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위기의 연쇄
「프리비슬린스키 총독부를 습격하려 한 극렬 사회주의·분리주의 폭도들에 맞서, 황제 폐하의 충성스러운 군대는 진압을 완료하고 바르샤바의 치안을 회복했다. 군대의 해산 권유를 거부하고 저항을 하던 폭도들은 사살되었으며, 부상자들은 당국의 관대한 보호를 받으며 치료 중이다. 폭도의 사망자는 99명, 부상자는 330명, 체포된 자는 3,000명…….」
내무부의 공식 발표는 진압의 정당성을 옹호했다. 친정부 언론은 공식 발표를 그대로 받아 적어 신문에 냈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비무장한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서 쏴 죽였다는데?"
"죽일 놈들. 심지어 여자와 아이들이 있는데도."
"실제로는 사상자가 공식 발표의 두 배가 넘는데."
"내가 듣기로는 열 배라던데."
"어느 쪽이든 용서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야. 이건 폴란드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정부 놈들은 수틀리면 언제든지 사람들을 향해 총을 쓸 수가 있어."
당국의 공식 발표에도, 시위의 성격과 진압 경위, 사상자 숫자에 대한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돌았다.
바르샤바에서 가까운 곳일수록, 저항의 파도가 빠르게 번져 나갔다. 20세기의 진보된 통신망은 신속히 소식을 전하고, 사람들을 모이게 했다.
"리투아니아 인민은 바르샤바 시민들의 희생을 잊지 않는다. 전제정권 타도! 제국 타도!"
1월 23일, 리투아니아 빌뉴스에 저항의 깃발이 올랐다. 다음날에는 리보니아-쿠를란트(라트비아)까지 확산됐다.
리보니아의 주도 리가에서는 라트비아 사회민주당의 주도로 총파업이 선언됐다.
"차르 전제정권은 무고한 인민을 학살했다! 라트비아 인민은 총파업으로 전제정권에 맞서 싸워야 한다!"
리가는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바르샤바, 오데사, 우치의 뒤를 잇는 러시아 제국의 6대 도시였고, 두 번째로 큰 항구였다. 발트해의 무역 창구이자, 발트 함대의 군항도 지척에 있었다.
이미 6대 도시 중 바르샤바와 우치가 도시 기능이 마비에 접어들었는데, 리가까지 소요 사태에 접어들면 심각하다고 판단한 주 당국은 결국 악수(惡手)를 남발했다.
"조속히 파업을 진압하라! 저항하면 발포하라!"
1월 26일, 리보니아 주둔군은 총파업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시위대에 발포하여 80명이 사망하고, 2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바르샤바 ‘피의 일요일’에 이은 리가 ‘피의 목요일’이었다.
"또 학살이야? 군대가 완전히 미쳤군!"
"군이 명령 없이 움직였겠나? 이건 차르가 명령한 거야!"
"노동자 목숨은 하찮다 이거지?"
연이은 학살은 혁명을 잠재우기는커녕,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시대는 20세기에 접어들었는데, 차르와 내무대신, 군대와 경찰 관료들의 인식은 여전히 50년 전 니콜라이 1세 시대에 머물러 있다는 게 문제였다. 이들은 철권독재자 니콜라이 1세처럼 강경 진압만을 능사로 여겼지만, 시대는 크게 바뀌어 있었다.
"총파업!"
"납세 거부!"
"핀란드 인민은 폴란드 인민들과 연대한다!"
"러시아군은 물러나라!"
1월 27일, 에스토니아의 주도 레발(Reval, 탈린)과 핀란드 대공국의 수도 헬싱포르스(Helsingfors, 헬싱키)에서도 총파업이 선언됐다.
가뜩이나 러시아화에 분개하여 총독까지 암살할 정도로 반발하고 있던 핀란드인들은, 바르샤바 학살이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폴란드에 이어 발트해 전역에 혁명의 깃발이 올라가고 있었다.
마치 도미노처럼, 한 도시에서 총파업이 선언되면 다음 도시에서도 저항이 일어났다. 혁명적 위기의 연쇄였다.
"단 5일 만에! 바르샤바, 우치, 빌뉴스, 리가, 레발, 헬싱포르스! 제국 서부 영토 전역이 파업과 반란으로 뒤집어졌습니다! 제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단한 업적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비테는 신랄한 어조로, 호언장담을 했던 내무대신 플레베를 비꼬았다.
"일부 불순분자들, 사회주의자들과 분리주의자들의 난동일 뿐입니다. 전례 없이 빠른 반란의 확산 속도를 보면, 저는 오히려 배후가 있으리라 의심합니다."
"배후요? 대체 그 배후가 누구랍니까?"
"러시아 제국이 허약해지길 바라는 어떤 외세라도 가능하지요.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일본……."
플레베의 외세 배후론에 비테가 코웃음을 쳤다.
"일본이 폴란드, 발트, 핀란드의 반란을 배후에서 조종한다고요? 일본 따위에게 러시아 제국이 흔들릴 정도라면, 그야말로 망조가 든 거 아닙니까? 도대체 그 지경이 되도록 내무부 공안질서수호국은 뭘 했답니까?"
"……."
비테의 통렬한 비아냥거림에 플레베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총파업이 페테르부르크의 목전까지 왔습니다. 수도까지 혼란이 확산되기 전에, 선제적 조치를 취해야합니다."
"아닙니다! 페테르부르크는 잠잠합니다. 시간을 좀 더 주시면, 지방의 반란 시도를 진압하겠습니다."
호언장담과 달리, 이미 페테르부르크에서도 시위가 발생했다. 사회주의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자유주의자들까지 바르샤바와 리가 학살을 비난하며 책임자 처벌과 정치개혁을 요구했다.
"하, 또 실수를 반복하자고요? 분리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그렇다 치고, 최소한 자유주의자들은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정치개혁을 약속하고, 이 난국을 불러일으킨 책임자를 경질해야 합니다!"
니콜라이 2세는 침묵하고 있었지만, 심기가 극도로 불편했다. 반란 그 자체보다, 자신의 면전(面前)에서 자신의 통치를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비테가 더 불편했다.
"짐은 신성한 하느님으로부터 왕권을 위임받았고, 왕권은 침해될 수 없소. 선제 알렉산드르 2세께서는 백성을 어여삐 여겨 수많은 혜택을 베푸셨지만, 돌아온 건 역도들의 폭탄이었소. 총파업을 운운하는 무리들은 폭도나 다름없소. 짐은 폭도에게 결코 굴복하지 않겠소. 반란이 발생한 모든 도시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에 진압 권한을 부여하시오."
차르의 결정에, 비테는 결국 한숨을 쉬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동지들! 바르샤바, 우치, 빌뉴스, 리가, 레발, 헬싱포르스 등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결코 다른 민족, 남의 일이 아니외다. 노동자에게 조국이란 없소이다. 우리가 얻을 것은 세계요, 잃을 것은 쇠사슬뿐이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
페테르부르크에서도 파업이 시작됐다. 사회민주노동당의 영향력이 강한 금속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하지만 다른 도시와 달리, 페테르부르크는 총파업이 발생하지 않았다.
플레베의 호언장담대로 페테르부르크 노동조합은 대부분 경찰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페테르부르크 노동자들의 다수가 가입되어있는 ‘러시아 공장노동조합’은 정교회 신부 가폰이 지도했다.
노동자들이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일상적인 물질적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노력을 하며 정권에 대한 충성심을 육성할 목적으로 경찰이 은밀히 설립을 유도한 노조였다. 노동자들로부터 큰 신망을 받는 신부 가폰은 사실 경찰과 유착 관계였다.
"형제들이여, 정치적 목적의 시위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비록 포악한 자들이 바르샤바 시민들을 학살했으나, 자비로운 어버이 차르께서는 사태가 안정되면 책임자들을 처벌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경제적 목적에 집중해야 합니다."
가폰의 설득으로, 공장노동조합은 파업에 동참하지 않았다. 결국 페테르부르크에서는 총파업이 발생하지 않았다. 당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1월 30일. 바르샤바, 우치, 빌뉴스, 리가, 레발, 헬싱포르스와 인근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타협은 없었다.
"참, 세상은 알 수가 없어. 같은 나라 안에서 학살이 발생하고, 군대와 시위대가 충돌하고 있는데. 여긴 완전히 다른 세상이구만."
페테르부르크의 고급 호텔 로비에 앉아 있는 동양인 신사, 조한민은 혀를 찼다. 웅장한 고대 그리스 양식의 호텔에는, 화려한 차림의 귀부인과 멋진 제복 차림의 남성들로 가득했다.
"어쩌겠습니까. 이게 현실인걸. 어제는 외교관들을 초대하는 무도회도 열렸는데, 그렇게 성대할 수가 없더군요."
"페테르부르크는 평시와 다를 바가 없다, 는 걸 외국에 알리고 싶은 거겠지."
"뭐, 그렇지요."
역시나 멋들어진 외교관 제복을 입은 이위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익문사 업무를 함께 수행한 조한민과 이위종은 성격과 취향이 흡사하다는 걸 알게 되었고,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다.
"난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가까워지면서 노동자들의 현실에 대해 알게 됐지. 우리가 알고 있는 저 화려하고 위대한 유럽의 이면에는, 노동자와 농민들의 피와 땀이 박혀 있네."
"특히 러시아는 더 심합니다. 귀족들과 어울리다 보면, 현실인식이 어찌 이럴 수 있나 싶더군요."
"바로 지척에 빈민가가 있건만.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거겠지. 아니, 그런 현실이 있는 것 자체를 모르겠지. 뭐, 이해는 되네. 나도 저들처럼 태어났더라면 모르고 살았을 거야. 하지만 무지가 면죄부가 될 수는 없지."
두 청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한민은 화제를 전환했다.
"본국에서는 뭐라든가?"
"성상께서도 우려가 크신가 봅니다. 공사관에는 러시아 정부의 동향을 면밀히 살피라 명하셨습니다."
1월 22일 이후, 각국 외교관들의 행보는 바빠졌다. 주러 한국 공사관도 분주히 움직였다.
"익문사에는?"
"독리께서 곧 회의를 소집하려나 봅니다. 황명이 내려졌겠지요."
조한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사관이 바빠졌다면, 익문사에는 비상사태가 걸릴 터였다.
* * *
대한제국, 황성.
바르샤바에서 ‘피의 일요일’이 발생했다는 긴급 전문을 타진 받은 이선은 분노했다.
"결국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고 마는군! 역사가 바뀌어도 인간의 어리석음은 바뀌지 않나?"
이선은 친우 니콜라이에게 이토록 극심한 실망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역사가 바뀌면서 니콜라이 2세와 러시아 제국의 운명도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니콜라이는 명군이 되는 길을 끝내 포기하고, 끝내 암군의 길을 택하고 만 것인가. 이젠 나도 어쩔 수가 없군.’
바르샤바에 이어 리가에서도 학살이 발생하고, 러시아 제국 서부 전역에서 시위와 총파업이 이어지고, 계엄령이 내려졌다는 전문이 잇달아 쏟아졌다.
유라시아 저편 머나먼 외국의 일이지만, 이선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총리 김옥균, 내무대신 민영환, 외무대신 서광범, 군무대신 한규설, 원수부 참모국 총장 박유굉 등을 경운궁으로 소집해 대책회의를 열었다.
"러시아의 위기가 불과 1주일 사이에 심화되고 있소. 짐은 작금의 사태에 우려하지 않을 수가 없소."
"폐하, 러시아 정부의 성명에 의하면, 사태가 그리 심각하지 않고 소요는 이미 진압되었다고 합니다."
"그건 면피용 성명이지! 비무장한 시민을 학살했는데, 아무런 일이 없을 것 같소? 위기는 이제 시작일뿐이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비록 러시아 정부가 부덕한 짓을 저지르긴 했습니다만, 국가의 안녕을 위협하는 분리주의자들을 진압하는 건 부득이한 일로 사료됩니다. 신민이 이에 반기를 든다면, 오히려 반역이라 하지 않겠습니까?"
한규설의 말은 옛 유학의 관점이었다. 그런데 대부분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개화파라 할지라도 본래 유학을 익힌 사대부 출신이오, 권력을 집행하는 국가의 수뇌부이니만큼 이들은 저항하는 인민보다는 진압하는 국가에 더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신이 일전에 폴란드를 방문하니, 망국의 한을 짐작하게 했습니다. 그들이 분노하는 건 이해가 됩니다."
바르샤바 방문 경험이 있는 민영환이 이선에게 동조의 빛을 보였다. 자유주의 성향의 서광범도 고개를 끄덕였다.
"신도 약소민족을 동정하는 감정은 있습니다만, 국가를 뒤엎으려는 시도는 단호히 진압해야 합니다."
"시대가 달라졌소, 시대가. 강경 진압은 단호함의 표현이 아니라,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약점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오. 국민에게 총질하는 정권은 결코 오래가지 못하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결국 언젠가는 대가를 치를 날이 오고 말 거요."
20세기의 역사를 알고 있는 이선으로선, 완전히 다른 관점을 가졌다. 국민을 학살하는 정권은 결코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뭐, 솔직히 말해서 러시아 국내 사정은 우리가 관여할 바는 아니오. 문제는 이 위기를 틈타, 전쟁을 도모하는 무리가 있을 것이오."
"전쟁을 도모하는 무리라 하오시면?"
"당연히 일본 군부지."
가쓰라 내각이 수립된 후, 일본이 은밀히 대러 개전을 노리고 있다는 첩보는 이미 1월부터 들어와 있었다. 정통성이 떨어진다는 근본적 약점을 지닌 가쓰라 내각은, 호헌 운동이 거세지며 더욱 큰 정치적 압박을 받고 있었다. 때마침 발생한 러시아의 혁명적 위기를 쌍수 들고 환영할 게 뻔했다.
‘어떻게 주변에 정상적인 국가가 하나도 없냐? 자국민을 전쟁터에 갈아 넣을 생각만 하는 일본에, 자국민 상대로 총질하는 러시아에. 그나마 광서제는 낫긴 하지만 국가 기능 자체를 상실하고 있으니.’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일본이 먼저 선제공격을 한다면 모순이 아닐지요? 아무리 위기가 발생했다고는 하지만, 러시아는 100만 이상의 대군을 보유한 강대국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렇겠지. 하지만 짐은 일본 군부의 이성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소."
사이온지 내각이 퇴진하고 가쓰라 내각, 사실상 야마가타가 주도하는 조슈-육군 내각이 수립되는 걸 본 이선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1941년 고노에 후미마로가 퇴진하고 도조 히데키가 총리가 된 후에 진주만 기습한 걸 떠올리게 하는군. 전쟁 내각이야. 이토와 문민파들이 반발하긴 하겠지만, 결국 군부가 개전을 주도할 거다.’
이선은 전쟁을 예상했다. 다만 빨라야 5월은 되리라 생각했는데, 러시아에서 혁명이 터지면서 일본 군부의 행보가 더욱 가속화될 수 있었다.
"총리와 외무대신은 특파대사 박영효와 협력하여 일본의 정보를 재빠르게 파악, 대응하시오."
"예, 폐하."
"내무대신은 국내 치안을 확실히 단속하고, 특히 교통과 물류 운송에 지장이 없도록 하시오."
"명을 받듭니다."
"군무대신과 참모총장은 유사시에 대비해 동원령 계획을 세우시오."
동원령이란 말에 대신들은 깜짝 놀랐다. 유사시 상비군 외에 예비군과 국민군 20만도 동원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징병제가 도입된 이래, 한 번도 동원해 본 적 없는 숫자였다.
"한마디로 요약해서, 전쟁에 대비해야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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