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2월의 포성
1904년 2월 16일, 갑진년(甲辰年) 정월 초하루.
책력을 태양력으로 개정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민간에서는 음력 정월 초하루를 새해의 시작으로 여겼다.
공식적으로 양력을 사용하는 황실 역시, 원단(元旦) 기념은 이날에 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올해 설날은 행사 없이 넘어갔다.
"명헌태후전의 병환이 중하니, 올해 원단은 별도의 행사를 가지지 않는다."
헌종의 계비, 명헌태후(明憲太后) 홍씨의 병세가 점차 악화되고 있었다. 신정왕후 조씨(조대비) 사후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된 홍대비는 대한제국 선포 후 명헌의 존호를 받았다. 문조(효명세자)가 22세에 요절했지만 신정왕후는 83세까지 장수했듯, 헌종도 23세에 요절했지만 명헌태후도 어느덧 74세였다.
헌종 성황제는 종법상 태상황의 황형(皇兄)이자 이선의 황백부(皇伯父)였다. 헌종은 후계가 없었으므로 이선이 그 역할을 대신해야 하니, 백모인 명헌태후의 병세를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상께옵서는 국무에 여념이 없으시니, 명헌태후전의 일은 저희에게 맡겨 주시옵소서."
황태후 김씨와 황후 아영이 명헌태후가 거처하는 수인당(壽仁堂)에 머무르며 병수발을 도맡아 했다. 황실의 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순친왕 이척도 함께 했다.
"명헌태후께옵서 붕서(崩逝)하시었습니다."
"황태후 폐하!"
정월 초이틀, 대한제국 최고의 의료진이 병환을 살폈음에도, 끝내 폐렴이 악화되어 명헌태후는 병석에서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향년 74세.
"짐의 효성이 부족해서 오늘 진시(辰時)에 명헌태후께서 수인당에서 승하하셨다. 끝없는 슬픔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이선은 조령을 발표하고 국장도감(國葬都監)을 설치했다.
이선이 명헌태후와 딱히 특별한 교류가 없었고, 갑신경장 이후 유교적 전통이 많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유교국가 조선을 뿌리로 삼은 대한제국에서 황제가 황태후의 국상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상복을 입은 이선은 김옥균 내각에 국정의 상당 부분을 위임하고, 장례 절차에 들어갔다.
‘뭐, 별일 없겠지. 실제로는 지난주에 전쟁이 발발했었는데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실제 역사에서 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 2월 8일, 이날은 아무 일도 없이 넘어갔다. 여러 충돌 우려에도 불구하고 정세는 평온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04년 2월은 군신 마르스(Mars)가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달이었다.
동양에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 * *
러시아 제국은 광대했다. 서쪽으로는 핀란드와 폴란드에서 동쪽으로는 사할린과 캄차카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육상 제국이었다.
다민족국가 러시아 제국을 관리하는 건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차르는 전제군주정을 고집했다.
1904년 들어 변경의 소수민족들, 특히 서쪽의 폴란드와 핀란드에서 불온한 조짐이 일었고, 러시아의 노동운동은 점차 격화되고 있었으며, 극동에서도 일본 및 청국과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재무대신 비테의 실각 이후 러시아 정부의 핵심인물로 떠오른 내무대신 바체슬라프 폰 플레베는, 전제군주정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대내외적으로 강경일변도 정책을 추진했다.
국내적으로는 악명 높은 오흐라나(내무부 공안국)를 내세워 공안 체제를 구축하려 했고, 국외적으로는 충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극동에서의 짧은 승리야말로, 러시아의 위신을 끌어올리고 신민을 단결시켜 불온한 조짐을 일소하여, 제국의 안녕을 담보할 수 있는 길이다."
차르 이하 러시아 정부의 그 누구도 전쟁을 원치 않았지만, 플레베는 극동에서의 외교적·군사적 승리가 점증하는 혁명의 파고를 잠재우리라 생각했다.
플레베로서는 극동 일각에서 벌이는 일본의 행태가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일본의 스파이가 만주, 시베리아, 사할린 일대를 횡행하며 반러시아 책동을 벌인다는 건 공안조직의 총수인 플레베의 귀에 들어왔다.
"극동 각지에 암약하는 일본 스파이 조직을 일소할 것. 반드시 생포하라."
플레베는 일본 스파이 조직을 일소하고 배후를 명백히 밝혀 대일 압박용으로 삼을 복안이었지만, 행정력이 떨어지는 극동 일대에서 촘촘한 감시망이 짜이기 힘든 노릇이었다.
내무대신의 지침은 극동 지역 헌병과 경찰들에게 굉장한 압박으로 다가왔다.
특히 일본과 해협을 사이로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인구의 태반이 유배 왔다가 정착한 정치범 출신인 사할린 섬에서는 ‘일본 스파이’에 대한 부담이 더욱 컸다.
2월 29일(율리우스력 2월 16일), 사할린 블라디미로프카(유즈노 사할린스크).
"반드시 체포하라! 놓쳐서는 안 돼!"
경찰과 헌병들은 ‘일본 스파이’를 체포하기 위해 항구를 이 잡듯이 뒤졌다.
사할린 방첩조직은 정치범 출신 주민을 매수하여 사할린 일대에서 공작을 벌여 온 일본 스파이의 꼬리를 잡았다고 판단했고, 일본으로 도주하기 전에 체포할 생각이었다.
"어디에도 흔적이 없습니다! 이미 도주한 것 같습니다!"
"젠장! 항구에서 출항한 배가 있나?"
"예, 일본 상선 한 척이 새벽에 출항했습니다!"
"그거잖아! 당장 해군에 전보 넣어!"
일본 기선 젠쇼마루(全勝丸)는 7백 톤급 상선으로, 도호쿠 지방과 연해주, 홋카이도와 사할린을 오가는 무역선이었다. 주로 화물을 운송했지만, 민간 여객도 수용했다.
사할린 블라디미로프카와 홋카이도 북단 왓카나이(稚内) 항까지는 약 3시간, 라페루즈 해협 혹은 소야 해협(宗谷海峡)을 횡단하는 루트였다.
콰앙!
갑작스러운 함포 사격 소리와 함께, 포탄이 젠쇼마루의 측면에 떨어졌다.
"뭐야? 웬 폭음이냐?"
"정선 신호가 들어왔습니다!"
갑작스럽게 5km 후방에서 출연한 군함에서, 탐조등으로 즉각적인 정선 요구가 들어왔다.
망원경으로 살펴보니 성(聖) 안드레이 깃발을 내건 러시아 군함이었다.
"러시아 군함, 그것도 순양함이잖아!"
"순양함이 왜 상선에게 지랄이야? 전쟁 났냐?"
선원의 절대 다수는 일본인이었지만, 선장과 기관사는 영국인이었다. 선장은 갑작스러운 포격과 정선 요구에 격분했다.
"야만인 러시아 놈들! 전시도 아닌데, 러시아 군함의 부당한 정선 요구에 응할 수는 없다. 조금만 더 가면 일본 영해니 이대로 계속 항진한다. 일본 영해에 들어가면 뭐 어쩔 거야?"
"하지만, 상선이 무슨 수로 순양함을 따돌립니까? 아무리 거리가 있다 해도 금방 따라 잡힐 텐데."
"항로에 유빙이 있잖나. 우리는 통과할 수 있지만, 순양함 덩치로는 못 지나간다."
겨울의 라페루즈 해협에는 유빙이 떠다녔고, 유빙을 피해 항로를 잡는 건 숙련된 항해사의 기술이었다. 때마침 젠쇼마루의 주위에는 통과하기 적당한 유빙의 균열이 있었고, 그대로 항진을 이어 나갔다.
"저것 봐라? 순양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선에 응하지 않는 거 보니 역시 스파이 선박이 맞군."
블라디보스토크 분견대 소속 순양함 그로모보이(Gromoboi)는 신예 장갑순양함이었다. 때마침 라페루즈 해협에 항진 중이었던 그로모보이는 사할린 헌병대의 전보를 받고 즉각 출동했다.
젠쇼마루가 정선에 응하지 않고 도주하는 걸 보고, 함장 니콜라이 다비치(Nikolai Dabich) 대령은 간첩선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유빙으로 도망치려나 본데, 우리에게 함포가 있다는 걸 잊었나 보군. 포격 개시!"
그로모보이는 ‘천둥’이라는 뜻의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천둥처럼 함포를 쏴서 유빙을 뚫어 항진했다.
"선장! 유빙을 뚫고 쫓아오는데요?"
"위협 사격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젠장! 도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겠네. 순양함을 상대할 순 없지, 정선시켜."
결국 젠쇼마루는 정선했지만, 결과적으로 불운한 선택이 되고야 말았다.
"어어? 포탄이 계속 날라오는데요?"
"으아아, 명중한다!"
콰앙!
정선 신호를 보지 못한 순양함이 계속 젠쇼마루를 향해 정선을 요구하는 위협포를 쏘았고, 그 중의 한발이 선미를 명중시키고 말았다.
"야야, 위협만 가하랬지 저걸 진짜로 맞추면 어떡해!"
"포격 훈련 때는 표적을 맞추지도 못하더니만!"
"빨리 구조해!"
상선의 피격에 당황한 건 순양함도 마찬가지였다. 정선하라고 위협을 가한 게 공교롭게도 격침을 시키고 만 것이다.
그로모보이는 즉시 젠쇼마루의 근처로 항진하여, 물에 뛰어든 선원과 승조원들을 구출했다.
생존자는 모두 순양함에 수용되었고, 선체는 그대로 침몰하였다. 생존자는 사할린으로 이송되었다.
침몰 과정에서 4명이 죽고, 9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상자는 전원 일본인이었다.
"호외요! 호외! 소야해협에서 러시아 군함이 일본 상선 젠쇼마루를 격침!"
"사망자 4인! 생존자 전원 가라후토(사할린)에 구금! 일본에 대한 전례 없는 공격!"
3월 1일, 호외가 도쿄 시내에 뿌려졌다.
이른바 ‘젠쇼마루 사건’은 일본 여론을 크게 격동시켰다. 가뜩이나 일본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나가던 러시아 공포증은 이 사건으로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아아! 순양함이 일개 상선을 쫓아다니며 격침하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가? 러시아는 문명 세계의 공법도 모른단 말인가? 이 죄는 침략 그 이상이다. 러시아인은 갓난아기를 요리해 삶아 먹는 식인종족이나 다름없다!」
팽창주의 성향의 ≪도쿄아사히≫는 노골적으로 러시아를 비난하는 기사를 실었다.
호외를 받아든 일본인들은 격분했다.
"러시아놈들! 군함이 민간 상선을 공격해 격침시키다니, 이게 무슨 미친 짓거리야!"
"러시아는 상선 격침을 사죄하고 배상하라!"
"정부는 강력히 대응하라! 물러서지 마라!"
하필 상선의 선장과 기관사가 영국인이라는 점이, 일본 언론을 더욱 부추기고 있었다.
「러시아, 마침내 가면을 벗어던지고 침략성을 드러내다!」
「일부러 영국 선장이 운항하는 상선을 공격한 것은, 영일동맹에 대한 명백한 공격을 의미한다!」
「영일 양국 정부는 공동으로 러시아의 침략 행위에 응전하라!」
러시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사건 발생 사흘 만에, 러시아 내무부와 해군부는 합동으로 공식 성명을 내놓았다.
「사할린과 극동 일대에 잠입하여 반러시아 공작을 획책하던 일본 스파이 조직이 명백히 실체를 드러냈다. 1904년 2월 16일(29일)에 발생한 사건의 전모는 다음과 같다. 일본 참모본부의 조종을 받는 우익단체 흑룡회는 사할린에 거주하는 석방 정치범들과 접촉해 왔다. 사할린 주둔군의 정보를 빼돌리고, 테러 행위에 필요한 공작을 획책했다. 이와 같은 적대행위는 피의자의 자백에 의해 명백히 밝혀졌다. 상선 젠쇼마루의 침몰은 순양함 그로모보이의 정선에 응하지 않고 도주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고로, 러시아 해군은 성심성의껏 선원과 승조원을 구조하여 보호했다. 상선의 격침은 유감스러운 일이나, 러시아 제국 정부는 일본 군부가 지속해 온 적대 행위를 규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러시아는 증거로 ‘일본 흑룡회 공작원’, ‘적에게 매수된 정치범’의 자백서를 발표했다.
"러시아 같은 대제국이 일본과 같은 소국에 욕보임을 당해서는 안 된다."
사건을 보고 받은 내무대신 플레베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뜻을 드러냈다. 러시아가 선박 격침에 대해 해명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일본이 러시아에 획책한 적대 행위를 해명해야 했다.
"거짓말하지 마라! 격침시켜 놓고 증거를 조작한 거 아니냐!"
"고문으로 받아 낸 자백 따위 인정할 성싶으냐!"
"전쟁이다! 러시아가 일본에 전쟁을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다!"
여론의 격동은 일본 정부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이미 국민적 분노는 손쓸 수 없을 정도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우리 측 공작원인 건 확실합니까?"
"러시아는 그렇다고 주장합니다만, 소위 피의자는 군인도 아니고 민간인 신분입니다."
"정부의 동의 없이 군부가 멋대로 이웃나라에서 파괴 공작을 획책하다니! 대체 뭐 하자는 거요?"
"총리대신, 오해이십니다. 군부와는 무관합니다."
사이온지의 힐난에 내무대신 가쓰라와 육군대신 데라우치가 뻣뻣한 태도로 답했다.
4년간 러시아에 유학하며, 철저히 러시아를 연구해 러시아통으로 불리우는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소좌가 운용하는 참모본부 산하 러시아과가 흑룡회의 배후에 있었다.
촉망받는 장교인 다나카는 조슈벌 출신이었고, 조슈벌을 대표하는 데라우치와 가쓰라는 다나카에게 책임이 돌아가게 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일은 터졌으니, 여론을 무마하려면 어쩔 수가 없지. 이는 일본 정부와 무관한 사건이고, 러시아가 과잉 진압을 한 거요. 러시아에 상선 격침에 대하여 정식으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겠소."
사이온지 내각은 러시아에 배상 책임을 묻는 선에서, 외교적으로 상황을 마무리하려고 했다. 전쟁까지 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안타깝긴 하지만, 겨우 4명 죽은 거로 국운을 걸고 전쟁까지 할 수 있나?"
"맞소. 이번 기회에 러시아를 압박해서 외교적 양보를 받아 내면 충분하지."
"국제법적으로 선례가 있는지 찾아보시오."
"영국과 연대해서 러시아를 압박하도록 합시다. 마침 선장이 영국인인 점이 잘됐군."
어차피 민간인 4명의 죽음은 크게 개의치 않는 바였다. 더욱이 사망자 4명 중 2명은 일본에서 ‘2등 신민’으로 여기는 홋카이도 아이누였다.
피해는 러시아를 압박하는 외교적 지렛대로 활용하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사이온지 내각의 문민 관료들, 내각을 후원하는 원로 이토와 마쓰가타는 외교적 해결책에 동의했다.
하지만, 격동된 여론은 그 정도로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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