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334화 (333/812)

15화 군비 증강

일본의 정책 방향이 북수남진, 해주육종을 유지하고 있다는 정보는 이선에게도 전해졌다.

대일(對日)첩보는 대한제국의 정보기관에서 가장 중시하는 분야였다.

"이대로 일본이 해양국으로 나간다면, 대한 입장에선 바라던바. 열심히 건함하라고 박수 쳐 줘야겠군."

"그렇습니다. 다만 영국과 일본의 관계가 부쩍 가까워지는 게 우려가 됩니다. 영일동맹이 임박했다는 이야기도……."

이선도 주영 공사관을 통해 최근 영국과 일본의 접촉이 잦아졌다는 걸 보고 받고 있었다.

"일본이 군함의 대부분을 영국에서 수입하고 있는 큰 손인 데다, 영국 입장에서는 편하게 부릴 수 있는 장기 말인 셈이니. 영일동맹은 각오하더라도, 미국이 그들에게 붙는 것만은 막을 생각이네."

대륙 공세가 아닌 해양 방어 목적의 영일동맹은, 한국 입장에서도 받아들일 수 있는 사안이었다.

다만 미국이 영일동맹으로 기울어져 동아시아의 러시아 포위망이 완성된다면,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한국은 어느 한편의 선택을 강요받는 당혹스러운 처지가 된다.

이 무렵 이선은 대미 외교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과연 미국의 잠재력은 엄청나군요. 앞으로는 미국과의 관계가 중요하리라는 황제 폐하의 훈령이 이해가 됩니다."

주미 한국 공사관 무관 노백린(盧伯麟) 참령은 일취월장하는 미국의 국력에 감탄했다.

의화단 전쟁에 참전해 광서제의 신변을 확보하는 공을 세운 노백린은 이미 유럽 열강의 힘을 뼈저리게 느꼈다. 유럽의 패권은 너무나 강력해 보였다.

하지만 미국에 와서 보니, 미국이야말로 장차 최강국이 될 잠재력과 힘이 넘쳐흘렀다.

"음. 그간 영국, 러시아, 일본, 청국이 주도했던 동아시아 정세였지만, 앞으로 미국의 역할이 중요해지겠지. 성상께서 나를 다시 워싱턴으로 보내신 성심도 이에 있으니……."

주미 한국 공사 서재필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처가도 미국 정계에 이름 있는 가문이요, 그 자신도 미국 경험이 많았기에 서재필의 노력은 소득이 있었다.

서재필과 주미 외교관들은 정치가뿐만 아니라 군인, 자본가, 언론인, 기술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우호적 분위기를 조성했다.

무관 노백린은 군사 기술을 익히는 데 중점을 두었고, 황제가 특별히 관심을 갖고 있는 비행 실험에 흥미를 느꼈다. 아직은 극비지만, 계획대로라면 연말에 최초의 동력 비행기가 하늘을 날 예정이었다.

"대한제국은 서양 국가 중 가장 먼저 조약을 체결한 미합중국을 소중한 우방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 황제 폐하께서도 미합중국을 특별히 여기고 계십니다. 20세기에는 한미관계가 더욱 융성해지리라 약속합니다."

"하하, 귀국의 호의에 기쁘게 생각합니다."

루스벨트가 태평양의 파트너로 일본을 선호하기는 했으나, 근대화로 힘을 갖추게 된 한국에 대해서도 역사와 달리 멸시의 감정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더욱이 자기 좋다고 하는 사람을 싫다고 떠밀 이유도 없었다.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 미국의 동아시아 진출을 확대하기 위해 일본을 밀어 주고 있는 미국이었다.

하지만 만약 영일동맹이 실현된다면, 영국에 은근히 경쟁의식을 품고 있는 루스벨트로서는 일본을 필요 이상으로 키워 줄 생각이 없었다. 일본이 영국의 하수인으로 태평양을 누비는 건 사양이었다.

근래 해군력을 확장하는 일본을 지나치게 밀어 줘, 대륙 국가로 태평양에 대한 이해관계가 떨어지는 러시아를 대신해 ‘미국의 태평양 경쟁자’로 떠오르게 해선 안 된다.

지금은 미국에 머리를 숙이고 있는 일본이지만, 언제든 미국의 국익을 위협하는 라이벌로 등장할 수 있다.

이선은 바로 이 지점을 공략했다.

* * *

1903년 현재, 세계에는 군비 증강의 바람이 불었다.

건함경쟁이 본격화되면서, 열강의 해군 예산이 급증했다.

당장 동아시아만 봐도, 러시아는 태평양 함대를 증강시키고 있었다. 심지어 일본은 매년 국가 예산의 25%에서 30%를 해군에 쏟아붓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건함 열풍에서는 비켜 갔지만, 군비 증강이란 측면에선 마찬가지였다.

광무 7년 대한제국 예산의 38%가 군비였고, 그중의 8할 이상은 육군 예산이었다.

가히 동양의 프로이센이라고 할 만했다.

"황제 폐하 납시오!"

"신등은 삼가 대원수 폐하를 알현하옵니다!"

군무대신 윤웅렬과 원수부(元帥府) 참모국 총장 박유굉 이하 고급 장교들이 일제히 거수경례했다.

황제는 대원수로서 군 통수권을 행사했다. 경운궁 내부에 위치한 원수부에서는 정기적으로 군무회의가 열렸고, 이선은 대원수로서 군무회의를 주재했다.

이들은 군사 현황을 대원수 이선에게 보고했다.

원수부의 5국, 군무국(軍務局)·검사국(檢査局)·참모국(參謀局)·기록국(記錄局)·회계국(會計局) 총장은 장성급이 맡았는데, 그중에서도 참모국이 핵심이었다.

조선에 아직 제대로 된 사관학교가 없던 시절,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프로이센 전쟁대학을 졸업한 37세의 박유굉은 군부의 핵심인사였다.

박유굉은 의화단 전쟁에서 근위여단을 이끌고 북경을 함락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부장(副將, 중장)으로 승진하고 참모국 총장이 되었다. 그는 프로이센식 군제 개혁을 계속 이어 나갔다.

"광무 군제(軍制)의 계획대로, 광무 7년 7월까지 7개 상비 사단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노고가 많았소."

광무 4년의 군제개혁 이후 수도 방위를 맡던 근위대와 친위대는 근위사단이 되었고, 지방 방위를 맡던 진위대도 모두 사단으로 개편되었다.

근위사단은 예외적으로 4개 보병 연대, 포병 연대, 기병 연대, 공병대, 치중대, 군악대까지 모두 갖춘 부대였다.

진위사단에는 새로운 삼각 편제가 도입되어, 보병 3개 연대와 포병 연대가 사단을 구성했다. 광무 4년의 군제개혁은 특히 포병 전력의 강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지도를 봐 주시길 바랍니다."

‘광무 7년 7월 배치 현황’이라고 적힌 큼지막한 지도가 원수부에 걸렸다.

근위사단, 사령부 황성(서울).

제1사단, 사령부 경기 인천.

제2사단, 사령부 전북 전주.

제3사단, 사령부 경북 대구.

제4사단, 사령부 서경(평양).

제5사단, 사령부 함남 함흥.

제6사단, 사령부 요동 봉황성.

기타 독립 부대, 해군육전대, 변계 경무서 등등.

상비군 총계 100,670명.

"마침내 10만의 상비군을 확보하는 날이 왔군요. 숙원이던 10만 양병을 이뤄 냈습니다."

조선군이 무(無)에서부터 시작한 걸 눈으로 지켜 온 군무대신 윤웅렬은 감개무량 한 듯 말했다.

이선도 잠시 회상에 잠겼다.

"21년 전, 임오년(1882)에 연해주에서 조직한 고려대대로 처음 신식 군대를 편성했소. 갑신년(1884)에 군사고문관 고든을 초빙하여 군제 개편에 나섰지. 경인년(1890)에 국민개병을 도입하고."

"그러하옵니다. 그리고 독립전쟁과 북벌전쟁에서 승리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성상의 신무한 위업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윤웅렬이 찬사를 보냈으나, 이선은 덤덤했다. 기존의 조선과 비교하면 굉장한 발전임에 틀림없었으나, 자신의 생각에 도취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아직 시작에 불과하오. 참모총장, 계속합시다."

"예. 상비군 10만에 예비군과 국민군 18만이 확보되었으니, 전시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최대 30만 정도입니다. 주일 무관의 추정에 따르면 일본은 현재 13개 사단, 상비군 20만, 예비군과 국민군 40만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주러 무관의 추정에 따르면 러시아군의 상비군은 약 110만……."

일본군의 규모는 좌중을 놀라게 할 것 없었으나, 러시아군의 규모는 새삼 놀라웠다. 하지만 박유굉은 냉정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중 극동군은 현재 약 10만, 재무부 산하 동청철도 경비대가 3만 정도입니다. 러시아가 당장 동양에 투입할 수 있는 군사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어쩌니저쩌니해도, 러시아는 유럽 국가지. 신항로 정책으로 전환하고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완공된다고 해도 당장은 크게 바뀌지 않을 거요."

지금까지 대한제국의 주적은 청국이었으나, 가상적국 1호는 일본이었다.

한국보다 인구가 2.5배 많고, 20년 먼저 근대화에 돌입한 일본군이었다. 그 격차가 상당했지만, 근래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원수부는 일본군과 최소 2:1의 상비 병력 비율을 맞출 계획이었다. 일본군이 상비군이 20만에 예비군이 40만이라고는 하지만, 대외작전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은 20만 내외였다.

의화단 전쟁 이후 사실상 사문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조약상으로는 일본의 한국 침략 시 러시아는 개입할 의무가 있으므로, 러시아군과 연합할 시에는 일본을 압도했다. 당장 한국군에 극동군만 합쳐도 일본군을 능가했다.

"당면한 과제는 요동과 연길의 방어입니다. 예정대로 7월말에 러시아군이 만주에서 철수한다면, 일시적으로 군사력의 공백이 발생합니다. 청국의 만주 행정력이 와해된 상황에서 의화단 잔당, 마적이 다시 날뛸 상황이 우려됩니다."

예정대로라면, 7월까지 러시아군이 2차 철병을 단행해야 했다. 한국 북방 영토와 면한 봉천성 남부와 길림성에서 철수할 예정이었다.

"4, 5, 6사단과 독립 기병대, 변계 경무서가 북방 방위를 맡고 있습니다만, 병력 증강이 필요합니다."

4사단과 5사단은 사령부가 본래 창설된 평양과 함흥에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요동도와 연길도(간도)를 관리하는 부대였다. 6사단은 요동에 주둔하는 부대였다.

한반도 곳곳에는 철도가 놓여 신속한 이동이 가능했지만, 넓은 영토에 비해 교통이 불편한 만주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독립 기병대도 편성되었다.

법적으로 남만주 자치령에 속하는 ‘자치령 의용군’은 대개 옛 만인대 출신에 속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대한제국의 ‘북진 부대’로 통했다. 전시에 이들은 확충되어 제7사단으로 편성될 계획이었다.

현재까지는 약 5만에 달하는 병력으로 관리하기 충분했지만, 박유굉은 러시아가 철군한 이후의 만주의 군사력 공백을 우려했다.

"정부도 무한정 병력을 늘리고야 싶지요. 하지만 문제는 군수(軍需)가……."

"현실적으로 군수는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니."

"그야 러시아만큼 흔쾌히 기술 이전을 해 주는 나라가 없지 않소."

러시아의 신형 제식 소총, 모신나강은 러시아 국외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에서 라이센스 생산이 허용되었다. 러시아 군부는 반대했지만, 차르의 통 큰 선물이었다.

‘광무 소총’, 혹은 본래 이름을 줄여서 모(矛)총이라 불리는 모신나강은, 대한제국군의 제식 소총이었다. 덕분에 한국군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좋은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이 무렵 한국의 공업은, 실질적으로 군수공업에 초점이 맞춰 있었다.

새로 개발한 금광, 철광, 탄광에서 캐낸 금, 철, 석탄이 총포와 탄환으로 바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용산, 부평, 평양, 원산 일대에 조병창이 형성되어 무기와 탄환을 찍어 냈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조병창도 한국군의 주된 공급원이었다.

"각 부대에 포병 전력이 크게 강화되었는데, 문제는 전시(戰時) 포탄 수급입니다. 현재 생산력으로는 물량을 감당하기 힘듭니다."

영국제 맥심 기관총, 독일제 크루프 야포는 대한제국군의 핵심 무기였다. 그 품질의 측면에서 타국이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영국과 독일은 기술 이전에 인색했고, 수입을 유도했다. 포탄의 자체 생산은 허용했지만, 평시가 아닌 전시 물량을 대기에는 불충분했다.

"전시 군수 문제는 일본이나 러시아도 해결 못 한 문제인데, 이제 막 공업화에 들어선 대한이 당장 해결을 바란다면 욕심이지."

군수생산의 자국화에 돌입했다지만 일본은 총력전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고, 그건 러시아도 마찬가지였다.

"만주의 군사력 공백에 대비해, 사단 추가 증원도 고려해 보겠소. 남만주 자치령의 의용군에도 계속 지원을 이어 나가시오. 내년도 징병과 예산 집행도 계획대로 하되, 추가 예산도 고려해 보겠소. 일단 광무 8년까지는 당초 목표대로 군비 증강을 이어 나갑시다."

"예, 대원수 폐하! 명을 받듭니다!"

이선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장교들이 기립하여 거수경례했다.

‘20세기의 전쟁은 총력전이 될 텐데, 섣불리 전쟁에 뛰어드는 것보단 체급을 키우는 게 우선이야. 뭐, 한국만 빼고 주변국만 싸우는 건 상관없지만, 우리가 그 유탄을 안 맞을 리가 있나…….’

아직 대한제국에선, 근대적 ‘총력전’이란 개념이 부재했다.

조청일 전쟁이 국운을 걸었다고는 하지만, 북양군을 상대로 한 단기간의 전쟁에 불과했다. 의화단 전쟁은 연합군 덕에 더 손쉬운 승리였다.

국가의 총력을 기울인 전쟁은 겪어 본 적 없고, 아직 상상도 못 해 본 일이었다.

바로 이 무렵, 총력전과 ‘인민 전쟁’ 개념을 최초로 한국에 도입하려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독일 군사고문관, 대한제국 신설 육군 대학(참모학교)의 교관 에리히 폰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 소령이었다.

- 16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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