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333화 (332/812)

14화 해양 패권주의

해양력(海洋力, Sea Power).

19세기 제국주의 국가의 상징과도 같은 단어다.

"해양에 대한 이용과 통제는 세계사에서 중요한 요소였고, 현재에도 여전히 그러하다."

1890년, 미국 해군의 전략가인 앨프레드 세이어 머핸(Alfred Thayer Mahan)은 해양 전략의 역사와 이론을 다룬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The Influence of Sea Power upon History)≫을 출간한다.

해군이 강력한 나라가 세계 전역으로 뻗어 나가, 군사력뿐만 아니라 경제력으로도 우위를 차지하여 강대국이 될 수 있다는 이론이었다.

이 책은 출간한 지 얼마 안 되어 열강의 해군교리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으니, 각국 지도자들의 시선을 사로잡게 된 덕분이었다.

"해양 지배의 역사는 바로 영국의 역사가 아닌가? 해양 지배가 있었기에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nica)도 있었다. 해군력의 도전은 결코 용납할 수가 없다."

"그렇다. 대영제국 해군은 2위와 3위 해군을 합친 것보다 많은 전력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1897년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주년을 기념한 관함식 당시만 해도, 영국의 해군력은 압도적이었다. 세계열강의 모든 전함을 합쳐도 40%가 영국 해군 소속이었다.

그런데 그 격차가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영국은 이런 상황을 용인할 수 없었다.

1899년, 영국 해군은 반드시 2위와 3위 해군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전력을 갖춰야 한다는 ‘2강국 기준(two-power standard)'을 채택했다.

처음에는 명백히 전통적인 숙적 프랑스와 러시아를 겨냥한 것이었다.

1902년 당시만 해도, 영국이 보유한 군함의 총 톤 수는 106만 5천 톤으로, 2위 프랑스의 50만 톤과 3위 러시아의 38만 톤을 합친 것보다 많았다.

영국의 해양패권은 19세기에 이어 20세기에도 지속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짐은 이 책을 열심히 읽고 있네. 아니, 한 페이지씩 먹어 치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경들도 반드시 읽어 보도록!"

"현명하십니다. 강력한 대양해군이야말로, 독일 제국의 패권을 세계에 떨치게 될 것입니다."

머핸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는,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2세였다. 마침 해군력 확장을 원하고 있던 카이저에게 머핸의 해양력 개념은 한줄기 서광과도 같은 것이었다.

카이저는 해군 장교들에게 머핸의 책을 필독서로 읽게 하였고, 대양해군의 지지자인 티르피츠(Alfred von Tirpitz)에게 명해 1898년부터 ‘1차 함대법’을 개시, 본격적인 건함 경쟁에 뛰어들었다.

신흥 제국, 막강한 산업력을 보유한 독일이 본격적인 해군력 확장에 나서자 건함 경쟁의 추이가 바뀔 정도였다.

독일은 단숨에 세계 4위의 해군력을 보유하게 되었고, 계획대로라면 1908년까지 프랑스와 러시아를 제치고 2위의 해군력으로 뛰어오를 계획이었다.

신흥 라이벌 독일까지 해군력 확장에 나서자 영국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영국은 더욱더 해군력 확장에 골몰했다.

하지만 건함경쟁에 뛰어든 유럽 열강들도, 막강한 잠재력을 보유한 국가의 존재를 뇌리에서 잊고 있었다.

"남북전쟁 이후, 미국은 너무 무사안일 했습니다. 단언하건대, 20세기는 미국의 시대가 될 것입니다. 해군력의 확대야말로, 미합중국의 새로운 패권을 약속하리라 생각합니다."

신임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기존의 고립주의 성향 전임자들과 명백히 다른 인물이었다. 그는 열렬한 제국주의자였고, 미국에 의한 새로운 패권을 꿈꿨다.

머핸의 이론은 미국 정치가들보다 오히려 타국에서 더 인기를 끌고 있었지만, 루스벨트는 1897년 해군차관에 임명되었을 때부터 대양해군 건설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1898년 미서일 전쟁은 미국의 카리브해 장악과 태평양 진출을 성사시켰고, 파나마 운하 건설을 통해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항로도 계획했다.

"위대한 미국의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1901년 대통령에 취임한 루스벨트는 본격적인 대양해군 건설에 나섰다.

세계 수위의 산업력과 경제력을 지니고도 10위권 내외의 함대를 보유하고 있던 미국은, 단 2년 만에 세계 5위의 해군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미국이 새로운 제국주의 열강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 * *

일본, 도쿄.

열강의 주목은 받지 못하고 있지만, 어쩌면 일본이야말로 해양력 이론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일지도 몰랐다.

일본이 추구하는 88 함대, 즉 전함 8척, 장갑순양함 8척의 함대.

이는 분명히 일본의 경제력과 산업력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해군력 확장에 집중했다. 매년 막대한 예산을 건함에 쏟아붓고 있었다.

독일 경제력에 한참 미치지도 못하는 일본이 비슷한 액수의 해군 예산을 쓴다는 건, 분명히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건함경쟁이 일종의 시대정신이라고는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간주하기에는 일본 특유의 정치 논리가 숨어 있었다.

"해군이 주도권을 계속 장악하려면, 북수남진과 해주육종 정책은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

"근래 육군이 다시 북진과 한만(韓滿) 진출을 외친다. 이는 곧 정한(征韓), 더 나아가 정로(征露)를 하자는 건데, 제국의 국운을 걸고 그런 미친 짓을 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러시아 정벌? 가당치도 않다. 이는 육군이 다시 주도권을 잡으려는 음모다. 결코 용인해서는 안 된다."

"육군은 군축이 용이하지만, 해군이 건조한 전함은 어쩔 텐가? 전함은 일단 만들고 봐야 한다."

1880년대 이후, 일본은 한동안 육군의 대부 야마가타의 주도로 육주해종 정책을 구사했다.

1894-95년 청조일 전쟁에서 별 다른 공훈을 세우지 못한 육군과 달리, 일본 해군은 북양함대 궤멸이라는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이는 1896년 해주육종으로의 전환, 건함정책에 나서는 결과를 낳았다. 해군의 주도권 탈환이었다.

대만 점령, 1898년 미서일 전쟁의 승리, 남양군도의 확보, 1900년 의화단 전쟁과 해남도(하이난 )점령은 북수남진과 해주육종을 정당화했다.

군비의 7할 이상이 해군에게 가는 상황에 육군은 굉장한 불만을 갖고 있었고, 북진론으로 국방 방침을 바꿔 보려고 했다.

"제국이 한반도와 만주를 방기한 결과, 러시아가 완전히 차지하게 되었소! 이게 다 해군이 함대에만 신경 쓴 결과가 아니오?"

"아니, 대체 제국에 한국이 왜 필요한 겁니까? 일본은 본래의 영토를 수호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내무대신, 육군을 대표하는 가쓰라 다로의 말에 해군대신, 야마모토 곤노효에가 답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한반도는 일본을 향해 겨눈 비수나 다름없소. 적대하는 세력에 넘어가면 끝장이란 말이오!"

"현재의 한국이 딱히 적대하는 세력이란 생각은 안 듭니다. 그리고, 북수남진은 제국의 확정된 국방 방침 아니었습니까? 안 그런가요, 육군대신?"

"음, 그렇습니다만 정세의 변화에 따라 바뀔 수도……."

육군대신 고다마 겐타로는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육군이었지만, 가쓰라처럼 야마가타 파벌은 아니었다.

그 자신이 대만 총독을 지내며 적극적인 북수남진 정책을 추진한 당사자로서 북진론에 반대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육군 수뇌부와 반대되는 의견을 낼 수도 없으니, 곤란한 침묵을 지켰다.

"자자, 진정하시고. 일단 기존 방침을 유지하면서 정세의 변화를 지켜보지요."

총리대신 사이온지 긴모치가 중재하는 척을 했지만, 은근히 해군 편을 들었다.

그 자신은 은밀히 영일동맹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굳이 러시아와 극한 경쟁을 벌이자는 육군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문민통제를 원했다. 아직은 해군이 육군보다 통제에 용이했다.

"육군이 새로운 국방 방침을 준비하고 있네. 우리에게 머핸의 이론이 있다지만, 일본만의 역사적 선례와 완벽한 이론을 갖춘 국방 방침이 필요해."

"안 그래도 준비 중입니다."

일본은 머핸의 해양력 이론을 재빠르게 수입해서 ≪해상권력사론(海上權力史論)≫이라 번역한 나라였다. 이는 물론 해주육종을 정당화하기 위함이었다.

육군이 ‘일본의 현실을 도외시한 사대주의적 이론 수입’이라고 비난을 퍼부으며 공세적 대륙 진출론을 준비하자, 해군은 독자적인 논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주미 해군 무관을 지내며 머핸의 이론을 흡수한 해군대학교 교관 사토 데쓰타로(佐藤 鐡太郎) 중좌가 ≪제국국방론(帝國國防論)≫을 집필 중이었다.

"제군! 주지하다시피 일본은 섬나라다. 일본의 방위는 본질적으로 해양의 문제이며, 일본이 취해야 할 최상의 전략은 일본에 접근하는 적을 격퇴하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모든 국정 과제 중에 해군력 강화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

해군의 이데올로그, 사토 데쓰타로는 해군대학교에 이어 해군병학교(海軍兵?校)를 찾아 젊은 생도들 앞에서 자신의 이론을 펼쳐 놓았다.

"육군은 개국진취와 대륙 진출을 부르짖으며, 해외에서 공세를 취하여 국방을 보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언어도단이다! 그건 ‘국방(國防)’이 아니다. 타국을 침략하고 자국의 강성을 자랑하는 것이 국방의 목적인가? 전쟁에 호소하여 국익의 증진을 도모하는 것이 국방의 목적인가?"

사토의 물음에 해군 생도들은 침묵했다. 그는 자문자답했다.

"아니다! 오만하게 공세적 전략을 펼쳤다가는, 오히려 제국에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육군의 주장은 위험천만하고 통탄할 노릇이다. 국력발전의 미명하에, 침략을 전진하기 위해 과대의 군비를 가지려는 것은, 실로 망국의 징조가 되는 것이리라고 본관은 믿는 바이다."

사토는 육군의 팽창론을 통렬히 비판했다.

"국방은 적극적 방수자위(防守自衛)에 있다. 국방의 실제적 의무는 국가의 안녕과 행복을 유지하고, 통상무역을 보호하고 국난에 임해서는 적병을 국토에 들이지 않는 것이다. 제국의 군비는 자강에 기준을 맞춰야 한다."

"교관, 그렇다면 한반도와 만주 문제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한반도가 적대하는 세력이 넘어가면 제국의 방위에 심각한 차질이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생도 중 하나가 질문했다. ‘한반도는 일본을 향해 뻗은 지정학적 비수(匕首)’라는 단정은 정한론자들의 주장을 정당화했고, 육군의 주장도 바로 여기에 기초했다. 해군에도 이 주장에 동조하는 이들이 적잖았다.

"좋은 질문이다. 본관은 이 또한 정한론자들의 피해망상이라고 생각한다. 만주와 한반도에 있어 세력을 유지하고, 국방의 본의가 공세에 있다고 주장하는 건, 국방 정책의 가장 큰 우환이다. 한반도에 대해서는, 우리 위력의 발전보다는 그들 국력의 증진을 주로 하여 완충지대로 두어야 한다. 실제로 한국은 스스로 육군을 정비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군비 강화를 지지해야 한다."

육군 수뇌부는 물론, 해군 수뇌부와도 결이 다른 사토의 주장에 생도들은 놀라움을 느꼈다.

"청국도 마찬가지다. 청국에서 이권을 빼앗을 궁리만 할 게 아니라, 그들이 대륙 공동의 적에 대적할 수 있는 힘을 키우게 해야 한다. 한청 양국으로 하여금 육군을 정비하고, 아국이 교묘하게 이들 제국의 관계를 조정해, 대륙 공동의 적을 맞서게 해야 한다. 그게 수십만의 대군을 대륙에 보내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인 안보정책이다."

물론 사토 역시 제국주의 시대의 군인이니만큼 제국주의와 식민지에 반대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현실주의적인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이었다. ‘동양 삼국 연대로 서양 열강을 저지한다.’ 아시아주의와는 결이 다르지만, 막부 해군과 초기 메이지 해군을 이끌었던 가쓰 가이슈의 주장을 계승·발전한 것에 가까웠다.

"일본은 동양의 영국이다. 영국을 보라! 영국은 미약한 육군만으로도, 유럽 열강들을 따돌리고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다. 이는 막강한 해군력에 기반한다. 일본이 추구하는 방향도 그와 같아야 한다. 육군이 제시하는 바와 같이 수십만의 대군을 대륙에 보내더라도, 우세한 해군이 없다면 고사될 뿐이다. 제군, 우리는 이미 역사를 통해 경험한 바가 있지 않은가?"

"영국의 넬슨 제독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물론 넬슨도 있지. 하지만 일본에는 보다 더 직접적인 경험이 있다."

사토는 칠판에 크게 이름 석 자를 적었다.

李舜臣(이순신).

"히데요시(秀吉)는 일본에 둘도 없는 영걸로서, 전국 통일을 이끌어 냈다. 그 부하들도 뛰어난 자가 많았다. 그런데 왜 분로쿠·게이초의 역(文?慶長の役, 임진·정유왜란)은 실패했는가? 바로 조선에는 하늘이 내린 명장, 이순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그렇게 대단합니까?"

"제군이 이순신에 대해 잘 모른다면, 제국 해군의 장교로서 자격이 부족하다! 이순신이 조선에 태어나 서양에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그 능력과 인품은 넬슨이 감히 비교할 수 없다. 서양에서 이에 필적한 자를 찾는다면 네덜란드의 드 로이테르(Michiel de Ruyter) 정도일까?"

사토는 열렬한 이순신 숭배자였다. 그는 예전에 주 조선 해군무관을 지낸 바 있었는데, 그때 이순신을 알게 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이선과 개화파 조정에 의해 막 이순신 숭배 열풍이 불고 있었고, 충무공전서가 재간되었다. 사토는 그 누구보다 이순신을 열심히 연구했고, 일본 해군의 표상을 찾았다.

"이순신은 실로 장갑함(裝甲艦)의 창조자로서, 3백 년 이전에 이미 훌륭한 해군전술로 싸운 명장이다. 이순신은 해군의 힘으로 국가를 구원했다. 일본에는 통탄할 숙적이겠으나, 현명한 이는 적에게서도 배워야 하는 법이다. 이순신의 숭고한 인격과 위대한 공적은 격렬히 본관의 정신을 일깨웠고, 본관은 공세적 국방의 문제에 더욱 각성하는 바가 있었다."

≪제국국방론≫의 저자인 사토 데쓰타로, 메이지 천황에게도 진상되어 해군의 필독서가 된 ≪제국해군사론≫의 저자 오가사와라 나가나리(小笠原長生), 해군 최고의 책략가라 불리는 아키야마 사네유키(秋山?之) 등.

머핸의 해양력 이론을 흡수한 해군의 핵심 이데올로그들은 이순신에게서 역사적 전범(典範)을 찾았다.

이는 단순히 이순신에 대한 호의 문제가 아니었다. 메이지 일본의 해군 이데올로그들은 이순신에게서 해군력의 중요성, 육군의 공세적 전략의 실패, 충군애국, 이에 따른 해주육종 정책의 정당성을 확보한 것이다.

"육군의 국방 방침은 히데요시의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다. 섬나라 일본에서, 대륙 진출을 위해 육군의 힘을 키워야 한다는 건, 취할 가치가 없는 괴설에 불과하다. 일본은 어디까지나 해양 강국이 되어야 한다. 장차 제국 해군의 근간이 될 제군! 명심하고 또 명심하라."

사토의 일장 연설에, 젊은 생도들이 눈을 빛내며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중에는 해군병학교 졸업반, 20세의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 五十六)도 있었다.

- 15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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