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개전 결의
메이지 38년(1905) 겨울, 도쿄.
연초부터 전개된 호헌 운동이 거세지면서, 가쓰라 내각의 정치적 명운은 기로에 섰다.
원내 제1당 입헌정우회의 오자키 유키오와 제2당 헌정본당의 이누카이 쓰요시가 주도하는 호헌 운동은, 정치인의 집회를 넘어 민중운동까지 결합되려는 기미를 보였다.
"헌정 수호! 번벌 타도! 선거권 확대! 증세 철회!"
매주 일요일마다 호헌을 외치며 히비야 공원에 모이는 시위대의 숫자는 계속 불어났다.
"예정된 중의원 선거는 하나마나 민당(民黨)이 압승하겠군. 의회 소집되자마자 내각 불신임안 나오겠어."
"그냥 계엄령 선포하고 밀어 버리면 안 됩니까? 의회도 소집을 미루고."
육군 일각에서는 강경론이 쏟아졌지만, 이토와 문민파 원로들이 제동을 걸었다.
"헌법 위반이오! 만약 육군이 헌정을 무너트리려 한다면, 폐하께서 결코 용인하시지 않을 거요. 대일본제국 헌법은 황공하옵게도 천황 폐하께옵서 흠정하신 헌법이라는 걸 명심하시오."
이토가 천황을 방패 삼아 나섰는데, 천황이 정말로 가쓰라 내각과 육군을 고깝게 여기고 있다는 풍문이 들려왔다.
전쟁을 반대하는 메이지로서는 육군의 강경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육군이 통수권자인 천황의 이름을 팔아서 전쟁을 도모한다면 더 불쾌한 일이었다.
하지만 메이지는 늘 그렇듯이 나서지 않고 장막 뒤에 남아 있었다. 대신 이토에게 신임을 밀어 주고, 육군이 멋대로 하지 못하게 했다.
가쓰라 내각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때마침 러시아가 대형 사고를 터트려 주니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
일본 정부는 그 어떤 나라보다 깊은 흥미를 갖고, 피의 일요일 사건과 그 여파를 보고받았다. 주러 일본 공사관은 하루가 다르게 급전(急傳)을 보내왔다.
"마침내 하늘이 준 개전의 기회가 오고야 말았소. 하늘은 러시아를 저버렸소. 아마테라스 오오카미(天照大御神, 일본 신화의 태양신)께서 일본을 지켜 주고 계시는구려!"
육군의 총수이자, 실질적으로 가쓰라 내각의 위에 있는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마침내 개전의 시기가 왔다고 부르짖었다.
야마가타의 개전론에 가쓰라와 육군이 재빠르게 받았다.
"러시아는 극도의 혼란 상태요.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앞으로도 영영 기회가 없을 것이오. 실기(失期)하면 끝장이오. 극동군과 태평양 함대를 격파하고, 동양에서 러시아를 몰아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요!"
한편, 주일 독일 공사관은 본국의 지령을 받아 일본 육군의 개전론을 은근히 부추겼다. 공사관 무관들은 육군 수뇌부와 은밀히 접촉했다.
"러시아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를 경계하기 때문에 결코 전력을 극동으로 보낼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혁명적 위기로 인해 극동에 전력을 투사할 수 없을 겁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수송 능력도 과장된 측면이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극동군과 태평양 함대만 상대하면 됩니다. 특별히 극비 정보를 공유해 드리겠습니다."
"오오, 귀국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지난 20년간 프로이센 군제를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한 일본을, 독일은 기쁘게 생각합니다. 일본은 극동의 프로이센이라 불릴 자격이 충분합니다. 지난 청국과의 전쟁은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에 거둔 승리와 유사합니다. 과감히 결단을 내려 러시아를 향해 진격한다면,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상대로 거둔 승리가 재현될 것입니다."
일본 육군 수뇌부는 대부분 독일 유학파이거나, 프로이센 군사사상에 강한 영향을 받은 이들이었다. 비록 동맹은 영국과 맺었지만, 정신적으로 독일을 숭상해마지않는 친독파였다. 야마가타의 판단 기준도 ‘비스마르크는 어땠는가? 몰트케는 어땠는가?’일 정도였다.
공사관 무관은 러시아의 약점이 담긴 극비 정보를 일본 육군에 전달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호의’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독일이 보여 주는 적극적인 호의에 육군 수뇌부는 기뻐했다.
"영국은 동맹이라면서 실질적인 도움도 주지 않는데, 오히려 독일이 돕는군."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 목적으로 일본과 동맹을 맺었다가, 이제 러시아보다 독일이 더 위협으로 다가오니 내버려 두겠다는 것이 아닌가!"
"상호방위조약도 조선을 위한 조약이지, 일본을 위한 조약이 아니오. 도대체 왜 대일본제국을 조선 따위와 동렬에 두려하는지?"
"차라리 독일과 동맹을 맺는 게 더 나았을지도. 러시아와 싸우는 데 큰 도움이 됐을 거요."
영국과의 동맹을 철석같이 지지하는 문민 관료나 해군과 달리, 육군은 영국에 은근히 불만을 품고 있었다.
"자, 그럼 육군의 총의는 개전으로 결의하였소. 이제 해군을 설득합시다."
"그럽시다. 해군 없이는 전쟁을 시작할 수 없으니까."
야마가타와 가쓰라는 해군대신 야마모토 곤노효에 대장의 설득에 나섰다. 야마모토는 대표적인 북수남진·해주육종·방수자위(防守自衛)의 지지자로, 개전에 반대했다.
"제독, 태평양 함대가 증원됐다는 소식 들었지요? 1월에 발트 함대가 출항을 했다던데."
"규모는 전함 2척, 순양함 5척, 구축함 7척이라고 합니다. 대략 4월에서 5월경에 뤼순으로 도착하리라 추정합니다."
1905년 1월 16일, 발트 함대 분함대가 태평양 함대의 증원을 위해 항행을 개시했다.
차르는 더 많은 군함을 보내려고 했지만, 발트 함대의 주적인 독일의 위협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여 일부만 보냈다. 페테르부르크를 출발해 뤼순까지, 대서양과 인도양을 넘는 기나긴 대항해였다.
"증원이 도착하기 전에, 개전해야 하오. 합류하면 태평양 함대는 전함만 9척이고, 총 톤수도 제국 해군을 능가하오. 만약 저들이 선제공격하면 어찌 되겠소?"
"러시아 국내 사정을 생각하면 먼저 전쟁을 도발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당장이야 그렇겠지. 하지만 위기가 진정되면, 저들은 전쟁으로 국민의 눈을 돌리려고 할 거요. 누굴 공격하겠소? 오스트리아? 터키? 아니지. 시베리아 철도를 개통하고, 태평양 함대를 증강하는 걸 보면 답은 일본이오. 공격당하기 전에 먼저 쳐야 합니다."
"일본이 영국과 동맹을 맺은 걸 알고 있는 러시아가 섣불리 선제공격을 하겠습니까?"
야마모토가 정론으로 나서니, 야마가타가 속내를 밝혔다.
"그렇다고 계속 내버려 뒀다간 군사력의 격차만 더 벌어질 뿐이오. 동양 전체가 러시아에 먹히고 말 거요. 적의 위협을 선제적으로 타격하는 걸, 독일에서는 예방전쟁이라고 합디다. 예방전쟁을 감행해야 하오. 최소한 극동군과 태평양 함대만이라도 섬멸시키고, 여순과 블라디보스토크를 무력화해야 하오. 그래야 진정한 국방도 가능할 거요. 기회는 러시아가 혼란에 빠져 있는 지금뿐이오."
비록 해군이 북수남진을 택하고는 있다지만, 주적으로 여기고 있는 건 역시 러시아 태평양 함대였다. 태평양 함대가 계속 증강되고, 군항 여순과 블라디보스토크의 도크 건설과 요새화가 완성되면 공격하기도 어려웠다.
야마모토는 해군 군령부 회의를 소집했다.
마침 러시아가 혁명적 위기에 빠졌다는 건, 다시 없을 좋은 기회였다. 해군도 개전으로 기울어졌다.
"개전의 호기(好期)는 작금에 있습니다. 러시아가 혼란을 극복하여 태평양 함대가 더 강성해지기 전에 섬멸해야 합니다."
막대한 비용을 들인 일본의 건함 10개년 계획, 1905년 말에 완료될 예정이었다. 영국에서 건조한 신형 전함 2척의 진수가 이미 완료됐지만, 취역과 전력화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해군은 그동안 개전의 적기를 8·8 함대가 완성되는 1906년으로 보았는데, 러시아가 혼란에 빠진 지금 개전하자는 의견이 다수를 점했다. 결국 호전적이기는 해군도 육군 못지않았다.
"내각과 원로가 모두 개전에 동의한다면, 해군도 선제공격을 준비하겠습니다."
"좋소! 육군과 해군이 힘을 합쳤으니, 허울뿐인 강국 러시아가 무엇이 두렵겠소?"
육군에 이어 해군까지 개전으로 기울자, 급격히 개전론이 확대됐다. 이번에도 이토가 제동을 걸었다.
"도대체가 왜 그렇게 전쟁을 하지 못해서 안달이오? 어심(御心)이 평화에 있음을 정녕 모른단 말이오?"
"후작, 우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합시다. 황공한 일이오나, 폐하께옵선 10년 전 청국과의 전쟁도 반대하셨소. 외교적으로 해결하자고 하셨지. 폐하의 적자(赤子, 백성)가 전장에서 목숨을 잃을까 봐 염려하시는 어진 마음을 신하가 되어 어찌 모르겠소?"
‘천황이 아니라 이토 네놈 뜻이겠지.’
‘흥, 마치 대단한 충신인 것마냥 떠드는군.’
"하지만 만약 그때 개전을 하지 않았더라면, 일본의 국위를 떨치지 못했을 것이오. 청국은 여전히 동양의 패자로 군림하려 들고 있었을 거요. 때로는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오. 지금이 바로 그때요. 폐하께서도 충심을 이해해 주실 거요."
야마가타의 말에는, ‘솔직히 천황은 우리 뜻대로 움직이는 사람 아니냐? 천황 핑계 그만 좀 대고, 네가 생각을 바꿔라.’는 의미가 숨어 있었다.
"원수야말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봅시다. 전쟁이 제국을 위함이오, 육군과 조슈를 위함이오?"
이토의 말에는, ‘육군이 무리수를 두는 바람에, 안팎으로 비난받으니까 실각을 모면해 보자고 전쟁을 벌여 보겠다는 거 아니냐? 는 의미가 숨어 있었다.
야마가타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대체 나를 뭐로 보는 거요! 내겐 오직 제국의 흥성, 부국강병, 개국진취! 이 목표밖에 없소. 대체 지난 40년간 막대한 군비를 들여 군대를 양성한 이유가 뭐요? 이런 상황에서 쓰자고 군대를 키운 거 아니오!"
"왜 매번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는지 모르겠소. 군대의 목적은 국방, 즉 국가방위에 있소. 나는 상호방위조약으로 러시아의 남침 위협을 막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보는데."
"그러니까 그게 러시아의 기만책에 불과하단 말이오.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개통했소. 저들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대군을 동양으로 보낼 수 있소. 시간이 갈수록 유리한 건 저들이고, 불리해지는 건 우리요. 러시아가 혁명으로 혼란에 빠진 지금, 더 늦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 하오!"
"그 강대한 러시아가 겨우 이 정도 위기로 흔들리겠소? 결국 시위는 진압되고 말 거요. 난 개전에 동의할 수 없소."
야마가타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이토는 당혹감을 느꼈다.
‘이 영감탱이가 왜 이래?’
"후작, 우리는 한때 조슈 지사의 일원이자 유신 동지로서, 일본을 위해 목숨을 걸었소. 내 인생의 마지막 부탁이오. 전쟁만 승리로 이끌면, 가쓰라에게 물러나라고 하겠소. 후임자는 후작이 추천하시오. 육군이 다시는 내각을 흔드는 일도 없을 거요. 만에 하나라도 일이 잘못되면, 내가 책임지고 할복하겠소. 러시아를 동양에서 몰아낼 수 있다면, 유신의 과업은 마침내 달성되는 거요. 부디 개전에 동의해 주시오."
비장한 어조였지만, 이토는 이런 입 발린 말에 넘어갈 정도로 어수룩하지 않았다.
"확실히 해 둡시다. 전쟁 목표가 뭐요?"
"러시아를 만주에서 몰아내고, 다시는 일본을 위협할 수 없게 만드는 거요."
"그럼 전쟁을 통해 일본이 얻고자 하는 건?"
"그건……."
야마가타가 전쟁 목표를 속닥였다. 이토는 혀를 찼다. 지나치게 과도한 목표였다.
"그게 가능하겠소? 대체 얼마나 크게 이겨야 그걸 다 차지할 수 있겠소?"
"육군과 해군의 희망사항을 종합해 보니 그렇다는 거고, 물론 전부 다 받아 낼 순 없겠지. 하지만 전쟁에 이기기만 한다면야."
"이길 자신은 있는 거요?"
"청국을 무찔렀듯이, 러시아도 무찌를 수 있소. 러시아는 서양의 청국일 뿐이오. 육군과 해군의 의견은 모두 일치했소. 이제 원로만 동의하면 되오."
모처럼 육군과 해군, 조슈와 사쓰마가 일치했으니, 이토가 내밀 수 있는 패가 극히 제한적이었다.
"원로의 동의만으로는 안 되오. 첫째, 천황 폐하의 재가가 있어야지."
"그건 당연한 거 아니오? 어전회의에서 재가를 받아야지."
"둘째, 영국의 동의가 있어야지. 영국이 개전에 동의하겠소?"
"그러라고 맺은 동맹이 아니오?"
"재작년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정세가 달라졌소. 영국은 러시아보다는 독일을 더 우려하고 있소."
"군부는 영국이 도와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소. 차관만 제공해 주면 충분하오. 그 정도는 해 주겠지."
동맹 상위 파트너인 영국이 동의하든 안 하든, 군부는 개전을 강행할 생각이었다.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나. 셋째, 한국의 동의가 있어야지. 동맹의 일원이니까."
"무슨 한국의 눈치를 보고 있는 거요. 조약에 따르면 우호적 중립을 지켜 주기로 하잖소? 일단 철도와 항구는 개방해서 군사통행권은 부여해야지."
"그걸 우격다짐으로 받아 낼 수 있겠소? 한국을 끌어들이지 않고선 결코 러시아와 싸울 수 없소."
"다 방법이 있소. 우리가 러시아를 선제공격하면, 만주의 러시아군이 한국군을 향해 포격을 하게 만들면 되오. 그럼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자동 참전이지."
요컨대 러시아의 공격을 유도해서 한국의 참전을 이끌어 내겠다는 말이었다.
"그런 방법이 통하겠소? 한국이 교전을 극력 피한다면?"
"여차하면 청국도 있소. 전쟁에서 이기면 만주를 청국에 돌려주겠다고 할 터이니, 청국은 일본을 지지하고 편의를 제공해 줄 거요."
"청국이 러시아를 반대하긴 하지만, 우릴 도와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소? 그들은 러시아를 두려워하오."
"그러니 설득해 봐야지."
이토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군부는 뭐라고 하든 전쟁을 벌일 작정이었다.
‘그 외교는 누가 하냐? 일은 지들이 다 벌이고, 뒤처리는 나더러 하라 이거냐?’
"원수, 전쟁은 전문가인 그대들이 맡더라도, 외교는 내게 맡겨 주시오. 최소한 영국의 묵인은 받아야 하고, 한국의 지지를 얻어야 하오."
"좋소, 후작께서 외교를 맡아 주시오."
"영국은 갈 수 없겠지만, 내가 직접 한국에 가서 황제를 설득해 보겠소."
야마가타가 난색을 표했다.
"한제를 어찌 믿고 중요한 기밀을 공유한다는 것이오? 한제는 러시아 황제와 친밀한데, 기밀이라도 흘려 버린다면? 기습의 기회는 날아가는 거요."
"물론 그러지 않게 해야지. 기껏 맺은 동맹인데 활용해야 할 것 아니오? 한국군이 함께 싸운다면 가장 좋고, 최소한 우호적 중립은 지킬 수 있도록 판을 깔아 놔야지. 그전까지 개전은 절대 안 되오. 내가 도쿄에 부재하더라도 이노우에 백작이 나를 대리할 거요."
이토의 강력한 요청에, 야마가타도 동의하여 내각은 이토에게 전권을 부여하고 특파대사로 임명했다.
‘춘산장 영감탱이보다는 차라리 한제가 더 말이 통하겠지. 이대로 가면 영국의 지지도 못 받고, 한국도 마찬가지다. 어떻게든 외교적 고립은 피해야 해.’
이토는 한국의 허가가 떨어지는 대로, 방한을 할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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