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405화 (404/812)

86화 전쟁의 종말

제7사단과 옛 만인대가 자치령 의용군에 편입되어 항전에 들어갔으나, 당장 러시아군과 교전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평양과 북부 지방에는 동원령이 내려지고 의용군이 속속 모집되었다.

"아버지! 저도 의용군에 지원할랍니다!"

"의용군이 뭐여?"

"군대요, 군대! 아라사 침략자를 몰아내고 만주 동포를 구제하기 위한 애국자들의 싸움이랍니다!"

"뭔 침략? 전쟁은 아라사가 아니라 왜놈이 일으킨 거 아녀? 가뜩이나 왜놈들 설치는 거 꼴불견인데."

"아라사가 만주를 침략했다니까요! 서북에는 군대도 동원하고 있대요!"

"아서라, 만주가 뭐 밥 먹여 주냐? 그래서 나라님이 너더러 군대 가라더냐?"

"그건 아니지만, 황은에 보답하려면 자원해서 만주로 가야죠!"

"기껏 밥 처먹여 놓으니 배가 처불렀구만! 흰소리 지껄이지 말고, 애비 일이나 도와! 가뜩이나 모내기철에 일손 부족해 심난하구만!"

의용군 열풍이 부는 도시와 달리, 농촌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그래도 애국주의 교육을 받은 청년층은 만주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지만, 장년 이상 세대에게는 ‘나라님’에게는 충성해도 ‘한민족의 고토 만주’ 같은 주장은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청년들이여, 대한국군으로 오라!"

정부도 자치령과 같은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의용군 결성을 원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국내 의용군 운동은 신병 모집으로 대체되었다.

신규로 편성 중인 제8사단에 의용군 자원자들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개전 이후 정부는 재정에 무리가 오는 한이 있더라도 상비 10개 사단 체제를 구축하기로 결정했다. 광무 9년에 8사단을, 10년에 9사단을 창설 계획이었다.

러시아군은 요양과 봉천의 측면인 무순과 본계를 점령하고 방어에 들어갔다. 자치령 북동부에서 동청철도에 인접한 지역 일부도 점령되었다.

"남만주 자치령 일부 점령은 묵덴(봉천)을 향한 일본군의 우회진격을 막기 위한 부득이한 조치이다. 러시아는 결코 청국 및 한국과 적대할 의사가 없다."

러시아군의 해명과 달리, 정작 일본의 작전계획에는 무순과 본계 점령이 없었다. 이는 사전에 한국의 요구로 합의한 바였다.

일본군은 개평-대석교-해성-안산-요양-봉천으로 이어지는 남만주철도를 따라 진격할 계획이었다.

"러시아군이 자치령 전체를 점령하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하필 무순과 본계를 점령한 게 불행이군."

무순-본계-안산으로 이어지는 요동지역 양질의 탄광과 철광은 대한제국 공업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전쟁으로 군수공업에 호황이 발생한 시기에는 더욱 그러했다.

"공사, 무순과 본계는 대한제국에 꼭 필요한 탄광·철광지대요. 러시아군의 철수를 요청하겠소."

"폐하, 북부 지방에 선포된 부분 동원령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정녕 폐하의 말씀대로 전쟁을 의미합니까?"

이선과 주한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는 논쟁에 들어갔다. 모두 전쟁은 원치 않았으나, 순순히 물러설 생각도 없었다.

"물론 짐은 우방 러시아와 전쟁을 원치 않소. 하지만 국내 여론은 러시아를 만주에서 몰아내자고 성화요. 부디 귀국이 소탐대실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전쟁을 원치 않으신다면서, 어째서 의용군을 조직하라 명하셨습니까? 자치령 곳곳에 러시아에 맞서는 의용군이 나타나고 있고, 이 중 대부분이 한국군 7사단이 이름만 바꾼 것이라는 정보가 있습니다."

파블로프의 의혹 제기에 이선은 정색했다.

"한국에는 의병이라 불리는, 오랜 의용군의 역사가 있소. 소위 자치령 의용군도 마찬가지요. 불의를 참지 못하는, 예의 바른 청년들일 뿐. 그들은 자신의 터전이 침략당한 것에 분개한 거지, 정부의 지시를 받지 않소."

"그 무슨……."

‘불의를 참지 못하는 예의 바른 청년들’이란 표현에 파블로프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러시아에도 선례가 있지 않소? 1876년 오스만이 불가리아와 세르비아를 공격했을 때, 적잖은 러시아 군인들이 의용군을 결성해 참전한 거로 아는데."

1876년 발칸 봉기 당시, 오스만 군대가 불가리아에서 학살을 저지르자 ‘슬라브 형제’를 구원하자는 러시아 여론이 격동했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는 영국이 오스만의 편을 들어 크림전쟁이 재현될까 봐 당장 참전하지는 않았다. 대신 장교와 병사들로 하여금 ‘의용군’을 결성해 발칸 전선에 참전하게 했다.

영국이 참전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얻자 러시아는 정식으로 선전포고하고 발칸으로 진격, 오스만을 대파하고 발칸 국가들을 ‘해방시켰다.

"어찌 30년 전 사례와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충분히 유사한 점이 많은데, 다르지 않을 건 또 뭐겠소?"

파블로프는 이선의 비유를 경고로 받아들였다.

만약 러시아와 갈등이 계속 지속되고, 동맹 영국이 용인한다면 한국은 정식으로 참전하겠다.

그러니 소탐대실하지 마라.

"짐은 일본군이 무순과 본계를 점령하지 않겠다고 확약하겠소. 러시아가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지 않는 이상, 한국이 러시아에 적대할 일은 없을 것이오."

"본국에 보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회견을 마친 후, 파블로프는 이튿날 다시 알현을 청했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요. 페테르부르크의 답은 뭐라 합니까?"

"아직 논의 중입니다. 황공하오나 오늘은 다른 일로 찾아왔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일로?"

"한국은 중립국이니, 러시아 황족의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있으십니까?"

이선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무슨 일이라도 있소?"

"황제 폐하의 사촌이신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께서 포트 아르투르(여순)를 떠나고자 하십니다. 한국을 경유해 귀국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 * *

키릴 대공은 알렉산드르 3세의 아우인 블라디미르 대공의 아들로, 니콜라이 2세의 사촌동생이다. 알렉세이 황태자와 미하일 대공의 뒤를 이어 장차 러시아 황위계승 서열 3위이기도 했다.

해군에서 경력을 쌓은 키릴은 1905년 초 태평양 함대의 참모로 부임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이 발발했다.

함대 사령관 마카로프의 참모로 기함 페트로파블롭스크에 승선했던 키릴은, 불행한 침몰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생존자였다. 바다에 떨어진 후 가까스로 헤엄을 쳐서 아군 구축함에 구조됐지만, 부상과 충격으로 더 이상 복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황실은 키릴을 페테르부르크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했지만, 문제는 이미 여순이 육상과 해상에서 모두 포위된 상황이라 빠져나올 수도 없다는 점이었다.

일본군의 여순 공략전을 앞두고, 요새에 남아 있던 제3국의 관전무관과 종군기자들, 비무장 민간인들을 모두 중립국으로 철수시키기로 합의했다. 이때 키릴도 전역하여 민간인 신분으로 동행하기로 했다.

러시아는 일본이 키릴을 군인 신분이라고 주장하며 포로로 잡을까 우려했다. 관전무관과 종군기자단이 철수하기로 한 중립국 대한제국에 신변 보장을 요청했고, 이선은 흔쾌히 이를 받아들였다.

이선의 중재를 받은 일본도 키릴 대공의 탈출을 용인했다.

6월 10일, 관전무관과 민간인들을 태운 기선이 여순을 출항해 진남포로 항행했다. 일본 해군은 이들의 안전 항해를 보장했고, 기선은 무사히 진남포에 도착했다.

민간인 신분의 키릴 대공은 이선의 초청을 받아 평양 흥경궁을 방문했다. 키릴의 주치의와 종군 화가 바실리 베레샤긴(Vasily Vereshchagin)도 동행했다.

"어서 오십시오, 대공. 근 10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군요. 한국에 초청하길 바랐습니다만, 평화로운 시기가 아니라서 유감입니다."

"다시 뵙게 되어 기쁩니다, 폐하."

1896년, 이선은 니콜라이 2세 즉위식에 참석하여 러시아를 방문할 때 키릴과도 친분을 맺은 바가 있었다.

"해전 소식은 들었습니다. 부상은 괜찮습니까?"

"폐하께서 배려해 주신 덕에 한결 낫습니다."

키릴은 20대 후반의 멋쟁이 청년이었지만, 충격 탓인지 굉장히 의기소침해 보였다.

"짐 역시 10년 전에 직접 전선을 체험한 바 있지요. 전쟁은 비극입니다. 정말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가급적 피하는 게 좋지요."

"러시아는 전쟁을 원치 않았습니다. 야만적인 일본이 기습적으로 공격해 전쟁을 일으켰지요."

키릴은 일본에 분노를 느꼈다. 일본의 공격으로 죽어 간 전우들을 생각하면 분노가 치솟았다.

"존경하던 마카로프 제독이 제 눈앞에서 산산조각 났습니다. 동료 장교들, 수병들……. 자기 위해 눈을 감으려고 하면 그들의 비명이 생생하게 떠올라서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아직 이런 단어가 생기진 않았지만, 키릴은 일종의 쉘 쇼크(Shell shock) 증세를 겪고 있었다.

그도 그럴 법했다. 자신의 눈앞에서 전우 수백 명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보았으니, 황실에서 곱게 자라던 청년의 신경이 온전하게 버틸 리가 없었다.

"실로 안타깝습니다. 마카로프 제독은 러시아의 가장 유능한 해군제독이라 들었습니다.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이선은 키릴을 위로했다. 키릴을 초청한 건 외교적 수완으로 활용하기 위함이었지만, 인간적으로 그가 딱하게 느껴졌다.

"한국에 얼마든지 편하게 머무르다가, 귀국하도록 하십시오. 짐이 할 수 있는 한 모두 돕겠습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하오나 황실에서 제 안위를 걱정하고 있어서, 최대한 빨리 귀국하고자 합니다. 동청철도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이용하면 2주면 갈 수 있겠지만……."

키릴 대공이 구사일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로마노프 황실은 신에게 감사드렸다. 블라디미르 대공은 조속히 귀국을 종용했다.

"그쪽은 전선이라 통과가 어렵겠지요. 인천에서 출발하는 배를 이용하도록 하십시오. 황실 전용 기선을 빌려드리겠습니다."

"폐하의 은혜에 어찌 보답을 해야 할지……."

"대공의 할아버님, 선제 알렉산드르 2세께 받은 은혜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지요."

키릴의 감사에 이선은 겸손한 어조로 답했지만, 로마노프 황실에 다시 빚을 지어 준 셈이었다.

알렉산드르 2세와 황태자 니콜라이의 암살을 막고, 이번에는 황위계승 서열 3위 키릴 대공이 포로로 잡히지 않고 무사히 귀국할 수 있도록 도왔다.

‘실제 역사에서는 니콜라이의 아들 알렉세이가 혈우병 환자고, 동생 미하일 대공은 귀천상혼을 하는 바람에 키릴이 후계자 후보군으로 떠오르기도 했지. 역사가 바뀌었으니 어찌 될지 모르겠지만, 은혜를 베풀어서 나쁠 건 없지.’

전쟁 충격에서 벗어난 후, 키릴은 영국 공주 빅토리아 멜리타(Victoria Melita)와 결혼한다.

빅토리아 멜리타는 알렉산드르 2세의 외손녀이기도 해서 키릴과는 사촌 간이라 정교회의 반대를 사고, 남편인 헤센 대공과 이혼을 해서 헤센 대공의 여동생이기도 한 황후 알렉산드라도 반대했다.

키릴이 차르의 허가 없이 끝내 결혼을 강행하자, 니콜라이는 키릴의 모든 작위와 직위를 박탈한다.

훗날 친동생 미하일은 한술 더 떠 황실에서 금지하는 귀천상혼을 해 버리는 바람에 니콜라이는 뒷목을 잡았고, 결국 키릴을 복권시켜 작위와 직위를 돌려주었다.

‘결국 이대로 간다면, 니콜라이는 실제 역사대로 민심을 잃을 것 같다. 하지만 이대로 로마노프 황실이 무너지는 것도 곤란해. 내가 로마노프 가문에 투자한 게 얼마인데……. 알렉세이는 환자고, 미하일은 국가보다 사랑을 택할 인물이니, 만의 하나에 대비해 키릴의 호의를 사는 게 낫겠군.’

러시아 2월 혁명 이후, 키릴은 제정에 반대하고 임시정부에 충성을 맹세했다. 심지어 군복에 붉은 리본을 달고 붉은 완장을 찼다.

황족이 진심으로 혁명을 지지했다기보다는, 민심을 사서 자신이 새로운 러시아의 수장이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만큼 야심이 있는 인물이었다.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는 프랑스로 망명하여 적법한 러시아 차르임을 주장했다. 황족 생존자 중 가장 계승 서열이 높았으므로 주장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다른 보수적인 황족들과 달리 키릴은 사회주의에도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차르와 소비에트’가 공존할 수 있다고 외쳐, 일명 ‘소비에트 차르’라고 불렸다.

사회주의자들과 군주제 지지자들이 모두 코웃음을 칠 공상적인 주장이라 할지라도, 키릴은 니콜라이와 달리 민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황족이었다.

"대공, 부디 무사히 귀국하기를 바랍니다. 다시 평화로운 시대가 돌아와, 좋은 환경에서 재회하길 희망하겠습니다. 황제 폐하와 황실 일원들께 짐의 인사를 전해 주십시오."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 폐하. 폐하의 배려와 은혜, 로마노프 황실을 깊이 존중하는 마음을 꼭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키릴은 이선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이선은 종군화가 베레샤긴과도 회동했다.

베레샤긴은 러일전쟁을 그리기 위해 여순에 도착, 기함 페트로파블롭스크에 동승했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은 생존자 중 한 명이었다.

"선생의 그림은 짐도 여러 번 보았습니다. 대작들이지만, 특히 투르키스탄 전쟁을 다룬 전쟁의 종말이란 그림은 정말 섬뜩하더군요."

"동양의 군주이신 폐하께서 먼 나라 늙은 화가의 그림을 보셨다니 영광입니다. 아, 영광이라. 전쟁은 결코 영광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 전쟁에 종군했습니다만, 언제나 전쟁의 결말은 비극이지요. 조금 전까지 멀쩡히 움직이던 사람들이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집니다. 전쟁은 지옥입니다."

베레샤긴은 1860년대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점령, 1870년대 영국군의 인도 반란 진압, 1877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1894년 청조일 전쟁,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1900년 의화단 전쟁에 모두 종군한 러시아의 가장 저명한 종군화가였다.

전쟁에 종군했다가 중상을 입고 장교였던 형제를 잃기도 했던 베레샤긴은, 그 이전까지 영광 일색의 프로파간다로 치장되었던 전쟁 기록화에서 벗어나, 전쟁의 비참함을 반전 평화주의에 입각하여 그렸다.

전사자로 가득 찬 전장, 부상자가 신음하는 야전 병원, 불타 버린 도시, 잔혹한 포로 학살 등이 사실주의적인 화폭에 가감 없이 담겼다.

그 비참함이 너무나 사실적이라, 러시아 당국에 의해 그림 전시가 중지된 것도 수차례였다.

"언제나 서양 열강들은 전쟁을 시작하면서 야만적인 이교도들을 정벌하는 정의로운 전쟁이라 했지만, 실상은 누가 문명이고 누가 야만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러시아인은 튀르크인들을, 영국인들은 인도인들을 문명의 힘으로 학살했습니다."

황족 앞인데도, 이 늙은 화가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일본도 참으로 서양의 충실한 제자더군요. 10년 전, 저는 일본군이 여순에서 저지른 학살을 보았습니다."

1895년, 일본군은 여순을 함락시키고 청군과 민간인들을 가리지 않고 학살을 벌였다. 일본군 포로를 처형한 청군이 군복을 벗고 도망치는 바람에 민간인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이유였지만, 끔찍한 학살임에는 틀림없었다. 제3자인 서양 종군기자들도 ‘전쟁이 아니라 도살’이라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운명의 장난인지, 10년이 지나 다시 일본군이 포트 아르투르에서 격돌하게 되었군요. 과연 이번에는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아무도 믿지 않을 이야기지만, 어쩌면 여순의 원혼들이 일본군을 향해 손짓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번에는 너희들 차례라고.

6월 하순, 일본 제3군의 여순 대공세가 시작되었다.

늙은 종군화가가 경고한, 비참한 ‘전쟁의 종말’을 향해.

- 87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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