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독립 보장
대한제국 내각 회의.
"영일동맹 조약 사본을 입수했소. 영국에서 얻은 정보, 일본에서 얻은 정보를 조합해서 정리했는데, 완전히 정확하진 않지만 실제에 부합되리라 생각하오."
이선은 내각에 영일동맹 사본을 공개했다. 처칠이 이강에게 제공한 사본 일부, 하라가 김옥균에게 제공한 사본 일부를 조합한 것이었다.
1. 영·일 양국은 청·한 양국의 독립을 보장하고, 영토를 보전한다. 영국은 청국에, 일본은 한국에 각각 정치적·상업적으로 특수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으므로, 제3국으로부터 그 이익이 침해될 때는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2. 동맹의 일국이 1항의 이유로 제3국과 전쟁에 연루될 경우, 일국은 엄정중립을 취한다.
3. 동맹의 일국이 2개국 이상의 열강과 전쟁에 연루될 경우, 지원과 참전을 약속한다.
4. 동맹이 전쟁 중 교전국과 별도의 조약을 체결하지 않는다.
5. 동맹 기한은 5년으로 하며, 연장할 수 있다.
부록. 동맹의 대상은 동아시아로 한정하며, 지역 방위에 중점을 둔다. 영국은 일본이 복건 일대에서 특수이익을 확장하는 것을 지지하고, 일본은 영국의 청국 주도권을 지지한다.
"이 조약문대로라면, 양국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항을 보면, 일본이 대한을 자신들의 영향권으로 본다는 말이니, 제3국이 그 이익을 침해하면 자신들이 나서 막겠다는 게 아닙니까? 불쾌하군요."
"안보나 경제적인 측면에서, 일본이 대한을 중시하는 건 어쩔 수 없지요. 독립을 보장하고, 영토를 보전한다는 문장을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미사여구지요. 저들의 선의를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대신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일었다.
"2항과 3항의 해석이 불확실한데, 3항은 노불동맹을 겨냥했다고 봐야겠지요?"
"만약 일본이 대한이나 청국을 공격해서 러시아가 참전하면, 영국은 어쩌겠다는 겁니까?"
"원문에 ‘국가’가 아닌 ‘열강(Power)’이란 표현이 있고, 1항의 한청 양국의 독립에 대한 보장이 있는 걸 보면, 노불동맹을 겨냥했다고 봐야 합니다."
"일본 공사 하라가 대한이 영일동맹에 합류할 것을 비공식적으로 타진했습니다. 이는 사이온지 총리의 뜻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김옥균의 보고에 내각이 술렁였다.
"그럼 긍정적으로 고려해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무슨 소리! 대한에는 아직 러시아와 체결한 방위조약의 기한이 남아 있소."
"그야 의화단 전쟁과 만주 점령으로 사문화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이제 와서 러시아와의 우의를 저버리고 일본을 택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러시아가 아니면 어찌 북벌을 성공시킬 수 있었겠소?"
"그렇게 따지면 일본도 청국에 맞서 싸운 동지가 아닙니까!"
대신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참정대신 김윤식과 탁지대신 어윤중, 내무대신 박영효와 군무대신 윤웅렬이 반대쪽 입장에서 열변을 토했다.
그들은 황제가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 사죄를 표했다.
"송구하옵니다. 신등의 무례를 벌하여 주시옵소서."
"아니오, 문자 그대로 각의(閣議)인데, 내각에서 의견이 활발한 게 좋지요. 짐의 생각으로는……."
좌중의 시선이 이선에게 집중되었다.
"동양의 관점에서 볼 때, 동양의 세력이 영일동맹과 노불동맹으로 갈라졌음을 의미하오. 프랑스는 영국만큼 동양 문제에 적극적이지 않으니, 영일에 기울어졌다고 봐야겠지. 영일동맹의 체결로, 러시아는 공세적 입장을 수정하리라 보오."
"실로 그렇사옵니다."
"일본이 주도권을 잡은 건 맞지만, 당장 공세적으로 나오지는 않을 것 같소. 그들의 방침은 여전히 해주육종에 북수남진이고, 해군의 입김이 강하니까. 의화단 전쟁 당시 일본의 복건 진출을 영국이 반대했었는데 이번에 영국이 승인했다는 건, 여전히 일본은 북수남진을 유지한다는 것이오. 영국은 일본에 동양 방위의 일부를 맡기고, 이익의 일부도 나눠 준다는 걸 의미하겠지. 영국식 표현대로라면, 일본을 극동의 헌병으로 고용했다고 봐야겠지."
이선은 영일동맹이 실제 영일동맹하고는 다르리라 보았다. 여러 차이점이 있었지만, 가장 중대한 차이는 대한제국의 국력과 외교적 대응이었다.
"지금 당장, 두 동맹 중 하나와 손을 잡는 건 위험하오. 영일동맹에 합류하라는 제안은, 러시아를 적으로 삼아 러시아 육군을 대한이 가장 먼저 상대해야 한다는 걸 의미하오. 안 될 말이오. 러시아가 점령하던 봉천과 길림 일대를 대한에 넘기겠다는 제안도 솔깃하긴 하나, 그랬다간 정말로 영국과 일본을 적으로 돌려야 하오. 해안 봉쇄를 각오해야 할 것이오."
살얼음판을 걷는 상황이었으나, 이선은 미래를 절망적으로 보지 않았다.
"동양에 영일동맹과 노불동맹, 두 세력이 대립하고 있으니, 실로 대한에게는 위기일발이라 하겠소. 하지만 역설적으로, 대한의 입장이 더 중요해졌다고 봐야겠지. 열강과 비교하면 대한의 국력이 가장 약하긴 하나, 10만의 상비군을 보유한 나라를 무조건 무시할 수는 없소."
"지당하십니다! 10만 장병뿐만 아니라, 2천만 국민은 대한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소. 우리의 자주적인 독립정신이 중요하오."
이선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외교관들이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소. 일단 확실한 외교적 보장을 받고, 우리의 힘을 착실히 키웁시다."
"삼가 지엄하신 명을 받드옵니다!"
* * *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영일동맹의 체결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열강은 역시 러시아였다.
주러 일본 공사관이 전달한 조약 문서에 공개된 정보는 제한적이었다. 미사여구를 늘어놓으며 대놓고 러시아를 적으로 규정하진 않았지만, 러시아를 겨냥한 동맹이라는 건 삼척동자도 알 수 있었다.
대응책을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계속 공격적인 정책을 쓰는 건 위험합니다. 다시 만주 철병을 진행하고, 일보 후퇴하심이……."
"그렇다면 영국과 일본에 굴복하는 꼴이 아닙니까! 저들의 위협에 물러서면 안 됩니다!"
"일단 우리도 동맹인 프랑스와 공동 선언을 발표하는 게 좋겠습니다. 가급적 독일도 러시아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추진해 보겠습니다."
"좋소, 추진해 보시오."
니콜라이 2세는 특유의 우유부단함을 드러냈다. 일단 외무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프랑스와 공동 대응을 하는 걸 택했지만, 확고한 방향성을 정하지 못한 채 고민을 거듭했다.
주러 한국 공사 이범진이 알현을 청한 건 바로 그 무렵이었다.
"황제 폐하, 강녕하시옵니까?"
"어서 오시오, 공사. 짐은 아주 좋소. 귀국 황제께서도 안녕하시오?"
"평안하십니다. 외신은 우리 황제께서 보내신 친서를 전달해 드리고자 왔습니다."
이범진은 차르에게 이선의 친서를 전달했다.
「친애하는 짐의 형제, 대러시아 황제 폐하! 영국과 일본의 동맹 체결로 고심이 크시리라 생각합니다. 짐이 확보한 영일동맹의 조약 사본을 첨부하오니, 귀국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차르는 즉시 사본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프랑스가 확보해서 러시아에 전달한 정보와 비슷했다. 그는 사본의 진실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오, 역시! 과연 귀국 황제 폐하의 정보력은 대단하오. 짐의 감사를 전해 주시오."
"그리하겠습니다."
차르는 계속 친서를 읽어 나갔다.
「짐은 일본이 한국을 자신들의 세력권에 있다 여기고, 영국을 등에 업고 어떤 무리한 요구를 해 올지 우려가 됩니다. 한국은 일본의 야욕에 맞서 단호히 대처할 것입니다. 전쟁은 피하고 싶은 일이지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1592년에 우리 선조들이 일본의 침략을 무찔렀듯이, 1812년에 폐하의 선조들이 나폴레옹의 침략을 무찔렀듯이, 수많은 피를 흘리더라도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싸워 침략자를 몰아낼 것입니다.」
‘역시 일국의 군주라면 이런 각오는 있어야지!’
「동시에, 유연하고 명확한 외교로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 혹자의 우려대로, 영일동맹의 체결로 동양 정세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두 나라의 우호가 있기 때문입니다. 실로 동양의 평화는 한국의 독립과 세력 균형에 달려 있습니다. 러시아와 프랑스 동맹이 한국의 독립을 확고히 지지해 주시길 바랍니다. 한국의 국력이 아직 미약하고, 영국과 일본의 압력으로 공개적으로 러시아를 지지하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짐은 언제나 좋은 형제이신 황제 폐하를 신뢰하고 지지하고 있음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폐하의 좋은 형제, 이선」
니콜라이는 이 서한의 내용이, 러시아에 대한 명확한 지지로 보였다. 그는 만족감을 느꼈다.
"폐하, 우리 황제께서는, 청국과 한국의 독립과 방위를 약속한 1896년의 조약이 유효한지 문의하셨습니다."
이선이 문의한 1896년 러·청·조 방위조약의 제1조는 다음과 같았다.
「일본이 동아시아의 러시아령, 청국과 조선의 영토를 공격하면, 본 조약을 즉시 적용하는 계기로 간주할 것이다. 이 경우 각 조인국은 그 시점에 소유하고 있는 모든 육해군 병력으로 상호지원하며, 각종 장비를 보급하는 데 상호원조를 할 의무를 가진다.」
이 조약은 철저히 비밀에 붙여져 있어, 일본조차 그 내용을 파악하고 있지 못할 정도였다.
방위조약은 1911년까지 유효했지만, 의화단 전쟁과 만주 점령 이후 사실상 사문화되었다는 게 문제였다. 조약 체결 당사자인 이홍장이 죽은 후, 청나라가 러시아의 만주 점령에 반대하면서 조약의 유효성이 의심되었다.
"짐은 유효하다고 생각하오만, 구체적인 사항은 대신들과 논의해야겠소. 독립 보장에 대해서는 이미 프랑스와 논의하고 있는 중이니,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오."
"황공하옵니다, 폐하!"
프랑스, 파리.
주불 한국 공사 서광범과 참서관 현상건(玄尙健)은 프랑스 외무부를 찾았다. 공식적으로 현상건은 공사관의 프랑스어 통역이었지만, 실제로는 제국익문사 유럽 담당 요원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장관 각하."
"어서 오십시오, 공사."
서광범과 프랑스 외무장관 테오필 델카세(Thophile Delcass)는 반갑게 악수를 했다.
근래 프랑스와 대한제국의 관계는 부쩍 가까워지고 있었으므로, 과거 개화당의 핵심인사였던 서광범이 중요성을 감안해 프랑스 공사를 맡았다.
"프랑스와 러시아의 공동 선언이 준비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프랑스 공화국은 극동에서의 현상 유지와 평화를 원합니다."
외교적인 언사였으나, 프랑스는 동맹 러시아가 아시아 문제에 지나치게 휩쓸리지 않기를 원했다.
프랑스의 제1목적은 숙적 독일의 견제였고, 러시아의 역할은 유럽에서 독일을 압박하기 위함이었다.
독일과 영국과의 관계 악화를 틈타, 전통적인 숙적 영국에게도 손을 내미려던 델카세의 계획은 영일동맹의 체결로 틀어지고야 말았다.
"러시아가 극동 문제에 깊숙이 개입하지 않으려는 프랑스의 입장을 이해합니다. 바로 그렇기에, 대한제국이 프랑스 공화국에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호오, 계속하시지요."
"예. 한국의 국력이 신장하여 극동에서 노불동맹의 대리인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다면, 러시아도 본연의 역할에 충실해지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당장 그렇게 될 수는 없으니, 프랑스가 이를 지원해 주신다면……."
서광범의 제안이 구체적으로 이어졌다. 듣고 있던 델카세는 씩 웃었다.
냉정히 말해서, 한국은 프랑스에게 있어 동맹의 세력권일 뿐이었다. 프랑스에게 아시아 문제는 곧 베트남과 인도차이나였고, 동아시아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하지만 영국이 일본을 키우기로 작정하고, 그 동맹이 러시아를 겨냥하고 있는 이상, 러시아는 열강의 위신을 생각해서라도 그냥 물러서지는 않을 터였다. 러시아의 패퇴는 프랑스가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차르가 한국을 중시한다면, 동맹 러시아의 입장을 배려해, 프랑스가 자랑하는 금융 자본이 페테르부르크에 힘을 실어 주듯 서울에도 나눠 줄 수 있었다.
"프랑스 공화국은 동맹 러시아의 입장과, 우호국인 한국의 입장을 이해합니다. 공화국 정부에서 제반 사항을 논의하여 결과를 도출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결과를 기다리겠습니다."
델카세는 능숙한 외교관답게 어떠한 보장도 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선은 한국에 유리한 상황 전개를 기대했다. 러시아-프랑스 동맹은, 프랑스 쪽에서 좀 더 아쉬워하는 입장이라 러시아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1903년 9월 6일, 러시아-프랑스 공동 선언이 발표되었다.
러시아 외무대신 람스도르프와 프랑스 외무장관 델카세의 명의로 발표한 공동 선언은, 영일동맹에 대한 대응이었다.
「러시아 제국과 프랑스 공화국은, 영국과 일본 양국이 표명한 원칙, 우호국인 한국·청국 양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 극동의 평화와 현상 유지를 재확인한다. 열국의 상공업 활동 개방이라는 원칙은 러시아와 프랑스 양국 정부도 동의하는 바이다. 시베리아 철도와 만주 철도는 군사적 목적이 아니라, 세계적인 상공업 발전과 촉진을 의미한다. ……」
노불선언은 영일동맹이 제기한 ‘원칙’에 동의했다.
한국과 청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은 침해되지 않을 것이다. 이를 위협하는 건 극동의 평화와 현상 유지를 깨는 행위다.
러시아는 영일동맹을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중지되었던 2차 만주 철병을 청국과 협의하여 다시 진행하기로 발표했다.
이렇게만 보면 영국과 일본의 외교적 승리였다.
같은 날, 이선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보내온 비밀 전문을 받았다.
「만약 일본이 한국의 독립과 영토를 무력으로 침해하려 한다면, 러시아는 1896년 조약에 따라 군사적으로 한국을 지지하고, 프랑스는 경제적으로 이를 뒷받침함.」
- 22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