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346화 (345/812)

27화 첩보

광무 7년 11월.

연길, 대한제국 5사단 5여단 사령부.

"소관이 보고하지 않았습니까? 러시아가 봉천을 재점령할 거라고. 결국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까!"

제7독립기병중대장 유동열 부위는 상관에게 푸념했다. 그는 카자크 기병대를 통해 파악한 정보를 5여단에 보고 했는데, 황성으로 제대로 보고나 됐는지 의문이었다.

"이봐, 유 부위. 나도 상부에 보고했어. 근데 그때만 해도 러시아에서 특이사항은 없었네. 그리고 요동은 6사단 관할이니, 우리가 그 이상 나설 일도 아니지 않나?"

유동렬이 보고한 7월 당시에는, 러시아가 봉천 점령을 시도하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알렉세예프와 극동군은 진작 봉천 재점령을 시도했으나, 비테의 반대로 무마되었다. 결국 비테의 해임 이후에 러시아군이 행동에 나서게 된 것이었다.

"그래, 어차피 엎질러진 물. 귀관의 보고에서 보다 중요한 건."

5여단장 홍범도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동렬이 황급히 거수경례하자, 홍범도가 답례했다.

"근래 발흥하는 마적의 배후에 누가 있느냐는 것이네. 만주에 분란을 조종하고, 전쟁을 도발하려는 무리가 있는 게 틀림없네."

"러시아 극동군이나 일본 우익단체라고 생각합니다만, 우익단체의 배후에 일본 육군 참모본부가 있을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유동열의 추측에 홍범도는 말없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살폈다.

"음. 귀관은 일본과 러시아 두 나라에 유학한 경험이 있더군."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러시아와 일본어 모두 가능하겠지?"

"예. 영어와 중국어도 조금 합니다."

"좋아. 귀관은 당분간 마적의 배후를 파헤치는 첩보에 종사하게."

"하오면 제가 지휘하던 부대는?"

"귀관은 임시로 보직대기하고, 부중대장이 지휘를 대리하도록 하겠네. 황성의 육군 정보국에서 요원이 파견 나올 예정인데, 귀관은 그를 보좌한다."

"예, 알겠습니다!"

대한제국은 만주의 충돌을 일으키는 배후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정보의 파악이 시급했다.

얼마 후, 황성에서 장교가 현지시찰 명목으로 요동에 파견 나왔다. 유동열은 안서에서 그를 맞이했다.

"이동휘 참령일세. 귀관이 유동열 부위인가?"

"예, 그렇습니다!"

당시 근위기병대 소속으로 북경 공략에 참여했던 유동열은, 이동휘의 이름을 들어 알고 있었다.

"북경 공사관 방어전의 영웅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귀관도 북경 공략전에 참전했다면서? 그때 우리는 자네들이 언제 오나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네. 도착하니까 얼마나 기쁘던지, 하하."

이동휘는 정보국에서 나온 장교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서글서글했다. 두 사람은 전우라는 공통점으로 금방 친교를 텄다.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 들었겠지?"

"마적의 배후를 밝혀 내기 위함이라 들었습니다."

"그래. 우리는 당분간 익명으로 청국령에서 탐문한다."

안산에 도착한 이동휘와 유동열은, 상인으로 위장해서 국경을 넘었다. 일본어와 러시아어가 유창한 유동열, 중국어가 유창한 이동휘는 손쉽게 위장할 수 있었다.

봉천 성내.

상인으로 위장한 이동휘와 유동열은, 무사히 봉천에 들어섰다.

"러시아군의 위세가 대단하군."

"우리 대황제 폐하께서 몸소 친정하시어 정벌했던 봉천인데, 이렇게 익명의 신분으로 넘다니."

러시아군은 봉천에 주둔하며, 성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을 검문했다. 사실상 러시아령이나 다름없는 분위기였다.

그때 어디선가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정탐(偵探)!"

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순간 움찔했으나, 상관없는 일이었다. 시내에서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탕! 탕! 탕!

짧은 총격전 끝에, 러시아군의 추격을 받던 한 사내가 총을 맞고 쓰러졌다.

"倭人?"

"密偵."

웅성거리던 중국인들은, 러시아군이 시체를 치우자 곧 사라져 버렸다.

"일본 밀정인 것 같습니다."

"일본도 정탐을 파견 안 할 리가 없지. 자, 갈 길 가세."

이동휘와 유동열은 목적지로 향했다. 현지 정보원과 접촉하기로 한 장소였다.

책방으로 위장한 접선지에서, 현지 정보원이 은밀히 접촉했다.

그들은 뒷골목의 으슥한 아편굴로 향했다. 아편에 취한 중국인들이 곳곳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퇴폐적이고 으스스했지만, 밀담을 나누기엔 오히려 안성맞춤이었다.

세 사람은 별도로 분리된 방으로 들어갔다. 덩치 큰 사내 한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시고 왔습니다."

"음, 어서 오시오. 아편 한 대 하시겠소?"

"정중히 사양하지요."

"그쪽 젊은이는?"

"사양합니다."

"이거 하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데. 뭐, 취향은 존중해 드리지."

사내는 아편을 빨더니, 황홀경에 빠진 듯 눈이 풀렸다. 유동열은 경멸감이 들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그래, 뭐가 알고 싶은지는 대강 들었소. 선물도 잘 받았고."

"그럼 말해 주시렵니까?"

"근데, 이거 알아 두시오. 여긴 난장판이야. 돈만 주면 안 되는 게 없소. 만인이 만인을 속이고, 언제든지 뒤통수친다고. 모두 도적놈이야!"

사내는 횡설수설했다. 이동휘는 눈을 찌푸렸다.

"그래서 모르신다?"

"아니, 그건 아니고."

사내는 손으로 돈 모양을 만들었다.

"말해 주면 추가로 더 제공해 드리지."

"뭐, 좋소. 이 근방에서 마적들의 대세가 누군지는 아시오?"

"펑더린(馮德麟, 풍덕림)?"

"정보가 느리시구만. 얼마 전까진 제일 잘나갔지. 하지만 작살났어. 러시아군이 반러 혐의로 쫓고 있거든. 지금은 장가(張家)가 대세지."

"장징후이(張景惠, 장경혜)?"

"아, 그 장가 놈도 잘나갔지. 하지만 근래 더 성공한 놈이 있소."

"그게 누구요?"

사내는 아편을 한 모금 다시 빨았다가 뱉었다. 그리고 탁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장쭤린(張作霖, 장작림)."

봉천성, 어느 마을.

청군 군복 차림의 사내와 양복 차림의 사내가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서른 정도의 청년으로 보였다.

"장 대장, 러시아의 횡포를 지켜만 보고 있을 거요? 녹림(綠林)의 명예는 어디에 있으며, 대청의 자부심은 어디로 갔소?"

"선생, 솔직히 말해서 대청은 내 알 바가 아니오. 하지만 증기 장군은 내게 관운(官運)을 열게 해 준 부친과도 같은 분. 러시아에 그런 수모를 당한 건 참을 수가 없지."

군복 차림의 사내는 바로 장작림이란 마적이었다. 나이는 29세였지만, 상당한 세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장작림은 청조일전쟁 당시 만주 방위를 맡은 송경(宋慶)의 의군(毅軍)에 자원하여 기병이 되었다. 하지만 청군은 연패를 거듭한 끝에 패전했고, 의군도 해산했다.

이후 장작림은 해산된 군인들과 함께 마적단을 구성했다. 행정이 붕괴하고 치안이 혼란해진 만주에서 마적의 힘은 커져 나갔다. 장작림은 처세술과 지도력이 타고 났는지 사람을 모으고, 주변의 마적들을 정리해가며 세력을 키웠다.

작년. 성경장군 증기는 골치 아픈 마적들을 토벌하는 대신 귀순 공작을 벌였고, 장작림도 이에 응했다. 5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귀순’한 장작림은 단련의 1개 영(營)을 이끌게 되었다. 합법적인 지위까지 얻은 장작림의 세력은 더욱 커져 나갔다.

"더욱이 러시아가 단련 해체를 요구했는데, 이건 우리더러 다시 마적으로 돌아가란 말이지. 그럴 수야 있나?"

물론, 여전히 장작림은 마적 두목이었다. 하지만 관의 지위를 갖고 있는 것과 수배대상인 마적은 천지 차이였다.

장작림은 그간 은밀히 러시아의 자금과 무기 지원도 받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러시아에 매수된 마적들의 수도 상당했다. 그런데 봉천 점령 이후에 팽(烹)하려고 들었다.

"그렇소. 러시아의 횡포는 동양을 위협하고 있소. 동양 삼국이 연대하여 러시아를 만주에서 몰아내야 하오. 하지만 청국 조정은 지리멸렬하고, 한국은 은근히 중립인척 하면서 러시아의 편을 들고 있소. 현재의 일본 정부도 서양에 굴욕적인 건 매한가지. 각국의 지사들이 연대해 동양을 구해야 하오."

흑룡회의 간부, 30세의 우치다 료헤이는 대륙낭인의 표본과도 같았다.

검술과 사격에 능하고, 한국어, 중국어, 러시아어를 익혔다. 손문이 이끄는 중국 혁명 세력을 지원하고, 시베리아를 횡단해 러시아의 실체를 파악했다.

우치다는 러시아를 다녀온 후, ‘러시아 망국론’을 출판하여 러시아는 약점이 많은 나라니 싸워 볼 만하다고 주장했는데, 외교적 갈등을 우려한 일본 정부에 의해 바로 출간금지 당했다.

흑룡회의 간부가 된 우치다는 만주에서 암약하며, 러시아 타도를 골몰했다.

"일본과 조선도 대청을 공격하고, 만주를 노리는 장본인들 아니오? 어떻게 믿으란 말이오?"

"다르지요. 서양은 중국을 분할해 식민지로 삼을 생각밖에 없지만, 일본은 동양의 연대를 목표로 할 것이오. 새 한국 총리가 된 김옥균도 흥아론에 공명하는 사람이니, 정세가 바뀌게 될 거요."

"흠……. 일본은 진지하게 러시아랑 한판 붙을 생각 있소?"

우치다는 가슴을 치며 호언장담했다.

"국민과 군부는 확고하오. 단지 정부 일각에서 방해하고 있기는 하나, 결국 현실을 깨닫게 될 거요. 러시아를 몰아내기 전까지 동양 평화는 없음을. 만주가 이를 증명하지 않겠소?"

"호오, 그래서 내게 원하는 건?"

"이래 줬으면 하는데……."

우치다는 장작림에게 계획을 설명했다.

장작림은 듣기는 했지만, 우치다의 호언장담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제안은 솔깃했다.

"자금과 무기만 넉넉히 지원해 준다면야."

"흑룡회가 적극적으로 도울 거요."

우치다는 손짓으로 자신의 일본도를 가리켰다. 배후를 은밀히 암시하는 태도였다.

"뭐, 기대하겠소. 하지만 나는 판돈을 전부 걸 생각은 없소. 패가망신하고 싶지 않거든."

장작림은 씩 웃었다. 그는 우치다가 떠드는 아시아주의에 공명하지 않았고, 결코 일본의 총알받이가 될 생각도 없었다. 일본은 불신했지만, 그들이 제공하는 돈과 무기는 환영이었다.

"아, 물론이오. 서로 믿을 만한 거래를 하자는 거지."

"좋소, 붕우(朋友). 거래를 합시다."

장작림은 술잔에 고량주를 가득 따랐다. 두 사내는 독한 고량주를 벌컥 들이켰다.

기묘한 신뢰관계였다.

* * *

첩자와 모험가들이 누비는 곳은 만주뿐만이 아니었다. 유라시아 대륙 곳곳에서 첩자들이 활발했다. 각국의 방첩 활동도 뒤따랐다.

그 무렵, 영국령 인도제국 부왕청의 정보부는, 러시아에 의한 거대한 음모를 확신했다.

"묵던(봉천) 점령은 러시아의 거대한 계획이 시작된 거요. 만주를 점령하고, 몽골을 분리시키고, 티베트까지 선동하려는 계획이겠지."

"도르지예프, 이자는 승려가 아니라 러시아의 첩자가 틀림없소. 러시아 첩자가 달라이 라마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니 위험하기 짝이 없소."

"배후에 러시아 군부가 있소. 바드마예프란 부랴트인이 러시아 참모본부 산하 아시아국에서 일하고 있다 하오. 러시아, 부랴트, 몽골, 티베트. 결코 우연이 아니지."

"티베트의 상실은 곧 인도의 위협. 절대 받아들일 수 없지."

인도 부왕(副王), 조지 커즌(George Curzon) 경은 강력한 반러시아주의자, 러시아 공포증(Russophobia) 환자였다.

"러시아가 아시아의 지배라는 야망을 가질 권리가 있다면, 영국도 저항할 권리가 있다. 아니, 그건 대영제국의 의무다!"

커즌은 러시아의 궁극적 목표가 아시아 전체의 지배라고 확신했으며, 영국은 이를 막아야만 했다.

하지만 커즌이 보기에 런던은 허약하기 짝이 없었다. 보어전쟁의 실패로, 정부는 새로운 분쟁에 휘말리는 걸 꺼리는 것처럼 보였다.

"런던은 현지 사정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러시아의 흉계가 목전에 이르렀는데!"

1903년, 커즌은 인도와 티베트의 무역과 국경 문제를 논의하자는 서한을 달라이 라마에게 보냈다. 하지만 첫 번째 편지는 무시되었고, 두 번째 편지는 아예 뜯어 보지도 않고 반송했다.

부왕은 굉장한 모욕감을 느꼈다.

"러시아 사절은 받아들이고, 대영제국 인도 부왕이 보낸 편지는 읽어 보지도 않는다? 이게 바로 티베트가 러시아에 경도되었다는 증거 아닌가?"

커즌은 러시아와 티베트가 어떤 밀약을 맺었다고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러시아가 티베트에서 어떤 활동을 하는지 파악하고, 영국이 티베트와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커즌은 사절단 파견을 결정했다.

이름과 달리, 평화를 추구하는 ‘사절단’은 아니었다.

"대령, 저 미개한 야만인들에게 대영제국의 위용을 보여 주게. 필요하다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말이야."

"알겠습니다!"

‘그레이트 게임’의 모험가 중 한 명인, 프랜시스 영허즈밴드(Francis Younghusband) 대령이 사절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사절단 호위병’은, 제임스 맥도널드(James Mcdonald) 준장이 지휘하는 구르카인과 시크교도로 구성된 3천여 명의 병력이었다.

영허즈밴드 사절단은, 인도-티베트 국경에서 대기했다.

밸푸어 내각은 커즌의 시도를 무모하다고 여겼지만, 러시아의 봉천 재점령은 런던에 적당한 명분을 주었다. 런던의 승인을 받은 커즌은 즉각 영허즈밴드에게 명령했다.

"국경을 넘어 티베트로 진격하라. 단, 라싸로의 진격은 허용하지 않는다. 동계 기간에는 전투를 하지 말고 티베트 영내에서 무력시위만 할 것. 야만인들에게 대영제국의 힘을 보여 줘라!"

1903년 12월 1일.

유니언 잭 깃발을 높이 든 기수를 선두로, 3천 명의 병사들, 7만 명의 짐꾼들이 노새와 야크를 이끌고 첩첩산중의 인도-티베트 국경을 넘었다.

티베트는 명목상 청나라의 영토에 속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태도였다.

그레이트 게임이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 28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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