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398화 (397/812)

79화 만주 전선 개막

1905년 4월, 마침내 만주 전선이 개막하였다.

2월 20일의 개전으로부터 무려 달포가 지난 후에야 첫 지상전이 발생한 것이다.

러시아군은 장기전으로 시간을 끌 목적으로 전투를 회피한다고 쳐도, 단기전을 노리는 일본군의 진격이 느린 것은 의외였다.

"3주면 25만 병력을 동원해 외지에서 작전을 개시할 수 있다!"

당초 육군의 호언장담과 달리, 군 동원과 편제, 수송과 진군에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된 것이다.

수송을 담당한 해군 탓을 하고 싶어도, 이미 해군은 목표대로 황해의 제해권을 장악한 상황이라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정부의 개전 결정이, 러시아의 혁명적 위기로 인해 근시안적으로 결정되었음을 의미했다. 육군도 갑작스러운 개전 방침에 대해 2월 초순에야 처음 들었기 때문이었다.

지상전 첫 공격을 담당할, 제1군 3개 사단이 진남포에 집결을 완료한 건 3월 14일이 되어서였다.

구로키 다메모토 대장 이하 1군 사령부는 평양에서 접반사 이영과 한국군 장교단의 환대를 받았다.

"친왕 전하께서 친히 환영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장군과 귀국 군대의 건투를 기원합니다. 향후 작전 계획은 어찌 됩니까?"

"압록강을 건너, 천산산맥을 넘어 안산을 점령한 러시아군을 몰아내겠습니다. 그다음은 러시아 만주군 사령부가 있는 요양입니다."

3월 18일, 제1군은 평양에서 압록강-요양 방면으로 진격을 개시했다. 한국은 일본군이 원하는 대로 넉넉한 군수품을 보급했다. 물론 세상에 공짜란 없었다. 일본군은 시세 이상의 돈을 지불하고 군수품을 구매하고, 운송을 요청했다.

이동휘 부령이 지휘하는 혼성지원연대, 노백린 부령이 이끄는 관전무관단이 1군의 진격에 합류했다.

"속히 만주로 진격한다!"

평양에서 압록강을 건너 봉황성에 도달하기까지는 철도로 손쉽게 행군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개전 이후 대한제국이 신속히 부설하고 있다지만, 봉황성 이북의 철도 부설은 완료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한국 정부는 4월 초에 마천령에 인접한 하마참역까지 부설을 완료하겠다고 약속했다.

1군 사령부는 철도 부설이 완료되길 기다리느냐, 아니면 육로로 행군을 계속하느냐를 기다려야 했다.

"어쩔 수 없지. 보병과 기병은 육로로 즉시 천산산맥을 넘어 행군을 하고, 포병은 철로 부설을 기다린다."

1군 보병과 기병 부대는 마천령을 향해 육로 행군을 개시했다.

3월 하순이 되어 추위는 풀렸지만, 문제는 만주의 포장되지 않은 도로가 진흙탕이 되어 버렸다는 점이었다.

3개 사단 4만 2천 명이 일제히 천산산맥의 소로로 모여드니 길은 더 좁아지고, 병목현상이 발생했다.

"싸우기도 전에 진 다 빠지겠네."

"제길, 포병대 놈들만 꿀 빠네."

"압록강을 넘기 전까진 도로고 철도고 잘되어 있더니만, 왜 만주의 도로는 포장도 안 하는 거야?"

한반도는 전국에 넓은 포장도로가 만들어졌지만, 압록강 이북 천산산맥을 넘는 길은 도로는 여전히 비포장 협도였다. 일본군 3개 사단은 비포장 산악로를 힘겹게 넘어갔다.

4월 초, 약속대로 하마참역까지의 철도 부설이 완료되었다. 포병대는 철도로 수송을 할 수 있었다.

만약 철도가 없었더라면 중포(重砲)와 산포(山砲)의 운송은 더욱 힘겨웠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군은 불만이었다.

"아니, 우리 군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철도와 도로 부설은 완료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긴급을 요하는 행군에 예정보다 시간이 더 소요되지 않았나!"

일본군 장교단의 불평에, 지원 업무를 총괄하는 이동휘 부령이 불쾌함을 표명했다.

"대한국은 한일의정서에 의거하여 최선을 다해 협력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갑작스럽게 전쟁을 시작한 건 귀국이 아닙니까?"

"아니, 나쁜 뜻으로 말한 건 아닙니다. 귀국의 협조에는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일단 일본군은 고개를 숙였다. 말마따나 ‘적극적으로 협조 중인 한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라는 사령부의 지시가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일본군 장교들의 심중에는 의심이 남았다.

"조선 놈들, 러시아랑 짜고 사보타주 하는 거 아닌가? 요충지인 안산 돌출부를 싸우지도 않고 넘겨주지 않나."

"에이, 그럴 리가. 의도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겠지. 1개 사단으로 러시아군을 어찌 막겠나. 조선은 우리보다 개혁이 20년 늦었네. 일본의 20년 전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되네."

일본군의 한국관(觀)은 전반적으로 ‘우월감’과 ‘기특함’의 교차였다. 황민화 교육의 영향으로 자신들이 아시아에서 가장 우월한 민족이라고 믿는 일본군은, 당연히 한국도 내려다보았다.

청조일전쟁과 의화단전쟁 이후 완전히 열등민족 취급하는 ‘시나징(支那人, 중국인)’보다야 훨씬 낫지만, ‘조센징(朝鮮人)’도 여전히 더 배워야 할 민족이었다.

일본은 공식적으로 ‘대한제국’, ‘한국인’이라고 불렀지만, 일본인들은 대개 ‘조선’, ‘조선인’이란 표현에 더 익숙했다.

실제 역사에서는 굉장한 비하의 뉘앙스를 풍기는 조센징은, 바뀐 역사에서는 비교적 가치중립적인 표현이었다. 오히려 시나징이 굉장한 멸칭이었다.

"뭐, 그래도 게으르고 야만적인 지나인보다야 조선인이 훨씬 낫지. 아시아에서 개화된 민족은 일본인과 조선인뿐이니까. 여전히 일본을 목표로 더 배워야겠지만."

"20년 사이에 이만하면 빠른 진보지. 이해해 주자고."

"한국이 러시아의 앞잡이니 뭐니 말이 많았지만,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는 일본을 택하지 않았나. 형제 민족이라 불릴 자격이 있지."

일본군은 한국의 ‘협력’을 기특하게 생각했다.

탈아입구(脫亞入歐)를 꿈꾸는 일본으로서는, 상종할 가치가 없는 아시아에서 자기들 수준에 근접하다고 생각하는 건 한국뿐이었다.

"우리가 놀고 있다는군, 건방진 쪽발이 새끼들."

"아니, 우리가 누구 때문에 고생하는데? 애초에 전쟁은 지들이 벌였지 우리가 벌였나?"

"예로부터 왜놈은 신의가 없는데, 믿어도 되는 건지."

혼성지원연대는 일본군의 불평에 어이가 없었다. 한국군 중 유일하게 전선으로 향하는 혼성지원연대는 공병대, 치중대, 군의대로 구성된 비전투부대였다. 죽을 염려는 없어도, 온갖 잡다한 일을 맡고 있는 혼성연대로서는 앞으로도 고생길이 예정되어 있었다.

"장병 제군, 이 전쟁은 비록 우리의 전쟁은 아니나, 새로운 형태의 전쟁을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거다. 모두 힘내 주길 바란다."

"네!"

혼성연대장 이동휘 부령과 관전무관단장 노백린 부령은 장병들을 격려했다.

독일 전쟁대학 유학파인 최고 엘리트인 데다, 서북 사람답게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야성적인 두 지휘관은 장병들의 신뢰와 환호를 받았다.

대한제국군 6사단은 개전 초기에 안산 돌출부를 포기하고 천산산맥의 주요 세 통로, 마천령·팔반령·분수령을 지켰다. 6사단에 속한 보병 3개 연대가 주요 고지 하나씩을 맡았다.

일본군의 진격이 접근하자, 원수부에서 보낸 전령이 6사단 지휘부에 도착했다.

"마천령, 팔반령, 분수령을 모두 포기하라고?"

"예, 즉시 봉황성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입니다."

6사단장 홍범도 참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올해 초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장성으로 진급하여 최전방인 6사단을 맡게 된 홍범도는, 자신이 이끄는 사단을 언제든 적과 일전을 벌일 수 있는 강군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런데 막상 개전 이후 철수만 거듭하고 있으니, 10년 전 독립전쟁의 영웅인 홍범도로서는 속이 쓰릴 지경이었다.

"그럼 러시아군이 장악할지도 모르는데? 러시아군은 지척에 있네. 원수부에서는 현지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가?"

러시아군 2개 사단이 마천령 인근에 주둔 중이므로, 이대로 무작정 철수하면 요지를 빼앗길 우려가 있었다.

"알고 계십니다. 곧 일본군이 도착할 터이니, 그 전에 먼저 철수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일본군이 온 다음에 인수인계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아닙니다. 일본군 3개 사단이 접근하여 극도로 혼잡하니, 만에 하나 충돌이 발생할 수도 있어 즉시 철수하라는 명령입니다."

홍범도는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군인은 상관의 명령에 따라야 했다.

"6사단, 고지를 포기하고 봉황성으로 속히 철수한다!"

일본군이 도착하기 전, 6사단은 일본군 진격 루트를 우회하여 봉황성을 향해 퇴각했다.

사실상 러시아군에게 방어하기 좋은 3개 통로를 점령하라고 내버려 둔 셈이었다.

안산 동남부, 천산산맥 북쪽에는 시베리아 제1보병군단을 재편성한 만주군 동부군단 2만 7천 명이 주둔했다.

동부군단은 2개 사단 보병 6개 연대, 포병 3개 부대, 카자크 기병 1여단을 보유했다. 마천령 북쪽 고지대에 4개 보병 연대와 3개 포병대를 구축하고, 그보다 서쪽에는 2개 보병 연대와 기병대를 예비대로 배치했다.

"한국군이 고지를 모두 포기했다고?"

"예, 텅 비어 있습니다. 진지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한국군은 보이지 않습니다."

군단장 표도르 켈러 중장은 수염을 매만졌다.

"이상한 일이군. 이유를 모르겠네."

"이유야 어찌 됐건 기회입니다! 속히 모티엔(마천령)과 주요 통로를 확보해야 합니다!"

바이칼 카자크 기병여단장 파벨 미셴코(Pavel Mishchenko) 소장이 속히 고지 점령을 주장했다. 미셴코가 이끄는 카자크 기병대는 신속한 기동력으로 한국령 남만주 각지를 우회하며 정찰했다. 현재 전선의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러시아군 지휘관이었다.

"아니, 함정일지도 몰라. 우리 군을 고지대로 끌어들여 포위하려는 게 아닌가?"

"안산 돌출부 포기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한국군은 러시아군과의 충돌을 원치 않습니다. 일본군에게만 전투를 맡기려는 겁니다. 일본군이 접근하기 전에, 먼저 고지를 확보해야 합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아군은 2개 사단이고 접근하는 적은 3개 사단이지 않나. 섣불리 공세로 나서는 건 위험하네."

"아니지요. 우리 군의 병력이 부족한 만큼, 지형적으로 유리한 고지대에서 일본군을 저지해야 합니다!"

미셴코의 거듭된 요청에도, 켈러는 고개를 저었다.

"총사령관께서는 지연전에 목표를 두고 계시다. 일본군의 진격은 10년 전 삼국전쟁과 유사해. 어차피 적은 안산과 요양을 목표로 할 터, 여기서 지연전을 벌인 후에 퇴각한다."

"지연전이라고 해도 적에게 최대한 출혈을 입혀야 의미가 있는 게 아닙니까! 모티엔 고지에서 싸워야 합니다!"

"내게 모티엔을 점령하라는 명령은 없었어! 우리가 확보한 지점에서 적을 막아도 충분하다. 섣불리 병력을 움직여서는 안 된다. 귀관도 내 명령을 따르도록!"

쿠로파트킨의 지연전 방침을 지지하는 켈러는, 명령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고집을 보였다.

천산산맥을 넘는 주요 통로를 확보하여 일본군을 방어할 기회를 스스로 포기해 버리고야 말았다.

"어리석은 놈들, 러시아군이 지척에 있는데 고지를 포기하고 내빼 버리면 어떡하나!"

"제길, 러시아군이 그렇게 두려웠나?"

"로스케 놈들이 점령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점령했더라면 골치 아플 뻔했군."

4월 8일, 일본군 1군은 마천령·팔반령·분수령 통로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한국군 진지가 텅 비어 있는 걸 보고, 일본군은 한국군을 탓했다.

"노 부령, 이게 어찌 된 거요? 만약 러시아군이 고지를 확보했으면 어쩌려고 귀국 6사단은 스스로 포기한 겁니까?"

"황성의 원수부에서 현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길은 좁은데 일본군 진격에 방해가 될까 봐 속히 철수 명령을 내린 것 같습니다."

관전무관단장 노백린 부령의 해명에, 구로키 대장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 했다.

도쿄의 대본영도 현지 상황을 모른 채 진격을 계속 재촉하는 상황이니, 한국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충분했다.

설마하니 한국군이 의도적으로 일본군의 희생을 늘리려고 고지를 포기하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10일 오전에 근위사단은 중앙, 2사단은 좌익, 12사단은 우익을 맡아 마천령을 넘어 적군을 타격한다."

"옛!"

"첫 전투다. 천황 폐하와 일본을 위하여 반드시 승리하자!"

"천황 폐하 만세! 대일본제국 만세!"

4월 9일 밤, 구로키 대장이 지휘하는 일본 제1군은 러시아 만주군 동부군을 향해 공세를 준비했다.

10일 오전 6시. 포성과 함께 일본군의 돌격이 개시되었다.

"全軍, 砲擊 開始!"

"發砲!"

"突擊!"

"天皇 陛下 萬世!"

3개 사단 4만 2천 명이 순차적으로 러시아군 진지를 향해 돌격했다.

"батаре?я!"

"Хорошо!"

"полк!"

"Ура!!"

콰앙! 콰앙!

타다다다다다다다다다당!

러시아군 포병대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산포와 맥심 기관총이 일본군을 향해 총탄을 쏟아 냈다.

일본군의 공세는 지형을 고려하지 않은 전형적인 밀집대형 돌격으로,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편리했다. 그 결과 일본군은 러시아군의 기관총에 의해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물러서지 마라! 계속 공격해!"

일본군 우익을 맡고 있는 12사단에 러시아군의 포탄이 집중됐다. 러시아 포병대의 강력한 방어로 일본군의 희생은 늘어났고, 오전의 1차 공세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런데.

"돌격!"

"천황 폐하 만세!"

"와아아아!"

정오 무렵, 일본식 짚신을 신고 소리를 숨긴 채 산길을 우회한 부대가 러시아군의 좌우측면에 나타났다.

"측면에 적군입니다, 각하!"

"제길, 이대로 가다간 포위될 수 있겠군."

"각하, 포위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설픕니다! 충분히 격퇴 가능합니다!"

"으음……. 좋다! 계속 교전하라!"

치열한 교전은 저녁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날이 어두워져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틈을 타, 러시아군은 갑작스럽게 퇴각을 개시했다.

러시아군의 퇴각 사실은 이튿날 오전에야 확인되었다.

일본군은 러시아군 진지를 접수하고, 13일까지 천산산맥 북방에서 러시아군을 모두 몰아냈다.

"이상하군. 충분히 더 싸울 여력이 있는데, 왜 퇴각한 거지?"

하루 사이에 일본군의 전사자는 1천여 명, 부상자는 2천여 명이었다.

러시아군은 전사자 500여 명, 부상자 1천여 명으로 피해가 대략 절반이었다. 다만 퇴각에 실패한 부대의 포로 700명과 야포 대부분을 상실했다.

일본군은 러시아군이 3개 주요 통로의 점령을 포기한 것도, 야포까지 포기한 빠른 퇴각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으으으, 전군은 속히 퇴각하라……."

오후에 일본군 산포가 러시아군 사령부에 직격, 켈러 중장은 포탄 파편에 중상을 입고 전선에서 이탈했다.

켈러는 후방으로 이송되면서 퇴각 명령을 내렸고, 사령군의 이탈에 전의를 잃은 러시아군은 요양 방향의 석목성(析木城, 시무청)으로 퇴각했다.

그전까지는 러시아군 내에서 꽤나 유능하다고 평가받던 켈러였으나, 전투 시작 전부터 끝까지 내내 이해가 되지 않는 선택만 거듭했다.

하지만 해명할 당사자가 결국 부상으로 사망해 버려서 아무도 해명할 수 없었다.

만주 전선의 첫 전투, 마천령 전투는 하루의 짧은 교전으로 끝났지만, 양군의 미래를 암시했다.

일본군 지휘부가 지나치게 공격적인 태도가 문제라면, 러시아군 지휘부는 지나치게 소극적인 태도가 문제였다.

이는 양군에게 모두 다가올 군사적 재앙을 예비했다.

- 80화에 계속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