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군부(軍部)의 총의(總意)
러시아 국무회의는 외교 문제에 있어 현상유지를 결정했다.
"당초 계획대로 극동군과 태평양 함대 증강 계획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어찌 되었건 저들이 러시아를 겨냥하는 조약을 맺은 이상, 명분은 충분합니다."
러시아는 당초 1905년을 목표로 극동군과 태평양 함대를 증강한다는 계획이 추진 중이었다.
특히 군함을 대대적으로 확충하고 있었다. 계획대로라면 태평양 함대는 1905년 말까지 전함 10척, 순양함 17척, 구축함 33척을 보유한 아시아 해역 최강의 함대가 될 예정이었다.
"유럽 상황을 보건대, 육군은 계획대로 극동에 대대적인 증강은 어렵습니다."
"어차피 일본이 섬나라인 이상, 피차 전쟁을 결심하더라도 1차적으로 해군력이 중요합니다. 전쟁 억지(抑止)를 위해서라도 함대는 증강되어야 합니다."
육군과 해군은 다른 입장을 보였다.
육군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대립이나 국내의 혁명적 상황에 대비해야 했지만, 해군은 오히려 수병의 급진화를 두려워해 태평양으로 보내고 싶어 했다. 러시아 해군은 육군보다 사회 분위기에 더 큰 영향을 받았다. 수도의 지척에 있는 발트 함대에서 불온한 분위기가 보인다는 우려가 돌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태평양 함대는 무풍지대였다.
"좋소. 발트 함대에서 군함을 차출해, 계획대로 태평양 함대를 증강시키도록 합시다. 저들에게 러시아 해군의 위용을 보여 주어 아예 전쟁은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차르는 태평양 함대 증강을 결정했다. 해군력의 강화가 전쟁 억지에 도움이 된다고 믿고.
대한제국, 황성.
겨울에 접어든 날씨는 쌀쌀했다. 하지만 관료와 군인들은 바쁘게 뛰어다니며 추운 줄도 몰랐다.
한국은 상호방위조약을 1904년이 가기 전에 비준 완료하기로 했다. 보통 동맹 체결에서 비준까지 1년 정도 시간이 소요되는 걸 감안하면, 이례적으로 빠른 속도였다.
조약의 심의는 중추원이 맡았다. 중추원이 사실상 정부의 거수기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부에서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중추원 종신의관으로 의장을 맡고 있는 원훈 김홍집이 조약 심의를 총괄했다. 비준은 국가원수인 황제의 몫이었다.
"폐하, 중추원은 심의를 완료하고, 만장일치로 조약을 의결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노고가 많으셨소, 대감. 경의 연배가 적지 않은데, 총리에서 물러난 후에도 계속 나랏일을 도맡아 주니 고마울 따름이오."
"신은 조미수호조약 이래 서양과의 조약을 도맡았습니다. 대한이 마침내 서양 제국과 동렬에 서는 걸 보게 되었으니, 노신은 이제 여한이 없나이다. 성상의 지극한 성은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김홍집은 감격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조선이 국제사회에 막 문을 열 때부터 외교를 도맡아 했던 그로선, 오늘날 위상의 변화에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록 방위조약은 체결되었지만, 군은 언제나 엄중한 인식을 지녀야 한다. 조약만으로는 국가를 지킬 수 없다. 우리의 무력이 뒷받침되어야, 진정한 국가방위를 이룩할 수 있다."
"예, 대원수 폐하!"
이선은 군부 고위인사들에게 국방 계획을 차질 없이 진행하라고 명했다.
올해 남만주에 정식으로 7사단이 창설되어, 근위사단부터 7사단까지 8개 상비사단이 구축되었다.
새로 8사단도 창설을 준비했다. 이를 위해 내년도 징병 장정은 전년보다 1만 명이 증가할 예정이었다.
광무 11년(1907)까지 10개 상비사단 체제를 구축하고, 전시에 동원할 예비사단도 20개로 확충해 유사시에 대비할 계획이었다.
상비사단 증설은 병력만 늘린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무기, 탄환, 피복, 병영, 군량 등 각종 군비 확충이 뒤따라야 했다. 사단 편제가 완료되더라도, ‘현대화’에 필요한 비용은 계속 발생했다.
"결국 당분간은 정부 예산에서 군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클 수밖에 없소. 재원 조달에 만전을 기하도록 합시다."
개화당 정부는 군비 확대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으므로, 군비 예산 증액에 동의했다.
지금까지 한국에 군비 지원을 이어 왔던 러시아에게 더 이상 의존할 수 없는 상황인 만큼, 동맹인 영국과 일본에서 지원을 약속했다.
대한제국군 제식소총 ‘광무 소총’, 즉 모신나강의 생산 계약은 조약 체결 후에도 유지되었지만, 앞으로도 러시아의 무한한 호의를 기대할 수 없었다.
영국의 하이람 맥심은 그동안 한국 군부가 염원했던 맥심 기관총의 현지 생산을 허가했고, 면허 계약에 막대한 비용이 들었지만 한국은 받아들였다.
국방력 강화는 황제, 정부, 군부, 의회, 국민 대부분이 동의하는 사안이었다.
‘국방’은 신생 대한제국의 신성한 사명으로 여겨졌다.
* * *
일본, 도쿄.
일본에서도 상호방위조약을 놓고 추밀원에서 심의가 한창이었다.
국제조약의 심의는 제국의회가 아니라 원로들로 구성된 추밀원의 몫이었다. 그리고 형식적인 천황의 재가를 통해 칙령으로 반포되는 형태였다.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는 의족을 하고 정계에 복귀했다. 방위조약의 필요성은 그 자신도 공감하는 만큼, 직접 심의하고자 했다.
부의장 야마가타 아리토모도 정계에 복귀했다. 외팔이 야마가타는 의수를 하지 않고, 전쟁에서 입은 부상마냥 자랑스럽게 군복 왼팔을 펄럭였다.
"에, 삼가 천황 폐하의 명을 받들어, 추밀원에 자문된 조약안은, 내각의 의견을 바탕으로, 원로와 육해군 당국자의 협의를 거쳐 기초된 것이니만큼, 긴급을 요하는 현안이니만큼 추밀원의 즉결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다들 이의 없으시지요?"
의장 이토의 말이 끝나자마자, 부의장 야마가타가 멀쩡한 오른팔을 들었다.
"이의 있소!"
"뭡니까, 부의장?"
"조약이 공수동맹(攻守同盟)이 아닌 상호방위조약으로 규정된 이상, 부득이한 선제공격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소이다!"
"아니, 부의장께선 4조와 5조도 다 안 읽어 보셨소? 그럼 내가 읽어 드리리다."
제4조. 만약 1국이 자국 방위에 필요하다 판단하여 제3국을 향해 선제공격을 한다면, 나머지 조약 당사국은 우호적 중립을 지킨다.
제5조. 만약 2개 이상의 열강이 적대국으로 참전해 교전이 발생한다면, 중립을 지키던 조약 당사국도 참전하여 공동 작전을 펼 의무가 있다.
"팔과 달리 눈에는 문제가 없을 터인데, 혹시 시신경에도 문제가 있으신 게요?"
이토의 노골적인 비아냥거림에, 야마가타가 오른손으로 탁자를 탁 쳤다.
"의장이야말로 다리가 아니라 머리에 문제가 생긴 거요? 똑똑히 보시오! 참전 의무는 오직 방어에만 발생하고, 공격 시에는 적의 동맹이 개입했을 때만 의무가 있잖소! 만약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 위기에 직면했다고 봅시다. 상대적으로 약한 일본은 기습적인 선제공격 말고는 대안이 없어요. 그런데 동맹의 우호적 중립만으로는 부족하단 말이오!"
"아니, 상호방위면 충분하지, 무슨 선제공격 타령이오. 군부가 그토록 강조하던 제국의 안보가 이 조약으로 보장되는데, 꼭 선제공격을 운운해야겠소?"
"일본이 조약에 목이나 매다는 동안, 러시아는 계속 병력을 증강하고 있소! 저들이 작정하고 육군을 배치하고 함대를 증강하면 일본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소. 계속 실기(失期)하고 있단 말이오!"
이토가 혀를 끌끌 찼다.
"그러니까, 그 러시아가 만약 남침이라도 하게 되면, 동맹인 영국과 한국이 개입할 의무가 생기잖소. 그래서 상호방위조약을 맺은 거 아니오?"
"이건 일본이 아니라 한국을 위한 조약이오. 만약 한국과 러시아 간에 분쟁이 발생하면, 러시아와 육지로 연결된 한국은 직접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크지. 그 경우에는 일본이 강제로 끌려들어 가게 되오. 일본과 러시아 간에 분쟁이 발생하면, 섬나라 일본은 먼저 러시아 함대를 공격해야 승산이 있소. 그런데 그 경우에는 한국은 구경만 하는 거 아니오!"
"부의장, 왜 자꾸 똑같은 말을 반복하게 합니까? 우리가 왜 꼭 선제공격을 해야 하냔 말이오! 상호방위조약을 지렛대로 삼아 러시아가 전쟁을 도발하지 못하게 하면 충분하지!"
적극적인 확장론자인 야마가타는 ‘상호방위조약’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고, 러시아와의 전쟁을 반대하는 이토로서는 충분히 만족할 만한 조약이었다.
"도대체 그동안 뭘 위해 국민을 쥐어짜서 군비를 그토록 썼던 거요? 그 막대한 건함비의 목적은 뭐요? 전쟁을 준비할 목적이 아니었다면,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냔 말이오! 러시아가 우리 선박을 침몰시키고 국내에서 테러 공작까지 벌이는데, 계속 굴욕만 감내하자는 거요!"
"국방의 본연 목적이란 문자 그대로 국가를 지키기 위함이지, 전쟁을 하자고 있는 게 아니오!"
야마가타의 외침에 이토도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윽고 이토는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이미 지난 7월에, 황공하옵게도 천황 폐하께옵서는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시고 조약 체결을 명하신 바 있었소. 우리는 신하된 처지로 마땅히 지엄한 황명을 따라야 할 것이오."
‘흥, 천황의 뜻이 아니라 이토 네놈과 사이온지, 하라 이 애송이들의 뜻이겠지.’ 야마가타는 불만이 가득했지만, 입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천황의 명이라는 말에 충신임을 자임하는 야마가타가 맞설 수는 없었다.
"더 이의 없지요? 그럼 추밀원은 심의를 마치고, 삼가 천황 폐하께 재가를 요청하도록 합시다."
더 이상 이의는 없었다. 추밀원은 상호방위조약 심의를 마치고, 천황에게 상주를 준비했다.
며칠 뒤, 춘산장(야마가타 저택).
조슈 출신으로 야마가타 파벌에 속하는 전 내무대신 가쓰라 다로 대장,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 중장, 근위사단장 하세가와 요시미치 중장이 모여들었다.
이윽고 육군참모총장 오야마 이와오 원수, 육군참모차장 고다마 겐타로 대장, 도쿄위수총독(위수령 사령관) 노기 마레스케 대장이 도착했다.
오야마가 야마가타에 비견될 사쓰마 출신 육군 원로이고, 고다마와 노기가 조슈 출신이지만 야마가타 파벌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회동이었다.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드리오, 여러분."
"아닙니다, 원수 각하. 어인 일로 육군의 핵심인사들을 한자리에 부르셨는지?"
"나랏일이 걱정이 되어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요. 여러분, 우리는 모두 유신 이래 국가 건설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불초 아리토모는 끝내 폭도에 의하여 팔까지 잃고 말았지요."
야마가타는 왼쪽 팔을 들어 올렸다. 군복 소매가 힘없이 펄럭였다.
"경시청 조사에 따르면, 이 폭도는 자칭 무정부주의자 단독범이지만, 배후에는 연해주에서 온 러시아 출신 조선인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 하더군요."
"아마 러시아 정보부가 개입되어 있다고 추정됩니다. 일본인과 유사한 외모의 조선계 러시아인을 입국시켜서 배후 조종을 했겠지요. 굳이 대러 강경파인 야마가타 원수를 노린 것도……."
"그렇소! 러시아는 군함을 동원해 우리 상선을 공격해 민간인을 죽이고, 심지어 타국에서 테러 공작을 벌여 수도 한복판에서 국가 원로에게 폭탄을 던지게 했소! 러시아는 우리의 정당한 사과 요구에 최소한의 해명도 하지 않고, 오히려 군대를 증강하고 있소. 그런데도 사이온지 내각은 러시아에 굴욕적으로 끌려다니고 있소. 이게 가당키나 한 말입니까?"
야마가타는 열변을 토했다. 러시아가 자신의 팔뿐만 아니라 일본의 국위까지 손상시켰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군인은 정치 불개입이 원칙이라, 현역 군인 신분인 장군들은 듣고만 있었다.
"오야마 원수, 추밀원에서 보셨지요? 이토 후작은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러도, 여전히 러시아를 두려워하기만 합니다. 제국에는 일영동맹이면 충분했어요. 정 한국을 끌어드리고 싶었더라면, 공수동맹을 맺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상호방위조약이라니, 도대체 이 무슨 애매한 행태입니까?"
"으음……."
오야마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지 29년(1896)부터 내년까지, 10개년 계획으로 매년 막대한 건함 예산을 지출합니다. 그 결과 내년에는 그 자랑스러운 해군의 8·8 함대가 완성된단 말입니다. 하지만 그걸 도대체 어디에 써먹으려고 둔답니까? 국민을 그토록 쥐어짜고, 건함비 명목으로 밥값까지 빼앗아가며 만든 그 함대는 대체 어디에 쓰려고 한단 말이오?"
지난 10년간, 일본은 막대한 건함 예산을 들였다. 매년 3할의 국가 예산을 쓴 것도 모자라, 예상보다 비용이 더 들자 ‘건함비’로 전 국민의 봉급에서 2.5%를 추가로 더 각출했다. 명목상 자원 납부였지만, 실제로는 강제였다.
가뜩이나 많은 세금에서, 추가로 더 건함비를 걷으니 국민의 원성이 자자했지만, 황민화 교육을 받은 일본인은 ‘전 국민이 밥 한 끼를 덜 먹어 군함 한 척을 더 건설한다면, 얼마든지 굶을 수 있다’라는 국가의 표어를 받아들였다.
이러니 일본인들이 전쟁을 회피하는 정부에 불만을 품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전쟁을 안 할 거면, 그렇게 많은 군비를 걷어 왜 대규모 함대를 양성한단 말인가.
"그에 비해 육군은 북수남진이라는 명목으로 완전히 종속된 처지로 취급당하고 있소. 육군이 2개 상비사단 증설을 그토록 요구했는데, 예산 부족을 핑계로 계속 거절만 당하고 있지. 우리는 메이지 31년부터 지금까지 13개 상비사단에 머물러 있는데, 저 한국마저도 10개 상비사단을 만든다고 합니다. 도대체 제국이 한국 따위에게 밀린다는 게 말이 됩니까?"
"정부 입장에서야 한국과 동맹을 맺게 되었으니, 육군은 그들에게 일정 부분 맡겨 놓고, 해군력 육성에 집중하려는 것이겠지요."
육군의 실질적인 책임자인 참모차장 고다마가 정부를 옹호하는 입장을 보였지만, 그도 내심 정부 입장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국은 그렇다 치고, 그럼 계속 증강될 러시아 극동군은 어찌 상대하렵니까? 앞으로 이렇게 계속 가면 해주육종이 현실화되고, 육군은 해군의 보조 병력이나 될 겁니다. 정녕 그걸 원하는 분은 없겠지요?"
"으음……."
대답은 없었지만, 이 자리의 그 누구도 육군이 해군에게 종속되는 미래를 원치 않았다.
"하지만 현재로선 뾰족한 수가 없지 않습니까?"
"방법은 있소. 이 자리에 모이신 분들은 모두 군부의 원로이자 우국지사이니만큼, 내 호소에 응해 주리라 믿소이다."
야마가타는 마치 유신 이전의 지사로 돌아간 것처럼, 무릎을 꿇고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단결하여 군부의 총의를 보입시다. 정부가 더 이상 군부를 무시하지 못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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