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359화 (358/812)

40화 연쇄 테러

하라는 이선에게 귀임을 통보했다. 이선은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일본의 정세가 많이 혼란스럽군요. 공사하고는 꽤나 정이 들었는데, 이렇게 급히 떠나다니."

"외신(外臣)도 그렇습니다. 제가 귀임하더라도, 유능한 후임자가 곧 도착할 것입니다. 양국 간의 우호가 영원히 계속되길 바랍니다."

"물론 그래야지요. 공사, 귀국 이후에 안전에 만전을 기울이길 바랍니다. 공사는 장차 총리에 올라 일본을 바꿀 인재라고 생각합니다. 결코 테러 따위에 쓰러져서는 안 됩니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다시 뵙게 될 날을 기원하겠습니다."

하라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떠났다.

실제 역사에서도, 하라는 정당 중심 문민 내각제를 확립시켜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를 이끌었으나, 극우파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이선은 하라와 같은 인물이 장차 총리를 맡으면, 한일관계를 위해서도 긍정적이라 전망했다.

"한국 황제가 로탐이라는 건 헛소리다. 유능한 외국 군주라서 경계해야 한다면 모를까. 오히려 그의 마음을 돌려 손을 잡는 게 일본에 이익이다."

하라도 이선을 꽤나 높이 평가했다. 이선이 러시아 스파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모략이었다. 오히려 영일동맹에 대해 더 우호적인 시각을 갖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하라가 이선에 대해 놓치고 있는 지점이 있었다.

"고균, 문의할 게 있소."

"하문하시옵소서."

"범인 구루시마란 자 말인데, 15년 전에 외무대신 오쿠마를 암살하려 했던 자라지? 그때 고균이 주일 공사로 있었으니까 잘 알겠군."

이선의 물음에 김옥균이 답했다.

"예, 그런 일이 있었지요. 그 전에 공사관에도 찾아와 저와 면담한 적도 있었습니다. 동양 삼국 연대와 서양 열강 타도를 부르짖는 흥아론자였지요. 그래도 범죄를 저지를 사람으로는 안 보였는데, 결국 이런 짓까지 저지르게 되는군요."

"그래, 그렇군……."

김옥균의 답변에 이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옥균은 주일 공사와 외무대신, 제국익문사 독리를 지낸 만큼, 일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한데, 김옥균조차도 제국익문사가 일본에서 획책하는 공작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일본, 도쿄.

"이토 히로부미가 폭탄 공격을 받았다. 모두 알다시피, 이토는 일본 정계를 대표하던 인사다. 그런 자가 테러를 당했으니, 이제 일본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 다름없다."

어두운 밤, 모처의 다다미방에서 은밀하게 한국어가 흘러나왔다.

이 당시, 일본에는 적지 않은 한국인 유학생이 있었다.

한국의 고등교육도 점차 높은 수준을 갖추는 과정이었으나, 당장 국가에 필요한 실용학문 중심이라 기초학문에 있어서는 아직 서양이나 일본에 미치지 못했다. 뜻 있는 청년의 유학 행렬은 계속되었다.

국비유학생은 근대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서양까지 갔지만, 사비로 유학을 떠나는 이들은 재정적인 문제로 가까운 일본으로 갔다.

가문의 지원을 받아 오는 이들도 있었지만, 고학(苦學)을 각오하고 현해탄을 넘은 이들도 있었다.

유학생들은 진보적이고, 개혁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했다. 일본어가 유창하고 일본문화에 밝은 유학생들은 대개 일본에 우호적이긴 했으나, 애국심도 충만했다. 이들이 유학을 온 본질적인 목적은 국가에 기여하고 입신양명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는, 비밀리에 제국익문사의 요원으로 선발되어 교육을 받아 유학생으로 온 이들도 있었다.

"명하신 대로 구루시마랑 접촉할 때만 해도, 그가 폭탄을 구해서 직접 던지리라고는 예상 못 했습니다."

"물론, 폭탄이 그렇게 쉽게 구해지는 게 아니니까. 대로동지회 배후에 육군이 있는 게 틀림없네. 군대에서 폭탄 빼돌리는 건 아주 어렵지 않지. 그런데, 경찰에 의심 살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겠지?"

"구루시마가 대로동지회와의 관계를 부정하고 단독범임을 강조하는 성명을 남겼습니다. 대로동지회에서 구루시마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조사를 받게 되어 저도 받았습니다만, 형식적인 참고인 조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대로동지회에 동아동문회가 합류했고, 아시아주의를 부르짖는 동아동문회에는 적잖은 한국인들이 가입되어 있었다. 표면적으로 이들은 친일파였지만, 일부는 속내를 감추고 있었다.

"경시청이야 사쓰마 출신들이 많으니 입장이 다르지만, 경시청 위에 있는 내무대신 가쓰라가 사건을 뭉개고 싶어 하는 것 같더군."

"정말로 조슈와 육군이 일을 저질렀을까요?"

"좀 더 두고 보면 알겠지. 우리 요원들이 파악하고 있네."

중년의 사내는 지금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또 다른 청년을 지목했다.

"주의자들과의 접촉은 잘 되어 가고 있나?"

"예. 사회주의자들은 아직 급진적 지식인 서클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무정부주의자들은 러시아 허무당(니힐리즘)의 영향을 받아 훨씬 과격합니다. 이들은 러시아 허무당처럼 폭탄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토를 향한 우익의 폭탄 공격은 이들의 본능에 불을 붙였습니다."

"흠, 일을 저지를 만한 인사는 있고? 대부분 몽상가들 아닌가?"

"물론 대부분 공상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있습니다."

"적당히 자극만 해 준다면 터질 수도 있겠군. 우리는 심지에 불을 붙이고 빠져나온다."

어둠 속에서,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지도 모를 계획이 논의되었다.

춘산장(春山莊), 야마가타 저택.

봄철의 산이라는 이름처럼, 3만 평의 거대한 부지의 정원에는 산천수목이 푸르게 자랐다. 가히 자연을 그대로 옮긴 것 같았다. 저택과 정원의 압도적인 규모는, 방문자들의 기가 질리게 할 정도였다.

춘산장은 야마가타의 부를 상징했고, 야마가타의 반대파들은 그를 조롱하는 의미에서 ‘춘산장 영감’이라 불렀다.

‘돈관계가 더러운 야마가타, 여자관계가 더러운 이토, 둘 다 더러운 이노우에’라는 세간의 악평이 있다. 그 말처럼, 이토는 호색한을 넘어 엽색가라고 불릴 만큼 색에 집착했지만 돈에는 초연했고, 야마가타는 색에는 초연했지만 돈에 집착했다. 유신 초기에 야마가타는 독직과 뇌물수수 사건으로 실각하는 일이 있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야마가타 본인은 당당했다.

"돈 없이 정치를 어떻게 하며, 파벌을 어떻게 운용하나? 그리고 10년 동안 부당하게 은퇴 생활을 강요받았는데, 정원이라도 꾸미는 거 말고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이 뭐가 있다고?"

야마가타는 지난 10년간 강요받은 은퇴 생활에 이를 갈고 있었다.

마침내 ‘러시아의 음모’가 밝혀지자, 야마가타는 무릎을 탁 쳤다. 그간의 한을 풀기 위해 복수의 칼을 빼 들 기회였다.

야마가타 파벌의 회합이 있은 후에, 내무대신 가쓰라가 야마가타와 독대했다.

"이토 후작도 참 안 됐어. 다리를 잃다니. 그렇게 여자 좋아하는 호색한이, 한쪽 다리도 없이 어찌할꼬?"

"뭐, 가장 중요한 곳은 멀쩡하다 하니, 어떻게든 하지 않겠습니까."

야마가타의 질 나쁜 농담에 가쓰라가 실실 웃으면서 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야마가타가 정색했다.

"위수령이 내려진 도쿄에서, 그것도 외무성 정문에서 폭탄 테러라니, 국내 치안을 총괄하는 내무대신이 책임져야 할 소관이 아닌가?"

"책임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흠, 육군하고는 무관한 일이겠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한 광인의 단독범행에 불과합니다."

"그래야지. 천황 폐하의 군인이, 유신의 원훈을 노리는 음모에 연루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야마가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옛일을 회고했다.

"비록 지금은 정적이 되긴 했지만, 리스케(利助, 이토의 아명)와 나는 유신 전부터 함께 일본을 위해 싸운 40년 동지야. 리스케가 로탐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예, 그렇지요."

"하지만, 내가 총리 시절에 작성해서, 비밀리에 대신들만 회람했던 의견서가 러시아 손에 넘어간 걸 보면, 정부 내에 로탐이 있던 건 분명하지. 아마 지금도 암약하고 있을 거야. 그렇지 않나, 가쓰라 대장?"

"그렇습니다, 원수 각하!"

가쓰라는 육군 대장에 내무대신이지만, 야마가타를 ‘오야붕’으로 섬기는 ‘꼬붕’이나 다름없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1901년에 야마가타가 밀어 준 덕에 총리가 되어 러시아와의 전쟁을 수행해야 했지만, 역사가 바뀌는 바람에 여전히 똘마니 신세였다.

"사이온지로는 절대 안 돼. 이토야 밑바닥에서 올라온 친구니까 좀 다르지. 하지만 명문 귀족 출신인 사이온지는 물러터진 도련님에 지나지 않아. 아마 주위에 로탐이 득실거릴 거야."

"의심 가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하라가 귀국했다지? 그동안 한제랑 아주 친해졌던 모양인데. 한국의 밀정, 아니지, 로탐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그런 자를 차기 내무대신으로 임명할 수야 없지 않나?"

"물론입니다, 각하."

야마가타는 사이온지가 가쓰라를 경질하고 하라를 내무대신으로 임명하리라 예측했다.

만약 사이온지와 입헌정우회 의원들이 신뢰하는 하라를 실각시키면, 문민파의 한쪽 팔을 꺾게 되는 것이었다.

"한국이라 하니, 근래 한국 유학생 중에 수상한 행동을 보이는 자들이 있습니다. 동아동문회는 그렇다 쳐도, 주의자들과 접촉하는 자들도 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히비야 폭동 이후에 주의자들의 동태도 심상치 않고……."

"주의자들이라. 일본인들 절대다수는 여전히 충량한 신민이지만, 이 극소수의 주의자들은 어디로 튈지 모른단 말이야. 모조리 싹을 뽑아 버려야겠지."

"즉시 체포할까요? 위수령이 내려졌으니 충분히 가능합니다."

"아니, 일단 내버려 두게."

야마가타가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주의자들은 한 줌 소수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히비야 폭동처럼, 뭔가 사고는 칠 수 있지. 물러터진 사이온지가 그들의 세력을 내버려 둬서 분란이 발생한다면, 천황 폐하께서도 용인하시겠나? 이 불초 야마가타가 직접 상주하겠네. 이토가 사라진 덕에 어심을 가리는 일도 없겠지."

"아, 역시. 각하의 대계(大計)에 탄복했습니다."

"만약 한국인과 관계가 있다면 더 좋지. 로탐의 수괴인 한제가 일본에서 불측한 일을 꾸몄다고 처리하면 되니까. 그걸 막지 못한 어리석은 사이온지 내각. 그러니 당분간 내버려 두라고."

"예, 각하!"

야마가타는 일본의 최고 권력을 되찾는 날이 머지않으리라 계산했다.

하지만, 정말로 한국이 일본에서 ‘불측한 일’을 꾸민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일부 유학생들의 망동이라고 여겼을 뿐이었다. 무정부주의자들도 계산 범위 내에 있다고 생각했다.

방심은 야마가타의 계산을 무너트리려고 하고 있었다.

"민권론자의 눈물이 비처럼 흘러 단련해 낸 야마토 담력. 국리민복 증진하고 민력을 보양하세. 여의치 않다면 다이너마이트로 쾅! 4천만 동포를 위해서라면 붉은 수의도 괴롭지 않네. 국리민복 증진하고 민력을 보양하세. 여의치 않다면 다이너마이트로 쾅!"

한 젊은이가 자유민권운동가들의 노래, ‘다이너마이트 부시’를 흥얼거렸다.

"한때 자유와 민권을 위해서라면 다이너마이트를 던질 수 있다고 각오를 다졌던 자유민권운동가들이, 대부분 변절하여 삿초 정권의 개가 됐지. 의원 나리들이라고 거들먹거리는 꼴이란. 하지만 무정부주의자는 다르다는 걸 보여 주마."

미야가와 다이치라는 직공은, 경찰의 요시찰 대상에도 오른 바 없는 평범한 노동자였다.

하지만 그는 은밀히 아나키즘과 러시아 니힐리즘 도서들을 탐독했고, 무정부주의자들의 회합에 참여했다.

"러시아에서는 혁명가들이 황제를 폭탄으로 날려 버렸다. 최근에도 사회혁명당이 압제자들을 날려 버리고 있다고 한다. 일본 혁명가라고 러시아 혁명가보다 목숨 바칠 의기가 부족하겠는가?"

"러시아와 일본에서 전쟁을 획책하는 압제자들을 제거한다면, 빈민직공들이 서로 싸울 이유가 없다."

"히비야 시위는 비록 국수주의에 의해 촉발되었지만, 민중의 힘을 보여 주었다. 결정적인 한 방만 날린다면, 민중은 폭발할 것이다."

"원로랍시고 군림하는 이토, 마쓰가타, 이노우에, 야마가타는 실로 간악한 도적이다. 저 어리석은 국수주의자들이 이토를 날려 버렸는데, 우리 혁명가들이 우익에게 밀려서야 되겠는가?"

"야마가타, 이자야말로 가장 부패한 자로, 전쟁을 획책하여 수많은 빈민직공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려는 도적 중의 도적이다. 야마가타를 처단하여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 줘야 한다."

의기는 좋아도, 무정부주의자들은 ‘폭발’을 실현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하지만 미야가와는 회심의 미소를 흘렸다. 그는 은밀히 폭탄 제조법을 익혔고, 성능도 확인했다.

"동지. 동양에서 가장 선진적인 국가인 일본이야말로, 혁명의 첨병에 서야 합니다. 러시아에서 혁명이 임박했습니다. 러시아와 일본에서 혁명이 동시에 일어난다면, 자연히 그 혁명은 한국과 청국에도 전파됩니다. 세계혁명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영광의 첫걸음을, 동지가 먼저 나서 주십시오. 저는 비록 망명자 신분이라 당장 나설 수 없으나, 조국으로 돌아가 뒤따르겠습니다."

러시아 체류 경험이 있다는 ‘국제 우인(友人)’은, 러시아에서 배워 왔다는 사제 폭탄 제조법을 미야가와에게 전수했다. 미야가와는 자신이 만든 폭탄의 성능을 시험하고, 마침내 때가 왔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주의자들이 입씨름을 하는 동안, 나는 민중의 영웅이 될 것이다.’

미야가와는 혁명가라기보다는, 얼치기 딜레당트에 가까웠다. 극기의 헌신을 보여 주는 진정한 혁명가들과 달리,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드높이고 싶은 욕구에 불타고 있었다.

1904년 5월 15일.

이날은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9주년 기념일이었다. 위수령의 여파가 남아 있으므로 성대한 축하 행사는 없었지만, 육·해군은 각자 별도로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10년 전, 대일본제국 육군은 대륙으로 웅비하여 청국을 격파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획책으로 부당하게도 전리품을 빼앗기고 말았다. 러시아의 음모가 명백히 밝혀진 지금, 천황 폐하의 군인으로서 목숨 바쳐 싸울 준비를 하라. 러시아와 그 앞잡이들을 무찌르고, 진취개국을 달성하자!"

"대일본제국 만세! 천황 폐하 만세!"

육군 기념식에 참석한 야마가타는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해주육종, 북수남진에 불만을 품고 있던 야마가타는 마침내 반격의 기회가 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기념식과 만찬도 마치고, 야마가타는 만족스럽게 춘산장으로 돌아갔다.

야마가타를 육군 헌병들이 상시적으로 경호했지만, 이날은 승전 기념식의 여파인지 호위가 느슨해져 있었다.

마차가 춘산장에 접근하던 순간.

"다이너마이트로 쾅!"

호위병이 미처 제지할 틈도 없이, 골목에서 튀어나온 청년이 폭탄을 던졌다.

쾅!

폭발과 함께, 야마가타의 한쪽 팔이 날아가 버렸다.

- 41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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