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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혁명의 시대-402화 (401/812)

83화 민족 자본가

광무 9년(1905) 5월 31일.

이날은 황제 이선의 탄일, 건원절이다. 예년이라면 국경일로 성대하게 기념했겠지만, 전시 상황인 점을 감안해 간소하게 일정을 보냈다. 여전히 평양에 체류 중인 이선은 흥경궁에 외빈을 초대하여 축연을 열었다.

축연이 끝난 후, 원수부 참모국 총장 박유굉이 이선에게 여순 해전의 진실을 보고했다.

"관전무관 극비 보고입니다. 15일 여순 해전의 결과, 일본은 전함 2척을 망실(亡失)했다고 합니다. 1척은 수리를 위해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일본 연합함대에는 대한제국 해군 관전무관도 동반하고 있었다. 이들은 상황을 알고 있었지만, 대본영의 명령대로 진실을 함구해 달라는 강한 요청을 받았다.

해군 관전무관 신순성(愼順晟) 부령은 연합함대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는 입장이라 일단 수락했지만, 시일이 지난 후 극비리에 원수부에 보고를 했다.

"허, 그럼 이긴 게 아니군. 대승이라고 그렇게 선전하더니만."

이선도 이제야 진실을 알게 되었다. 육지에는 익문사 요원들이 요소마다 잠입해 있어서 전황을 시시각각 보고했지만, 해상은 관전무관을 제외하면 확인할 길이 없었다.

여순에서 암약하는 익문사 요원도 일본 해군의 피해를 전함 1척 대파, 순양함 1척이라고 보고했다. 그 말인즉, 러시아도 일본이 전함 2척을 잃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의미였다.

"그럼 여순 포위는 어찌 되고 있소?"

"3군이 맡아 요새를 공격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예상대로군. 만주 전선은?"

"1군과 2군이 요양을 향해 진격 중이고, 새로 편성한 4군이 합류할 예정입니다."

"그렇군. 총장은 계속 정보를 파악해서 보고하도록 하시오."

"예, 폐하!"

개전 이래 일본은 원수부에 전황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선은 애당초 일본의 정보 공유를 믿지도 않았지만, 공공연히 거짓발표를 하니 신뢰를 더욱 잃게 되었다.

6월 1일, 이선은 평양 군수공업지대를 시찰했다.

서북 지방의 토착자본을 대표하는 이승훈(李承薰)이 동료들을 이끌고 황제를 영접했다.

"황제 폐하, 이리 누추한 곳에 친림해 주시니 신등은 황공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자본가와 상인들이 일제히 이선은 향해 절을 하였다. 이들은 정말로 황제가 공장에 친림했다는 사실에 황공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국가의 미래가 공업에 달려 있거늘, 어찌 누추한 곳이라 하겠소? 근래 경기(景氣)가 어떻소?"

"지극한 성은으로 최상이옵니다."

"좋소. 짐이 직접 살펴보겠소."

이선은 직접 공장에 들어가 시찰하였다. 직공(職工)들이 황제의 등장에 황공해 하며 조업을 중단하자, 이선은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생산에 지장이 없도록 하라. 짐은 그대들이 일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이선은 직공조합 대표들을 불러 격려하고 금일봉을 하사했다. 직공들은 떨리는 손으로 금일봉을 받았다.

"그대들은 국가의 역군이다. 대한의 미래는 공업에 달려 있으니, 맡은 바 일에 충실하길 바란다. 정부도 직공의 대우 향상을 위해 노력하겠다."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직공들은 감격해 하며 만세를 외쳤다.

사농공상의 잔재가 남아있는 여타 지역과 달리, 신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인 평양은 식산흥업 정책에 발맞춰 상공업을 진흥했다. 평안도 사람들은 상인이나 직공이 되는 걸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일본군이 발주한 군수품의 양이 많을 터인데, 생산에 차질은 없소?"

"2교대 생산으로 불철주야 부족함이 없도록 하고 있습니다."

"노고가 많구려. 이윤이 많은 만큼, 직공들의 대우에도 부족함이 없어야 할 것이오."

"예, 폐하."

러일전쟁으로 한국의 군수공업은 활황을 넘어 대호황이었다.

특히 평양은 육로로 만주와 가깝고, 해로도 진남포를 통해 요동반도와 지척이라 일본군의 발주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개전 초기도 이러할 진데,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이득이 커질 터였다.

3년 전 이선이 제2의 수도로 서경을 육성하기 시작하면서 도시 외곽에 군수공업지대를 설정하긴 했지만, 이토록 빠르게 발전하게 되리라고는 그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 사장의 명망은 짐도 익히 들어 알고 있소. 새로운 기법을 받아들여 사업을 번창한, 서북을 대표하는 자본가라고. 협동조합운동과 계몽교육운동도 주도하고 있다지요. 훌륭하오."

"성상께옵서 미천한 재야의 촌로까지 알아주시니……. 죽어서도 지극한 성은을 잊지 못할 것이옵니다."

이선의 치하에 이승훈은 감격하며 눈물을 흘렸다.

조선왕조에서 오랫동안 차별받던 서북인들이 이선의 치세에 이르러 사회 중심부에 진입한 것도 기쁜 일인데, 비록 경제적으로 성공했다고는 하나 황제가 ‘상놈’ 출신에 지나지 않는 자신을 직접 치하하니 진심으로 감격했다.

1864년생인 이승훈은 모범적인 민족 자본가의 육성을 상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부친의 친구인 유기상(鍮器商)의 심부름꾼으로 들어가게 된 이승훈은, 총명함과 성실함을 높이 평가받아 상인이 되었다.

점원으로 시작해 20대에 독립하여 자신의 상회를 차린 이승훈은 평안도 전역으로 유기상을 확대했다.

1894년 청군의 평안도 침략으로 사업이 한때 위기에 처했으나, 이승훈은 재빠르게 군수에 필요한 물자를 매입하여 군납업자가 되어 위기에서 벗어났다. 조선군의 북진과 함께, 오히려 더 큰 이문이 그에게 주어졌다.

이승훈은 그동안 축적한 자본을 토대로, 유기상에서 공장주이자 국제무역상으로 변화했다. 경의선 부설과 대외무역 진흥은 이승훈에게 더 큰 기회를 부여했고, 그의 회사는 서북을 대표하는 토착자본으로 성장했다.

광무 6년 서경 육성이 선포되자, 평양 사람들은 다시없는 기회라고 여겼다. 이승훈은 흥경궁과 신도시 건설에 적잖은 자금을 희사(喜捨)하고, 공업지대 육성에 앞장섰다.

이승훈과 동료들은 자금을 출자하여 평양기기제작주식회사(平壤器機製造株式會社)를 설립했다. 초기 주식 2천주를 발행했는데, 평안도 일대의 상공인들이 대거 참여해 성황리에 모집되었다. 20세기의 새로운 상징인 중공업과 주식회사를 두루 갖춘 형태였다.

이제 이승훈의 주 사업은 군수공업이었다. 그는 러일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군수품 폭등을 예상하여, 재빨리 공장을 확대하고 생산량을 늘렸다.

과연 상황은 이승훈의 예상대로 전개되었다. 그는 러일전쟁으로 거액을 벌어들이기 시작했다.

"이 어찌 지극한 성은이 아니겠는가!"

이승훈은 비록 평민 출신이었지만, 정부의 사민평등과 식산흥업 정책으로 더 이상 천대받는 ‘상놈’이나 ‘장사치’가 아니었다. 새로운 시대의 상징인 성공한 자본가였다.

그는 자신이 이토록 성공할 수 있었던 건 국가의 덕이라고 믿었고, 자산을 후속 세대의 교육을 위해 쓰길 원했다.

때마침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가 평양을 중심으로 계몽교육운동과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했다.

"나라가 없이는 집도 몸도 있을 수 없고, 동포의 삶이 어려운데 나 혼자만 영광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대한 동포여!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배우고, 협동합시다!"

안창호의 연설에 깊은 감명을 받은 이승훈은 곧바로 의기투합했다.

이승훈은 자산의 반을 털어 초중등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학생들을 후원하고, 책의 출판과 무상공급을 위한 서적회사를 창립하며, 토지를 사들여 농업협동조합을 위해 내주었다.

근래 서북을 중심으로 전국으로 확대되고 있는 계몽교육운동과 협동조합운동은, 이승훈으로 대표되는 ‘민족 자본가’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었다.

"실로 백골난망이니, 대한과 성상을 위해서라면 견마지로를 아끼지 않겠습니다."

"하하, 계속 힘써 주시오. 이 사장은 전국 상공인의 모범이오. 짐은 그대의 공훈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바, 그 노고를 결코 잊지 않겠소."

이선이야말로 이승훈과 같은 민족 자본가를 높이 평가했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부자들을 형성했지만, 이승훈처럼 공동체를 위해 아낌없이 돈을 쓰는 부자는 드물었다. 특히 미곡을 매집해서 수출로 떼돈을 번 상업 지주들은 농민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정부의 강력한 규제가 있기 전에는 미곡 시세를 마음대로 조종하기 일쑤였다.

이선이 공개적으로 이승훈을 치하하고 애국적 자본가의 표본으로 삼아 미담을 널리 전파하니, 부를 얻은 다음에는 명예를 얻기를 원하는 부자들의 심리를 자극했다.

"역시 군수공업에 투자해야 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빨리 투자하세."

"뭐니 뭐니 해도 이 나라는 교육을 최고로 치니까, 교육자라는 명예를 얻는 것도 좋겠지. 잘하면 황성의 눈에 들 수도 있고."

의무교육 대상인 소학교는 전국적으로 확립되어 있었지만, 중학교부터는 한정되어 있었다. 전국 각지의 부자들은 이승훈의 선례를 따라 자비를 들여 중등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을 후원했다.

광무 9년, 전쟁의 한복판 속에서 전국에 학교 설립운동 바람이 불었다.

그런데 대한제국에 또 다른 바람이 불고 있었으니, 바로 의용군 운동이었다.

"동양 평화! 황인을 위한 아시아! 동양 삼국이 연대하여 백색 침략자를 동양에서 몰아내자!"

"러시아를 만주에서 몰아내고 고토를 수복하자! 동포여, 의용군을 조직합시다!"

아시아주의자들은 개전 초기부터 의용군 조직을 부르짖었다. 이들은 일본군과 함께 러시아군과 싸우자고 주장했다.

아시아주의에 공감하는 건 소수의 지식인에 지나지 않았으나, 만주 고토 수복을 운운하는 애국주의자들은 훨씬 강성했다.

꼭 무슨 이념이 없다고 해도, 그저 멋진 군복을 입고 전장에 나가고 싶어서 안달이 난 젊은이들도 있었다.

특히 일본군의 주둔과 진격이 집중된 평안도에서는 더욱 그랬다.

임진·정유왜란의 오랜 원한과 쌀 수출 문제로 인해 일본에 악감정이 남아 있는 삼남 농민들과 달리, 10년 전 청군의 침략을 받은 전장이자 고구려의 정통을 계승했다고 믿는 서북 지방에서는 만주 진출에 대한 여론이 훨씬 강했다. 이들에게 있어 주적은 만주를 지배하고 있는 나라였다. 과거에는 청국이었고, 지금은 러시아였다.

"정부가 참전하지 않고 중립을 지킨다면, 자원의용군이라도 허락해 주십시오!"

흥경궁으로 의용군 설립을 허가해 달라는 청원서가 쏟아졌다. 동양 연대를 외치는 아시아주의자들이 주도했지만, 상당한 여론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10년 전 독립전쟁에서도 서북 지방에서는 의병이 일어나 청군과 싸운 경험이 있는 만큼, 선례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대한에는 대한국군만이 존재할 뿐이다. 대한은 중립국이다.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의용군은 허용할 수 없다."

‘전쟁이 그렇게 만만한 줄 아나?’ 이선은 의용군을 불허했다. 20세기 전쟁의 잔혹함을 모르는 애송이들에게 살 기회를 준 것이었지만, 의용군 청원은 계속되었다.

"청국도 중립국이지만, 만주에 의군이 결성되어 침략자에 맞서고 있습니다!"

"만주는 대한의 고토이니, 대한도 의군을 결성해야 합니다!"

전쟁 전부터 일본이 공들인, 만주 마적들의 연합전선이 구축되었다.

일본의 지원을 등에 업은 장작림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만주의 마적들을 끌어들였고, 소위 ‘만주 의군(義軍)’을 결성해 자칭 의군 통령의 자리에 앉았다.

"나, 의군 통령 장작림은 아라사 침략자에 맞서 싸울 것을 엄숙히 천명한다. 아라사를 만주에서 몰아내는 날까지, 동양 동지들과 함께 싸우자!"

"와아아아! 만주 의군 만세!"

북경 조정은 공식적으로 중립을 지켰지만, 의군을 자처한 무리를 은근히 후원했다.

직례총독 장지동은 ‘인아연일(拒俄聯日)’을 주장하며 일본과 연합해 러시아를 몰아낼 것을 외쳐 조야의 적잖은 지지를 얻었지만, 현실적으로 청나라가 러시아와 싸울 능력은 없었다.

때마침 마적들이 봉기하여 의군을 자처하니, 북경에서는 이들에게 관직과 자금을 하사하여 후원했다.

4천여 만주 의군은 러시아군의 배후에서 게릴라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비록 정규군에 비하면 오합지졸 마적이긴 했으나, 일본군과 북경 조정의 지원을 받는 의군은 만주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며 러시아군의 보급선을 방해했다. 일본군과의 전투에 투입되어야 할 카자크 기병대가 마적 토벌을 위해 동원되기 일쑤였다.

"만주 수복을 위해 싸우는 의군의 공출에 협력하라!"

"노야(老爺), 비상식량까지 가져가면 저흰 뭐 먹고 살라고……."

"너희들도 국민으로서 역할을 다해야 한다! 전쟁이 끝나면 조정에서 갚을 터이니 순순히 내놓아라!"

"마적 놈들에게 보급품을 제공하다니, 네놈들도 마적들과 한패다!"

"아라사 나으리, 마적 놈들이 총칼을 들고 뺏은 걸 어쩌란 말입니까?"

"시끄럽다! 마적이랑 다를 바가 없는 놈들이다! 모조리 체포하고 마을에 불을 질러라!"

의군이란 그럴싸한 이름은 달아도 물자를 현지에서 취하는 마적들과, 마적들과 협력했다며 토벌하는 러시아군에 의해 만주 주민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아이고 내 팔자야. 10년 전에는 조선과 일본이 쳐들어오고, 5년 전에는 의화단이 폭동을 일으켜 아라사가 쳐들어오더니, 이제는 러시아와 일본이 수십만을 끌고 와 전쟁을 벌이는구나!"

"도대체 조정이 뭘 해 준 게 있다고 국민 타령이야? 일본이든 조선이든 아라사든 안정만 시켜 줄 수 있다면 만주의 주인이 누군지 알게 뭐람?"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자치령은 전쟁을 피하고 있다고 하니, 그쪽으로 피난 가자."

1895년, 1900년, 1905년에 잇달아 전장이 된 만주에서는 혼란과 폭력이 난무했다.

특히 러일전쟁은 근래 전례 없을 정도로 대군이 충돌하는 전쟁이니, 전장이 되는 만주 주민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물자 징발과 인력 강제동원은 러일 양측 모두 하고 있었다.

러시아군은 일본인이나 만주인이나 비슷한 동양인이니 구분할 수 없었고, 마적들이 봉기한 데다 북경 조정이 일본에 기울어져 있으니 더욱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만주 놈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채찍과 총칼로 다스려야 한다."

러시아 헌병대가 ‘일본 밀정’ ‘마적 협력자’들을 공개적으로 처형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미개한 지나인들 같으니, 황군이 너희를 아라사백인들로부터 해방시켜 주러 왔는데, 왜 협력하지 않는 거냐!"

일본군이 다르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조약을 맺은 한국 영토에서는 군기를 엄중히 유지하며 신사적으로 구는 일본군이지만, 청국령으로 진입하자 태도가 싹 바뀌어 버렸다.

러시아군과 일본군에 이어 마적들까지, 삼중고에 시달리던 만주 주민들은 결국 살던 곳을 버리고 뿔뿔이 피난길에 올랐다.

만주에 사는 한족 이주민들은 대개 하북과 산동 출신이므로 아예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가까운 남만주 자치령이 피난민들의 주 목적지였다.

법적으로는 청국령이나 실질적으로는 대한제국의 지배를 받는 남만주 자치령은, 여전히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만주가 ‘전쟁 구역’으로 지정된 이상, 언제 전화(戰火)가 휩쓸지 모를 일이었다.

불길한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6월 2일, 봉천의 러시아 만주군은 남만주 자치령을 접수하기 위해 일제히 진격을 개시했다.

- 84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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