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350화 (349/812)

31화 대양의 꿈

서기 1904년 1월 1일의 해가 떠올랐다.

조선은 오랫동안 음력을 써 왔기에, 태양력을 쓰기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음에도 대한제국 사람들의 인식은 여전히 새해라는 느낌이 와닿지 않았다.

원단(元旦, 설날) 명절 역시 여전히 음력 정월 초하루에 이뤄졌지만, 정부는 공식적으로 양력 1월 1일을 새해의 첫날로 간주했다.

광무 8년 새해를 맞이한 이선의 기분은 특별했다.

‘역사대로라면 불과 한 달 뒤에 러일전쟁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럴 염려는 덜어도 되겠지.’

실제 역사에서는 1904년 2월에 일본의 기습으로 러일전쟁이 발발한다. 일본은 개전 하루 만에 인천을 점령하고 경인선 기차를 타고 서울에 입성, 한반도를 군사적 점령하에 두기 시작했다. 대한제국 입장에서는 마지막 희망도 무너지고, 망국의 길에 접어들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선의 대한제국은 달랐다.

10만의 근대적 상비군, 20만의 예비군을 보유한 대한제국은 결코 만만한 나라는 아니었다.

‘국제 정세도 실제보단 훨씬 안정적이고. 다만 영국과 러시아 간의 그레이트 게임은 내가 어쩔 수 없는 영역이라 쳐도, 러시아와 일본 간의 분쟁은 조절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일본이 북수남진과 해주육종을 택하고, 이토-사이온지 입헌정우회 계파가 군부를 적절히 통제하고 있는 상황이라, 러일 간의 갈등 요소는 확연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영일동맹 체결, 러시아의 봉천 재점령과 만주 철군 문제, 고조되는 일본의 반러감정, 영국의 티베트 침공이 잇달아 맞물리면서 동아시아의 긴장도는 전년에 비해 확연히 올라간 상태였다.

육군만큼은 아니어도, 일본 해군 역시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주적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했다.

일본은 10년간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여 1905년까지 전함 8척과 장갑순양함 8척을 완성하는 8·8함대 계획을 추진 중이었다.

1903년 시점에서 전함 6척, 장갑순양함 6척, 방호순양함 12척, 구축함 23척, 어뢰정 63척을 보유한 일본 해군은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전력을 능가했다.

러시아 역시 1905년을 건함계획의 기한으로 삼아, 1903년 시점에서 전함 6척, 장갑순양함 3척, 방호순양함 6척을 태평양 함대에 배치했고, 영일동맹이 체결되자 발트 함대에서 추가로 군함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계획대로라면 러시아 태평양 함대는 1905년에 전함 10척, 순양함 17척, 구축함 33척을 보유할 계획이었다.

태평양 함대의 전력 강화에 두려움을 느낀 일본은 계획을 앞당겨, 얼마 전 최신예 장갑순양함 2척을 추가로 구매했다. 영국에서 건조 중인 전함 2척도 최대한 빨리 인수할 계획이었다.

동아시아 해역에서 양국의 해군력 급증은 상호 간의 불신과 공포가 점차 임계점에 달해 가고 있다는 의미였다.

‘내년까지 10개년 계획이 완성되면 일본 해군도 러시아의 전력이 더 증대되기 전에 한판 붙으려고 하는 거 아닌가?’

대한제국으로서는 건함경쟁에 뛰어들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건함이란 건 막대한 비용을 감내해야 했고, 한국이 선택한 육군력 증대에 군비를 쏟아붓는 입장에서는, 미친 듯이 해군력을 증대하고 있는 일본과 경쟁할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드레드노트급 전함이 나오면 원점에서 다시 출발해야 하잖아. 비행기와 잠수함이 본격적으로 사용되는 시점에서는 비대칭 전략을 구사할 수 있겠지.’

결국, 대한제국의 해상 정책은 극단적인 방어 전략이었다. 소수의 빠른 순양함과 어뢰정을 배치하여 연안을 방비하고, 요소에 해안포를 배치하며, 유사시에 기뢰를 대량으로 항구에 부설하여 접안을 막는다.

삼면이 바다인 나라로서는 굉장히 소극적인 전략이었지만, 현재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는 육군과 달리, 대한제국 해군은 여전히 태동 단계였다.

해군도 국정의 우선순위에서 자신들이 밀리고 있다는 걸 이해했다.

육군이 일본 육군을 주적으로 상정하고 있다지만 근래에는 만주에 주둔하는 러시아 육군에 더 위협을 느끼고 있어 군비를 계속 증대했다.

주변국의 건함경쟁을 구경만 하고 있는 해군은, 육군의 증대를 부러움과 질시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대한 해군은 자랑스러운 충무공의 후예!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

대한제국 남해안 진해만은 천해의 요항(要港)으로, 주변국이 모두 해군기지로 탐내는 곳이었다. 진해만 조차를 희망하는 러시아와 일본의 요구는 대한제국 정부가 단호히 거절했다.

광무 3년, 인천에 총사령부를 둔 대한제국 해군의 기지가 진해만과 옛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진남군(鎭南郡, 통영)에 새로 설립되었다.

대한제국 해군의 규모는 주변국과 비교하면 작았지만, 해양방위의 일념은 다르지 않았다.

이 무렵, 남해안에 부임하는 해군 장교들은 한산도에 들려 충무공 이순신의 충렬사에 참배하는 관례가 생겼다.

충무공 숭배는 순국 300주기(週忌)였던 1898년 이후 전국민적으로 확대되었고, 근본을 이순신에서 찾는 해군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더욱이 남해경비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이규풍(李奎豊) 정령은 바로 충무공 이순신의 10대손이었다.

‘충무공의 후예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도록, 멸사봉공과 충군애국하리라.’

이규풍은 위대한 조상의 위패를 보며 새삼 전율을 느꼈다.

유교적 전통은 수군을 천시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충무공 이래 대대로 수군통제사를 배출한 덕수 이씨가문은 달랐다.

이규풍 본인만 해도 부친이 군수를 지낸 부유한 양반가 출신으로, 그는 이미 1882년 문과에 급제한 신분이었음에도 신생 해군을 선택했다.

충무공의 후예로서 조국의 바다를 지키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당장 대한제국 해군이 처한 위치는 엄혹했다.

대한제국 경상남도 마산부 진해만.

군함 양만춘과 함께 입항한 이규풍을 향해, 러시아 해군이 예포를 발사했다.

"러시아 해군에서 환영 인사가 왔습니다."

"고맙긴 하지만, 여기는 대한의 땅인데 환영을 하려면 우리가 해야지."

진해만에는 러시아 태평양 함대 분함대가 겨울철에 일시적으로 월동을 위해 기항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겨울철에 얼어붙기 때문에 부동항이라 할 수 없었고, 군함도 마찬가지로 겨울이 되면 다른 지역으로 피한을 가야 했다.

러시아 태평양 함대는 오랫동안 나가사키를 월동지로 삼았다. 근래 들어 점점 러일관계가 악화되면서 일본이 월동지 제공을 거부했고, 1898년 러시아가 여순을 조차하면서, 태평양 함대의 모항은 부동항인 여순으로 변경되었다.

여전히 블라디보스토크에는 분함대에 소속된 장갑순양함 류리크 이하 4척의 순양함이 배치되었는데, 이들은 겨울철에도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동해안을 순시했다.

러시아는 예전부터 진해만을 해군기지로 사용하게 해 달라고 요청해왔다. 블라디보스토크와 여순의 중간 지점으로 진해만은 최상의 위치였다.

하지만 이는 당연하게도, 일본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러일 간의 전쟁을 원치 않는 대한제국으로선, 러시아의 거듭된 요청에도 기지 제공을 허락하지 않았다.

"분함대가 겨울에라도 머무르게 해 주십시오. 이는 귀국의 방어에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1903년, 영일동맹 체결 직후 대한제국이 러시아에 은밀히 독립보장을 받으면서, 다시금 요청을 받았다.

일본을 가상적국으로 여기는 대한제국 정부도 일본의 해군력 증대에 두려움을 품고 있었고, 결국 받아들였다.

단, 조건은 있었다. 분함대에 속한 순양함 4척에게만, 동계 기간 11월에서 2월까지만 한정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당연히 반발했지만, 이선은 선례를 쫓았다.

"일본 역시 오랫동안 나가사키를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월동지로 제공하지 않았소? 일본과 마찬가지로, 동절기에 한하여 오직 월동지로 제공할 뿐이오. 진해만은 대한제국의 해군기지이니, 결코 타국 해군의 영구 주둔은 없을 것이오."

선례와 명분은 충분했으나, 러시아 공포증에 시달리는 일본은 반발을 멈추지 않았다.

"만약 진해만에 러시아 함대가 주둔한다면, 일본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아닐 수가 없소! 이는 개전 사유가 되고 말 겁니다!"

결국 대한제국 정부는 태평양 함대의 진해만 동절기 사용을 1904년 2월까지만 한정한다는 발표를 하게 되었다.

"결코 이웃나라에 대한 위협적인 조치가 아니며, 대한국은 동양의 평화를 원한다."

일본은 성의 있는 조치로 기쁘게 받아들였다.

문제는 러시아였다.

이선은 니콜라이 2세에게 친서를 보내 양해를 구했다. 차르는 가볍게 받아들였지만, 러시아 해군 지휘부는 불쾌하게 여겼다.

러시아와 일본의 경쟁 사이에서, 대한제국에 점차 선택의 폭이 좁아지고 있었다.

마침내 대한제국도 최소한의 해군력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전함은 아예 없고, 러시아로부터 인수한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급 구식 장갑순양함 2척과 포함 양무호를 새로 개장한 방호순양함 1척, 구축함 5척, 어뢰정 20여 척을 보유한 해군은, 신예 함선 취역을 위해 정부에 거듭 청원했다.

"주변국의 건함경쟁이 더 치열해지고, 대한의 대외무역도 크게 성장하고 있는데, 신예 순양함이 한 척이라도 있어야 해방(海防) 함대를 구성하지 않겠습니까?"

군무대신 윤웅렬은 육군 출신이지만, 주변국의 건함경쟁에 위협을 느끼고 해군 증대의 필요성을 느꼈다.

해군력 확대에 극도로 소극적이었던 박정양 내각과 달리, 김옥균 내각은 최신 순양함 구매를 결정했다.

"대한도 신예 순양함 한 척 정도는 있어도 된다고 봅니다."

"좋소. 예산에 포함 시킵시다. 조건만 맞으면 즉시 집행하고."

건함경쟁에 회의적인 이선도 신속한 군함의 필요성은 느꼈으므로, 순양함 구매가 결정됐다.

의화단 전쟁 이후 청나라로부터 받은 배상금의 일부가 순양함 구매로 전용되었다.

여러 조건을 따져 본 결과, 이탈리아의 안살도(Ansaldo)사가 건조한 주세페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급 장갑순양함이 최종후보로 떠올랐다.

가리발디급은 총 11척이 건조되어 3척만 이탈리아 해군이 운용하고, 6척은 아르헨티나에, 2척은 스페인에 발주되었다.

아르헨티나가 경제적 문제로 최신 2척의 인도를 포기하자, 일본이 재빨리 구매하여 순양함 가스가(春日)와 닛신(日進)으로 명명했다.

미서전쟁 이후 해군력을 사실상 포기한 스페인도 크리스트발 콜론(Cristobal Colon)의 2번함 ‘페드로 데 아라곤(Pedro de Aragon)’의 인도를 포기했다.

이탈리아는 일본에 페드로 데 아라곤의 판매도 제안했지만, 8·8 함대의 장갑순양함 8척을 채우고 전함 2척의 인수를 기다리는 일본은 거절했다.

결국 이탈리아는 주한 공사관 대리공사 카를로 로세티(Carlo Rossetti) 해군 대위를 통해 한국에 제안을 했다.

"일본이 가리발디급 순양함 2척을 구매했는데, 한국도 동형의 군함을 구매할 생각이 없으신지? 현재 세계에서 손꼽히는 순양함입니다."

배수량 7,750톤, 최대속력 20노트, 포탑 2개, 10인치 주포, 8인치 부포, 6인치 속사포 14문, 3인치 속사포 10문, 4.7인치 기관포 6문, 어뢰 발사관 4문, 함수 충각을 보유한 가리발디급 순양함은 속도와 무장을 모두 갖춘 당대 최신 순양함이었다.

"좋긴 한데, 예산이 맞아야 사죠. 얼마를 생각합니까?"

"일본은 2척을 76만 파운드에 구매했습니다. 38만 파운드를 다 받을 생각은 없고, 35만 파운드를 제안합니다."

"35만 파운드면 너무 비싼데. 예산도 없고, 딱히 군함이 그렇게 필요한 것도 아니고. 사양하겠소."

‘패닉 바이(Panic buy)’를 한 일본과 달리, 한국은 구태여 비싼 돈을 주고 군함을 살 이유가 없었다.

원래 인도를 예정했던 스페인이 포기하고, 남미에서 건함경쟁을 벌이던 아르헨티나와 칠레도, 동아시아에서 건함경쟁을 벌이던 일본과 러시아도 모두 페드로 데 아라곤의 구매를 포기했다.

서양 열강은 굳이 이탈리아에서 군함을 살 필요가 없었으니, 결국 순양함 구매에 약간이라도 관심을 보이는 건 한국뿐이었다.

이탈리아 해군도 인도 계획에 없었던 상황이라, 이탈리아는 한국에 새로운 제안을 했다.

"최대한 사정을 봐드리죠. 얼마까지 협상 가능합니까?"

"25만 파운드."

"그래도 30만은……."

"25만 파운드도 500만 원이란 말이오. 그게 우리 정부가 정한 최대치요."

"…… 그럼 25만 파운드로."

"좋소! 단, 5년 분할로 합시다. 특별 예산이 의회를 통과하지 못해서, 황실이 특별히 내탕금을 풀기로 했는데 시일이 필요합니다. 이 군함이 들어와 좋은 성능을 발휘한다면, 이탈리아 산업에 대한 신뢰가 높아질 것이고, 앞으로도 양국 관계는 좋겠지요."

"후, 그렇게 하십시오."

대한제국은 앞으로도 이탈리아가 군함의 구매처가 되리라는 암시를 주었다. 결국 이탈리아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1904년 1월, 주세페 가리발디급 장갑순양함 페드로 데 아라곤은 ‘광개토왕(廣開土王)’으로 명명되어 대한제국 해군에 판매되었다.

‘을지문덕’으로 명명된 드미트리 돈스코이, ‘양만춘’으로 명명된 블라디미르 모노마흐는 완공한지 20년 된 순양함이었지만, 광개토왕은 1903년에 완공한 최신 장갑순양함이었다.

"만세! 마침내 우리도 신예 순양함을 보유하게 되었다!"

"대한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해군은 일제히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마침내 그들이 열망하던 최신 군함을 보유하게 되었으니 그럴 법도 했다.

육군이 프로이센식으로 교육받았다면, 해군은 역시 영국식이었다. 초창기 통제영 학당(해군사관학교)의 교관들은 영국 해군 장교들이었고, 해군 지휘부도 영국과 일본 유학파로 구성되었다.

영국에서 유학한 참령 신순성(愼順晟)과 기간 요원들이 이탈리아 제노바로 급파되어 인도를 준비했다.

이들은 모두 언젠가 태극기를 단 대한의 군함이 연안을 넘어 대양으로 나아갈 날을 꿈꾸며 신생 해군에 열정을 바쳤다.

이 꿈이 소박하나마, 마침내 이뤄졌다.

광개토왕함은, 지중해와 인도양을 지나 한국으로 향하게 될 터였다.

- 32화에 계속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