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관전무관 (2)
독립전쟁 승전 10주년 기념 열병식이 끝난 후, 평양 흥경궁에서 축연이 개최되었다.
승전 10주년을 축하하고 일본 만주군 사령부를 치하한다는 당초 목적에 따라, 주빈(主賓)은 오야마 이와오 원수와 고다마 겐타로 대장이 되었다. 축연 참석자들도 한국 정부 고위 인사와 일본 고급 장교들이었다.
"역사적인 승전 10주년을 기념하며, 그리고 다가오는 전투의 선전을 기원하며. 한일 우호와 동양 평화를 위하여!"
"한일 우호와 동양 평화를 위하여!"
이선의 건배사에 일본군 장성들도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화답했다.
"폐하께옵서 이렇게 환영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귀국은 10년 전에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함께 싸운 전우요, 이제는 동양 평화를 위해 싸우는데 당연히 사령관을 환영해야지요."
이선은 속내를 감추고, 만면에 미소를 지으면서 우호적인 언사로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황제가 진정으로 일본의 승전을 기원한다고 믿을 정도로 깜빡 속을 연기였다.
"일본은 한국과 청국, 더 나아가 모든 아시아인을 위해 승리할 것입니다. 일본의 승리는 동양 평화를 위한 길이요, 서양 열강의 압제에 시달리는 모든 아시아인에게 자유와 독립의 희망을 줄 것입니다. 그러니 일본은 결코 질 수가 없습니다."
일본은 동양인들 앞에서는 동양 평화와 아시아주의를 내세웠다. 여기에 속아 넘어가는 아시아인들이 속출했다.
전쟁 초기 ‘동양을 대표하는’ 일본이 ‘서양 열강을 대표하는’ 러시아를 상대로 연전연승한다는 소식이 세계에 전해졌다. 지난 19세기에 서세동점의 시대를 살며, 서양 열강에 의해 자주독립을 상실하고 압제를 당하는 아시아 지식인들은 환호했다.
‘참 공수표 남발은 잘한단 말이야. 누가 들으면 진심으로 일본이 아시아의 해방을 위해 싸운다고 생각하겠어.’
동양평화론을 외치는 한국과 중국 지식인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 베트남과 인도차이나, 영국의 지배를 받는 인도와 말레이,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는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일본의 승리를 기원하는 지식인들이 있었다.
심지어 저 멀리 오스만 튀르크에서도 일본의 승리와 러시아의 패배를 기원했다. 19세기에 러시아에 연전연패해 온 튀르크로서는 러시아의 패배를 환영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아시아인에게 자유와 독립의 희망을 준다, 훌륭한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동맹인 영국 입장에선 아시아주의를 썩 바람직하지 않게 여길 터인데……."
서양 열강, 특히 영국과 미국 앞에서는 ‘이 전쟁은 인종 전쟁도 종교 전쟁도 아니다, 일본이야말로 앵글로색슨 문명의 적자로 야만적인 러시아 전제정과 싸우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일본이었다.
"그, 그건 장기적으로 그럴 수 있다는 의미지요, 하하하."
이선의 지적에 일본인들은 말을 얼버무렸다. 영미의 눈치를 봐야 하는 일본으로선 대놓고 아시아주의를 외칠 수가 없었다.
때마침 일본군 장교 한 사람이 밖에 나왔다가 들어와 고다마에게 소식을 전했다. 고다마는 크게 기뻐하며 외쳤다.
"어제, 14일 오후에 제2군이 대련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는 보고가 전해졌습니다! 무혈입성이라고 합니다!"
"오오!"
"참으로 기쁜 소식입니다!"
환호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러시아가 지난 7년간 공을 들인 항구인 대련에 무혈입성이라니.
"축하합니다, 장군."
"감사합니다, 폐하."
이선은 축하를 하면서도 내심 속이 쓰렸다. 마천령과 금주에서 일본군을 더 괴롭힐 수 있었음에도 쉽게 내주고 만 것이다. 러시아군이 개전 초기에 보인 추태는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러시아 병사들 하나하나는 용맹했지만, 문제는 지휘관이었다.
일본 야전군 사령관들도 평균 50대이긴 했는데, 러시아 장군들 평균 연령은 놀라울 정도였다.
러시아 장교단의 인사 적체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57세인 쿠로파트킨이 젊은 축에 속하고, 그 휘하의 장성들은 대부분 50대 후반에서 60대의 노장이었다.
장성 중에는 인맥으로 임명된 이들도 허다했다. 금주 전투에서 졸렬한 지휘력으로 추태를 보인 포크 소장도 인맥으로 임명된 60대 노인이었다.
‘똥별 천지군. 러시아군은 정년퇴직도 없나?’
늙은 장성들 대부분은 마지막 실전 경험이 1877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이었다. 그로부터 28년이 지나 전장의 환경이 엄청나게 바뀌었건만, 러시아군 지휘부의 인식은 여전히 19세기에 머물러 있었다.
그나마 최근에 경험한 의화단 전쟁은 일방적인 토벌과 점령이라 전쟁이라 부를 수도 없는 것이었다.
러시아군의 주력은 독일 전선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전선에 배치되어 있어, 만주 전선에 있는 장병들은 러시아군 내에서도 3선급이었다.
이러니 일본군에게 밀려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오늘 근위사단의 열병식을 보니, 과연 한국군이 정병이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황제 폐하와 개화당 정부가 지난 20년간 노력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일본에서도 진심으로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고다마가 한국군에 새삼 찬사를 보냈다.
"이런 군대가 어찌 중립만 지키겠습니까? 전황은 보시다시피 일본에 유리합니다. 한국으로서도 만주는 국익이 달린 중요한 지역이니, 러시아를 몰아내야 합니다. 일본과 한국이 손을 잡으면 반드시 승리하리라 확신합니다. 러시아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일본군 단독으로 승리를 거둬 모든 과실을 독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본영의 야마가타와 달리, 전선에서 군대를 지휘해야 할 고다마는 병력의 부족을 깨닫고 있었다.
승전의 과실을 논하기 전에, 일단 이기고 보려면 최대한 많은 병력이 필요했다.
당장 금주 공략전에서 2군이 큰 손실을 입었고, 요새화된 여순 공략을 위해서는 3군이 얼마나 손실을 입을지 가늠이 안 되었다.
출혈이 커질수록, 상비군만 8개 사단이나 되는 한국군을 그대로 구경만 시키게 놔두자니 아까울 지경이었다.
"그 문제는 이미 귀국 정부에 답을 드렸소. 아직 대한은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예, 그러니 전쟁 준비가 끝나면 참전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정부 일각에서도 참전 논의가 없는 건 아니었다. 총리 김옥균과 개화당 내각은 황제의 뜻을 따랐지만, 내심 참전을 지지했다.
김옥균이 단순히 친일 성향의 아시아주의자라서가 아니라, 국익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격파하는 틈을 타 이탈리아가 베네치아와 로마를 점령해 통일을 완수했듯, 대한국이 일본과 동맹을 맺고 총력을 동원해 만주를 점령해야 합니다."
김옥균은 이탈리아의 사례를 들어 참전을 주장했다.
1866년 동맹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제압한 덕에 베네치아를 수복할 수 있었고, 1870년에는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격파한 덕에 로마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이로써 이탈리아의 통일이 완성되었다.
"로마와 프랑스는 멀지. 그러니 손쉽게 함락시킬 수 있었소. 그에 비하면 만주는 대한과 지척이오. 전쟁 환경도 크게 달라졌소. 대한이 참전하면 막대한 희생을 감내해야 할 것이오."
이선은 참전론을 불식시키긴 했으나, 일본의 승전 소식이 계속 이어진다면 국내의 참전 욕구는 비례해서 커질 터였다.
"짐이 당장 장담할 수는 없소이다만, 귀국 군대가 여순을 함락시킬 즈음이 되면 우리 군의 준비도 끝나 가지 않을까 싶군요."
"하하, 그렇다면 얼마 남지 않았군요. 대련을 함락시켰으니, 여순도 머지않아 떨어질 것입니다."
오야마가 호언장담을 했다. 일본군 지휘관들도 대련 함락 소식에 기세등등해져, 모두 웃으면서 동의를 표했다.
이선도 함께 웃고 있었지만, 속내는 달랐다.
‘어디 여순에서 뜨거운 맛 좀 봐라. 일본군이 어떤 피해를 입는지, 관전무관의 보고서가 계속 올라가면 참전 소리가 사라지겠지.’
* * *
이튿날인 16일에 만주군 사령부는 전선을 향해 떠나고, 이선은 각국의 관전무관을 흥경궁에 초대하여 만찬을 열었다.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 스웨덴, 오스만 등에서 일본군 측 관전무관으로 파견한 관전무관들이 만주로 가기 전에 중간지점인 한국에 체류했다.
"국가의 명을 받아 멀리 한국까지 오게 된 관전무관단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만주까지는 힘든 여정이 될 터인데, 한국 영내에 있는 동안은 최상의 편의를 제공해 드리지요."
"영광입니다, 폐하!"
관전무관단은 각국에서 엄선한 엘리트 장교들로, 러시아인과 일본인의 피와 철로 만들어지는 전훈(戰訓)을 냉정하게 살피기 위해 멀리 동아시아까지 왔다.
관전무관단에는 이미 명성을 날리고 있거나, 훗날 이름을 떨칠 장교들이 있었다.
예컨대 관전무관단 면면을 살펴보면.
아서 맥아더 주니어(Arthur MacArthur Jr.) 소장, 필리핀 주둔 미군 사령관이자 훗날 이름을 떨칠 더글라스 맥아더의 부친.
존 퍼싱(John J. Pershing) 소령, 1차 세계대전 미국 원정군 총사령관. 미군 최초의 대원수.
이안 해밀턴(Ian Hamilton) 소장, 보어전쟁 참모장이자 1차 세계대전 지중해 사령관으로 갈리폴리 전투 지휘.
샤를 코비사르(Charles Pierre Corvisart) 중령, 1차 세계대전 베르됭 전투에서 활약하는 프랑스 장군.
엔리코 카발리아(Enrico Caviglia) 소령, 1차 세계대전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이탈리아 장군. 원수까지 진급.
‘별들의 향연이군.’
이선은 직접 관전무관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장차 각국의 군대를 대표할 장교들에게 한국에 우호적인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함이었다.
이미 관전무관들은 도쿄에서 메이지 천황이 주최하는 축연에 참석한 바 있었다.
하지만 ‘학처럼 고고한’ 천황은 축사 한마디만 낭독하고, 축연 내내 침묵을 지켰다. 애초에 외부인과 만나는 것도 꺼려 하는 메이지였다.
그에 비하면 한국 황제는 장교들에게 직접 술을 건네고, 스스럼없이 군사에 대해 물었다.
"맥아더 장군, 젊은 시절 남북전쟁의 영웅이라지요. 아드님도 육군사관학교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고 들었는데, 과연 3대가 모두 별을 달 명문 군인가답습니다."
"폐하께서 제 가문을 이토록 잘 알고 계시다니 영광입니다."
"하하, 짐이 미국에 대해 관심이 많은 건 미국인들도 잘 아리라고 생각합니다. 맥아더 가문이야 미군을 대표하는 군사 명문가 아닙니까. 아드님은 더욱 성공하실 겁니다."
이선은 여러 가지 이유로 미국에서도 유명인사였고, 그런 이선이 미국 장교들의 내력까지 꿰고 있어도 놀랄 일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퍼싱 소령, 스페인 전쟁의 영웅이라지요. 미국 육군대학에서도 가장 우수한 장교로 평가받았다고. 루스벨트 대통령의 주목을 받고 있으니 곧 별을 달겠군요. 장차 미군을 대표하는 장교가 될 겁니다."
"맥아더 장군 같은 유명한 장교도 아닌데, 폐하께서 소관도 아신다니 영광입니다."
훗날 원수까지 오르는 퍼싱이지만, 이때만 해도 진급이 막혀 있었다. 퍼싱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루스벨트가 대령 진급을 요구했지만, 참모총장은 ‘선임 장교 승진의 전례를 따라’ 거부했다.
퍼싱은 관전무관에서 돌아온 후, 대통령의 강력한 요구로 3계급을 건너뛰고 준장으로 진급하게 된다.
여러 관전무관 중에는 이선에게 낯익은 인물이 있었다.
"팔켄하인 중령, 이렇게 금방 다시 만나게 되었군요."
"한국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오게 될 줄은 소관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귀관이 독일군 내에서 전문가로 통한다는 의미겠지요."
이선은 팔켄하인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팔켄하인의 뒤에 서 있는 안경 쓴 장교가 낯익었다.
"곁에 계신 분은?"
"관전무관의 일원인 호프만 대위입니다."
"막시밀리안 호프만 대위입니다, 폐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 반갑소."
‘장차 독일군 참모총장 팔켄하인에, 타넨베르크 전투의 실질적인 승리자 호프만이라. 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에 심대한 타격을 입힐 조합이군. 역사가 바뀌었으니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막시밀리안 호프만(Maximilian Hoffmann) 대위. 1차 세계대전 초기, 독일군의 역사적인 승리가 된 타넨베르크 전투의 작전 계획안을 짠 참모장교다.
호프만이 러일전쟁의 관전무관으로 와서 러시아 장군들의 불화를 직접 눈으로 보고 타넨베르크 전투의 계획안을 짰다는 유명한 설이 있지만, 일본 측 관전무관으로 왔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러시아군 진영에 있지 않았다.
"중령 덕에 우리 군의 전력 향상이 크게 이뤄졌습니다. 특히 국군의 미래를 책임질 장교단에 미친 영향이 크지요."
"과찬이십니다. 그저 맡은 바 최선을 다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이건 관전무관이라기보다는 전(前) 군사고문단장으로 자문을 구하고자 함인데, 중령이 보기에 현재 한국군이 대외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된다고 봅니까?"
이선의 질문을 통역하던 참모국 총장 박유굉이 내심 놀랐다. 이는 한국군의 참전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소관은 이미 한국군을 떠난 입장이라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만, 하문하시니 답을 드리겠습니다. 소관의 생각으로는……."
팔켄하인은 생각을 가다듬었다.
참모총장 슐리펜 상급대장은 러시아가 극동에서 장기전에 휘말리길 원한다.
팔켄하인의 예측대로 장기전으로 가면 러시아가 반드시 이기겠지만, 러시아를 더욱 극동의 진흙탕으로 끌어들이려면 일본군에 한국군이 가세하는 게 바람직했다.
"열병식에서 드러난 근위사단의 전력은 충분히 싸워 볼 만한 희망을 줍니다만, 객관적인 전력으로 볼 때 한국군은 대외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부족합니다. 20세기의 전쟁은 병력만 갖춰졌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경제력과 군수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먼저 충분한 군수능력을 확보하십시오. 현저히 능력이 떨어지는 청국을 상대한다면 모를까, 현시점에서는 서양 열강과 대립을 피해야 합니다."
팔켄하인은 장교로서 정직한 분석을 택했다. 자신이 3년간 군사고문단장을 맡아 양성한 한국군에게 거짓분석으로 헛된 희망을 주고 싶지 않았다.
이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희미하게 웃음을 흘렸다.
"중령의 분석이 꼭 짐의 생각과 같소. 박 장군의 생각은 어떻소?"
"소관의 생각도 중령의 분석과 같습니다, 폐하."
팔켄하인의 분석은 이선의 중립론에 힘을 실어 주는 것이었다.
앞으로 일본은 희생이 늘어날수록 한국에 참전을 거듭 요청할 것이다. 참전을 종용해 와도, 일본 육군이 신처럼 숭배하는 프로이센 참모장교의 분석을 인용해 방패로 삼을 생각이었다.
"고맙소, 중령. 전쟁이 끝나면 서울에서 다시 만납시다. 중령이 좋아하는 모젤 와인을 준비해 두지요."
"감사합니다, 폐하."
이선은 팔켄하인에게 악수를 청했다. 팔켄하인은 정중하게 악수를 한 후, 이선을 향해 거수경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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