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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혁명의 시대-345화 (344/812)

26화 의문

"그 무슨……."

유홍기의 뜬금없는 말에 김옥균은 떨떠름했다.

반대파에게 몽상가라고 비난받았던 김옥균이지만, 현실정치를 담당하는 입장에서 ‘황제가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이다’는 말에 공감이 될 리가 없었다.

"이런 말을 하면 유림들이든, 합리주의자들이든 세상을 현혹하는 말이라 하겠지만, 뭐 어떤가. 고균은 성상을 오랫동안 지척에서 모셨는데 그런 느낌을 느끼지 않았나?"

김옥균은 얼마 전 자신이 박영효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성상은 하늘이 내린 분이야. 그건 틀림없네. 석조전 집무실에 앉아서 세상만사를 다 내다보시네. 가끔은 이 세상이 아니라 딴 세상에서 온 사람 같다니까.’

하지만 그건 비유적으로 쓴 표현이었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이선의 놀라운 행보와 초월적인 안목이 도저히 합리적인 영역에서 설명하기 어려워서 쓴 표현이었다.

"위창(葦滄, 오경석)에게 들으니까, 고균이 얼마 전에 티베트에서 온 승려와 독대했다지?"

극비사항이었지만, 외무부 아시아 담당 국장인 오세창은 비밀을 공유한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김옥균도 유홍기에게는 정보가 전해져도 괜찮았다.

"그 승려가, 성상께 전륜성왕의 화신이라는 표현을 썼다면서?"

"그렇긴 합니다만,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는……."

"물론 전륜성왕은 비유적인 표현이겠지. 하지만, 진짜로 그럴 수도 있지."

유홍기는 방에 놓여있는 불상을 바라보았다.

"난 그대와 달리 정치에서 한발 뒤에 물러서 있으니까, 현실에서 구애받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다네. 나는 성상께서 다른 세상에서 온 분이라고 믿네. 동인 선사가 그리 사라졌을 때, 우리가 얼마나 황망했었나. 하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완화군께서 지식과 힘을 갖고 우리 앞에 나타나셨지. 어쩌면 부처님의 가피(加被) 아니겠나?"

"……."

"물론 죽을 날을 앞둔 늙은이의 헛소리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할 생각도 없네. 하지만 나는 믿고 싶네. 멸망의 위기에 놓인 조선을 구하려고, 다른 세상에서 오신 분이라고."

김옥균은 스승의 믿음을 존중했다. ‘다른 세상’인지는 몰라도, 최소한 다른 나라에서 힘을 키워 조선을 구하기 위해 돌아온 건 맞았다.

"성상께서는 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오신 건 틀림없지요."

"그래. 그렇게 생각한다면 성심과 뜻을 함께 하게. 그대가 이 나라를 위해, 총리로서 성상을 잘 보좌해 주길 바라네."

유홍기는 예전처럼 김옥균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했다.

"돌이켜보면, 나와 역매가 30여 년 전에 그대를 개화당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변혁의 역사가 시작되었군. 마침내 큰 뜻을 펼치게 되었으니……."

유홍기는 감개무량했다. 작은 골방의 모임에서 논의되던 새로운 세상은, 마침내 현실로 도래하고 말았다.

"늙은이가 노파심에 말이 많았구만. 국정으로 바쁜 사람을 오래 붙잡아서 미안하네. 어서 돌아가시게."

"아닙니다, 선생님. 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평안하십시오."

"고맙네. 이제 그만 쉬어야겠군."

유홍기의 집을 나선 김옥균은,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스승의 말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성상께서 다른 세상에서 오신 분이라고? 그래서 과거를 두루 알고, 미래를 내다본다고? 불가능한 일이야.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성은 부정했지만, 문득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세상에는 이성과 합리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영역이 많지 않은가.

이 시대에도 ‘시간여행’이란 개념은 있었다. 영국 소설가 허버트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는 1895년 ≪타임머신≫을 출간, 시간여행을 소설로 풀어 냈다. 김옥균도 들어 본 이야기였다.

이선의 행동과 시야가 미래를 본 사람으로서 움직이는 것이었다면, 이해가 될 수 있었다.

‘…… 만약 그렇다면,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지?’

고심하던 김옥균은, 결국 그에 대해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총리로서 자신이 할 일은 산적해 있었다. 생각해야 할 일도 너무 많았다. 증명 불가능한 가정에 매달려서 현실정치를 도외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기묘한 의문으로 남았다.

김옥균 내각의 출범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환영을 받았다.

김옥균은 진보적인 친서양주의자로 널리 알려진 데다, 그간 외교관으로서 각국과 친분을 맺기 위해 노력해 온 덕이었다.

"김옥균이라면 괜찮은 사람이지."

"황제가 중단 없는 개혁을 하겠다는 뜻이겠군요."

"열강과의 관계도 중시하겠다는 뜻도 포함이겠고."

김옥균이 주재 공사를 맡으며 두루 친분을 맺었던 프랑스와 일본 정계의 반응은 특히 좋았다.

프랑스의 동맹이 러시아요, 일본의 동맹이 영국이니, 대립 중인 러시아와 영국도 만족할 수 있는 인사였다.

지리적 거리상 가장 먼저 축하를 보내온 건 일본이었다.

"총리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각하. 사이온지 총리께서 축하 전문을 보내오셨습니다."

주한 일본 공사 하라가 김옥균에게 총리 사이온지의 축하문을 전달했다.

"고맙습니다, 공사. 후작께도 고맙다는 말씀을 꼭 전해 주시길 바랍니다."

"총리 각하의 취임을 기점으로, 일한 양국 간에 특별한 우호가 가득하길 바랍니다."

"물론입니다. 한일 양국은 이웃나라요, 아시아에서 문명개화를 이룬 단둘뿐인 나라입니다. 앞으로 좋은 관계가 계속되길 바랍니다."

하라와 김옥균은 외교적인 덕담을 늘어놓았다.

이선이 니콜라이 2세와 친서 외교를 펼치는 것처럼, 김옥균과 사이온지도 편지 외교를 진행했다.

상황을 모르는 이가 보면 ‘황제는 친러, 총리는 친일’이라고 예단(豫斷)하겠지만, 이는 이선이 부여한 역할 분담이었다.

영일동맹과 노불동맹 사이에서 균형을 잡겠다는 이선과 김옥균 내각의 정략에, 총리 취임 1주일도 채 되지 않아 의문이 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 * *

러시아는 협상 중단을 선언한 후, 10월 21일 극동군 사령관 겸 태평양 함대 사령관 알렉세예프가 성경장군 증기에게 요구사항을 전달한 바 있었다.

첫째. 러시아 치안유지부대를 공격한 중국인 마적을 체포, 처형할 것.

둘째. 반러 성향을 보이는 도대(道臺, 지방 행정관)를 해임하고 추방할 것.

셋째. 봉천성에 주둔하는 청군은 1만 6천 명을 넘길 수 없으며, 단련(團練, 민병대)은 모두 해산시킬 것.

7일 이내로 답변하라고 했지만, 북경으로부터 러시아에 굴복하지 말라는 명을 받은 성경장군은 알렉세예프의 요구를 무시했다.

이에 러시아는 무력대응을 결정했다.

"러시아군, 철군 거부! 봉천 재점령!"

10월 31일, 급보가 전해졌다.

러시아 극동군이 만주의 중심지인 성경(盛京), 봉천을 재점령했다는 급보가 타전되었다.

러시아 카자크 기병대는 동청철도를 타고 봉천역에 하차, 성내에 입성했다. 청군이나 당국의 저항은 없었다.

"뭐라고! 이게 러시아의 총리 취임 선물이란 말인가?"

보고를 받은 김옥균은 분개했다. 그로선 시기가 참으로 공교롭기 짝이 없었다.

"경의 총리 취임과는 무관한 일이겠지. 청국의 협상 거부, 비테의 해임과 관계가 있을 거요."

이선은 비테의 해임 이후 이리되리라 어느 정도 짐작했지만, 자신의 생각보다 사태 전개가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도대체 니콜라이는 뭘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군. 내가 그렇게 때를 기다리라고 조언했건만. 이리되면 청국은 물론이고 한국과 일본에도 반러시아 감정만 고조시킬 것이 아닌가!’

이선은 점점 러시아의 행보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일본이 훨씬 공격적으로 나오고 러시아는 수세적이었는데, 여기서는 러시아가 공격적이었다.

‘일본의 러시아 견제가 실제보다 약하니까, 그 귀결이 이렇게 된 건가? 그래서 내가 지금껏 러시아가 선을 넘지 않도록 조언한 거 아닌가? 하, 앞으로 더 시끄러워지겠군.’

당연히 청나라는 격렬히 반발했다.

성경장군 증기는 러시아군이 봉천에 입성한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즉각 봉천 주재 코미사르(군사위원) 크베친스키 대령을 찾아가 항의했다.

"철군을 하기는커녕, 대청의 성지인 봉천을 재점령하다니! 이런 괘씸한 일이 있나? 즉시 철군을 요구하는 바이다!"

러시아의 만주 점령 이후 협정을 맺어 북경에 소환되었다가 성경장군으로 복귀한 증기였다. 그동안 러시아에 너무 양보를 많이 한다는 비난을 받아왔기에, 물러설 수 없었다.

"우리의 협상 요구를 거부한 건 청국이지, 러시아 제국이 아닙니다만? 그리고 봉천 입성은 교외에 주둔할 여건이 못 되어서 부득이하게 성내에 주둔하려는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 본관은 절대 인정할 수 없다!"

"애초에 장군이 알렉세예프 제독의 요구를 받아들였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 아니오!"

"그건 주권 침해인데 어떻게 받아들이나!"

증기와 크베친스키는 서로 언성을 높였다. 통역이 최대한 어조를 부드럽게 하려고 해도, 이미 표정과 목소리에서 다 드러나고 있었다.

"애초에 근본적인 문제는 청국이 만주의 치안 유지를 못 한 거 아니오! 의화단 폭도들이 동청철도를 습격하게 두어 러시아군이 부득이하게 만주에 진주하게 되었소. 이제 철군을 앞두게 되니, 마적들이 날뛰어 러시아의 재산을 침해하고 있소. 러시아는 마적들의 배후에 일본이 있다고 믿고 있소! 북경은 영국의 조종을 받아 협상도 응하지 않는데, 이런 상황에서 철군을 어찌하란 말이오?"

"그 무슨 당치도 않은 소리! 네놈들이 대청국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것도 분수가 있어야지! 나는 황제 폐하께 대청의 성지를 지키라는 명을 받은 성경장군이다! 러시아의 지방 총독과 동등하다! 일개 대령 따위가 어찌 나를 이리도 모욕한단 말이냐!"

증기의 분노에 대령이 코웃음을 쳤다.

"대청국? 그래, 그 대단한 청국이 일본이나 한국 같은 소국에 패전하는 굴욕이나 당한단 말인가? 대러시아는 청국과 같은 약소국과 더 이상 외교를 논할 가치가 없다! 약소국은 강대국에 맞서려 하지 말라!"

대령은 조롱에 이어, 군인들에게 명해 증기를 영사관에서 강제로 쫓아냈다.

"이, 이, 이 무례한……! 나라에 힘이 없으니 이런 수모를 당하는구나! 어쩌다 대청이 이리되었는가!"

증기는 땅을 치며 통곡했다. 한때 대청은 몽골, 티베트, 준가르, 카슈가르를 병합하고, 조선과 베트남을 제후국으로 삼아 동양의 최강자로 군림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대놓고 국토가 점령당하고 모욕을 당해도,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그저 러시아에 반대하는 다른 열강, 영국과 미국, 일본에 부탁하여, 러시아를 몰아내 달라고 청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 봉천 재점령! 도대체 북경 조정은 뭘 하고 있는 건가? 러시아가 만주 전체를 집어삼키는 걸 구경만 하고 있을 건가?"

"조정은 무능하기 짝이 없다. 러시아를 몰아낼 수 있는 건, 오직 동양의 강국 일본뿐이다. 일본과 손을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아시아가 연대하여 러시아를 몰아내자!"

흑룡회로 대표되는 일본의 ‘대륙낭인’들이 각지에서 암약하며 선동했다. 이들은 반러시아 감정을 부추기고, 흥아론과 친일 여론을 조성했다.

대부분 중국인은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하건 말건 관심 없었지만, 식자층은 주권 침탈에 격노한 상태였다.

조국 개혁의 뜻을 품고 일본에 유학한 중국 유학생들은, 청조의 무력함에 분개하였다.

재일 중국 유학생 200여 명은 ‘거아(拒俄)의용군’, 즉 ‘러시아를 막는 의용군’을 조직했다.

거아의용군은 러시아를 막기 위해 청조의 정예군인 북양군에 입대하자는 운동을 벌였고, 이 운동은 북경의 경사대학당(대학교)으로 번졌다.

이로써 중국 학생운동의 여명이 떠올랐다.

"조정은 무력하고 무능하다. 만주족의 청으로는 결코 중국의 주권을 지킬 수 없다!"

"그렇다. 만청을 무너트리고, 한족에 의한 민주공화정부를 수립시켜야 한다."

러시아를 막고, 주권을 지키자는 운동은 점점 다른 방향으로 향하게 되었다.

청나라가 주권을 지킬 수 없다는 의문은, 곧 멸만흥한(滅滿興漢)으로 나아갔다.

"러시아의 봉천 점령은 결코 승인할 수 없소. 러시아에 엄중항의하고, 동맹인 영국과 행보를 같이하겠소. 각국 정부에도 일본의 뜻을 알릴 것이오."

그동안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던 사이온지 내각도, 러시아의 봉천 재점령에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군부에 이어 원로들도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고, 군부보다 더 강경하고 호전적인 언론은 ‘러시아를 동양에서 몰아내라’고 외치고 있었다. 사이온지도 더 이상 강경한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일본은 러시아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드러냈다.

1903년 말의 만주 위기.

단적으로 말해서, 상대에 대한 의문과 오해에서 비롯된 행위였다.

일본과 영국은 러시아가 만주에 이어 동아시아 전체를 지배하려 한다는 야욕을 품고 있다고 의심했고,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겠다는 생각으로 청나라에 협상 결렬을 종용했다.

반대로 러시아는 청국과 일본의 반러시아적인 태도가, 러시아를 아시아에서 몰아내기 위한 영국의 배후조종에서 비롯된 것이라 의심했다. 그러니 더욱 강경하게 나오게 되었다.

상대의 행동이 상대에게 의문과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그에 대항하는 조치가 더 큰 공포와 반발을 낳는 상황이었다.

의문과 오해, 공포와 반발의 연쇄였다.

강경책에 맞서 강경책이 준비되었다.

- 27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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