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전쟁 발발
"자, 이제 전쟁이다. 이토 이 새가슴 늙은이가 한국을 끌어들이려고 온갖 독소조항으로 가득 찬 불리한 조약을 맺고 와 놓고선 협력을 얻어 냈다 자랑하고 있는데, 도대체 왜 한국 따위에 끌려다닌단 말인가? 이럴 거면 왜 러시아와 전쟁을 하나? 한국이 참전한다면 모를까, 중립을 유지하는 데 우리가 쟁취하는 이권을 내줄 이유가 없다. 최대한 신속하게 러시아를 격퇴하고, 동양의 패권을 장악한다."
원하던 대로 전쟁 선포를 얻어 낸 야마가타와 군부는 신속한 승리를 다짐했다.
이토가 한국과 맺은 조약은 이미 맺어 어쩔 수 없으니, 전시에는 존중하는 시늉을 하더라도 승전하고 나면 태도를 바꿀 생각이었다.
일본이 공수표를 날리고 있는 건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청나라에는 ‘만주 철군, 여순과 동청철도 환부’를 위해 싸운다며 우호적 중립을 요청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여순을 차지할 생각이었다.
미국과 영국에는 ‘승전 후 만주 이권과 동청철도 운영권을 넘겨 줄 테니 공채를 매입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이조차도 공수표였다.
"즉각 동원령을 내린다. 먼저 1군을 편성한다. 제1사단, 제2사단, 제12사단은 히로시마에 집결하라."
1905년 2월 16일, 일본에 동원령이 내려지고, 후비군이 소집되기 시작했다.
먼저 상비군 12개 사단이 4개 군으로 편성되어 대륙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1군에 편성된 3개 사단 4만 4천명의 임무는 한국과 맺은 조약에 따라 진남포에 상륙, 철도를 이용해 압록강을 넘어 요양 방향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1군에 이어 순차적으로 2군, 3군, 4군이 편성되어 진격할 예정이었다.
"2군은 청국령 요동반도에 상륙해 해성 방향으로 진출해 남만주 철도를 장악하라. 3군은 러시아령 관동주에 상륙해 대련항과 여순 요새를 점령하라."
1, 2, 3군은 1차 목표를 완수하면 요양과 봉천으로 진격, 러시아 만주군과 결전을 벌여 섬멸하는 게 최종 목표였다.
4군은 양동 부대로, 연해주에 상륙해 블라디보스토크를 위협하여 극동군의 만주 이동을 저지하는 게 목표였다.
물론 이 모든 전제조건은, 해군이 제해권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해군의 승리 없이 육군의 진격은 불가능하다. 해군은 신속하게 여순의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제압하고 황해의 제해권을 확보한다. 연합함대, 출진하라!"
2월 17일 금요일 오전, 연합함대가 군항 사세보를 출항했다. 전함 6척, 장갑순양함 8척, 방호순양함 12척, 구축함 20척, 어뢰정 35척으로 구성된 연합함대는 곧바로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모항인 여순항으로 항진을 개시했다.
선전포고 없는 전쟁의 개시였다.
같은 날 오후, 주일 러시아 공사 로젠은 단교를 통보받았다.
이미 일본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지켜보고 있던 로젠은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그렇다면 단교는 곧 전쟁을 의미합니까?"
"비록 양국 간의 관계가 끊어졌지만, 꼭 전쟁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공사의 안전한 퇴거를 보장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일본 외무대신 고무라는 로젠에게 안전을 보장하여 퇴거를 권유했다. 본국과 교신을 허용한다고 했으나, 이미 일본은 암호로 된 해외 전문 발신을 금지시켜 버린 상황이었다.
공사관 무관 루신 대령은 급박하게 딱 세 단어만 평문으로 적어서 본국으로 타진했다.
「일본군 총동원. 루신.」
대한제국 황성.
주한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는 초조했다.
그는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토의 방한이 협상 중재임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토가 일요일 온종일 경운궁에서 한국 황제 및 대신들과 회의를 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심상치 않은 상황이라 인지했다.
파블로프는 대한제국 외무부를 찾아 외무대신 서광범과 회견했으나, 서광범은 미묘한 태도로 말을 돌렸다.
"한일 양국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동맹으로서, 유사시에 발생할 수 있는 사태에 대비하여 여러 가지 상황을 조율한 것입니다."
"조속히 황제 폐하를 알현하게 해 주십시오."
"어가(御駕)의 평양 행차가 준비 중입니다. 당분간은 알현이 어렵습니다."
돌아가는 상황이 수상했으나, 본국에서는 아무런 훈령도 없었다.
한국은 러시아로 향하는 전보에 문제가 없으므로, 파블로프는 본국을 향해 타진했다.
「일본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 이토 후작 방한 이후 일본과 한국 간에 모종의 합의를 이룬 것으로 보임. 한국 황제는 평양으로 향한다고 함. 본국에서 훈령을 내려 주길 바람. 본관은 계속 상황을 파악하도록 하겠음. 주한 공사 파블로프.」
「주청 일본 공사가 자금성에서 청국 황제를 알현하고, 총리아문에서 장시간 대화를 나눔. 대화 내용은 파악되지 않고 있으나, 만주 문제와 관한 논의가 아닌지 추정. 본국에서 훈령을 내려 주길 바람. 주청 공사 카시니.」
단교가 통보되기 전에 이미 주일·주한·주청 러시아 공사관이 일제히 본국에 심상치 않은 상황 보고했으나, 정작 페테르부르크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2월 4일(17일) 오후. 주러 일본 공사 구리노 신이치로는 외무부를 찾아 단교를 통보했다. 외무대신 람스도르프는 아연실색했다.
「…… 러시아의 반복적인 적대 행위는, 일본 정부에 결단을 촉구하게 되었다. 러시아에 의해 침탈된 권리를 지키고 방위하기 위하여, 동양에서 공고하고 항구적인 평화를 위하여, 일본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독립행동을 취할 권리를 갖는다. …… 따라서 일본제국 정부는 러시아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기로 결정했다.」
"귀국의 행위는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50년 외교 관계를 논의도 없이 하루 만에 끊어 버리다니요!"
불과 며칠 전, 러일 수교 50주년을 축하하는 기념행사가 주러 일본 공사관에서 개최되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일본 공사는 향후 양국 관계가 만대에 걸쳐 우호가 이어지리라 다짐하지 않았던가?
"송구합니다. 저는 본국의 훈령대로 행할 뿐, 이는 결코 제 본의가 아닙니다. 단교가 일시적으로 끝나고, 조속히 외교관계가 회복되길 바랍니다. 저도 반드시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구리노는 진심으로 송구스러워했다. 그는 일본 내 대표적인 친러 인사로, 러시아와의 타협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고 믿었다. 그런데 정부는 앞에서 협상을 지시해 놓고서, 뒤에서는 전쟁을 획책하고 있었다. 고위 외교관인 자신도 전혀 몰랐던 일이었다.
일본 공사의 태도를 보고, 외무대신은 착각에 빠졌다.
정말 단교는 일시적인 것인가?
람스도르프는 즉각 겨울궁전으로 향했다.
"폐하, 일본이 단교를 통보해 왔습니다."
"단교? 기가 막힐 노릇이군. 최근 일본의 태도가 공격적이었다고 해도, 단교까지 하다니."
니콜라이 2세는 혀를 찼다. 국내 소요 사태만으로도 정신이 없는데, 일본까지 성가시게 하고 있었다.
"폐하, 일본의 동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극동에 전쟁을 대비하라는 명령을 내려야 하지 않을까요?"
육군대신 쿠로파트킨이 극동 지역의 동원령을 제안했으나, 차르는 고개를 저었다.
"전쟁은 없소."
"황공하오나 어찌하여 확신하십니까?"
"짐이 전쟁을 원치 않으니까!"
차르는 자신만만했다. 감히 일본 따위가 러시아 제국을 상대로 먼저 공격을 한다는 건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전쟁은 오직 러시아가 먼저 시작할 때만 가능했다.
다음날, 일본군 동원령에 대한 전보를 받은 육군 참모총장 사하로프는 심각성을 느꼈다. 참모총장은 즉각 육군대신 쿠로파트킨을 찾았다.
"방금 도쿄에서 들어온 급보입니다. 일본군이 동원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속히 대응하여 극동군관구에 부분 동원령이라도 내려야 합니다!"
"이미 말씀을 드렸는데, 황제 폐하께서 전쟁을 원치 않으시오."
"만약 적이 기습이라도 하면 어찌합니까? 우리가 군사적 대응을 회피하면 적은 오히려 더 기세등등할 겁니다. 적 해군이 황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기 전에, 먼저 태평양 함대를 발진시켜 적극적으로 적을 저지해야 합니다!"
"으음……. 좋소. 폐하께 아뢰어 봅시다."
겨울궁전에서 대책회의가 열렸다. 참모총장의 강력한 요청에도, 이번에도 차르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오히려 차르는 극동을 관할하는 극동총독 알렉세예프 제독에게 전보를 보냈다.
「우리가 아니라 일본이 먼저 군사행동을 개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만약 적이 포트 아르투르를 공격하려 한다면, 예상되는 적의 공격에 대비하되 선제공격은 하지 말 것.」
극도로 애매한 훈령이었다. 적이 공격해 와도 싸우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차르의 애매모호한 지령은, 그의 우유부단함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폐하, 단교는 차라리 잘된 일입니다. 일본이 먼저 공격하게 내버려 두십시오. 일본이 비겁하게 기습공격을 했다면, 러시아인들은 일본의 비열한 기습을 결코 용인하지 못할 겁니다. 러시아 국민들에게 열화와 같은 애국심을 끓어오르게 하겠지요. 정부를 향해 비난을 쏟아 내던 자들도, 일제히 전쟁 찬성으로 돌아설 겁니다."
내무대신 플레베는 극동의 전쟁이 오히려 혁명적 위기의 종료를 앞당기리라고 부추겼다.
비록 폴란드, 핀란드, 발트 지역은 여전히 반란 상태로 남아 있겠지만, 러시아인들의 충성만 유지한다면 제국은 안전했다.
"음, 과연 그렇겠소? 만약 전쟁이 장기화되면?"
"이 전쟁은 단기간에 러시아의 승리로 끝납니다. 짧고도 위대한 승리는, 제국을 반석 위에 올릴 수 있습니다. 전쟁 승리는 니콜라이 2세의 치세를 영광스럽게 빛낼 것입니다."
니콜라이는 내무대신의 진언이 충분히 일리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일본 따위가 감히 러시아에 먼저 전쟁을 하리라곤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저런 애매모호한 훈령이 내려오는 것이었다.
* * *
2월 5일(18일) 토요일, 포트 아르투르(여순).
차르의 훈령을 받고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이는 건 총독 알렉세예프도 마찬가지였다.
"단교 통보에 이어 여순과 대련에서 일본 거류민들이 일제히 철수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습니다. 비상 대기령을 내릴까요?"
"음, 그래야겠지. 다만 내일은 주일이니, 바로 비상령을 내리면 장병들의 반발이 크겠지? 7일 월요일을 기해 비상 대기령을 하달한다."
"예, 알겠습니다."
러시아는 위에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설마 일본 따위가 러시아를 먼저 공격하겠나?’는 확신에 빠져 있었다.
단교가 꼭 전쟁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고, 대부분은 일본을 극도로 얕잡아보고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있었다.
하필 다음날인 일요일은 봉헌 축일이었고, 독실한 정교회 신자인 러시아인들은 예배에 참석해 이날을 기렸다. 예배 후에는 축연도 있었다.
그날 밤 8시가 되어야, 태평양 함대 사령관 스타르크 제독이 소집한 작전회의가 열렸다.
"내일부터 비상 대기 상태에 들어간다. 각함은 방어 태세를 갖추고, 어뢰공격에 대비해 외항에 방어용 그물을 친다."
"알겠습니다."
여순은 깊은 만의 형태로, 좁은 수로를 사이에 두고 내항과 외항이 있었다.
여순항 외항에는 전함 7척, 장갑순양함 2척, 방호순양함 8척, 구축함 20척 등이 평시 상태로 대기하고 있었다.
회의가 끝난 후, 사령관이 단언했다.
"이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비상조치에 불과하다. 전쟁은 없을 것이다."
사령관의 단언과 달리, 이미 여순항 외곽에는 일본 함대가 대기 중이었다.
달빛조차 거의 사라지는 시각을 기다려, 일본 함대는 기습공격을 준비했다.
2월 19일 밤 11시 45분.
"제1 구축전대, 어뢰 공격 개시!"
"어뢰 발사!"
구축함과 어뢰정이 러시아 함대에 접근하여, 일제히 어뢰를 발사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는 순간이었다.
2월 20일 월요일 오후, 대한제국 황성.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총리 김옥균을 만나 ‘승전’ 소식을 전했다.
"일본제국 해군은 여순항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습니다. 러시아 군함의 다수가 침몰하거나 대파되었으며, 이로서 서해의 제해권은 제국 해군에게 넘어왔습니다."
"아, 귀국의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양국이 맺은 의정서에 의거하여, 일본군의 상륙을 허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일 12사단 선발대가 진남포에 당도할 예정입니다."
"물론입니다. 속히 황제 폐하의 재가를 받도록 하지요."
김옥균은 즉시 이선을 찾았다.
"폐하, 일본이 진남포 상륙 허가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상륙 허가하겠소. 이제 짐도 근위사단을 대동하고 평양으로 향해야겠군."
대한제국군은 동원령은 내리지 않았지만, 북방 부대에 비상을 내렸다.
평안도 4사단을 요동도로 보내고, 함경도 5사단은 연길도로 보냈다. 4·5·6·7사단이 북방 신영토를 방위할 계획이었다.
이선은 황성 방위는 1사단에게 맡기고, 직접 근위사단과 함께 평양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당분간 일본군의 행로를 직접 관리하고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하야시 공사의 전언에 따르면, 일본군은 여순항 해전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고 합니다."
"그래? 벌써부터 대본영 발표인가. 여순에서 온 보고는 다르던데."
이선은 여순에서 암약하는 제국익문사 요원으로부터, 조금 전 상황을 보고하는 전문을 받았다.
「극동총독부, 개전을 알리는 호외 발행. 피해는 전함 2척, 순양함 2척으로 추정. 이중 순양함 1척은 어뢰 공격으로 격침된 거로 보임. 나머지는 대파(大破)되었고, 전함 1척은 퇴각 중에 얕은 여울에 좌초되었음. 전사자는 10여 명으로 추정. 요새포의 반격으로 일본 함대는 외항에서 물러남.」
일본 해군이 필승의 각오로 야습에는 성공했지만, 정작 러시아 함대에 끼친 손해는 기대 이하였다.
러시아 해군의 방비 상황도 해이하기 짝이 없었지만, 일본 해군의 어뢰 공격도 대부분 실패하고야 말았다.
기습을 당한 러시아 해군은 놀라서 제대로 된 반격을 하지 못한 채 내항으로 퇴각했고, 기습을 한 일본 해군은 요새포의 반격에 계획했던 2차 공격도 하지 못한 채 외항에서 벗어났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아무튼 이로써 전쟁은 시작됐군. 태평양 함대가 손실이 적다고 해도 여순항에 갇혀서 나오지 못하게 됐으니, 결국 서해의 제해권은 일본이 차지하게 됐군. 하지만 이대로 태평양 함대를 내버려 두자니 눈엣가시인데, 내항에 틀어박혀 있으면 해군이 어쩔 도리가 없지. 결국 육군이 여순 요새로 투입되겠군."
결국 일본은 단기전으로 러시아를 격파하겠다는 야욕의 대가를 치르며 시체를 차곡차곡 쌓게 될 것이고, 러시아는 일본을 극도로 얕본 대가를 피로써 치르게 될 것이다.
‘일본은 장병들의 죽음을 국가와 천황을 위한 아름답고 조화로운 희생으로 포장할 터. 그러나 현대전에서는 더 이상 아름답거나 조화로운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무 이유 없이 개처럼 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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