8화 대한(大韓) 민족주의
개화 20년, 독립전쟁 10년이 지나 20세기에 접어든 대한제국의 이념적 동향을 살피면 - 압도적으로 민족주의가 강세였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조선 후기의 소중화(小中華)적 세계관을 탈피하고, 근대 국민국가의 일원으로 합류하게 된 한국은, 주변국, 특히 중국과 경계를 짓는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게 자연스러웠다.
새 시대의 상징, 국민교육은 ‘충군애국(忠君愛國)’을 내세웠지만, ‘충군’보다 ‘애국’에 보다 방점이 찍혀 있었다.
1894년 독립전쟁의 결과로 청나라로부터 자주독립을 쟁취하게 되고, 1900년 의화단 전쟁에 따른 북벌이 성공함에 따라 한국 민족주의는 더욱 퍼져 나갔다.
중요한 차이가 있다면, ‘중국과 조선은 다르다’는 독립전쟁 당시의 방어적·독립적 민족주의에서, 북벌 성공 이후에는 ‘한국과 만주는 하나다’라는 공격적·팽창적 민족주의가 팽배하게 되었다.
"동포 여러분, 국민 여러분! 우리는 자랑스러운 옛 조선의 후예이자, 대한의 형제요. 우리 민족의 위대한 조상, 옛 조선을 건국하신 단군께서 처음 터전을 잡으신 이래, 만주는 우리 민족의 터전이었소."
"아아, 그러나 저 위대한 고구려가 배신과 내분으로 쇠락하고, 고구려의 후예 발해조차 끝내 멸망하고 말았으니, 우리 민족은 만주를 잃고야 말았소. 그때가 서기 926년이니, 천 년 전의 일이오."
"그로부터 약 천 년이 지나, 대황제 폐하의 신무(神武)한 성덕(聖德)으로 다시 우리의 깃발이 만주에 펄럭이게 되었으니, 실로 천 년에 한 번 올 기회를 잡게 된 것이오!"
"만주를 보유했을 때, 우리 민족은 강성해졌고, 만주를 상실했을 때, 우리 민족은 쇠약해졌소. 그렇다면, 우리 대한국민의 답은 무엇이겠소?"
"만주! 만주로 진출하자!"
"그렇소, 동포 여러분! 만주! 조상의 고토, 대한의 미래인 만주로 진출해야 하오!"
"와아아아아아!"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여론은 만주에 대한 열망이 팽배했다. 이는 정세의 변화와 관련된 일이었지만, 역사관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기존의 조선 역사관은 ‘단군-기자-위만-삼한-삼국-신라-고려-조선’이었다.
실존성이 불분명한 기자(箕子)의 동래(東來)는 중화 문명의 정통 계승이라는 의미에서 높이 평가되었고, 평양의 기자릉(箕子陵)은 숭배대상이었다.
고조선의 수도인 평양은 기자의 땅이란 뜻의 기성(箕城)으로 불렸으며, 평양을 관할하는 평안도 관찰사는 기백(箕伯)이라 불렀다.
그런데 독립전쟁을 전후하여, 역사관이 급격히 바뀌기 시작했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고려, 조선, 대한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바로 우리 역사의 정통이라 할 수 있다. 대한은 한민족사의 정통을 계승한 후계자이며, 조상의 고토인 북방으로 돌아갈 권리가 있다!"
이른바 ‘북방사관’이 민족사의 정통으로 널리 알려졌다.
여기에는 기존의 정통 유학자들보다는, 주로 북부 출신의 신흥 학자들 사이에서 제기되는 이론이었다.
근래 발굴되어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는 광개토대왕릉비에 이어, 고구려의 유적과 유물을 찾는 고고학 운동도 일어났다.
발해, 고구려, 더 나아가 고조선이 민족의 기원으로 상정되었다. 오랫동안 뇌리에서 잊혀졌던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제왕운기(帝王韻紀)≫의 고조선 기록이 새로운 한국사의 첫머리에 등장했다.
「…… 단군왕검이라 불렀다. 당고(唐高) 즉위 50년 경인(庚寅)에 평양성에 도읍하여 처음으로 조선이라 칭했다.」
-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 1 고조선
「처음 누가 나라를 열고 풍운을 시작했나? 제석(帝釋)의 손자로 이름은 단군(檀君)이라.」
- ≪제왕운기(帝王韻紀)≫
1903년, ≪증보대한문헌비고(增補大韓文獻備考)≫가 간행되었다.
영조 시대에 이르러 조선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가 처음 간행되었고, 정조 시대에 이를 보강한 《증정동국문헌비고(增訂東國文獻備考)》가 간행되었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시대의 변화에 맞는 새로운 문헌비고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1898년 시작된 증보문헌비고 작업은, 1903년 비로소 완성되었다. 60책 300권에 달하는 증보문헌비고는 상고시대부터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한국사의 모든 제도와 문물을 16개 분야로 나누어 연대순으로 정리한 백과사전이자, 현존하는 역사서의 집대성이었다.
"삼가 ≪증보대한문헌비고≫를 오자가 없도록 대조, 교정한 다음 선사하여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성상께서 보실 수 있도록 준비하여 삼가 가져와 올립니다."
"경들의 노고가 많았소. 이를 널리 간행하여 국민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라."
바로 이 문헌비고 간행 덕에, 학자들과 식자층의 역사 접근이 한층 수월해졌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동국통감≫과 같은 전근대의 역사서들에, 발해사를 최초로 한국사에 편입시켜 연구했으나 한동안 잊혀졌던 정조 시대의 실학자 유득공의 ≪발해고≫도 포함되었다.
바로 이 국가공인 국사 편찬위원들, 문헌비고속찬위원(文獻備考續撰委員)들이 새로운 역사관을 주도했다.
예컨대, 개성 출신으로 성균관 교수, 중추원 서기관, 내각기록국 사적과장, 학부 국사편찬위원, 문헌비고속찬위원을 지낸 한학자 김택영(金澤榮)은 이렇게 주장했다.
"실로 작금의 대한국은 개국 초기의 고려와 같다. 대황제 폐하께옵서 북벌을 이룩하시고, 평양을 서경으로 선포하셨으니, 이는 북방을 향한 장대한 대책이자, 고려 태조의 서경과 같다. 거란을 거부하고 북진 정책을 추진한 고려를 본받아, 만청을 거부하고 조상의 고토를 계승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김택영은 이미 일찌감치 1880년대부터 북방 진출론을 외친 선구자였으나, 이때쯤 되면 그조차도 온건한 입장이었다.
새로 성장한 팽창주의자들에게, ‘고려 초기’는 그렇게 만족스러운 시대가 아니었다.
"대한국사의 기원은 실로 단군에 있다. 단군은 전설 속, 신화 속의 존재가 아니라, 민족사의 위대한 선조이니, 단군대황조(檀君大皇祖)라 할 수 있다.
단군으로 이어지는 북방 민족의 적자(嫡子)가 바로 우리 한민족이니, 그 계통은 부여-고구려-발해-고려-조선으로 이어진다. 그 적통이 바로 우리 대한이니, 우리 대한국인은 모두 단군의 후예이다."
성균관 대사성, 우부승지, 내무참의, 법부참서관 겸 고등재판소판사, 중추원의관, 비서원승 등 요직을 역임하고, 문헌비고속찬위원을 맡은 주임관 김교헌(金敎獻)이 단군 숭배 운동을 주도했다.
서북 지방, 특히 평양을 중심으로, 민족사의 기원으로서 단군 숭배가 시작되었다. 평양이 기자의 성지에서, 단군과 고구려의 성지로 변화한 것은 상징적인 변화였다.
이 무렵, 평양에서는 ‘단군기원절’ 운동이 시작되었다.
"단군왕검께서 나라를 처음 선포한, 시월 초사흘을 우리 민족의 국경일로 삼고, 이를 기리 기려야 한다. 광무 7년, 단군기원 4236년, 서기 1903년 10월 3일을 단군기원절로 삼자!"
대한제국의 4대 국경일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오른 계천기원절(繼天紀元節),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기념하는 개국기원절(開國紀元節), 황제의 탄일을 기념하는 건원절(乾元節), 태상황의 탄일을 기념하는 만수절(萬壽節)이었다.
민족주의자들은 모두 대한 황실과 황제 이선에게 충성했으나, ‘민족의 기원’을 기념하는 날이 없음을 아쉽게 여겼다.
"저 일본도 진무 천황의 즉위를 기념하는 진무기원을 쓰고, 중국에서도 황제가 즉위했다는 황제기원을 쓰는데, 우리 대한도 단군기원을 기념해야 마땅한 일 아니겠소?"
메이지 일본이 실체가 불분명한 진무 천황의 즉위(BC. 660) 역사의 기원으로 삼아 황기(皇基) 원년으로 삼고, 이에 자극을 받은 중국의 일부 민족주의자들이 역시 실체가 불분명한 삼황오제 중 황제(黃帝)의 즉위(BC. 2697)를 역사의 기원으로 삼아 황제기원을 쓰기 시작했다.
한국 민족주의자들은 단군의 즉위(BC 2333)을 민족사의 기원으로 끌어올렸고, 단군기원을 광무 연호와 병기하자고 주장했다.
"이는 결코 대황제 폐하와 황실의 권위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군 이래 대황제 폐하에 이르기까지 만세토록 성스러운 왕권이 연연이 내려왔음을 기억하기 위함이오."
혹시 ‘대한제국’보다 ‘한민족’을 위에 두려고 하는 시도라는 비난에 대비해, 단군 숭배자들은 단군의 계승자가 곧 대황제 이선이라고 주장했다.
"유교, 불교, 기독교는 모두 외국에서 들어온 외래 종교다. 공자, 석가, 야훼가 아니라, 오직 단군만이 우리 민족의 신앙 대상이 되어야 한다!"
평양 출신 김염백(金廉白)은 단군교(檀君敎)를 창시해 단군 신앙을 처음으로 종교화했다.
"동학의 정통을 계승하여, 북방에서 후천개벽 인내천의 세상을 연 천도교야말로, 한민족을 대표하는 종교이다! 오라, 동포여! 북방의 인내천 세상으로!"
이에 질세라 북방 이주운동과 만인대를 주도했던 동학, 천도교도 민족주의와 종교를 일치시켰다.
북방이주운동과 만인대의 성공 이후, 신영토 지역에서 천도교의 교세는 급증했다.
관료 김교헌은 종교적 연원은 제외하고, 나름 실증적인 역사적 연원을 따져 가며 정당화했다.
37세의 김교헌은 명문 경주 김씨의 후예로, 19세 때 급제하여 요직을 역임해 왔다. 그는 가문적으로도 역사학과 평양에 특별한 관계가 있었는데, 조부 김정집이 역사에 정통하고, 평안도 관찰사 재임 때 온갖 잡세를 혁파해 백성들의 칭송을 받은 인물이었다.
"발해 이후 만주의 역사, 요·금의 역사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비록 지난 천 년간 한국과 만주의 관계는 분리되었으나, 마침내 다시 합치게 된 오늘날에 이르면, 그 연원을 다시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다."
김교헌은 단군 숭배와 북방 사관을 더욱 강화시켰는데, 만주의 역사를 모두 한국사에 편입시키자고 주장한 것이다.
"거란은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오고, 여진은 발해에서 갈라져 나왔으니, 실로 단군의 차자(次子)이자 우리 민족의 형제와 다름없다. 이들이 비록 입관(入關)하여 중국을 다스렸다고는 하나, 한(漢)과는 그 근본이 다르다. 여진의 후예가 곧 오늘날 만주족이니, 한(韓)과 만(滿)은 적이 아니라 형제이다. 본디 만주 황실의 뿌리인 건주위(建州衛)는 조선에 조공하는 부족으로, 우리에게 아우와 같았다. 아우가 한때 번영하여 그 힘이 막강해지니, 형을 굴복시켜 종처럼 부렸다."
김교헌은 바로 이 지점에서 역사적 전환을 외쳤다.
"하지만 역사는 바뀌는 법, 형이 다시 강성해지고 아우는 혼미를 금치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동양의 미래가 걱정스럽다. 형으로서 어찌 아우를 적으로 삼겠는가? 형으로서 어찌 아우의 위급을 외면하겠는가? 대한 동포여, 만주는 우리의 형제이다!"
기존의 조선 식자층 입장에서는 놀라운 전환이 아닐 수가 없었다. 병자호란 이래 만주족은 반드시 복수해야 할 적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증오는 누그러졌지만, 야만인이라는 인식은 남아 있었다. 독립전쟁의 발발과 승리, 의화단 전쟁과 북경 함락은 ‘만주족 = 중국인 = 야만’ 이라는 인식을 극대화시켰다.
하지만 김교헌은 만주와 중국을 분리시키고, 만주족은 한국인의 형제 민족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대한(大韓) 민족주의였다.’
"에이, 이건 너무 나간 거 아닌가? 어떻게 저 야만적인 만주족이 우리의 형제일 수가 있나?"
"아니,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네. 만주족은 더 이상 우리의 적이 되선 안 돼. 황제 폐하께서도 청국 황제 및 그 황실을 존중하고,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되지 않았나. 중국과 만주를 분리해서 봐야 하네."
"음, 한민족의 만주 진출을 원활하게 하려면, 일리가 있네."
김교헌과 함께 문헌비고의 민간편찬위원으로 활동하고, 황성신문의 사장인 장지연(張志淵)이 이를 대대적으로 연재해 널리 알렸다.
만주 진출론은 대한제국의 좌우파, 보수·반동·개화·민권 세력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여졌으니, 당시 한국의 3대 언론, ≪독립신문≫, ≪황성신문≫, ≪제국신문≫ 모두 이념과 성향의 차이 없이 북방 진출론을 외쳤다.
자유민권을 주장하는 독립당도 예외가 없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정치를 담당하고 있어 조심스러운 입헌개화당보다 야당인 독립당이 더 강경했다.
"부국강병을 위해 학문과 훈련에 힘쓴다면, 우리 한국인이 영국인, 미국인에 뒤떨어질 이유가 없다. 바라건대, 대한이 청국을 공격해서 요동과 만주를 점유하고 배상금을 받아 내야 한다. 우리 대한이 10년 후에는 요동과 만주를 점유하고, 일본으로부터 대마도를 되찾을 생각을 하길 바란다."
가장 서구 친화적인 자유주의자 서재필조차도,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즈음에 고토 회복을 주장하며 외칠 정도였다.
북벌이 성공하고 신영토가 정식 도(道)로 편입되고, 남만주 자치령이 설립되자 고토 회복 의식은 더욱 강렬해졌다.
두만강 너머 북간도 지역은 연길도(延吉道), 압록강 너머 요동 지역은 요동도(遼東道)가 설립되었다. 황성과 서경, 본토 13도를 합쳐 2부 15도가 대한제국의 행정단위가 되었다.
남만주 자치령은 청나라의 주권하에, 한국이 실질적인 관리를 맡았고, 러시아가 이를 보증하는 형태였다.
한국 민족주의자들은 신영토에 이어 자연스럽게 자치령도 대한제국의 일부가 되리라 믿었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아직 서양처럼 광범위한 대중의 영역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사회 중상층, 특히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당연시되었다.
1903년, 광무 7년 현재, 민족주의의 열풍이 대한제국에 싹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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