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황제 폐하의 사랑
마르가리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선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고, 부드러운 어조로 화제를 돌렸다.
"아이는 잘 있소?"
"네, 기다리다가 조금 전에 잠들었어요."
"아, 아이들에게는 너무 늦은 시간이지. 깨울 것 없소. 자는 모습만 봐도 좋으니까."
이선은 마르가리타와 함께 아이 방으로 향했다.
침대 위에 사내아이가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갈색빛의 고수머리를 지닌 아이의 잠든 모습은 사랑스러웠다.
"아이가 엄마를 닮아서 외모가 빼어난 것 같아. 크면 더 멋지겠지. 여자애들 꽤나 울리고 다니겠어."
이선의 감탄에 마르가리타가 눈을 살짝 흘기며 웃었다.
"성격이 아빠를 닮았으면 점잖아서 안 그러겠죠. 유교 예법까지 충실히 익히면 여자 눈이나 제대로 쳐다볼 수 있겠어요?"
"얘가 클 무렵이 되면 예법도 크게 달라져 있을 거요. 아니, 멀리 갈 것 없이 당장 의친왕만 봐도 달라졌지. 연애사업이 한창이던데."
"그분의 자유로운 성격은 동양 황실에서 예외적인 존재죠."
"그처럼 장차 이 아이도 자유분방하길 바라오."
이선은 빙긋 웃었다.
아이는 황제의 셋째이자 차남, 마르가리타의 유일한 자식이었다.
아명(兒名)은 ‘얀(Jan)’에서 따온 ‘안(安)’으로 지었다. 아무런 탈 없이 평안히 자라길 바라는 마음에서 정한 아명이기도 했다.
만 2세, 세는 나이로 네 살이 된 이안은 한창 꿈나라에 빠져 있었다.
광무 5년 여름, 이선은 과로로 인해 병석에 누웠다. 마르가리타는 황실 어의로서 헌신을 다해 간호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있어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으면서, 이선과 마르가리타 사이에는 새삼 사랑의 감정이 싹텄다. 친구로 평생을 지내겠다는 다짐은 끝내 무너지고야 말았다.
두 남녀는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오랫동안 연정(戀情)을 품고 있었다. 아니, 두 사람만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영은 진즉 깨닫고 있었다. 단지 이선이 의무와 책임을 중시했기에 일부러 외면했을 뿐이었다.
지난 세월 동안 넘지 못했던 선을 넘게 되자, 이선과 마르가리타는 마침내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되었다.
"어쩌면 좋아. 황후께 너무 죄송해요. 다 내 잘못이에요."
"그 무슨 말이오? 당신 잘못은 없소. 내가 미안한 일이고,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니까."
이선은 아영에게 사실을 알리고 정중히 용서를 구했다. 아영은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감축드립니다, 폐하. 황실의 홍복이요, 국가의 경사입니다. 신첩은, 아니 저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오길 바랐습니다. 이로 인해 황실은 더욱 번영할 것이요, 폐하께옵서 무거운 짐을 조금이라도 내려놓으실 수 있으시다면, 저는 기쁘기 한량없나이다."
"…… 고맙소."
아영은 군부(君婦)로서 예의상 군주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럴수록 이선은 더욱 미안하고 고마웠다.
"황손을 잉태하셨으니 규례(規例)를 고려해 내명부의 지위를 내리고, 해산달이 가까워지면 산실청을 설치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음, 청국에 다녀온 후에 고려해 보리다."
산실청(産室廳)이나 호산청(護産廳)은 비빈(妃嬪)이 임신하여 왕손이 태어날 때 궁중 내에 설치하였던 임시 관아이다.
전례대로라면, 군주는 왕손을 임신한 여인을 출신을 막론하고 후궁으로 삼아야 했다.
문제는 조선 왕조에서 군주가 외국 여인을 비빈으로 삼은 전례가 없다는 점이었다. 거슬러 올라가도 고려 공민왕이 마지막이었다. 혼혈 왕자의 경우는 충목왕 이후로 처음이었다.
황후는 환영해도, 태상황을 비롯한 황실의 어른들이나 황족들, 유림과 국민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미지수였다.
이선은 일단 비밀에 부치고, 김옥균과 의논했다.
"유림이 하늘처럼 떠받드는 중국에서도, 외국의 여인을 후비로 삼는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청 황제는 서역(위구르) 여인도 후비로 삼지 않았습니까? 하물며 대한도 당당한 제국의 반열에 올랐거늘, 신하된 도리로 누가 감히 불경하게 황실의 일을 왈가왈부한단 말입니까? 전조(前朝, 고려)의 사례를 고려할 필요도 없이, 성심대로 하시옵소서."
김옥균은 즉각 환영하는 입장을 보였다.
"짐이 경에게 말했다시피 축첩을 인습으로 여겨 서양식 민법을 제정하고자 하는데, 군왕이 되어 모범을 보이지 못했으니 부끄러울 따름이오."
"황공하오나 어인 하교이십니까? 제왕의 도(道)는 백성과 다르니, 감히 법으로 규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청국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도 프랑스식 민법을 제정하여 축첩을 금지했다고는 하나 황실은 후궁을 들이는 게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일본 황태자도 후궁 소생 아니겠습니까? 귀족과 고위 관료들도 공공연하게 축첩을 하지요."
"허, 고균의 정당성을 설파하기 위함으로 보이는군."
"하하, 부끄러운 일이오나……."
김옥균이 겸연쩍게 웃었다. 황제에 대한 충심 외에도, 그 자신도 세집 살림에 일본 기생을 낙적하여 혼혈아를 얻었던 터라 동지 의식을 느끼는 듯했다.
사실 꼭 김옥균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서양을 모범으로 하는 문명개화론자라 해도, 고관대작들 중에 첩이 없는 이가 드물었다. 조선의 오랜 관습상 전혀 문제 될 게 없는 일이었다. 기독교 신자로 외국인과 결혼한 서재필이나 윤치호 정도가 예외였다.
오히려 대신들은 황제가 후궁을 들이지 않는 걸 의아하게 생각했다. 선대왕 중에서 현종과 경종을 제외하면 후궁을 두지 않은 군주는 없었다. 두 임금 모두 병약하여 30대에 요절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신체 건강한 황제가 후궁을 들이지 않는다는 건 시대가 바뀌었다는 점을 감안해도 기이했다.
"하물며 대한은 제국을 선포한 지 채 5년이 안 되었으니, 황실 전범(典範)을 새로이 제정하시면 될 일입니다. 폐하께옵서는 황실의 번영을 위하여 당연히 하셔야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김옥균의 말처럼, 군주의 행위는 개인적인 게 없었다. 사랑조차도 국가와 관계된 일이었다.
정사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 태상황과 태후도, 이선에게 후궁을 들이라고 권한 게 수차례였다.
‘황실의 번영’은 군주의 의무이자 덕목이기도 했다.
이선은 아영과 김옥균과의 대화를 통해 결심을 했으나, 정작 마르가리타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본인은 기독교 신앙을 저버렸다곤 하지만, 일부일처제의 기독교 문화에서 자라 후궁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무엇보다 아영에 대한 미안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아영 본인이 지지하는 입장이라고 해도, 마르가리타의 윤리관에서는 스스로가 용서되지 않았다.
이선이 북경에서 광서제와 회담을 마치고 귀국을 하니, 마르가리타는 황성을 떠나고 없었다.
이선은 깊은 당혹감을 느꼈다. 비밀을 공유하고 있던 아영도 난처해하긴 매한가지였다. 그녀는 일단 소재를 파악하고 이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은 대체 어디에 있소?"
"관북 경성(鏡城)에 있다고 합니다."
함경북도 경성군과 청진항 일대에는 미하우 얀코프스키의 목장과 별장이 있었다. 기병 육성에 도움을 준 공으로 얀코프스키는 명예 정령 지위와 토지를 하사받았고, 한러 국경무역과 군수 납품으로 쌓은 부로 바닷가에 아름다운 별장을 지었다.
알다시피 미하우는 마르가리타의 사촌오빠였다. 말하자면 그녀는 친정으로 향한 셈이었다.
「저는 황제 폐하께 어떤 부담도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황후께는 너무나 죄송스러운 마음뿐입니다. 제가 애초에 어리석은 마음을 품지 않았더라면…….」
마르가리타가 두고 간 편지를 읽던 이선은 한숨을 쉬었다. 마르가리타는 벌어진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피를 한 것이지만, 이미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황제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고, 이는 장차 황실의 일이자 국가적인 문제였다.
"짐이 청국에서 지금 막 돌아왔는데, 경성까지 갈 수는 없소."
그동안 쌓인 일이 많기 때문에, 이선은 황성을 비울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황제가 여자 문제로 국정을 마다하고 수도를 떠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신이 경성으로……."
"고균도 대신인데, 공사가 다망하거늘 어찌 경성까지 가겠소. 산부인과 경험이 많은 의사를 보내야지. 언더우드 여사에게 부탁하리다."
이선은 황실과 관계가 두텁고 마르가리타와도 가까운, 전 황실 어의이자 제중원 부인과 의사인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 여사에게 부탁을 했다.
"서양에서 온 여의사가 황제 폐하와 사랑에 빠지다니, 정말로 낭만적인 일입니다. 같은 여자인 제가 봐도, 닥터 얀코프스카라면 그럴 가치가 있는 여인이지요."
호튼은 출산 후까지 산모를 돌보겠다고 다짐하고, 이선이 선발한 궁내부와 시종원 관리들을 대동해 경성으로 떠났다.
이듬해, 광무 6년 봄, 호튼으로부터 전보가 왔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내아이를 출산했다는 소식이었다. 이선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 들었소. 당신이 고생이 많았소. 곁에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하구려. 누누이 말하지만, 당신이 미안해할 건 없소. 황후도 기뻐하고 있소. 푹 쉬고 몸을 추스르면, 부디 아이와 함께 서울로 돌아왔으면 좋겠소. 그 아이는 당신과 내 아이지만, 동시에 황실의 일원이기도 하오. 황손은 아비 없이 자랄 수 없소. 무엇보다, 나는 당신을 이대로 잃고 싶지 않소. ……」
이선의 편지를 받은 마르가리타는 고민에 빠졌다. 마음만 같아선, 그녀도 당장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가서 아버지를 만나게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에 걸렸다. 아이 아버지는 평범한 남자가 아니었다. 한 나라의 황제였다. 아직 아이의 운명을 가늠할 수 없었다.
‘과연 동양에서 혼혈 왕자를 용납할까? 그는 괜찮겠지만, 그의 부모, 그의 아내, 그의 국민이…….’
"고민할 거 없어요. 우리가 본 황제 폐하, 황후 폐하를 믿으세요. 당신과 당신의 아이를 끝까지 보호해줄 겁니다."
"그래, 나도 닥터의 말에 동의한다. 나는 22년 전 그분이 소년 왕자였을 때 처음 봤다. 차르를 구해 페테르부르크에서 호의호식할 수 있었음에도,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동포들을 구제하고 조국을 지키기 위해 극동으로 돌아온 사람이다. 그런 분을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니?"
호튼은 흔쾌히 서울로 돌아가라고 권했다. 한참 어린 사촌누이가 황제의 아이를 잉태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얀코프스키도, 진심으로 누이와 조카의 앞날을 축원했다.
"두 분 말씀이 옳아요. 아이를 위해서라도 돌아가야겠지요."
마르가리타는 몸을 추스른 뒤 여름에 경성을 떠났다. 하지만 황성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차마 황후를 만날 수 없다는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때마침 서경 선포로 평양에 갈 일이 있었으므로, 이선은 마르가리타를 평양으로 오게 했다. 아영도 평양행에 동반해서 마르가리타를 만나 설득했다.
"닥터 얀코프스카, 나는 내명부의 수장으로서 황실의 번영을 지킬 책무가 있습니다. 황자는 황실의 일원으로 자라야 합니다."
"죄송해요. 황후 폐하께 너무나 부끄러워서 들 낯이 없습니다."
마르가리타가 정말로 고개를 들지 못하자, 아영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독였다.
"그러지 마세요. 선생과 나는 자매나 다름없다고 생각해요. 나는 지아비이자 군주를 사랑하고 존경하지만, 동시에 그분의 마음이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부디 폐하를 가까이에서 도와주세요. 폐하께는 선생이 꼭 필요합니다."
남편이 다른 여인과 함께 있다는 걸 좋아할 부인이 어디 있겠냐마는, 아영은 황후로서 책무를 다하고자 했다. 그녀에게는 황제이자 지아비의 안녕이 더 중요했고, 모르는 여인이 후궁이 되는 것보다야 차라리 현명하고 기댈 곳이 없는 마르가리타가 더 나았다.
마르가리타는 아영의 선량함과 관대함에 눈물을 흘리며 감사를 표했다. 두 여인은 서로의 손을 오랫동안 함께 붙잡고 놓지 않았다.
태어난 아이는 황실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관례를 치를 나이가 되면 친왕 작위가 주어질 터였다. 적장자 계승 원칙에 따라, 둘째 황자는 황후 소생의 황자들보다 계승 순위가 떨어졌다. 애초에 마르가리타는 황위 계승권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다.
예외적으로, 마르가리타 얀코프스카는 비빈으로 책봉되지 않았다. 황자를 낳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귀비나 귀인으로 삼아도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본인이 극구 사양했다.
"황자는 다르겠지만, 저는 궁궐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부디 제가 배운 지식과 경험을, 한국인들에게 베풀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이선은 그녀를 이해했다. 당대에 드물게 여성으로 의학을 익힌 마르가리타가 동양 황실의 후궁이 되어, 궁궐 내전 안에 가만히 앉아서 여생을 보내는 건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례가 없다고는 하지만, 김옥균의 말처럼 ‘누가 감히 불경하게 황실의 일을 왈가왈부’하겠는가? 하물며 이 무렵의 이선은 북벌전쟁 승리와 토지개혁 반포로 인기와 권위가 절정에 달해있을 시기였다.
이선은 마르가리타가 계속 의사로서 활동하게 했다. 다만 황성에서는 보는 눈이 많으므로, 그녀를 잘 알지 못하는 평양에서 머물게 했다. 마르가리타는 새로 건립된 평양 자혜의원에서 일하기로 했다.
아이는 어미로부터 멀리 떨어트리지 않고, 당분간 평양 흥경궁에서 자라게 했다. 왕자가 대신의 집에서 성장하게 하는 일도 흔히 있었으므로, 크게 문제 될 일도 아니었다. 이선은 1년에 두 번씩 평양을 찾아 회포를 풀었다.
한동안 아들과 평양에서 머무르던 마르가리타는, 광무 8년 가을이 되어야 황성으로 돌아왔다.
표면적인 이유는 마르가리타가 새로 건립된 세브란스 병원의 전임의를 맡게 된 것이었지만, 아영이 거듭 그녀와 아이가 황성에 와 주길 바란다고 청원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어느 정도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이선은 마르가리타와 아이를 위해 경운궁에서 가까운 저택을 준비했다. 조국을 그리워하는 그녀를 위해, 특별히 폴란드풍으로 건설된 저택이었다.
"최소한 이 집만큼은, 당신의 고향이자 조국이 되길 바라오."
"…… 고마워요."
이선은 마르가리타가 진정으로 평안하기를 기원했다.
오랫동안 마음을 정착하지 못했던 마르가리타는, 비로소 이선의 어깨에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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