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352화 (351/812)

33화 동양의 발칸

만주 위기는 동아시아 문제의 뇌관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근본적으로는 만주 점령을 강행한 러시아와 소유주인 청나라 간의 문제였다. 하지만 만주의 역사적 연원을 주장하는 대한제국, 동양의 보호자를 자임하는 일본,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는 영국, 만주 문호 개방을 원하는 미국, 러시아를 지지하는 프랑스, 러시아의 동양 진출을 은근히 부추기는 독일이 얽히며 복잡한 이해관계가 형성되었다.

만주, 봉천성의 모처.

"형제들! 우리는 청조로부터 어떤 은혜도 입지 않았다. 오히려 지난 전쟁에서 목숨 바쳐 싸운 우리를 저버린 게 청조다. 우리가 만주에 녹림(綠林)을 형성한 건, 대청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였다. 그렇지 않은가?"

"옳소!"

"그러나 저 아라사 오랑캐가 대청을 업신여기고, 우리의 터전인 만주를 강점하기 시작했다. 저들은 사냥이 끝난 개를 삶아 죽이듯, 우리를 없애려고 한다. 녹림 형제들! 앉아서 죽겠는가, 분연히 일어나 싸워서 저들을 몰아내겠는가?"

장작림이 소집한 회합에 참석한 마적 두목들은 침묵했다.

애초에 말이 좋아 녹림이지, 마적이 대단한 대의로 뭉친 것도 아니었다. 군대는 해산됐고, 치안은 개판인 만주에서 전직 군인들이 할 만한 일은 마적이었다. 그나마 마적 두목들이 단련의 감투를 써서 청군의 일원이 됐다지만, 본질적으로 마적이라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러시아가 마적들을 키워 준 다음 만주 점령을 정당화해 이용하고 버리려는 건 사실이었지만, 강대한 러시아군에 맞서서 마적들이 덤비겠다는 건 자살행위였다.

"장 대장의 의기는 좋소. 과연 호걸이요. 하지만 봉천의 신군도 아라사군에게 총 한 방 쏘지 못하고 항복했는데, 대체 우리가 어떻게 싸운다는 거요?"

"그렇소. 아라사의 지원도 끊겼고, 봉천에서도 우리를 지원 못 해 주고 있는 상황이오. 총과 탄환은 대체 어떻게 보급할 거요?"

현실적인 지적에 장작림이 부하들에게 눈짓을 했다. 장작림의 부하들이 낑낑거리며 나른 짐의 정체는 소총이었다.

"무라타(村田) 22식 단기병총, 일본 기병 제식 소총이오."

"아니, 이걸 어떻게……."

일본군의 최신 제식소총은 1897년에 제작된 아리사카(有坂) 30식 소총이었지만, 1889년에 제작된 무라타 22식 소총의 성능도 시대에 아주 뒤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일본 육군 참모본부가 나를 돕고 있소."

"말인즉슨, 일본이 우리를 총알받이로 내밀겠다는 말이 아니오?"

"또한, 북양군도 은밀히 우리가 의거를 일으키길 바라고 있소. 갑오전쟁의 전우이자 북양대신인 장훈 장군이 내게 밀사를 보냈소이다."

장훈(張勳)은 삼국전쟁 당시 만주군 사령관 송경 휘하의 기병대장이었다. 역시 만주 기병대 소속이었던 장작림은 장훈의 휘하에 있었다.

의화단 전쟁 이후 광서제가 실권을 다시 잡으면서, 황제에게 변함없는 충직함을 보였던 장훈이 금위군 사령관을 거쳐 직례총독 겸 북양대신 서리로 임명됐다.

북양군의 총수가 된 장훈은 러시아의 만주 점령에 분개했고, 만주의 마적 총수로 성장하고 있는 장작림과 은밀히 접촉했다. 장훈은 장차 러시아와 일전을 벌일 각오를 보이고, ‘만주 수복’시 장작림에게 봉천군의 지휘권을 맡길 의사를 보였다. 마적 두목들에게도 모두 관직을 약속했다.

"북양군도 상대 못 하는 아라사군을 우리더러 상대하라고? 미친 짓이야!"

"우리가 북경에 그래야 할 의리라도 있나?"

일본의 지원에 이어 장훈의 밀서를 공개했음에도, 불만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장작림은 문득 총 한 자루를 빼 들더니, 천장을 향해 쏘았다.

탕!

총소리에 두목들이 움찔했다.

"물론 그래야 할 의리는 없지. 하지만 생각이란 걸 해 보시오. 이대로 아라사 지배가 지속되면 우리는 터전을 잃고 끝장이야. 거지꼴로 고향으로 돌아갈 텐가? 북경은 물론이고, 일본도 아라사랑 한판 붙으려는 용의가 있소. 설령 일본이 아라사를 몰아내도 만주를 먹지는 못해. 아라사도 없고, 조정의 지배력도 못 미치고, 무주공산인 만주의 지배권이 누구에게 떨어질까?"

나이 갓 서른, 야심만만한 장작림은 단순한 마적 두목이 아니었다. 그는 만주의 지배자를 꿈꾸고 있었다.

"다 좋은데, 불투명한 전망에 부하들 목숨을 걸 수는 없소."

"물론 도박에 판돈을 모두 걸 수는 없지. 우리가 할 일은 동청철도 주변에서 치고 빠지는 거요. 이제 우리는 마적이 아니라 거아 의용군이오. 군비는 일본이 부담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내가 여러분에게 바라는 건 용기 하나뿐이오."

장작림이 계획하는 건 기병을 이용한 유격전이었다.

대단한 성과를 올리는 게 목표가 아니라, 만주가 러시아의 통치력이 완전히 미치지 못하는 분쟁지역이라는 걸 세계에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주목을 받는 주역은 나, 장작림이 되리라.’

북경의 조정과 러시아의 만주 점령에 분개하는 혁명파는 물론이요, 열강의 주목도 받을 수 있었다.

일개 마적 두목 따위가 단숨에 세계사의 중심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적은 아라사만 있는 게 아니오. 아라사의 앞잡이 조선이 있잖소?"

"요새는 대청 국경까지 넘어 우리를 쓸어 버리겠다고 난리인데."

"걱정 마시오. 때가 되면 그들도 우리와 손을 잡게 될 날이 올 테니."

장작림의 호언장담에 마적들은 의아했다. 국경 너머 대한제국 기병대는 여태껏 마적들의 숙적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손을 잡는다니.

장작림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 *

황성, 원수부.

"참령 이동휘, 복귀를 신고합니다."

"부위 유동열, 복귀를 신고합니다."

지난 몇 달간, 겨울의 혹한을 뚫고 만주를 시찰한 이동휘와 유동열이 복귀했다.

육군 정보국뿐만 아니라, 군부의 핵심인 참모국 총장 박유굉이 직접 이들의 보고를 받았다. 사안의 심각성을 무겁게 여긴다는 의미였다.

"의화단의 난 이래 마적들을 키워 준 건 러시아 극동군이었습니다. 이들의 준동을 이용해 만주의 치안 부재를 명분으로 재점령을 감행한 것입니다. 점령 이후에는 토벌령을 내려 마적들을 섬멸하려 합니다. 다만 근래 준동하는 마적들의 배후에는 일본 우익단체 흑룡회가 있고, 흑룡회의 배후에는 일본 육군 참모본부가 있습니다."

"확실한가?"

냉철한 표정으로 묻는 박유굉을 보며, 이동휘는 순간 긴장했다. 박유굉은 일본 육사 출신으로, 대한제국 장교 중 일본 육군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소관은 확신합니다. 소관과 유 부위는 정보를 얻어 봉천의 염염서관이란 곳을 탐문한 바 있습니다. 명목상으로는 중국인이 운영하는 뒷골목 책방입니다만……."

박유굉이 눈짓으로 계속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중국인 점주로 위장한 이는 일본인, 그것도 장교입니다."

"호오, 그래서 일본군 장교와 마적의 관계는?"

"마적들을 선동하고 다니는 흑룡회 간부인 우치다 료헤이란 자가 있는데, 우치다의 봉천 거점이 염염서관입니다."

"점주가 장교라는 건 어떻게 확신하지?"

"중국어가 유창하긴 합니다만, 외국인이 쓰는 언어는 아무래도 억양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점주는 호복을 입고 있긴 했지만, 절도 있는 자세와 군인 특유의 걸음걸이가 남아 있었습니다. 군인, 그것도 고급장교로 여겨집니다. 대한의 장교가 아니라면 일본군 장교겠지요."

이동휘의 추측에 박유굉은 씩 웃으면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렇다면 그쪽도, 귀관이 상인으로 위장했지만 장교라는 걸 눈치챘겠군."

"아마도 그러리라 추정합니다."

"이 정도면 거의 다 알아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겠군. 그런데 왜 저들이 순순히 돌려보냈을까? 귀관들의 입을 막으려 하지 않았을까?"

"굳이 감출 이유가 없다고 봐서, 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은근히 우리가 저들에게 합류하길 바라는 게 아닐지……."

박유굉은 짚이는 바가 있었으나, 굳이 부하들에게 말하진 않았다.

"그다음에는 장작림이란 자와 접촉해 봤다고."

"예, 최근 떠오르는 마적의 실세입니다."

이동휘와 유동열은 인맥을 통해 장작림과 접촉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의 공식적인 신분은 상인이었지만, 장작림은 이미 누구와 만나는지 알고 있었다.

"일개 마적 두목에 불과합니다만, 수완과 능력이 만만치 않습니다. 기존의 마적들이 러시아와의 마찰로 위축된 틈을 타서, 봉천과 길림 일대의 마적들을 자신의 휘하로 끌어들였습니다. 봉천에서는 청군을 능가하는 실력자입니다."

"그래서, 그자가 뭘 원한다던가?"

"만주에서 러시아를 몰아내겠다고 호언장담하더군요. 북경과 일본이 자신을 지원하고 있으니, 대한도 자신을 지원해 달라고 합니다. 삼국이 연대하면 러시아를 만주에서 몰아낼 수 있다고."

"중국인들 허풍은 예로부터 잘 아는 바이지만, 이 장가란 놈의 허풍은 기가 찰 정도군."

박유굉은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허투루 들을 수는 없었다. 육군 정보국과 별개로, 그가 청취하는 정보가 있었다.

일본, 도쿄.

육군참모본부.

"하나다 소좌의 보고에 따르면, 만주 마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네."

육군참모차장 고다마 겐타로 중장은 얼마 전까지 대만총독 겸 육군대신이었다.

육군대신이 참모차장으로 부임한 건 타국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만큼 군부의 위상이 크다는 의미였다. 참모총장 오야마 이와오 원수가 군 원로 대우를 받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질적인 참모본부의 책임자는 고다마였다.

"그리고 한국도 접촉하고 있다. 저들 역시 만주 문제에 있어 방관자가 될 수는 없으니까."

"결국 만주가 분란의 씨앗이 될 겁니다."

일본 육군은 러시아와의 일전을 바라고 있었다.

고다마 본인은 대만 총독을 역임하며 북수남진론자가 됐지만, 그 자신이 육군 장성에 속한 이상 ‘육군의 총의’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명백히 해군과의 파워게임에서 밀리고 있는 육군에게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건 대륙에서의 전쟁뿐이었다.

만주에서 움직이고 있는 건 명목상 민간인인 우치다 료헤이와 흑룡회였지만, 실질적으로 ‘만주 의군 작전’을 책임지고 있는 건 하나다 나카노스케 예비역 소좌였다. 하나다는 참모본부 내의 중국통이었고, 예비역 신분으로 만주에서 암약하고 있었다.

이동휘와 유동열이 만난 게 바로 이 하나다였다.

"한국을 초전에 제압할 게 아니라면,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야 해."

"명하신 바와 같이 계속 공작을 벌이고 있습니다."

"음. 황제와 달리, 개화당 내각과 군부는 일본에 호의적이니까. 특히 한국 육군 상층부는……."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선 일본 정부와 별개로, 군부도 독자적인 공작을 벌이고 있었다.

"이대로 러시아의 만주 강점을 내버려 둘 수 있는가?"

"그럴 수야 없지."

과연 한국 군부는 러시아보다 일본에 호의적이었다.

군부 지휘부는 대개 1894년 삼국전쟁의 공훈으로 승진한 이들이었는데, 그들에게 있어 일본은 ‘독립전쟁의 전우’였다.

프로이센 육군을 모범으로 삼고 있는 한국 육군은, 뿌리를 따지면 일본 육군과 흡사했다. 둘은 모두 ‘프로이센의 제자들’이었다.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프로이센 전쟁대학을 이수한 참모총장 박유굉은 그 전형이라 할 수 있었다.

"황제 폐하, 신 원수부 참모국 총장 박유굉, 삼가 군무에 관해 아뢰옵고자 하옵니다."

"음. 보고하도록 하게."

황제 이선, 총리대신 김옥균, 내무대신 박영효, 외무대신 서광범, 군무대신 윤웅렬, 원수부 군무국 총장 백성기가 배석한 가운데, 박유굉의 군무 보고가 이어졌다.

"요컨대, 일본이 만주에서 분란을 조장하고 있다는 말이군."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엄밀히 말하면 러시아가 먼저 분란을 벌였다고 봐야 하지 않을련지……."

박유굉의 조심스러운 지적에 이선이 웃음을 흘렸다.

"세계 패권의 관점에서 보자면, 영국이 주도하는 질서에 러시아가 도전하고 있는 상황이지. 하지만 동양의 관점에서 보면 일본이 러시아가 주도하려는 질서에 도전하고 있네."

20세기 초의 세계 질서를 보면, 영국이 패권 세력이고 러시아와 독일이 이에 도전하는 수정주의(revisionism) 세력이었다.

동양의 수정주의 세력은 명백하게 일본이었다. 동양의 전통적인 패권 국가인 청국을 몰락시켰고, 러시아의 우위에 도전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이익과 팽창을 추구하는 한국도 소(小) 수정주의 세력이라 할 수 있었다.

"열강 입장에서 만주는 동양의 발칸 반도지. 쇠약해 가는 다민족제국 오스만이 청조와 유사하다면, 만주는 러시아가 남하정책을 추진하는 발칸이랄까. 발칸이 열강들이 충돌하는 유럽의 화약고라면, 만주는 동양의 화약고요. 그런데 화약고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군."

비스마르크가 익히 우려한 대로, ‘발칸에서의 바보짓’이 유럽의 화약고를 터트려 세계대전으로 확장된다면, 동양의 화약고인 만주에서 불씨가 당겨져 동양판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 있었다.

실제 역사처럼 러시아와 일본 만의 전쟁이 아니라, 얽히고설킨 동맹 관계에 따라 열강이 참여하는 ‘0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영일동맹과 노불동맹, 더 나아가 독일과 미국까지.

대한제국은 만주라는 화약고를 머리에 이고 있는 상황이니, 그야말로 화약고의 중심에 있었다.

살얼음판을 걷는 상황이었다.

- 34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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