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348화 (347/812)

29화 세기의 실험

‘특종’의 내용은 워싱턴에도 전해졌다.

당연하게도, 주미 한국 공사관은 발칵 뒤집혔다.

"아뢰기 황공한 일이나, 여쭙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전하?"

"당연히 사실이 아니오. 내가 이 여인과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브라운 양이 곧 대한에 갈 예정이라 친분이 생겼을 뿐이오. 벗이지 연인이 아니란 말이오!"

서재필의 질문에 이강은 부인했다.

<보스턴 선데이 포스트>는 신뢰성 떨어지는 황색언론이었으므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20년 전 이선이 보빙사로 미국에 방문했을 때도 비슷한 루머가 퍼진 적 있었고, 더욱이 이강은 미국 여인과 연애한 전적도 있었기 때문에 이런 소문이 퍼질 만한 환경이었다.

하지만 루머는 루머를 낳고,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황색언론은 경쟁적으로 뉴스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동양의 왕자와 미국의 숙녀가 사랑에 빠지다!」

「한국에서 온 프린스 리,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걸다!」

「새로운 신데렐라 이야기, 에밀리 브라운 양은 누구인가?」

「알라딘과 아라비아 공주보다 더 화려한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다!」

「이 젊은 연인이 결혼하여 자식을 얻으면, 한국 황실에 미국인의 피가 흐르게 된다!」

<뉴욕 헤럴드>가 <보스턴 선데이 포스트>를 인용해 새로운 보도를 하고, <콜로라도 스프링스 텔레그래프>가 <뉴욕 해럴드>를 인용하는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소문이 퍼져 나갔다.

심지어 대륙 건너 뉴질랜드의 <이브닝 포스트>나 오스트리아의 <노이에 프라이 프레세>도 신속 보도를 했다. 오스트리아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결혼이 흔치 않았던 귀천상혼이었던 만큼, 인종과 신분을 뛰어넘은 루머에 빠른 관심을 보였다.

「프린스 리, 당당히 고백하다! ‘만약 황실에서 인종과 신분을 이유로 혼인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나는 왕위 계승권을 포기할 의사가 있다.’」

"전하, 이건……."

"아니, 진짜 오보라니까! 내가 정말로 그런 말을 미국인 앞에서 했을 리가 없지 않소! 황형(皇兄)께 누가 될 말을 어찌 감히 할 수 있겠소?"

이강은 완강히 부인했다.

왕위계승권 운운하는 말은 단순한 루머가 아니었다. 자칫 대역(大逆)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7년 전, 갓 스물을 넘긴 이강이 여배우와 결혼하기 위해 뭐든 하겠다고 이선 앞에서 떠든 적이 있었지만, 지금의 이선은 황제였다.

"과연 그럴 리가 없지요. 그렇다면 반박 성명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서재필 본인도 미국 여인과 결혼했으니 개인적으로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황실의 일은 완전히 달랐다.

"주미합중국 대한제국 공사관은 친왕 전하에 대한 일련의 보도를 공식적으로 부인함을 알립니다. 모든 보도는 결코 사실이 아니며, 오보를 낸 모든 언론사에 정정기사를 요구하는 바입니다. 정정기사를 내지 않는다면, 응당한 법적 조치를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미 한국 공사관의 공식 부인 이후 오보는 잦아들었지만, 이미 퍼져 나간 소문은 멈추지 않았다.

‘신비한 동양 왕실’에 대한 소문은 미국인의 환상을 자극했고, 대한제국 황실은 엄청난 부를 보유한 존재로 그려졌다.

아시아를 뭉뚱그려 동양으로 여기는 서양인의 무지를 반영하듯, 묘사만 보면 동아시아라기보다는 오히려 페르시아나 오스만 제국에 더 가까웠다.

"동양인이 감히 백인 여성을 노리다니, 이래도 되는 건가?"

"말세야, 말세. 이교도 황인종 주제에 감히……."

"여보, 무식한 소리 마요! 이 동양 왕자는 500년 전통의 명문 왕가에 엄청난 부자라잖아요!"

"아니, 그래도 이교도 야만인들인 건 맞잖아? 하렘에 처첩을 수백 명씩 거느리는!"

"뭐, 진짜야? 우와, 그거 진짜 엄청나구만. 그 나라 왕은 대체 얼마나 힘이 좋아야 하는 거야?"

"정말 무식하기는! 그건 터키나 아랍이잖아요!"

"아빠, 제대로 된 신문을 봐요. 한국 황제는 문명화를 추구하는 군주라고요. 20년 전에 미국을 배우기 위해 왔다잖아요."

"그래도 엄청난 부자인 건 맞지?"

"그렇겠죠. 아, 이 에밀리 브라운이라는 여자는 정말 좋겠다. 고귀하고 부유한 황실의 일원이 된다니! 얼마나 떠받들어지겠어요?"

"헛바람 들지 말고 네 할 일이나 잘해라!"

"흥! 동양에 또 다른 왕자는 없으려나?"

1903년 12월, 미국인들의 화젯거리는 단연 한국 황실과 관련된 루머였다.

한국 공사관에는 수많은 편지와 전보가 쏟아져 들어왔다.

"두 분의 혼인을 축하드립니다! 저는 숙련된 간호사입니다. 황실 의료진으로 채용을 희망합니다."

"저는 오랜 경력의 하녀입니다. 브라운 양을 따라 황실의 시녀로 가고 싶습니다."

"저는 명문가 전문 가정교사입니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각종 예법과 문학에 능통합니다. 장차 태어날 황실 일원을 위한 교육을……."

"저는 오랫동안 모 명문가의 요리사로 고용되었습니다. 제 실력에 자부심이 있습니다. 황실 요리사로 채용해 주시면……."

공사관에는 온갖 직업군에서 황실 채용을 희망하는 이력서가 쏟아져 난처할 지경이었다. 일일이 아니라고 답변하기도 힘들었다.

"…… 송구합니다. 이게 다 내 잘못입니다."

"아닙니다. 아무래도 반박 성명을 한 번 더 내야겠군요."

공사관 직원들은 의친왕에게 감히 뭐라 하진 않았지만, 괜히 일을 만들었다고 내심 불만이었다.

이강은 에밀리에게 당분간 만나기 어렵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에밀리에게서도 이해한다는 답장이 왔다.

반박 성명 이후에도 이강이 어딜 가든 주변에는 기자들이 서성거렸고, 에밀리도 마찬가지였다.

"후, 정말 피곤하기 짝이 없군."

이렇게만 보면 이강이 여자 꽁무니나 쫓다가 사고를 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사실 그의 속내는 더 복잡했다.

‘이만하면 적당히 관심과 주의를 끄는 데 성공했겠지? 황성에서도 좋게 받아들여 줘야 할 텐데.’

아무리 이강이 여자 좋아하는 한량이라지만, 처음 본 외국 여자와 다짜고짜 사랑을 나누자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강은 에밀리를 보는 순간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한국과 한국어를 배우려 하고, 장차 한국에 가서 보탬이 되고 싶어 하며, 교육을 잘 받았고, 진보적이다.

‘닥터 얀코프스카와 닮았잖아!’

외모는 금발벽안이라는 점이 같다는 걸 제외하면 마르가리타와 크게 닮지 않았지만, 성격이나 성향이 비슷했다.

‘그럼 황성에서도 용납해 줄 수 있겠지?’

이강은 7년 전의 철없는 왕족과는 달랐다.

형을 대리해 왕실외교를 맡으면서 국가의 중대사를 알게 되었고, 여러 고위직과 교분을 맺게 되었다.

자신이 주로 무언가를 얻어 내는 쪽이었지만, 반대로 은밀히 접촉을 시도하는 자들도 있었고 그럴듯한 제안을 해 온 자들도 있었다.

물론 이강은 어떤 제안이든 받아들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걱정되는 건 황제나 대신들이 자신을 오해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비밀리에 외교를 한다는 건 황제와 정부 핵심인사나 아는 사실이었고, 세간에서는 놀고먹으려고 해외를 떠도는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외국 정부와 접촉한다는 소문이 퍼진다?’

압도적인 명망으로 아버지 대군주와 동생 왕태자를 몰아내고 왕좌에 오른 이선이었다.

황제의 충성파들이 이강을 제거해야 한다고 나설지도 몰랐다.

영일동맹 체결 후에는, 서양에 체류하는 자신에게 정말로 의심이 화살이 쏟아질 수 있었다.

물론 이강에게 대임을 맡긴 건 이선 본인이었지만, 왕좌에 오른 후에 혈통 상의 경쟁자를 의심하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늘 있는 일이었다.

‘형님은 그럴 사람이 아닐지라도, 나를 음해하는 무리는 언제든지 있을 수 있지.’

여자나 쫓아다니는 한량이라는 평판이 오히려 나았다.

마침 에밀리가 왕실이나 고위 귀족이 아니라 한국과 관계가 있는 미국 선교사 가정이라는 점도 적당했다.

‘에밀리야 아름답고 순수한 여성이라 할지라도, 그 부친의 속내는 어떨까?’

북장로교 선교사 피터 브라운은 오하이오 출신으로, 역시 오하이오 출신 북장로교 소속으로 조선에 왔던 알렌과 가까운 사이였다.

알렌이 조선 왕실과의 친분으로 성공했던 것처럼, 브라운도 이강을 통해 왕실과 접촉해서 친분을 얻으려는 것일 가능성이 충분했다.

하지만 그 정도면 오히려 동기가 현실적이라, 황성에서도 그럴듯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형님, 저는 결코 권력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강에게는 형에게 어필하기 위한, 나름의 생존전략이었다.

* * *

"또 여자 문제냐? 이젠 놀랍지도 않군."

주미 공사관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이선은, 처음에는 황당해했다.

"보스턴 선데이 포스트? 이거 완전히 황색언론이잖아. 보스턴이면 야구나 보도할 것이지. 월드시리즈 첫 우승인데."

1903년 10월, 미국에서 최초의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가 개최되었다. 아메리칸리그의 보스턴 아메리칸스(레드삭스의 전신)가 내셔널리그의 피츠버그 파이리츠를 꺾고 첫 우승팀이 되었다.

‘내가 그렇게 MLB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월드시리즈 초대 우승팀이 보스턴이라는 거랑 1908년에 시카고 컵스가 우승한 건 안다.’

이선은 미국 대리인을 통해 보스턴 우승에 판돈을 걸었다. 대리인은 ‘뭘 이런 것까지 신경 쓰냐’는 반응이었지만, 진짜로 보스턴이 우승하는 걸 보고 놀랐다.

고부가 산업에서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이선이 예측하는 건 다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대리인은 새삼 놀라서 더 이상 이선의 예측에 토를 달지 않았다.

"아니, 얘는 뭐 이런 고민을 하고 있어."

제국익문사 미국 지부로부터 보고받은 후, 이선은 이강의 속내를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족의 처지라는 게 딱하기 짝이 없군. 늘 그래 왔다지만, 내가 바꿔 보려고 자유롭게 살라고 한 건데…….’

왕태자에서 물러나 순친왕이 된 이척도, 영친왕 이영도 혹시나 구설수에 오를까 봐 납작 엎드려 있었다.

그나마 자유로운 게 이강이었는데, 그조차도 형이자 황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으음……. 뭐, 이제 괜찮겠지.’

한때 주한 외교가에는, 황제가 황실 여성 주치의 마르가리타 얀코프스카와 이성 관계라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을 부담스럽게 여긴 마르가리타는 황실 주치의에서 사임하고, 황성을 떠나 한동안 사촌오빠 얀코프스키의 함경북도 청진 목장에 머물렀다.

황후의 요청을 받아 마르가리타는 복귀하긴 했지만, 황성이 아니라 평양 흥경궁의 의료진으로 머물렀다.

당사자가 안 보이니 소문은 점차 수면 아래로 내려갔고, 이강의 연애 루머가 터지면서 호사가들의 관심은 그쪽에 쏠렸다.

"연애는 사적인 문제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이선은 이강에게 전보를 보냈다.

7년 전과 비교하면 한껏 관대해진 입장이었다.

황권이 튼튼하고, 후계자가 태어나 성장하고 있는 지금으로선 오히려 아우에게 관대할 수 있었다.

황제인 자신이나 황위를 계승할 황자는 입장이 다르지만, 이강은 경우가 달랐다.

‘이렇게 해서 미국인들의 관심이 한국에 쏠리는 건, 사양할 이유가 없지.’

이선은 근본적으로 정치적 인간이었다. 여론을 중시하는 미국 사회에서, 이강의 연애 문제로 한국에 대한 관심이 올라간다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다.

「비밀 전문. 발신 워싱턴 주미 일본 공사관, 수신 도쿄 외무성.

한국 공사관은 의친왕 이강의 연애 문제로 혼란스러움. 의친왕이 미국에 나타나기 전까지 한국 공사관은 미국 정부와 활발히 접촉하면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있었으나, 지금은 의친왕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음.

의친왕의 소문이 미국 사회에 한국에 대한 친근감을 부여한 건 사실이나, 외교적 가치는 전혀 없어 보임.

계속 주시하겠음.

주미 특명전권공사 가네코 겐타로」

일본은 한국의 대미 접근을 견제했고, 일본 공사 가네코는 루스벨트 대통령을 수차례 접견하여 공작을 벌였다.

일본과 한국은 서로 치열한 첩보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강의 등장 이후 한국 공사관은 쓸데없는 일에 여력을 다 빼고 있는 느낌이었다.

"저 의친왕이란 왕족이 한국의 대미 외교를 방해하니, 오히려 일본에 큰 도움이 되는군."

"한제(韓帝)의 속 좀 꽤 썩이겠습니다, 하하하."

한국 공사관 일원들을 은밀히 감시하던 일본의 첩보망은 모두 이강에게 집중하였다.

특히 주재무관 노백린 참령은 한동안 일본의 주목을 받고 있었는데, 의친왕 연애 사건 이후에는 자연히 소홀해졌다.

1903년 12월 중순.

겨울의 강한 바람을 뚫고, 노백린은 워싱턴을 떠나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한 시골 마을을 향해 가고 있었다. 기차를 여러 번 갈아 타고, 다시 기선을 타는 복잡한 일정이었다.

노스캐롤라이나주 키티호크(Kitty Hawk)는 대서양에 접해 있는 황량한 지역으로, 미국인도 찾지 않는 이곳을 동양인이 일부러 방문하기에는,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작은 마을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던 실험이 진행 중이었다.

미국의 역사, 아니 세계의 역사를 바꿀 세기의 실험이었다.

- 30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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