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어전회의
광무 9년 2월 11일 오전.
경운궁 중화전에 어전회의(御前會議)가 소집되었다.
내각총리대신 김옥균 이하 각부 대신들, 군부 최고위 인사인 원수부 국장들, 은퇴한 원훈 김홍집·박정양·김윤식도 입궐했다.
"제공(諸公),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결심했습니다."
어전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총리 김옥균이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좌중은 얼어붙은 듯 침묵했다.
러시아의 혁명적 위기, 일본의 정정 불안에 이은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의 방한 등 심각한 상황이라는 건 인지했지만, 전쟁 논의라는 건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은 대한에 동맹으로서 참전하거나,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우호적 중립을 지켜 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특파대사가 제안한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의 전쟁목표.
만주 전역에서 러시아군 철수, 여순 조차권과 동청철도 청국에 환부. 여순과 블라디보스토크는 비무장 자유항으로 삼음. 사할린을 일본에 할양.
한국이 동맹으로 참전할 시.
한국의 남만주 세력권 보장, 만주를 일본과 한국이 공동 보호. 동청철도는 일본과 한국이 공동 운영. 연해주도 러시아에서 분리, 자치를 실시하여 일본과 한국이 공동으로 보호.
한국이 우호적 중립을 유지할 시.
한국령 주요 지역의 항구와 철도를 개방해 일본에 군사통행권 부여. 군수품 보급.
전후 한국의 남만주 세력권 지지. 남만주 자치령 병합 인정.
"조건만 따지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조건입니다. 동맹으로 참전해 승리한다면, 대한은 단숨에 만주와 연해주를 세력권에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북방고토 수복의 역사를 쓸 수 있다는 의미지요. 중립만 지켜도, 만주에서 러시아가 철수하고 대한의 세력권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김옥균의 말에 좌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미가 당기는 제안임에는 틀림없었다.
"문제는 이 제안을 신뢰할 수 있냐는 겁니다. 이 조건에 따르면 일본은 만주에서 러시아를 몰아내고 청국에 환부하며, 대한의 남만주 세력권을 확보해 주는 대가로, 겨우 화태(樺太, 사할린)를 차지하는 게 전부입니다. 아무리 일본이 동양평화를 명분으로 내걸고 있다지만, 자신들의 피를 흘려 주변국의 이익을 챙겨 준다는 건 믿기가 힘들지요."
말을 마친 김옥균은 황제를 쳐다보았다. 이선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일부러 침묵을 지켰다. 황제의 주장을 무작정 따르는 걸 방지하기 위해, 대신들이 의견을 펼치는 걸 들어 보고 싶었다.
"일본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나라고, 10년 전 청국을 상대하여 함께 싸운 나라입니다. 일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독립전쟁에서 청국을 그리 빠르게 격파할 수 없었을 겁니다. 조건이 너무 좋다는 건 의아한 일이나, 무작정 의심할 수는 없지요."
다들 침묵을 지키자, 원훈 김홍집이 먼저 의견을 밝혔다. 은퇴한 후에도 최고 명예직인 의정대신(議政大臣)과 중추원 종신의관 직함을 유지했다.
"그럼 의정께서는 참전을 지지하는 입장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참전하여 대한국민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보단, 우호적 중립을 지키는 게 좋겠습니다. 중립만 지켜도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이윽고 박정양이 질의하고 외무대신 서광범이 답변했다.
"의정대신의 의견에 전반적으로 동의합니다만, 의문점이 있습니다. 또 다른 동맹인 영국은 이 전쟁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러시아의 남하를 경계해 오던 영국은 여전히 일본을 지지하는 입장입니까?"
"영국의 입장은 아직 불분명합니다. 영일동맹을 체결한 재작년까지는 확실히 그런 입장이라 봐야겠습니다만, 러시아의 동맹인 프랑스와 협상이 체결된 시점부터는 독일을 더 경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도 전쟁이 일어나면, 조약에 따라 영국은 우호적 중립을 지키리라 봅니다."
"미국은 어떻습니까? 미국도 일본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는데."
"주미공사의 전언에 따르면, 최근 일본은 대미외교를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습니다. 재선에 성공한 루스벨트 대통령은 여전히 일본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보입니다."
서광범은 주미, 주영공사를 지냈으므로 동향 파악이 빨랐다. 영국은 일본과 동맹을 맺은 이상 최소한 우호적 중립은 지켜 줄 것이고, 루스벨트는 일본을 이용해 러시아의 태평양·중국 진출을 막고자 하는 관점이 여전했다.
"전후 조건은 차치하고, 근본적인 문제가 논의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단독으로 전쟁해서 이길 능력이 되냐는 것입니다. 러시아가 비록 근래 혼란스럽다고는 하나 강대국인데, 일본은 무엇을 믿고 전쟁을 벌이려 하는 겁니까?"
내무대신 민영환이 회의감을 드러냈다. 러시아 공사를 지낸 민영환은 러시아의 군사력을 높이 평가했다. 강대국 러시아에 대한 두려움과 일본의 국력에 대한 의문은 민영환만 느끼고 있는 게 아니었다.
군무대신 한규설이 원수부 참모국 총장 박유굉에게 답변 기회를 넘겼다.
"예. 객관적으로 볼 때는 러시아가 압도적으로 강합니다. 일본은 상비군 13개 사단 약 20만, 후비군 약 40만, 총 60여만을 동원할 능력이 되는 거로 파악됩니다. 국민군까지 총동원을 하더라도 최대 80만으로 추정됩니다. 그에 비하면 러시아는 상비군만 110만, 동원 가능한 병력은 최소 300만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300만 대군이라……."
순간 어전회의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러시아군의 강대함은 알고 있었지만, 새삼 압도적인 규모에 놀랄 따름이었다. 대부분은 ‘역시 일본의 무리수’라고 생각했다. 일본과의 동맹을 지지하는 아시아주의자들도 침묵했다.
"해군력의 경우, 일본은 지난 10년간 빠른 속도로 건함을 하여 세계 5위의 해군력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전함 수는 더 많지만, 일본 전함이 더 최신입니다. 해군은 충분히 격돌해 볼 만합니다. 물론 러시아 발트 함대가 온다면 해군력조차 러시아의 압도적인 우위겠습니다만."
그나마 일본이 근소하게 우위를 보이는 해군력조차도, 발트 함대가 합류한다면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마치 임진왜란을 떠올리게 하는군요. 왜적 풍신수길(豐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이 명을 정벌하겠다며 아조(我朝)에 길을 빌려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결과가 임진년 참화였습니다."
나이 71세, 가장 연로한 김윤식은 옛일을 떠올렸다.
정명가도(征明假道), 즉 명을 치러 가니 조선은 침공할 길을 빌려 달라. 말도 안 되는 요구에 조선은 단호히 거부했고, 일본은 조선을 침략했다. 실제로 도요토미는 명나라까지 정벌하겠다는 야욕을 품고 있었으니, 조선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30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지만, 20세기 초 한국인이 일본에 품고 있는 불신의 기저에는 임진왜란이 있었다. 일본의 제안은 하필이면 임진왜란을 떠올리게 하는 제안이었다.
1905년 현재는 정명가도 대신에 정로가도(征露假道)였다.
"군사통행권이란 게 결국 우리 영토를 빌려달라는 뜻이 아닙니까? 혹여 군사통행권을 얻어 러시아를 치러 가는 척하다가, 대한을 기습한다면?"
업무분야 외에는 가급적 발언을 삼가는 농림대신 전봉준이지만, 일본에 강한 불신감을 드러냈다.
일본을 서구화의 동지로 여겨 우호적인 개화당 엘리트들과 달리, 농민을 대표하는 전봉준은 일본에 대한 농민들의 불신을 공유했다.
"대한을 노린 가도멸괵일 가능성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리되면 꼼짝없이 계략에 당하는 것입니다."
가도멸괵(假道滅虢).
춘추시대의 고사로, 진나라가 우나라에 길을 빌려 괵나라를 치겠다고 했다. 진헌공의 뇌물에 넘어간 우나라 군주는 길을 빌려주었다가, 진나라는 괵나라에 이어 우나라도 멸망시켰다.
"어허, 작금은 만국공법의 시대입니다. 더욱이 일본은 대한과 상호방위조약까지 맺었는데 가도멸괵이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조약의 일원인 영국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아니, 만국이 비난할 것입니다."
"기습을 당한 후에 만국이 비난하면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공은 가도멸괵은 알아도 순망치한은 모릅니까? 이 경우에 순망치한은 오히려 대한과 일본이에요."
법무대신 유길준이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순망치한(脣亡齒寒).
우나라 재상은 군주가 길을 빌려주는 데 결사반대하면서,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듯 괵나라가 망하면 다음은 우나라가 되리라 경고했다. 그 경고대로 우나라는 망했다.
대신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전봉준이 국제정세에 무지하다고 생각했다. 개화당 대신들은 한국과 일본이 동양의 순망치한이라 여겼고, 한쪽이 망하면 다른 쪽도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전봉준은 개화당 대신들 사이에서 언제나 소수파였고, 이선의 굳건한 지지가 아니었더라면 벌써 직을 내던졌을 터였다.
"가도멸괵이라, 물론 그런 일은 없을 것이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일본이 가도멸괵을 꾀한다면, 분노한 2천만 국민의 저항을 봐야겠지. 짐이 직접 앞장서서 적과 싸우겠소. 적이 대한을 굴복시키길 원한다면, 짐의 시체부터 밟고 지나가야 할 거요."
회의를 경청하고 있던 이선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만약 기습을 당하더라도 죽을지언정 굴복은 하지 않겠다는 황제의 강경한 발언에, 대신들은 몸 둘 바를 몰라했다.
"지존의 옥체는 그 무엇보다 소중하시거늘, 성상께서는 어찌하여 황공한 하교를 하십니까?"
"만약 일본이 그런 음험한 계책을 꾸미고 있다면, 신등(臣等)은 목숨을 다해 성상을 보위하겠습니다!"
"신등뿐이겠사옵니까? 2천만 국민이 몸을 바쳐 싸울 것입니다!"
대신들이 황공해 하며 일제히 절대 충성을 다짐했다.
러시아를 두려워하면서도, 아시아주의에 공감하여 일본에 호감을 느끼고 신뢰하는 개화당 엘리트들.
이선은 그들의 시각을 이해하면서도, 약간의 거리감이 있었다.
만약 일본이 한국을 노린다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굴복하지 않을 것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대한제국의 국익이 중요하다는 걸 새삼 각인시켰다.
"참모총장, 분석을 계속하시오. 러시아가 일본보다 군사력이 강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니, 보다 중요한 건 현재 정세를 반영하는 것이겠지."
"예, 폐하. 객관적인 전력은 일본의 열세임에 틀림없으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일본이 선제공격하면 단기적으로 우세를 점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어찌하여 그렇소?"
"러시아의 군사력이 비록 막강하기는 하나, 그 전력의 9할이 유럽에 있습니다. 만주와 극동에 주둔하는 러시아군은 15만 남짓입니다. 물론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개통하여 러시아군의 수송이 예전보다 빨라졌음은 분명하나, 그래도 페테르부르크에서 극동까지는 동서 2만 5천 리(1만 km)에 달합니다. 발트 함대는 엄청난 우회거리까지 감안하면, 항행하는 데 많은 시일이 필요합니다. 전체 군사력은 러시아가 일본을 압도하지만, 동아시아 전선으로 한정하면 일본이 육·해군 모두를 압도합니다."
박유굉은 전면에 걸려 있는 커다란 세계지도를 지휘봉으로 가리키며 분석을 이어 나갔다.
"하물며 현재 러시아에는 극심한 정치적 소요사태가 이어지고 있으므로, 대군을 극동에 파견하는 건 부담이 큽니다. 무엇보다 러시아군의 주적은 어디까지나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입니다. 독일의 잠재적 위협이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단기간에 주력을 빼돌려서 극동으로 보내는 건 위험합니다."
"단기전에서는 일본이 우세하되, 장기전으로 가면 러시아가 우세하다는 뜻이겠군."
"예, 장기전으로 가면 러시아가 필승할 겁니다. 다만 러시아 국내정세가 평안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일본 육사와 프로이센 전쟁대학을 졸업한 박유굉은 일본과 독일의 전략을 익히 알고 있었고, 일본의 단기적 우세를 예측했다.
실제 러일전쟁의 역사를 아는 이선으로선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예측이었다. 하물며 러시아는 지금 정치적 혼란까지 더한 상황이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혼란이 잠재워지기는커녕 더 커질 것이다.
"그렇다면 참모총장의 최종 결론은? 대한은 어떤 길을 택해야겠는가?"
"황공하오나 신은 어디까지나 군인이므로, 군사적인 판단만 내릴 수 있습니다."
박유굉은 제복군인 중 최고위였지만, 발언을 조심히 했다.
독립전쟁과 북벌전쟁 승전 이후 무관의 지위가 굉장히 높아졌다곤 하지만, 조선은 전통적으로 문관 우위의 나라였다. 조선의 전통을 이은 대한제국은 철저한 문민통제를 지향했다. 아무리 개화당 엘리트가 일본을 선호한다고 해도, 일본처럼 군인들이 내각을 무너트리고 전쟁까지 주도하는 상황을 용납할 리가 없었다.
박유굉의 고심을 읽은 이선이 흔쾌히 답했다.
"정치적 판단은 짐과 대신들의 몫이니, 어디까지나 군사적인 판단만 내려 주시오."
"예, 폐하. 단기전에서 일본이 우세를 점할 길은 분명해 보이므로, 대한은 동맹국인 일본을 지지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대한의 안보 위협은 남쪽이 아니라, 북쪽에 있습니다. 만주에서 러시아군이 사라지는 것만으로 대한의 안보에는 큰 도움입니다."
"그럼 참전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인가?"
"아닙니다. 대한은 아직 외지에서 전면전을 치를 능력은 되지 못합니다. 우호적 중립을 표명하고, 전도유망한 장교들로 하여금 관전무관으로 근대전을 체험하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만약 군사적 지원을 하더라도 비전투요원인 공병대, 치중대(輜重隊), 군의대로 한정해야 합니다."
박유굉의 분석을 듣고 난 후, 이선은 김옥균을 쳐다보았다. 총리인 김옥균이 내각을 대표하여 최종적으로 의견을 내라는 의미였다. 김옥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리하자면, 대한은 크게 세 가지 전략 중 하나를 택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일본과 함께 적극적으로 참전한다. 승전한다면 단순에 만주와 연해주에 세력을 떨치겠으나, 인적·물적 손해가 클 것이며 위험부담이 너무나 큽니다. 둘째, 우호적 중립을 지켜 철도와 항구를 개방하고, 군수품을 보급한다. 물론 중립이라고 해도 러시아는 대한을 크게 불신하겠지요. 전황에 따라 전쟁에 휘말릴 가능성은 충분하나, 일본이 승전한다면 러시아의 만주 지배를 끝낼 수 있습니다."
김옥균은 선택 시 예상되는 이익과 손해를 분석했다.
"셋째, 조약을 무시하고 엄정중립을 지킨다. 일본을 전혀 신뢰할 수 없다면 택할 방법입니다. 만약 이리되면 일본이 전의를 꺾게 될 것이냐? 신은 회의적입니다. 일본은 대한에서 실패한다면, 어떻게든 청국을 끌어들일 겁니다. 만주 철군, 여순과 동청철도 환부는 청국 입장에서 바라마지 않는 일이니까요. 만약 일본과 청국이 손을 잡고 러시아와 전쟁을 벌인다면, 오히려 대한 입장에서는 최악입니다."
김옥균의 분석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한국이 거절한다고 해서, 일본이 결단한 전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한국 대신에 청국에 온갖 공수표를 남발해서 끌어들이고자 할 것이다. 그리되면 한국은 평화는 지킬 수 있을지 몰라도, 러시아·일본·청국 사이에서 모두 고립된다.
"고견 잘 들었소. 이제 결단을 내려야겠군."
좌중의 시선이 황제에게 집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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