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336화 (335/812)

17화 만주 위기

독립전쟁과 북벌 이후, 압록-두만 이북의 만주 영토는 대한제국령이 되었다.

요동도와 연길도는 확고한 한국령이었다. 남만주 자치령은 명목상 주권은 대청 황제에게 있되, ‘자치’는 한국인에 의해, ‘보호’는 대한제국과 러시아의 공동 보증을 받았다.

이외의 만주 지역은 1900년 이래 러시아의 점령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만주 협약 체결로 1902년 봉천성 북부 지역에서는 철수했으나, 흑룡강, 길림, 봉천 남부에서는 점령이 지속됐다.

점령 지역의 명목상 행정은 청나라 관리들에 의해 집행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러시아 코미사르(전권위원)들의 관리를 받았다.

"이보시오, 장군! 계속 중국 난민들이 요하를 넘어 만주로 들어오고 있잖소! 왜 청국 당국은 이민 관리를 안 하는 거요?"

"아니, 봉금령도 폐지되었는데, 대청 영토에 청국인이 이주하는 게 무슨 문제란 말이오?"

"관리하기가 어려우니까 하는 말 아니오! 러시아 당국은 이주를 허용할 수 없소."

"그 무슨 내정간섭이오? 여긴 대청국 영토란 말이오!"

의화단 전쟁 이후 화북의 혼란상이 지속됨에 따라, 만주로의 한족 이주 행렬이 계속 이어졌다.

북경 조정은 이를 관리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1880년대에 이미 한족의 만주 이주를 금지시켰던 봉금령을 폐지한 청나라는, 러시아의 만주 합병이 두려워서라도 한족의 이주를 막을 생각이 없었다.

문제는 대책 없는 이주로 인해 난민화가 진행 중이라는 것이었다.

청나라의 만주 행정력은 붕괴했고, 러시아는 계속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식량은 부족하고, 도적이 들끓었다.

"제발 이주를 받아 주십시오, 대인!"

"대한국 국법에 의거하여, 허가받지 않은 불법 이주는 금지한다. 퇴거하라!"

안정적인 한국 영토로의 이주 행렬이 이어졌지만, 한국 당국은 이주를 금지시켰다. 변계 경무서의 주된 역할은 난민을 추방시키는 일이었다.

"후, 여기나 저기나 예전엔 다 대청 영토였는데, 아라사 놈들과 조선 놈들이 지배하고 있으니……."

"그나마 자치령은 관대하다더군. 거기로 갑시다. 먹고 살려면 어쩔 수가 없소."

자치령은 명목상 청 황제의 주권하에 있었으니, 중국인의 이주를 무작정 막을 수 없었다.

자치령 곳곳에서 프랑스-러시아 자본의 투자, 한국인 관리로 철광과 탄광 개발이 한창이었다.

한국인 노동자에 의해 개발되는 북방 신영토와 달리, 자치령에는 중국인 노동자가 몰려들어 헐값이나 다름없는 저임금으로 착취당했다. 자본가 입장에선 급료가 중요하지, 국적이 상관없었다.

"왜 중국인은 한국인 임금의 절반이고, 러시아인 임금의 반의반 밖에 안 됩니까?"

"너희 중국인들은 노동 생산성이 떨어지잖아! 불만 있으면 꺼져! 너희 말고 사람 많으니까!"

노골적인 차별에 중국인은 분개했지만 따질 수 없었다. 아무리 형편없는 저임금이더라도, 청국 영토의 혼란상보단 나았기에 이주 행렬은 멈추지 않았다.

"한울님 아래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사람이 곧 하늘이오! 이주민을 교화시켜 우리와 같은 동포로 만듭시다!"

"무슨 소리! 조상의 고토인 만주에, 이민족이 계속 밀려오는 걸 두고 보잔 말이오? 단군과 태왕의 땅에서 오랑캐들을 몰아내자!"

남만주 일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천도교의 공식 입장은 사해동포, 평등사상이었다. 실제로 중국인을 향한 포교도 상당한 성과를 발휘하여, 천도교에 귀의하여 스스로 변발을 자르고 동학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중국인이 갈수록 늘고 있었다.

하지만 ‘신파(新派)’라 불리는 천도교 우파는 반발했다. 새로이 교세를 확장하는 민족주의 성향의 단군교와 연합해서, 이주민 배척운동을 벌였다.

"동학은 낡은 종교일 뿐이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일 뿐, 착취계급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있소. 노동자에겐 조국이란 없소! 한국과 만주, 중국과 러시아의 노동자들 모두 착취당하고 있소! 착취계급을 타도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 만국의 노동계급이여, 단결하라!"

새로운 조류인 사회주의 사상도 수입되었다. 농민 인구가 압도적 다수인 동양에서 사회주의 사상은 미약한 수준이지만, 만주 일대에는 러시아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사회주의가 등장하고 있었다.

"혼란 그 자체로군. 왜 본국에서는 이런 상황을 내버려 두고 있는 건가?"

남만주 자치령 고등판무관 청안군(淸安君) 이재순(李載純)이 한탄했다. 철종의 형인 영평군의 양자로, 대한제국 황족의 일원인 이재순이 고등판무관으로 자치령의 행정 책임을 맡았다.

"판무관 각하, 자치령에는 공식적으로 군대가 의용군만 있지 않습니까?"

자치령 의용군 사령관, 이범윤이 이재순의 말을 받았다.

의용군은 대개 옛 만인대 출신으로 구성되었는데, 장교진에는 대한제국군의 예비역들이 입대하고 있었다. 당장 이범윤만 해도 예비역 육군 참장(參將)이었다. 전시에는 언제든지 복귀 예정이었다.

"그야 그렇소만."

"7월 말에 러시아군이 봉천 남부와 길림에서 철군합니다. 모두 자치령과 밀접한 지역이지요. 치안공백이 발생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러니 앞으로 치안이 걱정이라는 거 아니겠소. 그나마 러시아군이 있어서 통제가 됐는데, 앞으로 의용군만으로 어떻게 관리하란 말이오?"

"어느 정도 혼란이 지속되어야 대한국군의 주둔이 합리화되지요. 자치령 자체의 무력만으로는 도저히 치안을 해결할 수 없다, 의용군이 아니라 정규군이 필요하다. 그래야 열강도 이해해 주지 않겠습니까?"

이범윤의 지적에 이재순의 입이 떡 벌어졌다. 군부의 계획을 이제야 눈치채게 된 것이다.

의용군은 장차 대한 육군 제7사단으로 재편할 계획이었다. 정규 사단으로 재편되면 본국에서 제대로 된 군사력이 보강될 것이며, 7사단은 북방을 향해 뻗은 ‘북진 부대’가 될 것이다.

"작금의 혼란도 통제 가능한 범위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과연, 알겠소."

이범윤은 씩 웃었다.

형인 주 러시아 공사 이범진을 통해 러시아의 상황에 대해서도 듣고 있는 이범윤이었다. 이범진도 구체적인 핵심 정보는 알려 주지 않았지만, 장차 정세의 변화가 오리라는 짐작은 있었다.

대한제국 동북 변경, 이른바 북간도.

목단강 일대는 공식적으로 대한제국과 자치령의 국경이었다. 러시아군이 주둔하고 있는 동청철도 연변하고도 거리가 멀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통제가 잘되고 있는 요동 지역의 행정과 달리, 연길도에 접한 길림 동부는 혼란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청조의 성지인 봉천성은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으므로, 점령을 유지하고 있는 러시아도 치안 유지에 열심이었다.

"또 마적이냐!"

"빨리 본부에 지원 알려!"

하지만 북간도 일대는 한국도, 청국도, 러시아도 우선순위가 떨어졌기 때문에, 치안 부재의 상황이 잦았다.

한인(韓人) 정착촌과 만주 원주민, 중국 이주민을 노린 마적들이 횡행했고, 이를 토벌하기 위해 독립 기병대가 곳곳에 주둔하였다. 독립 기병대의 주적은 이들 ‘청비(淸匪)’였다.

요컨대, 상시적 대기 상태인 북간도는 대한제국 장교 입장에서는 공훈을 세울 지역이었고, 육군 내에서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병과인 기병대가 활약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일반적으로 육군무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장교들은 근위사단에 배치되었지만, 북간도로의 전출을 자원하는 야심만만한 장교들도 상당했다.

마치 임진왜란 이전 두만강 일대에 가장 유능한 군인들이 배속되어 여진족을 상대로 전공을 세우길 희망하는 것과 유사했다.

독립 기병중대의 지휘관, 유동열(柳東說) 부위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중대장님! 훈춘 북방 정착촌에 마적이 출몰했다는 척후의 보고입니다!"

"알겠다! 즉시 출진한다!"

25세의 유동열은 광무 4년 무관학교 기병과 수석이었다. 근위기병연대 참위로 임관한 유동열은, 이윽고 발발한 의화단 전쟁에 근위여단이 출진하면서 참전했다.

‘의장용 부대’라고 은근히 질시 받던 근위 기병대가 광서제를 구출하는 공을 세우고, 지휘관 노백린 정위가 전쟁영웅으로 떠오르자 젊은 기병 장교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귀국 후 해외 유학에 선발된 유동열은 러시아행을 자원했다. 그는 이르쿠츠크 군사학교에서 1년간 러시아 기병 전술을 익히기 위해 노력했다.

귀국 후에 유동열은 근위 기병대로 복귀하는 대신, 만주의 독립 기병대에 자원하는 길을 택했다.

"전방에 마적이 보입니다! 수는 약 30!"

"좋아! 단숨에 토벌한다! 진격!"

"와아아아!"

기병대는 일제히 마적을 향해 돌격했다. 국군의 출동에 마적들은 싸울 생각도 안 하고 줄행랑을 치기 바빴다. 사살당한 동료 시체와 약탈품을 내버려 두고 청국령으로 도주했다.

"중대장님, 청국 국경입니다!"

"쳇, 여기까지인가. 여기서부턴 카자크가 저놈들을 귀여워해 주겠지. 제군, 수고했다! 국경에서 잠시 휴식하고 돌아간다!"

"옛!"

청국령에는 러시아 카자크 기병대가 치안 유지를 맡고 있었으므로, 한국 기병대는 국경을 넘지 않았다.

"저 마적 놈들, 토벌해도 끝이 없군. 도대체 러시아 놈들은 뭘 하고 있는 거야?"

"기병 운용이 쉬운 게 아닌데, 말을 사고 유지하는 비용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지?"

"약탈해서 나오는 거 아닌가?"

"말 공급이 간단한 게 아니잖아. 마적들이 목장도 운영하나?"

"어디서 사 오겠지."

"그러니까 누가 파냐고?"

한국군만 해도 군마 수급에 오랫동안 공을 들여왔다. 명예 기병 정령인 귀화인 얀코프스키가 연해주와 함경북도 일대에서 대규모 목장을 운영하면서 혈통을 개량한 군마를 군대에 공급했다.

하지만 이런 공식적 공급 루트가 없는 마적들이 계속 말을 수급하는 게 신기했다.

고려대대 이래 20년간 토벌해 온 마적들인데, 아직도 청나라 변경에는 마적들이 들끓는다니.

"……."

중대장 유동열은 부하들의 말을 들으며 담배를 폈다. 대략 짐작 가는 바는 있었다.

‘러시아가 만주 주둔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 마적들을 토벌하는 척하면서 이중행각을 벌일 가능성. 만주에서 활동하는 일본 우익단체의 밀정들이 국경을 교란하기 위해 마적들을 후원할 가능성. 어느 쪽이든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

평안북도 박천 출신으로, 일찌감치 개화 열풍을 탄 집안에서 태어난 유동열은 중학교부터 일본 유학을 갔다. 부친의 예상과 달리 육군무관학교 진학을 택했지만, 여러 나라에서 공부한 경력은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일본어와 러시아어, 영어가 모두 능통한 유동열은 촉망받는 자원이었다.

일본과 러시아에 모두 체류한 경력이 있는 유동열은 두 나라의 문화를 존중했지만, 호전적인 여론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전방에 기병대! 카자크 같습니다!"

"эй, товарищ!"

멀리서 카자크 기병대가 흙먼지를 날리며 접근했다. 한국과 러시아는 우방국이었으므로, 러시아어를 아는 유동열이 손을 흔들며 환영을 표했다. 카자크 지휘관도 손을 흔들며 답례했다.

유동열과 카자크 백부장(百夫長, сотникъ)이 접근하여 경례하고 악수했다.

"노고가 많소. 러시아군 관할지로 마적들이 도망쳤는데, 보았소?"

"아, 도망치는 놈들이 보이기에 총알 세례를 안겨 줬지. 아주 박살을 내놨으니 당분간 귀찮게 안 할 거요."

"아, 역시 카자크답소. 대단하오!"

"먼저 한국군이 박살을 내준 덕이지. 승리의 기념으로 한잔하겠소?"

"근무 중인데? 본부로 돌아가야 하오."

"이미 적은 토벌됐소. 승리하고 마시는 보드카 맛이야말로 일품이지! 자자, 마십시다!"

카자크의 성화에 즉석에서 술판이 벌어졌다. 카자크가 보드카를 내놓았다. 한국 기병대는 술을 지참하고 있지 않았지만, 대신 보급용 육포를 안주로 내놓았다.

"Ай, люли-люли, ай, люли-люли! (아, 좋구나 좋아!)"

"와와와!"

술이 얼큰히 취한 카자크는 민요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음주가무라면 한국인도 뒤지지 않았고, 금세 함께 어울리며 축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하하, 모처럼 정말 즐겁군. 한국인, 우리 황제 폐하랑 당신네 황제랑 친구니까, 그대들은 우리 형제나 다름없지!"

"아, 옳으신 말씀."

유동열도 술기가 올라 붉어진 얼굴을 끄덕였다.

"이거, 이런 좋은 시절도 다 끝나는구만."

"아, 곧 만주에서 철수하기 때문인가? 연해주로 돌아가나? 자네들이 이대로 떠나면 섭섭하겠군. 앞으로 마적 토벌은 우리한테 맡기고, 걱정 말고 떠나시게."

만주 협약에 따라, 예정대로라면 1903년 7월 25일까지 봉천 남부와 길림에서 2차 철군이 진행되어야 했다.

"아니, 철군 안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인가?"

"주둔지를 옮기는 건 맞지만 철군은 아니라고. 일단 하르빈(하얼빈)으로 갔다가 동청철도를 따라 이동할 예정이야. 묵던(봉천, 심양)으로 간다든가."

순간 유동열은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묵던? 이미 철수한 지역이 아닌가!"

"몰라,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지. 아무튼, 다시 만날 일이 있겠지. 그러니까 오늘은 마셔! 하하하!"

‘분명 군사기밀일 텐데 누설하다니. 이자가 술에 취해 헛소리를 하는 건가? 아니, 취중진담일 수 있지. 우리를 경계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떠들 수도. 그렇다면 만주의 위기다.’ 러시아군이 철군을 중단하고, 오히려 봉천성의 성도인 심양에 다시 주둔한다.

유동열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술을 건성으로 마셨다. 빨리 상부에 보고해야 했다.

- 18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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