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401화 (400/812)

82화 여순 해전

5월 14일, 러시아 관동군이 대련을 싸우지도 않고 내줬다는 소식은 지휘부를 격노하게 했다.

뒤늦게 현지 상황을 파악한 총사령관 쿠로파트킨 대장은 관동군 사령관 아나톨리 스테셀(Anatoly Stessel) 중장을 경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후임으로는 요새 축성의 전문가인 콘스탄틴 스미르노프(Konstantin Smirnov) 중장이 임명되었다.

이로써 여순 전투를 앞두고 육군 지휘부가 교체되었다. 문제는 의도치 않게 해군 지휘부도 교체되었다는 점이었다.

"다르니(대련) 항구를 파괴조차 하지 않고 적에게 그냥 넘겨주다니, 육군은 정신이 있는 건가!"

태평양함대 사령관 스테판 마카로프(Stepan Makarov) 제독은 격분했다.

러시아 해군에서 가장 탁월한 이론가이자 지휘관으로 평가받는 마카로프는, 태평양함대에 부임하자마자 함대를 정상화했다.

기습을 당하고 항구에 갇혀 의기소침한 함대를 추스르고, 일본 해군을 괴롭힐 태세를 갖췄다.

2월의 여순항 기습 이후, 러시아 태평양함대와 일본 연합함대는 소규모 교전을 이어 왔다.

연합함대 사령장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 제독이 지휘하는 연합함대는, 여순항의 좁은 출입구를 폐색(閉塞)하여 태평양함대를 내항에 고립시킨다는 전술을 꾀했다. 그리되면 태평양함대는 외해로 나가지 못해 무용지물이 된다.

연합함대는 기선을 여순항 입구에 자침시키는 야간 폐색 작전을 실행했으나, 이를 예상한 마카로프의 반격으로 번번이 실패하고야 말았다. 수차례의 시도에도 기선과 인력만 낭비했을 뿐이었다. 결국 여순항을 외부에서 포위하는 상태로 만족해야 했다.

"러시아가 발트함대를 파견하기 전에 속히 태평양함대를 섬멸해야 하는데……."

아직 발트함대 본함대는 출항하지 않았지만, 개전 이전에 파병한 분함대가 접근하고 있었다. 분함대는 포위된 여순으로 접근하는 걸 포기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그 무렵 블라디보스토크의 태평양함대 순양함대는 통상파괴작전에 나서 동해를 항진, 일본 기선들을 격침시키고 있었다.

도고는 속히 태평양함대를 궤멸시켜야한다는 압박에 시달렸지만, 마카로프 역시 포위망을 뚫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제독은 조속히 포위를 뚫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항진, 분함대와 합류하라."

그 결과 3월과 4월에 여순항에서 교전이 여러 번 벌어졌으나, 양측은 함대의 손실을 두려워하고 있는 까닭에 소규모 충돌로 끝나고야 말았다.

양측은 서로의 항행을 막고자 여순항 안팎에다가 기뢰를 잔뜩 부설했다.

소강상태였던 함대 간 결전이 재개된 건, 대련 함락의 소식이 전해지면서였다.

"이대로 다르니 항구를 적에게 넘겨줄 순 없다. 적 함대의 기지로 쓰이게 되어 우리의 목을 조이게 될 것이다. 육군이 해결하지 못했으니, 함대가 함상 포격으로 항구를 파괴한다. 먼저 기습을 가해 적 함대를 물러나게 한다."

5월 15일 오전, 마카로프 제독이 지휘하는 태평양 함대가 여순을 출항해 대련 방향으로 항진했다.

2월의 기습으로 대파된 전함과 순양함도 수리가 완료되어 전열에 복귀했다. 전함 7척과 순양함 8척, 구축함 18척까지 동원한 일대 결전이었다.

연함함대는 전함 6척, 장갑순양함 8척, 방호순양함 12척, 구축함 20척으로 태평양함대보다 훨씬 우세한 전력을 갖고 있었다.

여순에서 대련은 지척이었으나, 일본 함대의 감시망과 기뢰밭을 뚫어야하는 어려운 임무였다.

"ЭКИПАЖ, В БОЮ(승무원 전원, 전투태세로)!"

"ПЛИ(발포하라)!!"

금주 요새를 해상에서 포격하고 귀환한 연합함대의 포위망은 예전보다 헐거워져 있었다.

새벽의 여명이 떠오를 무렵, 태평양함대는 여순항 밖으로 나와 절묘한 기동으로 기뢰를 뚫고 기습적으로 포격을 감행했다.

"敵襲! 敵襲!"

"戰艦, 砲擊 開始!"

여순항에 틀어박혀 있던 태평양함대의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허를 찔린 연합함대는 반격에 나섰다.

하지만 초전은 러시아의 명백한 우세였다. 마카로프는 기함 페트로파블롭스크(Petropavlovsk)에 탑승하여 전투를 직접 지휘했다.

"ПЛИ! ПЛИ!!"

콰앙! 콰앙!

영국에서 거액을 주고 건조한 전함 후지(富士)에 포격이 집중되어 대파되었다. 후지는 대파되어 후방으로 빠져나갔다.

"후지 대파! 요시노 격침!"

"뭣이?"

청일전쟁에서도 활약한 바 있는 방호순양함 요시노(吉野)는 좌현에 전함의 직격탄을 맞아 그대로 침몰해 버렸다.

"적 기함에 포격을 집중하라! 적 기함을 제압하면 전세를 바꿀 수 있다!"

연합함대의 포격이 전방에 선 기함 페트로파블롭스크를 향해 집중했다.

당시 러시아의 최신예 전함으로 높이 평가받던 페트로파블롭스크는, 마카로프의 탁월한 지휘력이 빛을 발휘한 덕으로 굉장한 전투력을 보이며 일본 군함들을 압도했다.

"좋아! 이길 수 있다!"

페트로파블롭스크에 탑승하고 있던 키릴 블라디미로비치(Kirill Vladimirovich) 대공은 전율을 느꼈다. 차르의 사촌동생이자 황위 계승 서열 3위인 키릴 대공은 당시 28세로, 태평양함대의 참모장교였다.

키릴이 해전의 승리를 예상하며 함교의 사령부를 쳐다보는 순간.

콰아아앙!

2발의 포탄이 하필이면 기함의 함교를 직격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최악의 불운이요, 일본에는 최고의 행운이었다.

"제독!"

"사령관 각하!"

삽시간에 함교는 잿더미로 변해 버렸고, 지휘부는 문자 그대로 소멸해 버렸다. 피에 젖은 마카로프의 군모는 발견되었지만, 시신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지휘권을 페레스베트의 우흐톰스키 소장에게 일임한다!"

"퇴각한다! 포트 아르투르로 복귀하라!"

삽시간에 사령관을 잃고 지휘권을 대행하게 된 차석 지휘관 우흐톰스키 소장은 퇴각 명령을 내렸다. 전의를 상실한 함대는 퇴각을 시작했다.

하지만 페트로파블롭스크의 불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쿠우우웅……!

함교가 파괴된 채로 무질서하게 퇴각하던 페트로파블롭스크는 일본이 부설한 기뢰와 충돌하고야 말았다. 하필이면 화약고를 건드려 유폭이 일어났다.

콰아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페트로파블롭스크는 두 조각이 나며 침몰했다.

함미에 서 있던 키릴 대공은 충격으로 배 밖으로 튕겨 나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난 지도 미처 몰랐다.

‘이렇게 죽는 건가…….’

바다에 떨어진 키릴은 용케 정신을 차리고, 눈앞에 보이는 함을 향해 무작정 헤엄쳐 갔다. 키릴은 비록 부상을 입긴 했으나, 운 좋은 생존자 중 한 명이었다.

페트로파블롭스크는 마카로프 제독 이하 대부분의 장교와 수병이 함과 운명을 함께했다.

"적 기함 격침!"

"됐다, 상황 역전이다! 전함 포격!"

일본 해군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승세를 잡았다고 생각한 연합함대는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했다.

"우리가 후위를 맡겠다. 전함 퇴각하라!"

전함 페레스베트(Peresvet)와 레트비잔(Retvizan)이 후위를 맡아 일본 해군의 공격으로부터 아군의 전열을 보호했다.

페레스베트와 레트비잔의 분전으로, 태평양함대는 큰 손실 없이 여순항으로 퇴각에 거의 성공했다.

"이대로 적함이 퇴각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

"다시없을 함대결전의 기회다! 이번 기회에 적을 섬멸해야 한다!"

"무작정 추격하지 마라! 적의 기뢰를 주의하라!"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일부 군함은 무작정 여순을 향해 돌진했다.

일본 해군은 함대결전으로 적 함대를 섬멸해야한다는 초조함에 시달렸고,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된 상황에서 전투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 조급함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쿠우우웅……!

일본이 부설한 기뢰에 페트로파블롭스크가 단숨에 격침된 것처럼, 이번에는 러시아가 부설한 기뢰가 일본에게 횡액으로 다가왔다.

경고를 무시하고 돌진하던 전함 하쓰세(初瀬)가 기뢰와 충돌했다. 첫 번째 기뢰는 전함을 항행불능시키는 데 그쳤지만, 두 번째 기뢰가 화약고를 건드려 유폭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콰아아아아앙!

하쓰세는 손 쓸 틈도 없이 격침하고야 말았다. 장교와 수병 대부분은 함과 운명을 함께했다.

"기뢰! 기뢰 접촉!"

"뭐, 뭣이?"

쿠우우웅!?

전함 야시마(八島)도 기뢰에 부딪혔다. 야시마는 불행 중 다행으로 유폭을 일으키진 않았지만, 침수가 발생해 오른쪽으로 크게 기울어져 항행불능 상태가 되었다.

"전원, 퇴함하라! 군기를 내려라!"

야시마는 빠른 퇴함으로 수병의 목숨은 건졌지만, 전함은 건질 수가 없었다. 야시마는 수 시간에 걸쳐 서서히 바다에 가라앉았다.

* * *

"제독께서 이렇게 허무하게 전사하시다니……."

여순으로 회항한 태평양함대는 문자 그대로 초상집이었다. 기함 페트로파블롭스크를 잃은 것도 안타깝지만, 마카로프 제독과 함대 지휘부를 상실한 게 더 뼈아팠다.

페레스베트와 레트비잔의 분전으로 함대 대부분은 온전했지만, 두 척은 대파되어 겨우 모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전함 체사레비치, 포베다, 폴타바, 세바스토폴도 소파(小破)되어 수리를 필요로 했다. 포위에 걸린 구축함 4척은 격침되거나 나포되었다.

포위 3개월 만에 시도된 해전의 결과가 참담한 실패로 끝난 만큼, 함대는 급격히 위축되었다.

"교전 금지다! 절대 포트 아르투르 항구 밖으로 나가 교전하지 마라."

극동총독 알렉세예프 해군대장은 교전 금지 명령을 내렸다. 태평양함대는 다시 여순항 내항에 틀어박혔다.

알렉세예프는 여순의 지휘권을 신임 관동군 사령관 스미르노프에게 맡기고, 일본군의 포위가 완성되기 전에 자신은 봉천으로 탈출해 버렸다.

이제 여순에서는 지상전으로 결전을 벌여야 했다.

"이걸 승전이라 할 수 있는 건가……."

여순 해전의 대차대조표를 결산하던 도고 제독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일단 전술적으로 승전이라 할 수 있었다. 러시아 기함은 격침하였고, 유능한 적 사령관이 전사했다. 대련으로 작전을 나가기는커녕 여순으로 다시 퇴각하여 숨어들어야 했다.

하지만, 손실은 일본 해군이 더 컸다. 5월 15일은 일본 해군 재앙의 날이었다.

"내가 무작정 추격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기껏 전세를 역전시켰는데……!"

전함 6척 중 2척이 격침당하고, 1척이 대파당했다. 방호순양함 1척과 구축함 2척이 격침당한 건 덤이었다.

후지는 사세보로 회항하여 수리를 받도록 했지만, 하쓰세와 야시마는 건질 수도 없었다.

"황공하옵게도 폐하께옵서 친히 건함비를 내려 건조한 군함을 잃다니, 책임을 지고 죽어 마땅하다."

"아닙니다! 어찌 사령장관의 책임이겠습니까?"

"내가 사령장관인데, 사령장관이 책임을 지지 않으면 누가 지겠는가?"

하쓰세와 야시마는 의회의 반대로 건함 예산이 책정되지 않자, 메이지가 친히 궁중 예산을 절감한다고 조칙을 내려 간신히 예산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건조된 하쓰세와 야시마인데, 고철덩어리가 되어 바다 속으로 사라지고야 만 것이다.

막대한 건함비를 들여 만든 전함이 삽시간에 3분의 1을 잃고야 말았다.

"국민의 사기에 막대한 영향이 올 것이다. 하쓰세와 야시마의 격침은 발표하지 마라."

연합함대의 보고를 받은 대본영은 ‘여순 대해전’의 승전 소식만 대대적으로 발표하고, 하쓰세와 야시마의 격침을 비밀로 숨겼다.

‘천황이 하사한’ 군함을 추격하다 기뢰로 잃었다고 발표했다간 그 후폭풍이 두려웠던 것이다.

「5월 15일, 시모노세키 조약 10주년 기념일에 여순 대해전 승리! 여순 앞바다에 적 기함 페트로파블롭스크 격침! 적 전함 2척 대파! 무시무시한 적 사령관 마카로프 전사! 적 함대,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여순항으로 다시 숨어들다! 대일본제국 해군, 황해의 제해권을 확실히 장악하다!」

5월 17일, 여순 대해전 결과가 발표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대본영 발표’는 위대한 승리로만 점철되어 있었다.

도고 제독과 연합함대 사령부는 위대한 승리자로 포장되었기에, 전함 2척을 상실한 책임을 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공식적으로는 ‘전함을 상실한 일’ 자체가 없었다.

워낙 철저하게 은폐하는 바람에, 러시아조차도 일본이 전함 2척을 상실했다는 걸 몰랐다.

"영국에서 진수한 전함 2척을 최대한 빨리 전력화해야 해! 속히 일본으로 인도하도록 하라!"

일본 해군 8·8함대의 마지막 퍼즐인 최신 전함 2척은 영국에서 이미 건조가 완료되어 진수되었다.

물론 진수했다고 바로 취역하는 건 아니었으므로, 전력화는 당초 1906년 초 정도로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일본은 찬밥 더운밥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전함 2척의 상실을 빨리 메워야 했다.

즉시 일본 해군의 인도반이 영국으로 파견되어, 일본으로 항행할 준비를 했다. 지구 반대편까지 항행해야 할 대항로였다.

"어리석은 해군 놈들. 추격하다가 기뢰에 걸려 천황 폐하의 전함 2척을 날려 먹다니. 대체 건함비를 얼마나 날려 먹은 건가!"

"육군으로 치면 지뢰밭을 넘어가다가 2개 사단을 통째로 날려 먹은 꼴이 아닌가?"

"허허, 물론 육군은 그런 실수를 하지 않지요."

해군이 초상집 분위기였으므로 표면적으로는 침통하게 여겼지만, 육군은 내심 해군의 실수를 비웃었다.

"해군이 육군에게 여순을 속히 떨어트려 달라고 애원을 하더군."

"자력으로 태평양함대를 제압하지 못했으니, 결국 육군의 힘을 빌려야겠다는 거지요."

"그런데 굳이 여순 요새를 함락시킬 필요가 있습니까? 이미 여순의 적은 고립된 상태입니다. 철통같이 포위만 해 놓아도 적은 고사할 것입니다."

육군 일각에서는 여순 공격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는 이들도 있었다. 어차피 적의 주 전력인 러시아 만주군을 섬멸하는 게 목표이니만큼, 여순을 계속 포위하여 관동군이 탈출하지 못하도록 고사시키자는 제안이 나왔다.

"해군의 애원 못 들었나? 육군이 나서서 여순을 함락하고 태평양함대를 격멸시켜 달라고. 무시할 수는 없지."

"하오나 여순 요새의 방어가 워낙 두터워서, 아군의 희생이 클까 우려가 됩니다."

"여순에는 태평양함대 말고 관동군도 있네. 물자도 한가득이지. 여순 함락 없이 적이 강화에 응하겠나?"

"희생 없는 승리가 어디 있겠나? 2군이 금주를 결국 함락시킨 것처럼, 3군도 여순을 함락시키고 관동군을 섬멸할 것이네."

해군이 고개를 숙여 여순 요새를 공격해 달라고 부탁하니, 육군은 내심 이보다 짜릿할 수가 없었다.

노기 마레스케 대장이 지휘하는 제3군이 여순 요새 공격을 위해 준비에 돌입했다.

육군 지휘부는 총공세 한 번이면 여순 요새를 함락시킬 수 있으리라고 자신만만했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승전의 주역이 육군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러시아 관동군과 태평양함대를 소멸시키는 건 승전으로 가는 길이고, 해군에게 체면치레를 하기에도 충분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이때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일본 육군은 지옥으로 가는 길을 활짝 열어젖히고 말았다.

- 83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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