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357화 (356/812)

38화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이선은 당대 최강국, 영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20년 전부터 노력해 왔다.

하지만 영국은 청일전쟁 이전까지는 청나라와, 그 이후에는 일본을 대화상대로 인정했을 뿐, 여전히 한국은 동양 문제의 종속적인 존재로 보았다.

이런 관점은 한국의 국력이 신장한 1904년에 이르러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본지 특종! 상트페테르부르크 특파원이 밝혀 낸 비밀 정보!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 걸친 러시아 특수 첩보 조직!」

영국의 여론이 티베트 침공에 대해 설왕설래하던 중, 보수당과 제국주의 지지 성향의 ≪더 글로브(The Globe)≫에 특종이 실렸다. 국제 뉴스에서 꽤나 공신력 있는 신문이었지만, 이 무렵에는 노골적으로 보수당과 영제국주의를 찬양했다.

「아시아를 향한 러시아의 야심은 언제부터인가? 만주를 점령한 1900년? 투르키스탄을 병합한 1860년대? 아니다. 그 근원은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표트르 이래 러시아는 세계 정복을 꾀하고 있으며, 아시아는 그들의 야망을 실천하는 첫 관문이다. 표트르가 창설한 러시아 비밀 정보부는 세계에서 가장 은밀하고 강력한 첩보 조직이며, 그들의 요원은 전 세계에 퍼져 있다. 본지가 어렵게 확보한 명단에 따르면, 그 면면은 실로 경악할 수준이다…….」

「티베트 달라이 라마 13세의 스승이라는 아그반 도르지예프란 몽골 승려가 러시아 스파이라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달라이 라마는 러시아 스파이의 조종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러시아의 첩보망은 티베트에만 뻗어 있는가? 천만에! 만주, 몽골, 카슈가르에도 러시아 스파이가 드글거린다. 이들은 청국에 대해 분리 독립을 외치고 있지만, 실상은 러시아가 이 지역을 병합하려는 음모의 일환이다.」

「그렇다면 혹자는 물을 것이다. 중국 변방의 일은 중국이 알아서 할 일이지, 대체 왜 영국이 나서야 하는가?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4억 인구, 중국의 심장부에도 러시아 스파이는 존재한다. 중국 정치를 좌지우지하던 총독 이홍장, 이 교활한 노인도 러시아 스파이였다. 청나라를 조각내 러시아에 신강과 몽골, 만주를 할양하려는 음모를 품고, 이홍장은 암약해 왔다. 그 결과, 청나라는 러시아와 허울뿐인 동맹을 맺고, 러시아는 만주를 점령했다. 그다음은 몽골이 될 것이다.」

「혹자는 다시 물을 것이다. 이미 이홍장은 죽지 않았나? 중국 황제는 영국에 우호적이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그건 허울뿐인 변화에 지나지 않는다. 더 젊고, 유능하고, 강력한 스파이가 러시아 첩보 조직을 이끌고 있다. 그가 동양의 정세를 조종하고 있다. 그는 바로, 한국 황제 이선이다.」

「이선은 어떻게 한국의 왕좌에 오를 수 있었나? 그는 선왕의 장자였으나, 서자였다. 원래대로라면 왕위를 계승할 수 없는 위치다. 하지만 그는 1881년 러시아로 망명해 러시아 비밀 정보부에 포섭되었다.」

「이선은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을 막은 공로로 총애를 받게 되었다. 어쩌면 암살 미수 자체가 러시아 정보부의 공작이었을지 모른다. 이선은 러시아 차르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작위를 받았다. 1년 뒤, 러시아에서 양성한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귀국, 부왕의 정권을 타도하고 권력을 탈취했다. 이는 러시아 정보부의 가장 성공적인 기획 작품이다.」

「그 후 20년간, 이선은 표면적으로는 한국의 집정자로,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러시아의 비밀 첩보원으로 암약하며 러시아의 극동 정책을 추진했다. 이선이 1891년 일본의 니콜라이 황태자 암살 미수 사건을 막은 것도, 10년 전과 같은 러시아 정보부의 공작이었다. 일본은 농락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청과 한국의 전쟁은 무엇이었나에 대한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이홍장과 이선은 적으로 싸우지 않았나? 하지만 그조차도 러시아의 거대한 책략의 일부분이었다. 청나라의 만주 상실은 이홍장과 이선, 두 러시아 스파이에 의해 진행된 계략이다. 상식적으로 대청국이 한국에 진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러나 현실로 이뤄졌다. 이홍장이 고의적으로 참패를 유도했기 때문이다. 이선은 이홍장으로부터 만주를 넘겨받아 레드카펫을 깔아 놓은 후, 마침내 1900년 러시아에 만주를 바쳤다.」

「한국은 복서(의화단) 전쟁에서 잘 싸웠으며, 중국 황제를 구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이조차도, 러시아 스파이들이 계략을 꾸며 중국 황제를 한국군에게 갖다 바친 덕분이다. 이제 이선은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지시를 받아, 청나라 황제를 조종하고 있다. 이상으로 살펴본 이선의 행보는 능력과 행운으로 설명이 불가능하다. 러시아의 비밀 첩보 요원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독자들이여, 러시아 첩보망은 아시아 전역에 이르고 있다. 러시아의 스파이들이 도처에 횡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러시아 스파이는 아시아에만 있을까? 유럽에는 더 많을 것이다. 혹시 아는가?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주위에도 러시아 스파이가 있을지. 화이트홀에도, 웨스트민스터에도, 왕립 육·해군에도, 사회 곳곳에 러시아 스파이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러시아의 세계 정복을 획책하고 있다.」

* * *

글로브의 특종은 영국에서는 흔한 ‘찌라시’ 중의 하나 정도로 치부되었다. 이런 류의 러시아 세계 지배 음모론은 19세기 초부터 내려오는 유구한 전통이었고, 러시아와의 관계가 악화될 때마다 나와 팔리는 내용이었다.

크림 전쟁을 주도하며 가장 강경한 반러 정책을 추진했던 파머스턴이나,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전쟁을 진지하게 고려했던 글래드스턴 같은 이들도 ‘러시아 스파이’라는 음모론이 있었다.

보수당 일각에서 강경한 대외정책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긴 했지만, 영국 정부는 이런 주장에 특별히 관심도 없었다. 그저 호사가들의 가십 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 스파이 활동 범위로 지목된 지역에서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글로브를 번역한 기사가 일본에서 호외로 쏟아지고, 이윽고 한국에도 번역되었다.

기사의 심각성으로 인해, 내무부는 사전검열로 보도를 막고 이선에게 보고했다.

"오, 그래? 내가 러시아 스파이라고? 달라이 라마와 이홍장도 러시아 스파이고? 그거참 재미있는 소설이구만. 내가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라니! 이 정도면 첩보 소설 주인공 감인데."

‘하, 러시아 공포증이 극에 달했군. 보수당 정권 교체 언제 되냐? 자유당만 돼도 좀 낫겠구만. 다음 총선까지 한 1, 2년 남았나?’ 러시아 스파이로 지목된 당사자인 이선은 그야말로 코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최악의 모략입니다. 영국 공사관에 강력히 항의하고, 반박 성명을 내겠습니다. 해당 신문사에 소송도 준비하겠습니다. 관련 보도는 대한 국내에서 결코 이뤄지지 않을 것입니다."

김옥균이 이를 악물었다. 그도 영국에게 뺨을 맞은 기분이었다.

"뭐, 영국 정부야 자유 언론이라는 점이나 강조하겠지. 그래도 반박은 하시오. 짐이 직접 해명이나 항의를 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한마디 해야겠군. 각국 공사를 경운궁으로 부르시오."

"예, 폐하."

곧바로 대한제국 외무부의 성명이 나왔다.

「황제 폐하께서 완화군 시절, 1881년 러시아에 입국하여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생명을 구한 일이 있었기에, 차르의 호의로 러시아 공작 작위를 받고 국적을 취득한 건 사실이나, 1884년에 자진 반납했다. 이후 러시아와는 근린으로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을 뿐이다.

…… 아시아의 주요 집정자들이 모두 러시아의 스파이라는 주장은 논할 가치조차 없다. 온갖 추측과 낭설, 악의적 보도로 대한제국에 전례 없이 지독한 모욕을 준 글로브에게 정정 보도를 요청하고, 불응한다면 단호히 법적 책임을 묻겠다.」

다음날, 주한 공사들이 경운궁에 입궐했다.

일본 공사 하라, 청국 흠차대신 허태신, 미국 공사 알렌, 영국 공사 조던, 프랑스 공사 플랑시, 독일 공사 잘데른,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 이탈리아 공사 로세티, 벨기에 총영사 뱅카르가 석조전 응접실에 도열했다.

그들 사이에 말은 없어도, 이선이 무슨 목적으로 그들을 불렀는지 짐작이 갔다.

궁내부 관리와 시종들은 영국 공사를 계속 노려보았고, 조던은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 납시오!"

황제의 등장에 각국 공사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선은 여전히 하얀 곤룡포 차림이었다.

"짐의 초대에 응해 줘서 고맙소, 여러분."

"황공하옵니다, 폐하."

"봄 날씨가 좋군요. 다들 글로브의 특종은 보셨는지? 나는 원래 영국 신문을 즐겨 읽지만, 이번만큼 재미있는 기사는 본 적이 없소. 아주 재미있습디다."

자리에 앉자마자 시작된 비꼼에, 각국 공사의 시선이 모두 영국 공사에게 향했다. 조던은 고개를 숙였다.

"폐하, 그……."

"파블로프 공사. 이걸 어찌하면 좋습니까? 이제 전 세계가 다 알아 버렸구려. 짐이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라는 걸 말이오. 이제 더 이상 암약도 못 하겠구려. 황제 폐하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전해 주시오."

러시아 공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서 쩔쩔매다가, 농담이라는 걸 깨닫고 웃었다.

"위대한 러시아의 첩보 조직이 이렇게 정체가 들통 나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렇소. 영국인들의 정보력에는 감탄만 나온단 말이오. 그러니까 해가 지지 않는 나라겠지. 안 그렇습니까, 조던 공사?"

"송구합니다. 본의 아니게 심려를 끼쳐 드리게 되어 죄송하단 말씀을 드립니다. 하오나, 영국은 자유 언론 국가로, 본래 괴이쩍은 기사가 많습니다. 결코 영국 정부의 의사와는 무관한……."

조던의 해명에 이선이 손을 내저었다.

"압니다. 뭐, 귀국 신문 주장대로라면 저 위대한 글래드스턴 경도 러시아 스파이 아닙니까. 나를 그 정도 거물과 동급으로 여겨 준다니 기쁠 수밖에요."

"황공하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이 자리를 통해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이선은 웃음을 거두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지난 20년간,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오직 대한제국과 대한국민의 이익과 복지만을 위해 일합니다. 나는 모든 나라와 친밀하게 지내고 싶지만, 대한의 주권을 보장하는 나라와 더욱 가깝게 지내고, 대한의 주권을 침해하는 나라와 멀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내가 특정 국가에 기울어진 태도를 보였다면, 그건 그 나라가 대한의 주권을 존중하고 더 많은 이익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간 이선과 한국이 영·러 그레이트 게임에서 러시아 쪽으로 기울어졌다면, 그건 영국보다 러시아가 한국에 훨씬 우호적이고 이익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한 나라의 군주로서, 설마 내가 이런 기본적인 말까지 외교관들 앞에서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각국 정부에 내 뜻을 전하도록 하십시오."

말을 마친 이선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외교관들은 모두 기립했다. 이선이 그들 한 사람과 모두 악수한 후, 외교관들은 목례하고 물러났다.

"이보시오, 조던 공사. 영국 언론의 무례함은 익히 잘 알고 있었지만, 이번은 지나치지 않소? 이런 건 금지 처분을 내려야지! 한국 황제 폐하에 대한 모욕이자, 러시아 제국에 대한 모욕이오!"

"저도 유감스럽긴 합니다만, 우리나라에는 귀국과 같은 검열제도가 없습니다. 모두가 자유롭게 발언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자유민주주의라는 것이지요."

"뭐요? 그래도 영국이 잘났다 이거요!"

파블로프와 조던은 언성을 높였다.

자유언론을 보장하는 미국과 프랑스 공사도 이번만은 심하다는 태도를 보였다.

"우리 공화국 신문이 영국 국왕 폐하를 모욕하면 귀국의 반응이 어떻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지요."

"저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본국 정부에 보고할 터이니, 적절한 조치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조던도 한발 물러섰다. 한국의 분노를 뒤집어써야 하는 당사자인 자신으로서는 황색 언론이 원망스럽기 매한가지였다.

보도 지침으로 인해 글로브의 ‘특종’이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 외무부의 반박과 항의는 각 언론에 실렸다.

신문을 받아 본 한국인들은 분노했다.

"영국 놈들이 감히 대황제 폐하를 아라사 밀정이라 모략했다고?"

"이런 무례한 놈들! 얼마나 우리 대한을 우습게 여겼으면!"

"영길리 해적 놈들 본성이 어디로 가겠는가!"

"서장(티베트)을 침략해 내외의 비난을 받으니까, 아세아의 지도자들이 모두 아라사의 밀정이라고 헛소리를 지껄인 거요. 영국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지."

"영국 편 안 들어주면 아라사 밀정이냐!"

"군주가 이런 모욕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다면, 어찌 신하된 도리라 하겠는가!"

아무리 서양 언론이 방종하다지만, 자신들의 군주를 이렇게까지 모욕하리라곤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절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 이선은 위대한 군주였고, 러시아 황제와 친밀하다는 이유로 스파이라는 건 가당찮은 헛소리였다.

간혹 이선이 러시아로 망명하여 힘을 키워 귀국해 권력을 잡은 건 사실이 아닌가, 의문을 품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건 감히 입 밖으로 내지도 못했다.

근왕파를 자처하는 제국당을 중심으로, 정동 영국 공사관 앞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영국 신문뿐만 아니라 영국제 상품에 대한 화형식까지 벌어졌다.

"영국 상품 불매 운동을 벌입시다! 영국제는 사지도, 쓰지도 말자!"

"우리 물건, 우리 제품을 쓰자!"

"국산이 좀 질이 떨어지면 어떻습니까? 대한의 제품을 쓰는 게 애국입니다!"

당시 한국 시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무역품이 일본을 통해 수입된 영국제 직물, 공산품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영일동맹 모두에게 타격이었다.

"독리, 영국인들은 짐이 러시아 첩자라던데."

"황공할 따름입니다."

이선의 농담에 제국익문사 독리 김학우가 고개를 숙였다.

전 러시아 공사, 전 법무대신 김학우는 러시아어·중국어·일본어에 모두 능통하고, 전신과 암호 전문가이기도 했다. 연해주 출신인 그야말로 진정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였다.

"정말로 첩보 조직을 가동해야겠군. 그간 외교 마찰을 고려해 대외공작은 자제했네만, 러일간의 갈등이 본격화됐으니 나설 때가 됐어."

"하명만 하시면, 즉시 실행하겠습니다."

"좋아. 시작하세."

이선은 제국익문사 창설 이래, 대외 첩보와 방첩에 만전을 기울여왔다. 그 결과 은밀히 강력한 첩보망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동안 벼려온 칼을 빼들 때가 왔다.

한편, 이 ‘특종’ 소동이 한국에서는 불쾌한 해프닝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면, 일본에서는 거대한 파도로 몰아쳤다.

‘로탐(露探, 러시아 스파이) 사냥’의 광풍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로탐 의혹은 초대 내각총리대신, 원로의 대표로 메이지 정부를 조종하는 이토 히로부미에게 집중되었다.

- 39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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