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과거와 미래
10월 25일 밤, 경운궁에서는 새 총리의 취임을 축하하는 만찬이 있었다.
황제와 황족들, 원훈과 내각 대신들, 중추원과 민의원의 의장을 초대한 만찬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대임을 맡게 되어 축하드리오이다, 총리대신. 앞으로 책무가 막중하겠소."
김홍집은 넌지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가 얼마나 힘든지를 암시했다.
오랫동안 개화 정책을 총괄하는 위치에 있다 보니 얼마나 많은 비난을 받아 왔는가.
서양 오랑캐의 앞잡이라는 비난은 기본이요, 암살 위협도 수차례였다.
갑신경장에서 독립전쟁에 이르기까지 10년간, 김홍집을 노린 암살 시도만 공식적으로 세 번이었다.
독립전쟁 승전과 대한제국 선포 후에 반동파의 위협은 사라졌지만, 이번에는 급진민권파와 대외강경파로부터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황제를 향한 국민적 지지가 절대적으로 올라갈수록, 역설적으로 불평과 비난은 총리를 대신 향했다.
"황제 폐하와 국민에게 책임이 무겁지요. 원훈께서도 많은 가르침을 주십시오."
김옥균도 각오하는 바였다. 이미 개화당의 지도자로서 반대파의 비난을 받아온 건 오래전부터 일상사였다. 김옥균에 대한 황제의 신뢰와 대중적 인기가 높은 만큼, 반감도 적지 않았다.
김옥균을 노린 암살 시도도 여러 번 있었으나, 정치인 암살이 빈번하게 발생한 일본과 달리 조선은 대개 위협만 하다 체포되기 일쑤였다.
"고균, 한잔 더 하지. 앞으로는 황제와 총리이니, 이렇게 술 마실 일도 없지 않겠소."
"황공하옵니다, 폐하."
만찬이 끝난 후에, 이선은 김옥균을 응접실로 따로 불렀다.
"작금은 엄중한 시국이오. 국제정세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소. 앞으로 할 일이 많을 거요."
이선은 술잔을 들어 올렸다. 김옥균이 정중히 화답했다.
"우리가 지난 20년을 노력해 왔음에도, 열강들 사이에서 자주독립을 도모해야 한다는 현실은 크게 바뀌지 않았군."
"그렇지 않사옵니다, 폐하. 20년 전의 조선은 형편없는 약소국이었으나, 오늘의 대한은 열강이 존중하는 중견국이 되었습니다. 바로 폐하의 지도가 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김옥균은 정색하고 이선에게 찬사를 보냈다. 그는 지난 20년간의 업적에 대해 진심으로 높이 평가했다.
"노력이 헛되진 않았지. 하지만 그만큼 출발이 늦었으니까, 걱정이 되는 거요. 국내정치와 달리 국제정세는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서 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특히 앞으로 5년 정도가 정말 중요하오."
이선은 다시 술잔을 채웠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깔려 있었다.
"근래도 어침(御寢)에 들지 못하십니까?"
"불면이야 고질병이지. 그래도 4시간 이상은 자고 있소."
대한제국의 국력이 신장할수록, 오히려 황제의 업무는 비례해서 급증했다.
내각의 책무가 더 많아지고 관료 조직이 커졌다고는 하지만, 국정의 모든 분야에 신경을 쓰고 있는 이선으로선 늘 시간이 부족했다.
"부디 옥체 보중하소서. 폐하의 강녕하심에 이 나라의 흥망이 달렸습니다."
"음, 흥망이란 표현은 과하구려. 군주 한 사람의 존재에 국가의 운명이 달렸다면, 그건 진정한 근대국가라 할 수 없는데. 군주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튼튼한 나라가 되어야지."
이선은 쓴웃음을 지었다.
"황공하오나, 폐하께서 아니 계시면 대한이 어찌 되겠습니까?"
적어도 현재는, 김옥균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대한제국에서 이선이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 났다. 갑자기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걱정 마시오. 짐은 이제 서른여섯, 아직 젊소. 앞으로도 국가의 앞날을 지켜보려면 건강해야지. 그래서 담배는 줄였는데, 술은 포기하기 어렵군."
"하하, 술은 삶의 낙인데, 쉽게 포기하기 어렵지요."
격무의 연속에도, 이선은 건강을 위해 체력관리도 하고 담배도 끊다시피 했다. 음주도 과음은 안 하고, 적당히 즐겨 마시는 정도였다.
"그러니 오늘과 같은 날에는 마셔야지. 앞으로 내각에 쉴 틈 없이 일을 시킬 터이니 각오하는 게 좋을 거요."
"마땅히 받들겠습니다."
이선은 김옥균의 술잔에 술을 가득 채워 주었다.
"갑신경장 이래 어언 19년이 지났소. 독립전쟁 승전 후, 경에게 말했던 구상을 기억하시오?"
김옥균은 1895년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이선을 대군주로 추대하기 위해 장교들과 완화궁으로 찾아갔다. 추대를 완강히 거부하던 이선은, 마치 오늘처럼 독대하여 술을 마시며 자신의 속내를 밝혔다.
"2기 10년은 제국의 시대가 될 것이오. 전쟁의 결과로 기존 중화 질서는 완전히 무너졌소. 청조는 뒤늦은 개혁에 나서겠지만, 몰락하는 국가를 되살리기엔 너무 늦었소. 청조의 주검 위에서 열강이 세력경쟁에 들어가겠지. 이제 영국과 러시아가 동양에서 주요한 세력으로 대립하게 될 거요. 조선은 이 틈바구니에서 국가의 이익을 극대화해야 하오. 향후 5년 내로 동양을 뒤흔드는 일이 있을 거요. 러시아는 남하할 것이고, 우리도 선택에 나서야겠지. 그러니 승전의 내실을 다지는 한편으로, 외교에 만반을 기해 진정한 제국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야 하오. 이 2기 10년이 조선, 아니 동양의 분수령이 될 것이오."
이선은 김옥균의 비상한 기억력에 놀랐다.
"전부 기억하고 있구려."
"신이 어찌 잊겠습니까? 성상의 하교는 참으로 그리되었기 때문에, 신은 경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조선을 총체적으로 바꾸고자 했던 1기 10년, 혁명의 시대는 독립전쟁의 승전으로 성공리에 끝났다. 2기 10년도 이선의 구상대로 착착 진행 중이었다.
"어느덧 내년이면 원래 구상했던 2기 10년의 마지막 해군. 목표대로라면 2기를 결산하는 해가 되어야겠지만……."
"심려하시는 바가 있으십니까?"
이선은 고심했다. 1904년은 실제 역사대로라면, 러일전쟁이 일어나는 해였다. 러일전쟁의 가능성을 최대한 빼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영일동맹과 러시아의 만주 철군 거부는 결국 진행되고야 말았다.
"말하지 않았소? 지난 20년간 국력을 신장시켰지만, 여전히 열강 사이에서 고심해야 하는 처지는 같다고."
"어찌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20년 전의 조선에 부(富)와 군대라고 할 만한 게 있었습니까? 오늘날 대한의 창고는 넉넉하고, 10만의 정병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폐하의 업적에 자긍심을 가지시옵소서."
김옥균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20년 전의 조선과 대한제국을 비교하면 천지 차이였다. 그럼에도 황제는 조바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대한은 아직 너무나 가난한 나라요. 여전히 국민의 대다수는 빈곤한 농민이오. 이들의 삶을 바꾸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오."
역대 군주들과 달리 지방 시찰을 자주하는 이선이었다. 근대화의 수혜를 누리는 도시의 외관과 달리 한 발만 들어가면 여전히 국민 대다수는 빈곤했다. 대다수 농민과 도시빈민들은 가난에 허덕였다.
물론 20년 전과 비교하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국민은 만민평등, 조세개혁, 식산흥업, 부국강병, 자주독립, 영토확장, 토지개혁을 이끈 황제에게 깊은 충성심을 지니고 있었다.
"신민을 사랑하는 성상의 어심이 지극하십니다만, 이 역시 지난 20년간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 냈습니다. 어찌 수백 년의 빈곤이 단숨에 사라질 수 있겠습니까?"
결국 관점의 차이였다. 가난한 농업 국가인 과거의 조선에서 태어나 자란 김옥균은, 현재의 대한제국으로도 비약적인 발전을 체감했다.
그러나 이선에게 이 정도로는 한참 부족했다. 그는 미래의 21세기 대한민국을 본 기억이 있었기에, 현재의 대한제국은 너무나 가난했다. 선진 경제국의 반열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결코 만족할 수 없었다.
‘시대 차이가 있으니 20세기 후반에 이르지 않고서야 그 정도 부를 체감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내 치세에 절대 빈곤은 해결하고, 아시아에서 가장 자유롭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겠다.’
이선은 장구한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 앞으로가 더 중요하오. 강병(强兵)은 어디까지나 부국(富國)을 위한 길이지, 강병을 위해 부국을 하는 게 아니오. 대한은 아직 국가의 운명을 걸 전쟁을 치를 능력이 못 되오. 한 세대는 차분히 국력을 키워야 할 것이오. 적어도 10년은 전쟁에 휘말려서는 안 되고, 평화를 유지해야 하겠소. 경은 짐의 뜻을 이해해 주리라 믿소. 부국과 번영의 방향으로 정부를 잘 이끌어 주길 바라오."
이선은 국가구상 4기, 1920년대까지의 구상이 짜여 있었다. 이를 뒷받침할 국제정세가 계획대로 진행되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신은 성심을 깊이 받들겠습니다."
"좋소. 경이 이제 내각 총리를 맡게 되었으니, 익문사의 업무까지 겸임하는 건 과도하겠군. 익문사 독리는 다른 이에게 맡기겠소.
"예, 마땅히 그리하겠습니다."
이선은 총리에게 황제 직속 정보기관의 총수까지 겸임시킬 생각이 없었기에, 익문사 업무에서 배제했다. 김옥균도 이를 이해했기에 순순히 물러났다.
"경이 총리를 맡게 된 이상, 대한의 미래가 경의 지모(智謀)에 달렸음을 잊지 마시오."
"황공하옵니다. 신은 신명을 다해, 성총을 보좌하겠습니다!"
이선의 격려에 김옥균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김옥균은 총리 취임 직후 며칠간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밤늦게야 퇴청하려는데, 외무부 아주국장 오세창이 소식을 전했다.
"각하, 대치 선생님께서 많이 편찮으십니다. 조용히 보내려고 하십니다만, 각하께는 알려 드려야 하지 않을까 싶어……."
"아니, 저런. 안 그래도 선생께 총리 취임을 알리고자 찾아뵙고자 했는데. 속히 문안을 가세나."
바쁜 와중에도, 김옥균은 유홍기의 집으로 향했다. 시대가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대치 유홍기는 그의 스승이었다.
김옥균이 유홍기의 집에 도착하니, 소식을 들은 제자들이 모여 있었다. 총리의 등장에 그들이 황급히 인사하자, 김옥균은 화답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누운 70대의 노인은 병색이 완연했다.
"선생님, 고균입니다. 평안하신지 진작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오, 고균. 총리가 되어 국정으로 바쁜 사람이 뭐 이런 늙은이에게까지 신경을 쓰나."
"선생님은 이 나라의 백의정승이자 개화당의 지도자, 제게도 스승이 되십니다. 어찌 찾아뵙지 않겠습니까?"
공식적인 벼슬은 하지 않았음에도, 초기 개화파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쳐 ‘백의정승’이라 불린 대치 유홍기.
박규수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던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을 포섭해 더 급진적인 개혁의 방향으로 이끈 이가 바로 역관 오경석과 의원 유홍기였다.
지식이 풍부하고 실무에 능통하지만 기존의 조선 체제에 절망감을 느끼고 있던 의역(醫譯) 전문직 중인의 변혁에 대한 꿈이, 초기 개화파를 인도했다.
개화당의 출발은, 30년 전 오경석과 유홍기가 김옥균을 끌어들이면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침내 그 노력은 개화당의 집권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어서 쾌차하시길 바랍니다, 선생님."
"내가 명색이 의원 노릇을 한 게 수십 년인데, 내 몸은 내가 잘 아네. 일흔셋이니 살 만큼 살았어."
"아닙니다. 일어나셔야지요."
"역매(오경석)가 개화를 보지 못하고 떠난 지가 벌써 24년이나 됐네. 그에 비하면 난 좋은 세상을 보고 가지 않나. 문명개화와 자주독립을 이룬 세상을 봤으니, 더 여한이 없네."
신선처럼 하얗게 센 눈썹과 수염의 유홍기는 초탈한 것처럼 보였다.
"고균. 개화당이 국가의 대업을 맡은 지 20년이 지났고, 많은 일을 해냈네. 딱히 한 일도 없는 이 늙은이가 더 뭐라 더 조언할 것도 없겠네만……."
"선생님께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셨는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가르침을 주십시오."
유홍기 본인은 개화당 집권 후에도 전면에 나서지 않고 배후에 남았다. 제중원의학교장, 내무부 위생국장, 황성대학 초대 총장 등을 역임하며 교육과 의료 개선에 열중했고, 후학 양성을 위해 노력했다. ‘백의정승 유대치의 제자’는 사회 곳곳에서 중책을 맡고 있었다.
"음, 그렇다면 마지막 조언을 하지. 그대도 마침내 일인지상 만인지하의 자리에까지 올랐네. 진심으로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모두 성상께서 베푸신 은혜지요."
"음, 과연 성상께선 위대한 군주이시자, 동양의 영걸이지. 그러니 그대가 총리하기가 더욱 어려울 거야. 뛰어난 군주를 보좌하는 재상이란 쉬운 일이 아니거든. 더욱이 작금과 같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세상에선."
"옳습니다. 그러니 더욱 성심을 다해야지요."
"지난 20년간 그대는 성상과 한 몸처럼 보였지만, 분명히 견해차가 있어. 이제 총리가 되었으니 견해차가 도드라질 수 있네."
"아닙니다. 저야 신하 된 도리를 다할 뿐이지요."
"어차피 이 늙은이는 머지않아 갈 텐데, 솔직히 말해 보시게. 아무런 문제도 없는가?"
김옥균이 본래 솔직한 성품이라고는 하나, 황제와의 견해차를 이야기하고 다닐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죽음을 앞둔 스승에게만은 굳이 감추고 싶지 않았다.
"견해차라 할 것까진 없습니다만, 가끔 성상께서 너무 조급해하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김옥균은 유홍기에게 자신의 우려를 정리해서 전달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유홍기가 희미하게 웃었다.
"고균, 그대도 청년기에는 조급해했어. 서양 열강이 저렇게 강한데, 일본도 저렇게 변화하고 있는데, 조선만 뒤떨어져 있다고. 하루라도 빨리 바꾸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고 말 거라고."
"그렇기야 합니다만, 그땐 정말 급했지요. 지난 20년과 비교하면 대단한 변화가 오지 않았습니까?"
"그대와 달리 성상은 만족할 수 없으신 게지."
유홍기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알다시피 난 불자일세. 그래서 유학을 익힌 이들과는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바가 달랐을 게야."
"저도 그래서 평등사상을 익힐 수 있었지요."
"하지만 그대가 불교를 믿는 건 아니지. 내세(來世)를 믿나?"
김옥균이 불교의 평등사상에 공감해 심취하긴 했어도, 근본적으로는 유학을 익힌 사대부 출신이었다. 내세나 윤회와 같은 ‘괴력난신(怪力亂神)’의 이야기는 믿지 않았다.
"그건 아닙니다."
"난 믿네. 새삼스럽게 내세 이야기를 꺼내는 건, 죽을 때가 되니 내세가 마음에 걸린다, 이런 말을 하려는 건 아닐세. 나는 예전부터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마침내 유홍기는 오랫동안 심중에 담아 둔 말을 꺼냈다.
"성상께선 현재를 살고 있지만, 과거를 두루 알고 계시고, 미래를 내다보고 있지. 어쩌면 다른 세상에서 오신 분이 아닌가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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