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전쟁 논의
2월 5일, 페테르부르크에서 계엄령이 선포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마침 이날은 호헌 집회, 사회주의자들의 집회가 별도로 개최되는 날이었다.
그동안 내각은 호헌 운동을 진압하면 정치적 부담이 커지니 내버려 두었지만, 소수의 사회주의자는 내버려 두지 않았다.
"러시아가 만주를 빼앗은 건, 분명 타국의 영토를 도적질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이 대만과 해남도를 빼앗은 건 옳은가? 그렇지 않다. 똑같은 강도짓일 뿐이다. 제국주의 전쟁은 강도들의 전쟁일 뿐이다! 우리는 억압받는 러시아 평민들과 연대하여, 혁명을 지지해야 한다! 만국의 평민이여 단결하라!"
"평민사 정간 철회! 구속된 기자들 석방! 증세 철회! 전쟁 반대! 노동 인권 개선!"
"소요 사태다, 진압하라!"
경찰은 무자비하게 사회주의자들의 집회를 진압했다.
다음날,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극렬한 무정부·사회주의자들이 국체를 부정하고, 치안을 위협하여 혼란을 도모한바……. 이에 정부는 도쿄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치안 유지를 위하여, 당분간 모든 정치 집회는 중지된다. 정부는 국가 방위와 치안 유지를 위해 만전을 기하겠다."
정부는 좌익의 위협을 과장하여 계엄령을 빼 들었다. 정부의 지원을 받는 어용언론은 개전론을 부추기는 언설을 쏟아 냈다.
"러시아에는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다. 외국과 피 흘리는 싸움을 하게 되면, 이를 신호로 혁명 세력이 각지에서 봉기해 일시에 내우외환으로 무너질 것이다."
"폭압적 러시아를 동양에서 몰아내는 정의로운 전쟁을 반대하는 자, 비국민이다!"
"전 국민이 거국적으로 일치단결하여 개전으로!"
일본의 여론은 순식간에 개전론으로 기울어졌다.
막 싹트려고 했던 일본의 민주주의는, 겨울 칼바람과 같은 개전론의 광풍에 꺾이고 말았다.
하지만 이미 씨앗은 뿌려졌기에, 봄이 온다면 언제든지 꽃은 다시 필 수 있으리라.
* * *
극비 전문으로 일본의 상황을 보고받은 이선은, 일본이 개전을 결심했다고 확신했다.
피의 일요일만 아니었더라면, 러시아 서부가 파업과 혼란에 빠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때를 엿보며 칼을 갈아 오고 있던 일본은 절호의 기회를 발견하지 못했을 터이다.
이선은 군무대신 한규설과 참모국 총장 박유굉을 원수부로 즉각 소집했다.
"2월 6일 자로 도쿄에 계엄령이 선포됐다고 하오. 표면적인 명분은 정치적 요인이지만, 개전의 직전 단계라는 느낌이 오는군. 특파대사로 이토가 직접 온다고 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기다려 봐야 알겠지만, 개전 논의가 아닌가 싶소."
순간 한규설과 박유굉의 표정에 긴장감이 어렸다.
"폐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이어 도쿄에도 계엄령이 내려졌다면, 황성에도 계엄령을……."
"아니, 그럴 건 없소. 황성은 정치적 불안이 있는 상황은 아니니까. 대신 언제든지 전국에 동원령을 내릴 준비를 하시오."
"예, 폐하! 군무부에서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하겠습니다."
바르샤바 피의 일요일 이후 이선의 명령을 받아 2주간 동원령 대비를 해 온 한규설이 결의를 다졌다.
팔켄하인과 독일 군사고문단은 신속한 동원의 비법을 전수해 주었다. 1904년에 한반도를 연결하는 주요 간선 철도가 모두 완공되어, 동원령에 유리했다.
동원령이 떨어지면,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예비군과 국민군을 동원해 전시 30만 병력을 갖추는 게 목표였다.
막대한 비용이 발생하겠지만, 특별 예산을 증액하는 한이 있더라도 군비는 채워야 했다.
"일본이 러시아에 선제공격을 한다면, 직접적인 전장은 남만주가 될 것이오. 특히 여순 요새. 결국 대한의 영토도 휘말릴 가능성이 충분하오. 참모국의 계획은?"
"예, 폐하. 개전 시 일본과 러시아만 싸운다는 전제하에, 4·5·6·7사단이 남만주에 배치됩니다. 황성 방위는 근위사단에, 후방 방위는 동원된 후비군에게 맡기고 1·2·3사단도 평안도와 함경도로 전진 배치될 계획입니다."
박유굉은 지도를 가리키며 동원 계획을 설명했다. 이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좋소. 언제든 전쟁 상황에 대비하도록 하시오."
군사 계획을 확인한 이선은, 주한 영국공사 조던을 경운궁으로 불러들였다.
"공사, 아무래도 일본의 동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혹여 귀국에는 특별한 정보가 없습니까?"
"영국 외무부도 일본의 행보에 우려를 느끼고 있습니다만, 아직 일본으로부터 어떠한 요청이 들어온 바는 없습니다."
이선은 일본이 영국의 동의도 받지 않고, 전쟁을 획책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해서 좋을 게 없습니다. 러시아가 극동 전쟁에 휘말리게 되면, 프랑스는 독일의 위협에 홀로 노출됩니다. 프랑스와 우호협상을 맺은 영국의 입장도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정확한 지적이십니다. 실로 그렇습니다."
영일동맹을 체결한 1903년만 해도, 밸푸어 내각은 일본을 ‘극동의 헌병’으로 고용해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 일본이 러시아를 공격하면 적극 지지하겠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1905년 현재는 달랐다. 영국은 독일에 더 위협을 느꼈고, 혁명적 위기에 빠진 러시아가 극동 전쟁에까지 휘말려 국력을 소모하는 건 영국이 추구하는 균형을 깨트리는 일이었다.
"일본이 영국의 동의마저 구하려 하는 게 아니라면, 결정의 배후에 독일이 있는 게 아닐지 의심스럽습니다. 아시다시피 현재 일본 정부를 주도하는 육군 수뇌부는 대개 독일 유학파지요. 현재 일본이 러시아를 공격하는 걸, 독일보다 더 바라는 나라가 없을 겁니다. 그리되면 독일 입장에서는 양면전쟁을 피해 프랑스만 상대하면 되니까요."
이선의 의혹 제기에, 조던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만약 그렇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본국 정부에 즉시 보고하여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대한제국 정부는, 영국의 세계 전략을 언제나 지지하는 입장이라는 걸 귀국에 전해 주십시오. 우리는 균형을 깨트리는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꼭 전하겠습니다. 귀국의 지지에 감사드립니다."
이선은 영국에, 비록 한국이 일본보다 국력은 약할지라도 훨씬 신뢰할 만한 동맹이라는 걸 어필했다.
영국 입장에서도, 만약 일본이 독일의 부추김을 받고 전쟁을 결정했다면 결코 용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방한 허가가 나오자마자, 이토는 신속히 한국행 기선에 올랐다.
9일에 인천에 도착한 이토는, 바로 다음 날 알현을 요청했다.
2월 10일, 경운궁 중명전에서 알현이 성사되었다. 이토가 극비 회담을 요청하여, 회담 배석자는 황제 이선과 총리 김옥균, 특파대사 이토 뿐이었다. 일본어가 유창한 김옥균이 직접 통역을 맡았다.
"황제 폐하, 외신이 급박하게 방한과 알현을 요청했음에도, 조속히 허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원로에 고생이 많으셨소, 후작."
"황공하옵니다. 천황 폐하께옵서 보내는 국서를 삼가 봉정합니다."
이토는 오른 다리가 의족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중한 예의를 갖춰 국서를 바쳤다.
국서의 내용은 호의적이지만 상투적이었다. 비록 험난한 시국이 왔지만 동양 평화를 위해 함께 힘쓰고, 양국의 우호가 만대에 이르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귀국 천황 폐하의 국서에 짐은 깊이 공감하는 바입니다. 짐은 평화를 사랑하시는 폐하의 어진 마음을 느낍니다. 어찌 어린 백성을 전화(戰禍)에 희생시키겠습니까?"
"두 분 지존(至尊)께옵서 일시동인(一視同仁)하시니, 외신은 참으로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이토가 깊이 허리를 숙여 조아렸다.
"근래 러시아의 혼란이 심상치 않고, 일본의 정세도 평안하지 않으니 근린으로서는 걱정이 될 따름이외다. 아마 후작이 방한한 목적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소이다마는."
"과연 그렇습니다. 러시아의 폭압은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고, 그 신민이 받는 고통은 차마 보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하물며 러시아의 불법 점령과 압제에 시달리는 만주인들은 어떠하겠습니까? 동양의 일원으로서 참기 어려운 일입니다."
러시아를 비난하는 이토의 말에 이선이 빙긋 웃었다.
"일본 국내 사정도 어려울 터인데, 동양 평화와 러시아 신민의 안위까지 걱정하다니요. 후작도 참으로 고생이 많겠소이다. 짐처럼 잠 못 이루는 밤이 많겠군요."
이토가 못 알아들을 리가 없겠다마는, 예의를 가장한 비아냥거림이었다.
"부끄러우나 그렇사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외다. 후작의 연령이 올해로 예순……, 몇이지요?"
"65세입니다, 폐하."
"허어, 그 연세에 고생도 많으시오. 이토록 일본의 안녕과 동양 평화를 위해 불철주야 몸을 아끼지 않는 후작인데, 저 어리석은 전쟁광들은 그 고뇌도 모르고 폭탄을 던지다니! 아, 후작은 일본의 영웅이오, 대한의 벗이며, 짐과는 천진과 시모노세키에서 함께 동양의 평화를 논의한 동지외다. 후작이 피습당하여 중상을 입었다는 말을 듣고, 짐의 고굉(股肱)이 무너진 것 같은 슬픔을 느꼈소이다."
이선의 어조는 비장한 슬픔이 담겨 있어, 그 말을 통역하던 김옥균이 다 감격할 지경이었다. 닳고 닳은 노회한 정치가 이토는 감격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황제가 보이는 후의에 고개를 조아렸다.
"지극한 염려 덕에 괜찮습니다. 폐하께옵서 외신을 이토록 아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후작은 동양 평화에 꼭 필요한 사람이오. 후작이 아니라면 저 전쟁광과 팽창주의자들을 누가 제어하겠소? 짐은 후작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오."
겉으로 보이는 엄숙한 태도와 달리, 이선은 내심 냉소를 짓고 있었다.
이토 피격이야 지시한 게 아니었지만, 은근히 그런 분위기를 조성한 게 바로 자신이었다. 야마가타 피습의 경우에는 익문사가 배후에서 조종한 바였다.
물론 일본은 이선이 그런 일까지 꾸미리라곤 상상조차 못 하고 있었다. 그저 러시아가 일본의 혼란을 부추기기 위해 벌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외신 또한 폐하께옵서 성수무강하시길 기원하옵니다. 폐하께옵서 계셨기에 한국의 자주독립과 동양의 균형이 맞춰졌으니, 그 누구도 폐하를 대신할 수 없으십니다."
"고맙소. 비록 국적은 다르나, 우리는 동양 평화라는 같은 목표를 갖고 있소. 그러니 허심탄회하게 말해 주길 바라오. 방한의 목적이 무엇이오? 일본이 개전을 결정하였소?"
이선은 본론으로 들어가길 촉구했다. 이토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외신이 드리는 말씀은 모두 극비이옵니다. 특히 제3국은 결코 알아서는 안 될 일입니다. 부디 비밀을 엄수하여 주시옵소서."
"염려 마시오. 오직 짐과 총리, 정부 수뇌부만 공유하도록 하겠소. 엄숙히 약속하리다."
"일본 정부는, 동양 평화와 일본의 방위, 한국의 자주독립과 청국의 영토보전을 위하여, 조속한 시일 내로 러시아와 단교하고 간과(干戈, 전쟁)에 호소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통역하던 김옥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선은 예상된 바이긴 했으나,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결국 전쟁이냐 평화냐 양자택일의 순간인가? 지난 몇 년간 노심초사하여 외교적 안전장치를 깔아 놨건만. 러시아 전제정의 어리석음과 일본 군국주의의 공격성이 끝내 사고를 치려 하는군.’
"그래, 그렇다면 언제 개전할 생각이오?"
"2월이 가기 전에 시작될 겁니다."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후작이 직접 방한하여 비밀 회담을 요청했다는 건, 대한에게 요청할 사안이 있다는 것일 터."
"과연 그렇사옵니다. 일본이 전쟁에 돌입하면, 한국은 동맹국으로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이토의 애타는 어조와 달리, 이선은 냉정했다.
"후작도 잘 알겠지만, 상호방위조약에 따르면, 참전 의무는 오직 방어전쟁에 한정되오. 선제공격 시에는 중립의 의무만이 있소."
"물론 그렇습니다. 하오나 러시아가 점령한 만주와 한국의 국경이 접한 이상, 그 여파가 번지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겠지. 일본은 여순을 최우선 목표로 삼을 거고, 동청철도를 따라 봉천의 러시아군을 공격하려는 계획이겠지요?"
"황공하오나 외신도 자세한 군부의 계획은 알지 못합니다."
이토는 정확한 계획을 알려 주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본인도 군부에게 들은 바가 없는 걸지도 몰랐다. 알려 주지 않아도, 이미 이선은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대한국의 영토 밖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라면, 대한은 우호적 중립을 지키도록 하겠소."
"하오나 폐하, 전쟁이 발발하면 러시아가 요동의 한국군을 공격할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그리되면……."
"물론 그리되면 대한도 참전해야겠지. 하지만 대한은 엄정중립을 지킬 것이며, 러시아도 먼저 공격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는 않을 거요."
이선은 일본의 노림수가 뻔히 보였다. 어떻게든 ‘방어전’을 만들어 참전 요건을 채울 목적이.
"묻고 싶소. 일본의 전쟁 목표는 뭡니까?"
"만주에서 러시아 육군을 몰아내고, 여순과 블라디보스토크는 비무장 자유항으로 삼아 영원히 그 위협을 사라지게 합니다. 분쟁대상인 가라후토를 할양받으며, 만주는 원주인인 청국에 환부(還付)하는 것입니다."
"그럼 여순과 동청철도는?
"역시 주인인 청국에 돌려줘야겠지요."
이토의 답에 이선은 냉소했다.
‘겨우 사할린이나 먹자고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그럴 리가 있나.’
"듣고 나니 일본이 청국을 위해 전쟁을 한단 말처럼 들립니다. 후작, 짐이 허심탄회하게 논의하자고 하지 않았소? 빙빙 돌리지 말고,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합시다. 대한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뭐요? 귀국이 대한에 원하는 바와, 그에 대한 대가는?"
"가능하면 동맹국으로 참전하는 것입니다. 만약 한국이 동맹국으로 참전한다면, 한국의 남만주 세력권을 보장하고, 만주를 일본과 한국이 공동 보호하는 겁니다. 동청철도 운영권을 일본과 한국이 나눠 가졌으면 합니다. 또한 연해주도 러시아에서 분리하여, 자치를 실시하여 일본과 한국이 공동으로 보호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연해주에는 한인이 다수 거주하니 명분도 충분합니다."
표면적으로 들으면 굉장히 구미가 당기는 조건이었다. 한국은 단숨에 만주와 연해주에 세력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우호적 중립을 유지한다면?"
"주요 지역의 항구와 철도를 개방해 군사통행권을 부여해 주시고, 군수품을 보급해 주십시오. 항구와 철도 이용권, 군수품의 대가는 지불하겠습니다. 우호적 중립이 유지되면, 전후에 한국이 남만주 자치령을 병합하는 것을 지지하겠습니다."
"호오."
"한국은 만주를 세력권으로 여기는데, 러시아는 만주 전역을 지배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러시아가 만주에서 사라지면, 한국은 자유롭게 그 세력을 뻗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래저래 조건이 너무 좋은데. 참전해서 이기면 만주와 연해주를 같이 나눠먹고, 중립만 지켜도 한국의 남만주 세력권을 인정한다고? 일본은 전쟁으로 자선사업 하나? 그럴 리가 있나.’ 오히려 조건이 너무 좋아서, 이선은 일본의 의도가 전혀 신뢰가 되지 않았다.
"이는 매우 중대한 사안이므로, 짐이 혼자 결정할 수 없소. 각의를 개최해 결정하도록 하겠소."
"예, 폐하. 부디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하겠습니다."
이토는 이선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이며 고개를 조아렸다.
이선은 결단의 시기가 다가왔음을 인지했다.
1905년 2월, 동아시아의 정세는 결국 격랑으로 빠져들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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