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대륙의 꿈
"어쩌니저쩌니해도, 대한국은 대륙 국가다."
"그렇다. 반도와 대륙, 한국과 만주는 분리될 수 없는 운명이다."
신흥 대한제국의 정치가, 군인, 상인, 지식인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했다.
독립전쟁과 북벌전쟁의 승전으로 한국의 강역(疆域)은 약 450년 만에 압록강-두만강을 넘어 남만주에 이르렀다.
이제 그들의 시야는 한반도 독립의 문제가 아니라, 만주 문제로 나아갔다. 북방 ‘고토’이자 ‘신영토’를 어떻게 관리하며, 쇠락해 가는 청조를 대신해 만주로 나아 갈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현실적으로 대한이 그럴 국력이 되는가? 무엇보다 중요한 건 국력의 신장이다. 자주독립과 문명개화를 완수하고, 국부(國富)를 창출하고, 국방을 튼튼히 하며, 국민을 계몽시키는 게 급선무이다. 대륙으로의 진출은 그 후에 해도 늦지 않다."
"쇠락했다 할지라도 청국은 대국이며, 인구는 4억에 이른다. 일본이 대륙 침략을 포기했다는 증거도 없는데, 북방에만 시선을 고정시킬 수는 없다."
"만주를 재점령한 러시아는 어찌할 것인가? 러시아는 대한의 우방이다. 일단 만주 문제는 청국과 열강이 해결하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
황제 이선, 총리 김옥균 이하 개화당 정부 등 당국자들은 현실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광무 8년, 1904년에 이르자 여론은 더욱 강경해지고 있었다.
"역사적 연원이 있는 대한이라면 모를까, 도대체 러시아가 왜 심양(봉천)을 점령해야 한단 말인가? 심양은 지난 전쟁에서 대황제 폐하께옵서 친정하시어 북벌을 완수한 역사적인 장소다. 그럼에도 심양은 만청의 성지이기에, 대황제 폐하의 성덕으로 만청에 반환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러시아가 약속을 깨고 심양을 점령한단 말인가!"
"러시아인에게 만주에 대한 어떤 권리가 있는가? 아니다. 힘이 강하다는 게 그들의 권리이다. 아무리 힘이 곧 정의라 외치는 시대이지만, 이는 명백한 불의이다. 우리는 단호히 불의를 거부해야 한다."
"서양 제국주의자들은 동양을 분할하려고 획책한다. 만주 문제는 작금 동양의 뇌관이다. 동포여, 결코 좌시해서는 안 된다!"
"서양에 맞서는 길은 동양의 연대밖에 없다. 한·청·일 삼국이 연대하여, 서양 제국주의에 맞서야 한다."
러시아의 봉천 재점령은 북경만 격노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황성과 도쿄도 분노하게 만들었다.
시모노세키 조약의 요동반도 할양이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에 의해 좌절되었다고 생각하는 일본의 여론, 러시아의 봉천 재점령이 만주에 대한 권리를 침해받았다고 생각하는 한국의 여론은 강경으로 치달았다.
당시 유행하던 민족주의와 아시아주의도 기승을 부림에 따라, 러시아를 더이상 우방이 아니라 잠재적인 적으로 여기는 여론이 상승했다.
사이온지의 입헌정우회 내각, 김옥균의 입헌개화당 내각 모두 현실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입장이었으므로, 무책임한 여론에 동조하지 않았다.
"외교적 수완을 활용해 만주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한다."
하지만 아무리 실질적으로 정부 운영이 독재적이라 할지라도, 명목상 대의제 입헌 국가에서 여론을 무조건 무시만 할 수는 없었다.
정부로서는 난처했다.
러시아가 은밀히 제안한 남만주 공동 관리 문제나, 독립 보장 조약과 전시 지원 계획을 공개하면 여론이 잠잠해지긴 하겠지만, 주변국의 반발을 각오하고 러시아와 맺은 밀약을 섣불리 공개할 수는 없었다.
"물론 여론이라는 건 조종하기 나름입니다. 대한국 헌법에 언론과 집회 결사의 자유가 있다고는 하지만, 제한할 방법도 많습니다. 신문 정간, 보도 지침, 집회 금지, 관제 시위, 경찰력 동원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요."
국내 행정과 치안을 총괄하는 내무대신 박영효가 여론에 대해 냉소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강경한 여론을 활용해, 러시아의 만주 철군에 압박을 가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러시아가 주변국 여론에 대응하여 온건한 반응을 보일 나라라면, 애초에 만주 점령을 단행하지도 않았을 거요. 열강이 압박한다면 모를까."
총리 김옥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필 그가 취임하자마자 받아든 러시아의 만주 점령이라는 문제로 인해 골치가 아플 지경이었다.
"열강의 압박으로 철군하기에는, 강대국의 위신 문제가 달려 있다 생각하오. 영국이 일본과 청국의 배후에 있다고 생각하는 러시아 군부가 만주에서 순순히 물러날 리가 없지. 정부 내에서는 온건한 입장이 주류를 이룬다고 파악하고 있소이다마는, 결국 전제군주국인 러시아에서 결단은 황제의 몫이라."
이선도 골치 아프긴 매한가지였다.
러시아는 은밀히 한국 공사관에 남만주 공동 관리를 제안했다가, 곧바로 이를 뒤집고 백지화시켰다.
한국 독립 보장을 해 줬다가, 얼마 안 있어 만주 재점령을 단행해 분란의 씨앗을 만들었다.
‘도대체 뭐하자는 거야? 한국을 우습게 여긴다면 만주 문제에 끼지 말라고 하든가. 동양에 믿을 만한 나라가 한국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면, 아예 화끈하게 우리를 밀어 주고 만주 문제를 함께 해결하든가.’
예전 같았으면 이선의 친서에 귀를 기울이던 니콜라이였지만, 근래 들어 조언이 잘 통하지 않았다.
물론 여전히 니콜라이가 이선에 호의적이라는 건, 독립 보장에 응하고 진해만 철수 문제도 동의했다는 점에서 볼 수 있듯이 분명했다.
하지만 강경책과 온건책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차르가 대체 뭘 원하는지 파악이 안 됐다.
차르가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만주 점령은 누가 뭐라 하든 지속할 태도였다.
"저 거대한 러시아가 만주까지 병합하면, 대체 대한의 앞날은 어떻게 되나?"
"예전에 청조를 섬겼듯이 러시아를 상국으로 섬겨야 할지도 모르지."
"뭐? 말 같잖은 소리! 러시아를 만주에서 몰아내야 해!"
"다른 곳은 몰라도, 남만주만큼은 반드시 대한이 장악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영원히 약소국으로 남고 말겠지."
대한제국 군부, 육군의 소장파 장교들은 강력한 팽창정책 지지자였다.
전우들이 피를 흘려 가며 싸운 독립전쟁과 북벌전쟁은 만주 진출을 향한 길이었고, 대륙을 향한 꿈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을 수 없었다.
"현실적으로 대한이 만주를 병합하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완충지대로 삼아야 한다. 쇠약한 청조가 만주를 지배하는 게 낫지, 강대한 러시아가 웅거하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군부의 두뇌, 참모총장 박유굉과 참모국 장교들도 러시아의 만주 지배를 용인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러시아가 적으로 돌변하게 될 상황을 극도로 우려했다. 상비군 110만, 무제한으로 보이는 예비 병력을 보유한 러시아는 공포 그 자체였다.
만약 ‘러시아 증기 롤러’가 만주에 들이닥친다면, 한국은 상대조차 할 수 없었다.
이들의 시선에서, 저 강대한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무너진다든가 하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청국령 만주와 국경을 접한 북방 신영토, 요동도와 연길도의 주민과 군인들은 더욱 강경했다.
저 멀리 떨어져 있는 황성의 엘리트들이 국익이나 안보, 역사성 같은 문제로 만주를 논의한다면, 이들에게는 실제로 살아 가고 있는 터전이었다.
"만주가 조상의 고토라는 건 차치해도, 우리의 새로운 터전이라는 건 분명하오."
"여기까지 와서 새로운 삶을 추구하고 있는데, 절대로 빼앗길 순 없지."
북방 이주는 문자 그대로 ‘식민(植民)’, 인구의 이식이었다.
먹고 살기 어려운 본토를 떠나 만주를 개척하기 위해 떠난 농민들이건, 종교적 이상향을 찾아 집단 이주를 단행한 천도교(동학)신자들이건, 북방에서 일확천금을 노리고 찾아온 모험가들이건, 이들에게 대륙은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공간이었다.
만주는 살아가는 현실이었고,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한 땅이었다.
신영토가 과거에 청나라 땅이었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차피 봉금령이랍시고 지난 수백 년간 만주를 방기한 건 청조 아니었나? 진취적인 한민족이 고토를 찾아 만주를 개발하는 건 당연하다!"
"애초에 만주에 살았던 건 만주인이지, 바다 건너에서 온 중국인이 아니다! 대한의 영토에 넘어오지 마라!"
요동도와 연길도를 관리하는 군인과 관료들은 더 노골적이었다. 민정으로 이양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치안의 위협이 존재하는 지역 특성상 군대의 입김이 강한 신영토였다.
"마적놈들, 모조리 쓸어 버려!"
"잘한다, 우리 대한국군!"
의화단 전쟁 이후 만주에 급증한 마적들은 이주민들에게 증오의 대상이었다.
마적들은 정착촌을 습격하고, 약탈하고, 인명을 해쳤다.
마적을 토벌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군대가 환영받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연길도의 5사단, 요동도의 6사단, 자치령 의용군은 이주민들에게 가장 신뢰받는 집단이었다.
"만주는 원래 대청국 영토란 말이다! 침략자는 네놈들이지, 왜 우리가 범죄자냐?"
대개 청조의 해산 군인이나 의화단 출신인 마적들은 강한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의화단 전쟁 이후 흑룡강성은 사실상 러시아의 지배에 들어갔고, 길림성의 행정은 와해 됐고, 그나마 행정력을 유지하던 봉천성조차 러시아군의 진주 이후 군사력을 제한받았다.
마적들이 들끓는 환경이 조성됐고, 이들은 한국인 정착촌을 습격, 중국인들을 착취하는 것으로 세력을 유지했다.
"북방 치안 숙정(肅正) 계획을 실시한다. 요동도, 연길도, 자치령을 침입하는 모든 마적을 뿌리 뽑는다!"
5사단, 6사단, 의용군은 만주의 맹렬한 겨울 추위에도 불구하고 군사 활동에 나섰다.
토벌 과정에서 청국령을 침입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마적의 본거지가 청국령에 있는데, 저들이 내버려 두고 있으니 당연한 일 아닌가?"
문제는 1903년 11월 이후 러시아가 만주 행정 관리에 나섰다는 점이었다.
"한국군은 결코 국경을 넘어서는 안 된다. 당분간 봉천과 길림의 치안은 러시아군이 담당한다. 청국령의 마적은 우리가 토벌할 터이니 한국군은 돌아가라."
러시아와 갈등을 빚지 말라는 상부의 명령으로 한국군은 돌아서야 했다.
"러시아 놈들, 마적이 날뛰게 내버려 두어 만주 점령을 정당화하려는 거 아닌가?"
"일본이 전쟁을 도발하려고 마적을 조종한다는 소문도 있다던데."
"어느 쪽이든 전방에서 구르는 우리 입장에서는 짜증 나는 일이군."
전방의 군인들이 내심 불만을 품고는 있어도, 중앙의 통제가 확고한 상황이라 불만이 표면으로 드러나진 않았다.
남만주 자치령은 현실적으로 대한제국이 파견한 고등판무관이 통치한다 할지라도, 명목상 청국 황제의 주권이 있었다.
한국인 인구가 압도적인 요동도 및 연길도와 달리, 자치령의 인구 구조는 한국인이 압도적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
러시아의 봉천 재점령 이후 자치령으로 계속 중국인이 몰려들었고, 러시아군과 코미사르도 뒤따라 들어왔다.
"장군, 러시아가 철수하면 모든 게 계획대로 된다 하지 않았소? 이제 나는 더이상 건강이 못 버티겠소. 정부에 사임을 요청했으니 후임자 인수인계를 기다리겠소."
고등판무관 이재순은 왕족 출신이라 도저히 만주의 추위도 견디지 못했는데, 여기에 혼란스러운 상황까지 더해지니 건강이 남아나질 못했다. 이재순은 정부에 사임을 거듭 요청했다.
의용군 사령관 이범윤은 러시아의 봉천 재점령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가, 갑작스러운 상황 전개에 본인도 당황하고 있었다.
분명히 주러 공사로 재직 중인 형 이범진도 러시아가 만주 문제를 양보하리라 예상하지 않았던가.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청국령은 그렇다치고, 왜 러시아가 자치령에 대해서도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지?"
"그냥 대한에 병합하면 안 되는 건가?"
자치령의 의용군인 ‘북진 부대’는 구 만인대 출신과 현지 둔전병이 주류를 이뤘다. 특수한 환경으로 인해 북진 부대는 둔전과 방위를 동시에 맡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의 상황 전개는 도대체 누가 자치령을 통치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범윤은 황성에 해결책을 요청했다.
"도처에 혼란이 가득합니다. 작금의 혼란상을 더이상 좌시할 수 없습니다. 훈령을 내려 주십시오."
보고를 받은 정부는 해결책을 골몰했다.
"계속 이 상황을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러시아와 담판을 지어서, 만주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논의해야 합니다."
"교섭을 시도해 봅시다."
‘결과가 어찌 되건, 확실히 담판은 지어야겠다.’ 이선도 대러 교섭을 승인했다.
‘결국, 국내의 혼란한 정치 문제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때문에라도, 러시아는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동양에서 손을 떼게 되어 있다. 일본과는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차분히 기다리면 되는데.’
역사가 바뀌었다 할지라도, 이선은 신해년(1911)과 1914년에 일어날 지 여부는 불확실해도 결국 중국 혁명과 1차 세계대전은 필연적으로 발생하리라 계산했다.
중국 혁명을 대비하여 러시아와 함께 만주·몽골, 티베트·신강 분리 문제를 조종하고, 1차 세계대전으로 러시아의 지배력이 후퇴할 때를 노려 동양 문제를 위임받는다.
그때까지 전쟁 없이 국력을 최대한 신장시킨다.
이게 이선의 차기 10년 계획이었는데, 첫 단추는 꿰는데 성공했지만 그 후로는 손발이 맞지 않고 있었다.
본인은 그러한 미래를 전망하고 있다 할지라도, 대부분의 사람에게 보이는 건 만주를 향한 러시아의 위협이었다.
이선은 정부와 민간을 막론하고 퍼져 있는 한국인들의 열망, 만주와 대륙을 향한 꿈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해결책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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