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356화 (355/812)

37화 평등과 불평등

「부산 개항장 충돌에 대해서는 한국 정부가 알아서 하라고 하시오. 그런 멍청한 놈들, 풀려나든 말든 제국에 이익이 되는 건 하나도 없소. 현재 한국 황실이 국상 중이니 조의를 거듭 표하고, 개화당 정부에게 내 제안을 보내시오.」

이어서 사이온지는 히비야 폭동의 책임을 물어 가쓰라를 내무대신에서 경질하고, 후임으로 하라를 임명할 뜻을 밝혔다. 사이온지는 가쓰라의 배후에 있는 야마가타와 조슈벌이 신경에 거슬렸다.

하라는 본국에 귀임하기 전에 대한(對韓) 외교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다. 어떻게든 한국을 러시아에서 떨어트려 놔야 했다.

"외무대신, 황제 폐하를 알현하게 해 주십시오."

"글쎄요, 아시다시피 황제 폐하께옵선 상중이십니다. 신하된 도리로 성심을 번거롭게 해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이선은 국상을 핑계로 일본 공사의 알현 요청을 거절했다.

하지만 정무는 여전히 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본을 애태우려는 걸 간접적으로 표현한 셈이었다. 지금 상황에선 아쉬운 게 일본이었다.

"일본국 정부의 조전(弔典)에 이어, 천황 폐하께옵서도 몸소 조전을 보내셨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상주하겠습니다."

상대 국가원수가 조전을 보냈다는데, 알현을 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음날, 경운궁 정관헌에서 이선은 일본 공사를 회견했다. 대례복 차림의 하라는 엄숙한 태도로 메이지의 조의를 전달했고, 하얀 곤룡포 차림의 이선도 정중하게 답례했다.

"…… 황제 폐하의 슬픔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귀국 천황 폐하의 조의에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의례적인 이야기가 오간 후, 이선이 먼저 화제를 돌렸다.

"귀국의 정세가 심상치 않으니, 국내외적으로 고민이 많겠습니다."

"여러 문제가 있기는 합니다만, 우방과 협의해 잘 해결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귀국 선원들이 죽은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그 분노를 애먼 이웃나라에 풀려고 하면 안 되지요. 일본 거류민들이 공개적으로 난동을 벌인 건, 대한을 우습게 여겨서가 아니겠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들이 어리석고 선동되어 잠시 이성을 잃었을 뿐, 결코 무시하려는 마음은 아닐 것입니다."

"이건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오. 개항 이래 30년, 일본은 한국을 늘 우습게 여겨 왔소. 마치 서양이 일본을 대하듯, 일본은 한국을 대하고 있소. 귀국 정부나 언론, 국민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소."

실제 역사처럼 노골적인 무시는 아니더라도, 바뀐 역사에서도 일본의 한국관은 ‘오, 조선, 많이 컸네? 그럭저럭 문명개화를 이뤘지만 여전히 일본의 도움이 필요하지?’ 정도였다.

이는 서양의 일본관과 거의 유사했다.

‘일본은 서양 흉내를 내서 문명개화에 성공한, 여전히 서양의 우호적인 지도가 필요한 나라’에서 단어만 바꾼 정도였다.

일본인의 우열의식은 서양인에게는 열등감을 느끼고, 중국인에게는 노골적인 우월감을 드러낸다면, 한국인을 상대로는 은근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시아주의를 부르짖기 전에, 양놈들이 보기에는 똑같은 칭챙총끼리 서열 정해 놓고 대장 노릇 하려는 태도부터 고치는 게 어떨지?’

물론, 이선은 이를 외교적인 언어로 말했다.

"서양 열강에 맞선 동양 삼국의 연대, 좋지요. 하지만 외교라는 건 상대방을 대등하게 인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신뢰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오만, 공사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일부 몰지각한 일본인들이 이웃나라의 국민감정을 해치려는 태도는 외신(外臣)도 우려하고 있습니다. 하오나 결코 그들이 주류는 아니며, 현재 일본 정부는 그런 오류를 바로잡으려고 합니다."

이선도 그건 인정했다. 그나마 사이온지와 하라는 대화가 통하는 사람들이었다.

"좋소. 귀 정부의 호의는 짐이 신뢰할 수 있지요. 공사의 체면을 봐서, 부산에서 체포된 자들은 석방하라 명하겠소. 다만 반성문 정도는 써야 할 거요."

사실 근본적인 문제는 치외법권이었다.

일본이 서양과의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려고 하는 것처럼, 한국도 일본 및 서양과의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이선은 단숨에 거기까지는 나가지 않았다.

"성은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저들이 다시는 난동을 부리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시키겠습니다."

머리를 숙여 정중하게 감사를 표한 하라는, 마침내 본론을 꺼냈다.

"폐하, 동양의 정세가 하루가 다르게 심상치 않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일본에 있어 한국은 가장 중요한 이웃나라입니다. 양국의 굳건한 연대는 점증하는 위기를 막고, 동양 평화를 지켜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대한 역시 이웃나라와의 관계를 중시합니다. 일본과 러시아 모두 소중한 이웃이니, 어찌 두 나라가 대립하는 걸 바라겠소? 일본 선원들이 희생된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나, 두 나라가 조속히 평화적으로 타협을 이루길 바랍니다."

이선은 원론적으로 대응했다.

하라가 김옥균에게 비공식적으로 협력 조건을 타진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있었다.

이선은 국상을 핑계로 일단 대일 외교를 김옥균에게 맡기고, 한 발 뒤에서 관망했다.

"귀국 정부에 거듭 요청하고 싶은 바가 있다면, 상대방의 주권을 존중하고, 대등한 관계로 인정할 때 진정한 신뢰가 이어지는 겁니다. 짐의 뜻을 꼭 전해 주길 바랍니다."

"예, 폐하. 본국에 반드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가운데 낀 게 피곤할 일이 많지만, 때로는 유리한 점도 있지.’ 러시아와 일본 모두 한국의 호의를 사려고 했다.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와 유사시 30만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한국을 적에게 넘겨줄 수 없었다.

하지만 ‘차르와의 특별한 관계’로 인해 러시아가 안심하고 있다면, 일본은 보다 적극적으로 한국을 끌어드리려 했다.

‘일본이 무력으로 판을 엎으려 하는 게 아니라면, 결국 조건을 계속 상향할 수밖에.’

청나라와의 오랜 종속적인 관계를 대등한 평등 조약으로 바꿔 버린 것처럼, 이선은 한일 관계도 1876년 이래의 불평등 조약을 폐기하고, 평등 조약으로 전환하고자 했다.

러일 갈등을 이용한 것이었지만, 근본적으로 대한제국의 국력이 상승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본과의 평등 조약을 지렛대 삼아, 장차 서양 열강과의 관계도 관세자주권 인정과 치외법권 폐지를 골자로 한 평등 조약으로 전환하는 게 궁극적인 목표였다.

그런 점에서 일본은 러시아가 제공할 수 없는 걸 내놓을 수 있었다. 러시아가 아무리 한국에 호의적이더라도, 혁명 이전에 비(非)서양 국가에 평등 조약을 맺어 줄 리가 없었다.

‘그래야 진정으로 대등한 연대, 아시아주의도 가능한 게 아니겠나?’

아시아주의를 외치고 싶다면, 일본이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다. 서양과의 조약 개정을 추진하는 일본이 한국을 상대로 불평등 조약을 유지하려 한다면 모순이 아닌가.

이선은 이를 지적하는 것이었고, 하라는 이해했다.

‘자, 그럼 일본의 동맹인 영국이 어떻게 나올지도 궁금하군. 장차 영국과 동맹을 맺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일본과도 손을 잡을 수 있지만…….’

한국이 일본에 요구하는 건 다음과 같았다.

불가침, 평등 조약 체결, 영국의 독립 보장과 3자 안보 체계.

이선은 가능하다면, 영국과 손을 잡고 싶었다. 어쨌든 영국은 당대 세계 최강국이었다.

* * *

1904년 초 동아시아에서 위기가 고조되는 동안, 영국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하면.

해발고도 5천 미터의 고지대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영국령 인도에서 티베트를 침공한 것이다.

비록 영국이 국경을 넘은 집단과 행위를 공식적으로 ‘사절단(mission)’, ‘원정(expedition)’이란 표현을 쓰고 있긴 하지만, 실상은 군대고 침략이란 행위를 부정할 수 없었다.

"세상에 어떤 사절단이 1만의 무장병력을 거느리고 국경을 넘는단 말이오? 당장 철수하시오!"

인도 병사 3천, 현지 짐꾼 7천 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은 겨울을 티베트 영내에서 보내고 있었다.

티베트는 영국군에게 철수를 요구했다. 명목상 종주국인 북경의 청 조정도 항의했지만, 영국은 무시로 일관했다.

"협상은 오직 사절단이 갼체에 도달해야만 이뤄집니다. 순순히 갼체로 가는 길을 열어야만 유혈사태를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2월, 영국 원정대는 항의를 모두 무시하고 진격을 재개했다. 이미 땅에 떨어진 대청의 권위는 다시 한번 진흙탕에 뒹굴게 된 셈이었지만, 청나라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티베트는 애초에 북경에서 지원이 있으리라곤 기대조차 안 했다. 지원을 요청하는 특사가 러시아로 향했다.

"티베트를 지킬 수 있는 건 오직 티베트인의 힘이다. 티베트의 불자, 승려, 인민들이여! 영국 침략자에 맞서라!"

달라이 라마 13세는 항전을 선언했다.

‘활불(活佛)’ 달라이 라마의 항전 선언은 티베트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영국 원정대는 전투 없이 티베트의 중요 도시 갼체(Gyantse)로 향하길 바랐지만, 3월 3일 구루라는 작은 마을에서 티베트인의 항전이 시작됐다.

라싸에서 온 승려가 이끄는 병력은 약 3천, 대부분 구식 화승총과 창칼로 무장한 병사들이었다.

"설마 저런 중세의 군대로 대영제국군에게 맞서겠다는 건 아니겠지?"

사절단 호위단장 맥도널드 준장은 휘하의 시크교도와 구르카 병사들을 움직여 티베트군을 포위하고, 무장해제와 항복을 요구했다.

하지만 티베트인들은 뜻밖에도 완강히 저항했다. 인도 병사들이 무장해제를 하려고 티베트인들의 화승총을 빼앗기 시작하자, 티베트 지휘관이 격노하여 권총을 빼 들고 공격을 명령했다.

지휘관의 명령에 티베트군이 일제히 영국군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달라이 라마가 하사한 부적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 부적이 있으면 총알이 피해 가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어리석은 놈들! 전군, 공격하라! 저 야만인들에게 문명의 힘을 보여 줘라!"

영국 장교들이 지휘하는 인도 병사들은 잘 훈련된 정예병들이었다. 리-엔필드 소총과 맥심 기관총으로 무장한 영국군은 화승총과 창칼을 든 티베트군이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존재였다.

탕! 탕! 탕! 타다다다다다다다다다당!

전투는 단 5분 만에 결판이 났다.

중세의 군대는 압도적인 근대 살상 무기 앞에 궤멸당하고 말았다.

"이건 학살이잖아! 왜 사격 중지 명령이 안 떨어지는 거지?"

기관총 부대를 지휘하는 중위는 눈앞에 벌어진 참상이 끔찍했다. 하지만 사격 중지 명령은 없었다.

티베트군은 도망치기 시작했지만, 영국군의 기관총 사격은 멈추지 않았다. 전투라고 부를 수도 없는,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단기간에 티베트인 700명이 전사하고, 168명이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영국군은 전사자 없이 부상자만 12명이었다.

사절단장 영허즈밴드는 인도 부왕청에 보내는 보고서에 ‘학살’에 대해 솔직히 인정했다.

"본관은 유혈사태 없는 승리를 바랐으나,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티베트인들이 당한 엄청난 살육은, 대영제국의 위력을 체감하고 마침내 협상으로 나오는 길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티베트인들이 근대적 무기의 위용 앞에 경악하고, ‘부적’의 쓸모가 없다는 걸 깨닫는 계기가 되긴 했지만, 순순히 항복하지는 않았다.

"이래서 진작 군제 개혁을 했어야 했다. 어찌 저들을 막아 낸단 말인가……!"

달라이 라마는 항전을 이어나가며, 거듭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영국에 맞서 티베트를 보호하기를 꺼리고 있었다. 작년에 외교관과 군사고문관 2인을 티베트로 파견하긴 했지만, 전쟁이 발발하면서 아예 티베트에 입국조차 못 했다.

영국군이 갼체로 진격하는 동안, 티베트인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붉은 불상 골짜기’라는 좁은 협곡에서 티베트군 200명이 전사했다.

이어서 해발 5,700미터, 역사상 가장 높은 고지대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카로(Karo) 고개의 격렬한 전투에서는 영국군 5명이 전사하고, 티베트군이 400명 이상 전사했다.

영국군은 갼체를 함락시키고, 티베트의 신성한 수도 라싸로 가는 길을 통제했다. 그럼에도 티베트는 협상에 응하지 않았다.

「티베트에서의 대량 학살! 저항하지도 못하는 원주민들을 과학 무기로 말살하다! 이것이 문명의 윤리, 대영제국의 윤리란 말인가?」

「정부는 보어전쟁의 참상을 잊었나? 티베트 원정은 수치스럽기 짝이 없다!」

구루의 학살 소식이 런던에 전해지자, 자유주의자들은 분노했다. 심지어 보수주의 성향의 ≪스펙테이터(Spectator)≫, ≪펀치Punch)≫에도 침공을 비판하는 논설이 실릴 정도였다.

자유당에서는 보수당 내각을 격렬히 비판했고, 화이트홀(영국 정부)은 비판에 일단 고개를 숙였다.

"불행한 유혈사태가 있긴 했지만, 우리 군의 역할은 본래 평화 사절단입니다. 전투 후 우리 군의관들은 부상자들을 정성껏 치료하고,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티베트인들에게 현대 의료를 전파하고 있습니다. 미신과 야만에 시달려 오던 티베트인들도 영국 사절단을 환영하고 있습니다."

인도 부왕청에서 전쟁 명분을 정당화하는 성명을 쏟아 냈다. 인도군 총사령관 키치너(Herbert Kitchener) 장군은 영허즈밴드의 보고서를 공개했다.

"영국은 티베트와 싸우는 게 아니다. 카로 전투 이후, 우리는 러시아와 싸우고 있다. 티베트가 러시아의 조종을 받는다는 명백한 증거들이 있다. 러시아 스파이들이 티베트에 횡행하고 있다. 우리 사절단이 라싸에 도달하게 되면, 지울 수 없는 러시아의 흔적들을 찾게 될 것이다."

요컨대 러시아의 흔적을 찾아 라싸로 계속 진격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러자 제국주의 매파 언론들이 재빠르게 기사를 양산하기 시작했다.

「순진한 인도주의자들은 착각하지 마라. 인간의 목숨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백인 중에서도 가장 우월한 민족, 앵글로색슨인이 황인 중에서도 가장 열등한 종족, 티베트인의 목숨을 따져가며 작전을 수행해야 한단 말인가?」

「티베트의 배후에는 숙적 러시아가 있다. 러시아 첩보 조직은 유럽과 아시아 대륙 전체에 횡행한다. 대영제국은 러시아의 공작에 단호히 맞서야 한다!」

대내외의 격렬한 비난에 직면한 영국 제국주의자들은, 뜻밖에도 새로운 카드를 꺼냈다.

- 38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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