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363화 (362/812)

44화 공안정국

20세기 초, 대한제국의 치안·정보기관은 다음과 같다.

내무부 산하 경무청(警務廳)은 국내의 전반적인 치안을 책임졌고, 궁내부 산하 경위원(警衛院)은 황실과 관련된 경비를 맡았지만, 대내외적으로 최고 정보기관으로 통하는 곳이었다.

군부 산하로는 육군정보국과 국가헌병대가 있었고, 군사정보를 책임졌다.

이희두(李熙斗) 참령은 네 개의 정보기관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감찰에 걸리지 않도록 은밀히 행동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급장교인 그도 제5의 기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늦가을 어느 날 밤, 어둠 속에서 나타난 사내들은 이희두의 목덜미에 권총을 겨눴다.

"이희두 참령, 같이 가 주셔야겠습니다."

"누, 누구냐?"

"잔말 말고 빨리 타기나 해."

사내들은 이희두의 눈을 가리고, 검은 장막에 가려진 마차에 태워 어디론가 끌고 갔다.

모처에 끌려간 이희두는 어둠 속에 방치되었다. 그는 꼼짝없이 죽었다 싶었다. 인기척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안대가 풀렸다.

"육군 참령 이희두. 육군무관학교 졸업, 독립전쟁 참전. 일본 육군사관학교 전술과 특별과정 수료. 일본 육군 대연습에 한국 무관대표로 참관, 훈4등 욱일장 수여. 현 육군무관학교 학도대장."

뜻밖에도 검은색 정장 차림의 젊은 사내가 이희두의 약력을 읊었다.

"성은을 입어 입신양명의 길을 걸은 장교가, 뭐가 아쉬워서 반역을 꾀했는지? 아,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아서? 일본이 조국처럼 느껴졌나? 근데 귀관을 학비까지 대줘 가며 일본에 보내 준 건 대한인데."

"저,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소관이 어찌 감히 반역을……."

"이 참령, 우리는 오해 같은 건 안 합니다. 귀관이 비밀리에 유신회에 가담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

이희두는 어떻게 비밀이 폭로됐는지 의문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개제가 없었다.

"군인 신분으로 정치단체에 가입한 게 부적절한 행동이라는 건 인정합니다만, 반역은 가당치도 않습니다."

"유신회가 일본 흑룡회의 하부조직이라는 건 다 알고 있소. 그러니 피차 시간 낭비하지 말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귀관이 무슨 이유로, 무슨 목적으로 유신회에 들어갔는지 관여하지 않겠소. 하지만 앞으로 우리 지시를 받지 않는다면 살아남기 어려울 겁니다."

사내의 싸늘한 시선은 이희두의 기를 죽였다. 그는 일본의 힘에 감화되어 일본식 유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유신회에 가담했지만, 목숨 걸고 반역을 도모할 생각까진 없었다.

"아니, 귀관만 위태로운 게 아니지. 일본에 유학 다녀온 모든 장교들의 충성심이 의심받게 될 겁니다. 군내에서 일대 숙청이 단행될지도 모르지. 동료들, 후배들 앞길 다 망칠 생각입니까?"

"그, 그건……."

"원래대로라면 봐줄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귀관의 창창한 앞날을 생각해서 기회를 주는 겁니다. 목이 날아가든가, 공을 세워 죄를 갚든가."

"…… 지시라 하시면,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채찍과 당근을 연달아 내미는 사내의 수완에, 결국 이희두는 굴복하고 말았다.

사내는 이희두에게 구체적인 지시사항을 하달했다. 이희두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심적으로 최후의 갈등이 남았다.

"소, 소관은 명색이 무관인데 밀고자가 되라는 말씀이십니까?"

"역적이 되는 것보단 낫지 않겠소?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지. 방첩 업무에 투입됐다고 생각하시오. 사태가 잘 해결되면, 독일 유학을 주선해 드리지. 현 군부에서 독일 유학만큼 진급에 큰 도움이 되는 건 없지요. 부령 진급하고, 장차 별도 달아봐야지. 자신이 그럴 만한 능력이 된다고 생각하지요?"

사내의 능란한 화술에 이희두는 완전히 굴복했다. 이희두는 ‘방첩 요원’이 되기로 받아들였지만, 도저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선생은 대체 누구십니까? 경무청은 아닌 것 같은데, 경위원입니까?"

사내는 처음으로 표정을 풀고, 씩 웃었다.

"국가를 위해 일합니다."

"국가라 하시면……."

"국가는 곧 황제 폐하지요. 성총을 보좌하는 게 우리 일입니다. 이만하면 설명은 충분하겠지요."

사내의 말투는 정중했지만, 더 이상 알려 하지 말라는 태도였다. 이희두는 사내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선이 제국익문사를 통해 유신회의 전모를 파악하고, 첩자를 심어 둔 건 1903년 가을의 일이었다.

러시아와 일본의 충돌이 심해지는 틈을 타, 흑룡회와 손잡은 유신회는 일본과 아시아주의에 심취한 자들을 끌어 모아 세력을 불리고 있었다.

"최대한 세를 불리게 내버려 두게. 언제든 때가 되면 일망타진할 수 있도록."

이선은 일부러 흑룡회와 유신회가 활동할 여지를 열어 두고, 상황이 무르익을 때까지 내버려 두었다.

1904년 4월 29일,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 극우파에게 폭탄 테러를 당하자, 마침내 이선은 그동안 묵혀 두었던 낚시밥을 던져 놓았다.

"즉시 작전을 시행하라."

미끼를 문 대어들이 춤을 췄다. 이토에 이어 이선까지 ‘로탐’들을 날려 버리면 폭풍을 일으킬 수 있다고, 어리석은 자들은 역사의 무대에 올랐다고 착각했지만, 실상은 이선의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었다.

김봉석 정위의 고변이 박용화와 박영효를 거쳐 경운궁에 닿았을 때에, 이미 이선은 모든 걸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물고기들은 모조리 그물에 잡히고야 말았다.

‘우범선, 송병준, 윤시병, 유학주 등등이라. 매국노들이 한자리에 모였군. 역사가 바뀌어도 한번 매국노는 영원한 매국노인가?’

물론 꼭 그렇지는 않았다. 실제 역사의 친일 매국노 중 신념형 친일파는 드물었고, 대부분 기회주의자, 힘에 굴종하여 빌붙은 자였다.

대한제국의 힘이 강력하다면, 구태여 편을 갈아탈 이유도 없었다.

친일 매국노의 대명사나 다름없는 이완용도, 철저한 기회주의자답게 친미와 친러를 거쳐 친일에 도달한 것이었다.

바뀐 역사의 이완용은, 국제정세에 밝고 영어 잘하는 실무형 관료였다. 각국 주재 외교관을 역임하고, 협판급 지위에 이르렀다. ‘기계나 다름없는 인간’이란 평가처럼, 명령을 받는 관료로서의 업무능력도 괜찮았다.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할 지위에 앉히지 않으면 돼. 기계는 기계답게 충실히 일을 시키면 된다.’

결코 정치를 책임질 지위에는 올릴 생각이 없었다. 이완용의 역할은 실무 관료까지였고, 그 자신도 갑신경장부터 국정을 이끌어온 개화당 거목들을 제치고 권좌에 오르겠다는 야심 같은 건 없어 보였다.

‘송병준 같은 모리배는 어떤 의미에선 다루기 쉽지.’

송병준은 그야말로 모리배였다. 개항장에서 미곡 수출을 해서 돈을 벌어들인 송병준은, 이익형 친일파였다. 대로동지회와 흑룡회에 매수되어 일본의 앞잡이가 되었을 뿐, 뭐 대단한 신념이 있는 건 아니었다.

‘우범선, 그나마 이 자가 신념형 친일파인가.’

별기군 시절부터 개화당에 가담한 우범선은, 철저한 일본식 유신 지지자였다. 개화당 주류에서 밀려나 친일분자로 찍혀 군복을 벗은 후에는 더욱 일본에 심취했고, 끝내 흑룡회와 손잡고 정변을 도모했다.

‘친일 성향이라고 다 숙청하는 건 아닌데, 착각도 유분수지. 박유굉은 일본 육사 출신이지만 유능하니까 30대 초반에 장군까지 오르지 않았나. 우범선은 전형적인 정치지향형 군인이었어. 근대적 군사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개화 초기에는 필요했을지 몰라도 군의 전문화가 필요한 시점에선 아니지.’

한때 개화당과 이선에게 충성했던 우범선의 몰락은 다른 자들과 비교하면 참작의 여지가 있었지만, 용서해 줄 수는 없었다.

용서해 줄 수는 없었으나, 이선은 역모 피의자들을 죽일 생각도 없었다.

"내무협판. 짐은 역적들을 재판에 세울 것이네. 재판 전까지, 이들이 순순히 자복하고 대한에 충성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면 하는군."

"예, 폐하! 다시는 이런 흉역한 역적이 없도록, 철저히 발본색원하겠습니다."

"헌법 제정 후 최초의 대역 사건이니만큼, 재판은 국가의 정당성을 확인하고, 최악의 역적들조차 개심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줘야 하네. 자의로 개심하면 가장 좋은 건데, 타의로 변심해도 상관없네. 재판에 보이기만 하면 돼. 그러니 앞으로는 신문을 하더라도 외관은 건드리지 말게. 육체가 아니라 정신을 굴복시키란 말일세."

이선이 꾸미는 건 일종의 ‘전시(展示)재판’이었다.

황제 시해를 꾀한 최악의 역적들조차 정당한 근대적 재판을 받고, 자발적으로 개심하여 과오에 대한 반성과 국가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며, 국가는 관대하게도 이 어리석은 적자(赤子)들의 회심에 관용을 베푼다-라는 구상이었다.

신념형 지사가 아니라, 기회주의자들이라면 살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터였다.

이선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황공하옵게도 대황제 폐하께옵서는, 너희와 같은 역적도 황제의 적자이니 관용을 베풀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한다. 지극한 성은에 보답해야 하지 않겠는가?"

"예, 예! 이르다 뿐입니까. 이 흉악무도한 역적을 용서해 주시다니, 성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유신회장 윤시병이 고개를 거듭 조아렸다. 그동안 경무청의 모진 고문을 받았던 그는 이대로 죽는 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내무협판 민영환이 직접 신문을 맡아 온건한 조치를 취해 주니 살았다 싶었다.

"그럼 뭐라고 자백해야 할지는 알고 있겠지?"

"예, 예. 저와 유신회는 그저 하수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든 건 흑룡회가 꾸민 일입니다. 흑룡회, 그리고 흑룡회와 결탁한 한성신보의 일본인들이 대역 음모를 종용했고……."

"나는 조선인 송병준이지만 동시에 일본인 노다 헤이지로이기도 하다! 도대체 경무청이 무슨 권리로 나를 잡아 신문하는 거냐! 이건 조작이야! 일본 정부가 강력히 항의할 거다!"

처음 잡혀 올 때만 해도 가장 발악하던 송병준조차도, 신문과장 안환과 순검들의 매타작을 계속 두드려 맞은 결과 이제는 순종적인 개나 다름없었다.

"모든 건 흑룡회의 공작 때문입니다. 신 송병준, 살려만 주신다면 어리석은 과오를 참회하고 대한과 황제 폐하의 충량한 신민으로 살겠습니다."

민영환은 한 사람씩 자백서를 받아 냈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우범선도 민영환이 직접 대면했다.

"우 정령, 한때 그대는 대한의 자랑스러운 무관 아니었는가. 비록 잘못된 길을 걷기는 했지만, 성상께서는 대역 수괴나 다름없는 그대에게도 관용을 베푸려고 하시네."

"이희두가 황제의 밀정 아니었소? 폭탄을 던지자고 충동질해 놓고, 밀고해서 대역 사건을 발표한 거 아니오? 국내 친일 세력과 일본을 한 번에 모두 엮을 수 있게 됐으니, 대단한 책략입니다."

우범선의 냉소에 민영환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이희두 참령도 흑룡회의 협박을 받아 강경책을 선동한 것이네. 견디다 못해 자수한 거고. 김봉석 정위도 자수했지. 이들은 고변의 공로를 인정받아 관대한 처우를 약속받았네. 뿐만 아니라, 역모에 가담한 유신회 지도부도 사형만은 면하게 될 걸세."

"허어, 참 눈물 나게 관대하시군."

"성상께서는 특히 자네를 안타깝게 여기셨네. 개화당 동지였던 자네가 어쩌다 오늘날 이 지경까지 이르렀냐고 말이야. 성상께서는 일본을 적대할 생각이 없는데, 자네가 지레짐작해서 이 지경까지 온 게 아닌가!"

"……."

"나를 보게. 내가 바로 그 임오년 역적 민겸호의 아들이야. 하지만 성은을 입어 오늘날 이 자리에 올랐네. 이처럼 성상께서는 신민 모두를 아끼시고, 누구에게나 다 기회를 주고 싶어 하시네. 일본에 남겨 둔 처자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나? 자네가 끝내 개심하지 않은 역적으로 죽는다면 자네 아들은 영영 역적의 자식이 되어 동포들의 분노를 받겠지. 하지만 자네가 개심한다면, 자네 아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질 거야. 누가 아나, 자네 아들도 나처럼 각료의 반열에 오를지."

자식의 운명을 놓고 한동안 고심하던 우범선은, 마침내 깊은 한숨을 토해 내고 말았다.

"명하신 대로 하리다. 내가 어찌하면 좋겠소?"

"잘 생각했네. ……이렇게 자백서를 쓰고, 재판에서 증언하면 되네."

심문 과정과 ‘역적들의 참회’는 언론을 통해 제한적으로 보도되었다. 평리원 특별 법원에서는 재판을 준비했고, 검사 출신 법무협판 이준은 ‘헌법과 형법에 따른 공정한 재판’을 천명했다.

"이 극악무도한 역적놈들에게도 관용을 베푸시다니, 황제 폐하께서는 어찌 이토록 어지시단 말인가."

"그러게 말이야. 대로변에서 사지를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을."

"신민은 모두 황제의 적자이니, 어리석고 못난 자식들이라도 개심의 기회를 주겠다는 지극한 성심이 아니시겠는가."

"참으로 황제 폐하께서는 성군이시네."

"그래, 이놈들은 신민이라 그렇다 쳐. 그런데 역모를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왜놈들은 왜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 건가?"

"저 왜놈들은 영사재판권이란 게 있어서, 국내법으로 처벌이 불가능하지 않다던가. 일본 재판정에서 처벌받게 된다는군."

"말도 안 돼! 국내에서 대역죄를 저질렀는데, 왜 일본에서 재판을 받냐고! 당장 때려 죽여도 시원찮은데!"

"그러니 이 영사재판을 개정해야 돼! 하지만 일본뿐만 아니라 서양도 개정을 반대하고 있으니……."

"하여튼 양놈이나 왜놈이나 다 매한가지구만."

"아무튼 일본과 손잡아야 한다고 하는 놈들은 다 역적이나 다름없어!"

배후로 지목된 일본인 피의자들, 흑룡회 요원들과 한성신보 기자들은 경무청의 강도 높은 신문을 받긴 했지만, 참고인 신분으로 남았을 뿐 기소되어 재판에 넘겨지지는 않았다. 영사재판권 때문이었다.

국민들 사이에는 반일 감정, 특히 불평등 조약과 영사재판권에 대한 반감이 솟구쳤다.

"좋아, 마음에 드는군."

이선은 차갑게 웃었다.

일본 정부는 얼마 전까지 주한 공사를 지낸 내무대신 하라를 특사로 보내, 일본인이 연루된 대역 사건에 유감을 표명하고 한일 관계를 개선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산적해 있는 일본 국내 문제를 생각해 볼 때, 사이온지 내각의 이인자 하라의 한국행은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다는 의미였다.

"이제 동양 연대니, 아시아주의니 떠들어 댈 놈들도 없을 테니 말이야."

한국인들 사이에서 반일 감정이 솟구치고, 친일 세력과 아시아주의자들은 역적과 연루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반일 구호를 외치거나 아예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일본이 그동안 공들여서 쌓은 한국 내 친일세력이 일거에 쓸려나간 셈이었다.

"자, 이제야 비로소 일본과 대등한 위치에서 협상이 가능하겠군."

역설적으로, 이선은 비로소 현시점에서야 한일 간의 협상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동안 한일 협상에 방해가 되는 장애물들은 모두 치워졌고, 이선이 깔아 놓은 새 판에 일본이 올라와야 했다.

공안정국(公安政局)이 조성한 기회였다.

- 45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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