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412화 (411/812)

93화 여순 공방전

만주 전선은 요양 회전 이후 장마로 인해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빠졌다. 9월 초에 요양과 봉천 사이에 있는 사하(沙河)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일본 만주군을 격퇴하고 여순으로 향하는 길을 연다."

거듭되는 퇴각 소식에, ‘일본 만주군을 격파하고 포위된 여순을 지원하라’는 극동총독 알렉세예프의 채근을 받은 러시아군은 마침내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

사하 일대에서 러시아군 24만, 일본군 17만이 격돌했다.

공격과 방어의 입장이 바뀌자, 전투는 여지없이 공격자인 러시아군에게 불리하게 적용됐다. 일본군 참호와 고지를 향한 러시아군의 돌격도 구식 전쟁의 돌격 그 자체였다. 1877년 튀르크 전쟁 이래 변화를 받아들인 바 없는 러시아 장군들은 밀집대형으로 일본군의 포화 앞에 돌격하게 했다.

"퇴각! 공세를 중단한다!"

가뜩이나 공세에 대한 열의가 없었던 러시아군 지휘부는, 일본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다시 퇴각하고야 말았다.

러시아군은 2주간의 혈투 끝에 아무런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러시아군 사상자는 약 4만으로, 일본군 사상자의 두 배였다.

전술적으로 변명의 여지가 없는 패배였고, 전략적으로도 실패였다. 이제 여순을 구원하겠다는 어떠한 시도도 불가능했다.

영락없는 패배였으나, 쿠로파트킨은 작전 실패의 책임을 알렉세예프가 무리한 공세를 요구하는 탓으로 돌려 오히려 지휘권 단일화에 성공했다.

개전 이전부터 거듭된 알렉세예프의 무능에 페테르부르크도 질려 있었고, 차르는 그나마 더 유능한 쿠로파트킨의 손을 들어주었다.

쿠로파트킨은 유럽의 병력이 수송되어 충분한 병력을 갖추기 전까지, 앞으로 어떠한 공세도 할 계획이 없었다.

"이제 봉천으로 향하는 길이 열리긴 했는데, 제3군이 문제로군!"

일본군은 승리를 활용하지 못했다. 어차피 10월 이후에는 만주에 거센 추위가 찾아오는 바람에 대규모 공세도 불가능했다.

제3군이 여순 공략전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으며 발목이 잡혀 있는 상황이라, 봉천 공세는 여순 함락 후로 연기되었다.

3군의 여순 함락 여부에 일본군의 운명이 달려 있었다.

* * *

여순 공방전은 일본의 예상을 깨고 추위가 다가오는 계절까지 지속되었다.

2차 총공세와 3차 총공세도 참담하게 실패로 끝나고, 사상자는 갈수록 늘어났다.

일본군의 공세 계획은 언제나 같았다. 포병대의 포격 후 요새를 향한 일제 보병 돌격.

하지만 여순 요새는 굳건히 버텼고, 손실만 반복될 뿐이었다.

"요새 함락에만 매달릴 때가 아닙니다! 서북쪽의 203고지를 함락시키면 여순항을 감제(瞰制)할 수 있습니다! 203고지를 점령한 후에 포대를 설치, 적 함대를 격멸시켜 주십시오!"

"203고지를 함락시켜 봤자 여순 요새의 함락에 영향을 미칠 수 없소. 제3군이 대본영으로부터 받은 임무는 여순 요새의 함락이오!"

"남산을 함락시킨 덕에 금주성을 공략했던 선례도 있지 않습니까? 203고지를 떨어트리면 적의 사기도 떨어져 끝내 항복할 겁니다!"

"그건 가정에 불과하오! 해군이 어째서 육군의 작전에 개입하려고 드는 거요? 지상전은 육군의 임무요! 애초에 해군이 진작 적 함대를 격멸했더라면 육군이 여순에서 이렇게까지 고생할 일도 없지 않소!"

"뭐라고요! 해군은 이미 적 함대의 절반을 무너트렸습니다! 내항에 틀어박힌 적을 어떻게 합니까?"

"요새에 틀어박힌 적을 어쩌지 못하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요! 육군도 놀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오!"

육군과 해군은 고질적인 분란을 일으켰다. 해군의 이령산(203고지) 점령과 항구 포격 요구에 육군은 반발했다. 그 작전이 옳건 그르건 간에, 해군이 육군에게 지상전을 참견한다는 것 자체가 육군 체면에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곧 천장절이 다가온다. 오오키미(大君, 천황을 지칭하는 고어)께 부끄럽지 않게 신하된 도리를 다할 수 있도록, 그때까지 반드시 요새를 함락시켜라! 최소한 전방 고지들만은 모두 확보해야 한다!"

대본영과 만주군 총사령부에서는 3군에 하루라도 빨리 여순을 함락시키라고 엄청난 압박이 이어졌다.

대본영은 3군에게 병력을 몰아줬다. 본래 1사단, 7사단, 9사단에 홋카이도 7사단, 3개 후비여단이 더해져 3군 병력은 6개 사단 10만에 달했다.

11월 3일 천장절, 즉 천황의 생일이 다가오자 3군 사령관 노기 마레스케 대장에게는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다. 3군의 위신을 위해서라도 천장절까지 어떻게든 성과를 내야 했다.

10월 26일, 전 전선에 일제히 신호와 함께 4차 총공세가 개시되었다.

4차 공세에는 공병대가 미리 사전작업을 했다. 지하갱도를 통해 화약을 터트려 전방의 지뢰밭을 무력화하는 방식이었다. 전 전선에서 공성용 참호도 구축되었다.

포병대는 전방을 향해 아낌없이 포탄을 퍼부었다.

콰콰콰쾅!

콰앙! 콰앙!

"백거대, 돌격!"

"우리 부대에는 퇴각이란 단어가 없다! 오직 공격 아니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자원병들로 구성된 ‘백거대(白擧隊)’가 돌진했다. 군복 상의에 흰 띠를 두른 백거대는 죽음의 결사대였다.

실로 용기는 대단했지만, 흰 띠가 피로 물들어도 전선을 뚫지는 못했다.

백거대 지휘관 나카무라 마사오 소장 이하, 백거대 대부분은 고지에 도달하지도 못한 채 전멸했다.

"撃て!"

"突擊!"

"天皇陛下萬歲!"

일본군은 만세 소리와 함께 일제히 돌격을 개시했다.

일본군 병사들의 감투는 훌륭했지만, 지뢰밭을 넘으면 철조망이 나오고, 철조망을 자르고 돌진하면 기관총으로 들어찬 참호가 대기하고 있다.

"ПЛИ!"

"ОГОНЬ!"

타다다다다다당!

기관총은 쉴 새 없이 전방의 일본군을 향해 쏟아졌다. 철조망조차 넘지 못하고 죽어 가는 병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용케 적 참호에 돌입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러시아군 보병대가 대기했다.

"В атаку!!"

"Ура!!!"

괴성을 내지르며 돌격하는 러시아군은 포화를 뚫고 올라온 일본군의 전의를 꺾어 버렸다. 러시아군 지휘부는 무능할지라도 병사들은 용맹했고, 특히 백병전만큼은 세계 최고라고 평가받는 군대였다. 일본군은 기껏 참호에 돌입하는 데 성공해도 백병전에 쫓겨 퇴각했다.

"만주군은 요양과 사하에서 승리를 거뒀다! 우리가 여순을 함락시키지 못하면 제3군의 체면이 대체 뭐가 되겠는가!"

"7사단 홋카이도 촌놈들은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들으면 부끄럽지 않겠는가? 전쟁만은 1사단 도쿄 놈들에게 뒤져선 안 된다!"

"도대체 포병대는 뭘 하고 있는 거야! 포격 하나 똑바로 못하나! 적 참호가 그대로 있잖아!"

"도대체 보병대는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지원 사격을 날려 줬으면 적 고지를 점령해야지!"

"연대장님! 이제 한계입니다. 더 이상 공격할 수 없습니다. 돌격을 중단해야 합니다!"

"에잇, 사단장께 반드시 고지를 점령하겠다고 약속했단 말이다! 옆 연대는 고지 돌파에 성공했는데 우리 연대는 못 하면, 대체 내 체면이 뭐가 되나? 폐하께서 하사한 연대기를 반드시 저 고지에 꽂는다! 알겠나!"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육군은 해군에 맞서 자존심을 따졌고, 만주군은 대본영에 맞서 자존심을 따졌고, 제3군은 다른 전선에 맞서 자존심을 따졌고, 보병은 포병에 맞서 자존심을 따졌고, 사단은 이웃 사단에 맞서 자존심을 따졌다.

육군과 해군의 뿌리가 다르고, 육군 내에서도 사단과 연대는 각 지역을 대표하는 입장이라 자존심 경쟁이 있었다.

"우리 가나자와 9사단은 카가 번(加賀藩)의 후예다! 가나자와는 고쿠다카(石高) 백만 석을 자랑하는, 에도 다음가는 번이었다. 비록 유신 이후로 삿쵸에 밀리게 되었지만, 이 여순에서 가나자와의 명예를 드높여 옛 영광을 되찾자!"

"와아아아!"

일본이 아무리 메이지유신 이후 30년 넘게 근대국민국가를 지향했다지만, 수백 년 내려온 ‘번(藩)’의 전통이 한세대 만에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물론 이는 장년층인 지휘관들의 이야기지, 유신 이후에 태어난 젊은 세대에게는 와닿지 않는 소리였다.

"놀고들 있네. 대체 언제적 케케묵은 사무라이 타령이냐. 전방에서 병사들이 죽어 나가는데 자존심 싸움만 할 텐가? 무능한 놈들!"

사토 히로시 중위는 지휘관들에게 경멸감을 느꼈다. 그 자신은 1차 총공세 때 고지를 함락시킨 공로로 훈장과 함께 중위로 진급했지만, 얼굴과 몸 곳곳에 깊은 자상(刺傷)의 흔적을 남겼다.

일본과 천황에 대한 충성심은 여전했지만, 어리석은 공세로 끊임없이 죽어 가는 전우들을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지휘부의 무능에 사토는 깊은 경멸감을 느꼈다.

"천황 폐하 만세!"

"돌격! 돌격하라!"

기백과 광기를 혼동하는 지휘관들의 무리한 요구에 일본군 장병들은 계속 죽어 나갔다.

3군 지휘부는 광신적인 돌격을 반복했지만, 병사들이 죽음 앞에서도 계속 순종한다는 건 지휘부의 착각이었다.

"내가 왜 샤모(일본인)들을 위해 죽어 줘야 하지?"

홋카이도 7사단에는 북방 원주민, 아이누도 대거 징집되어 있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홋카이도가 중앙 정부의 지배하에 들어가 황국신민화 정책이 추진되면서, 아이누는 터전을 빼앗기고 ‘2등 신민’이 되었다. 아이누는 이름부터 일본식으로 고칠 것을 강요받았고, 언어부터 풍습에 이르기까지 본래의 문화는 파괴되고 정체성을 빼앗겼다.

그나마 차별이 덜한 곳이 군대 내부라고는 하지만, 이들은 ‘우타리(동포)’도 아닌 침략자 ‘샤모(일본인)’를 위해 죽어야 할 이유를 몰랐다.

"이런 듣도 보도 못한 타지에서 죽게 될 줄이야……."

전쟁에 대한 회의는 차별받는 민족인 아이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유신 이전만 해도 전쟁은 사무라이의 몫이었다. 워낙 무를 숭상하는 문화가 있었기에 가난한 농민의 자식이 군대에 들어가는 건 영광으로 여겨졌다.

황민화 교육을 받은 세대는 더욱 그랬다. 징병되면 ‘나라님의 부름’을 받았다고 마을에 잔치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막상 여순에서 참혹한 근대전의 현실을 맞이하게 되자, 가난한 농민의 자식들은 왜 이곳에서 산산조각 나서 죽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근대국민국가란 바로 이런 장삼이사들에게 죽으라고 명령할 수 있는 잔혹한 존재였다. 명령에 따라 죽는 길밖에 없었다.

"언제까지 기관총을 향해 맨몸으로 돌격하라는 거야!"

"이건 미친 짓이야! 난 여기서 나가야겠어!"

"돌격은 너나 실컷 해라, 제기랄!"

격렬한 돌격전이 반복되는 동안 대부분의 병사는 충실히 명령을 수행하도 죽어 나갔지만, 명령을 거부하고 돌격을 거부하거나 심지어 상관을 살해하는 일도 발생했다.

이는 지휘부에게 굉장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상관에게 순종적인 일본 병사들이 처음으로 반기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반기를 든 병사들은 즉결처분되었지만, 지휘부는 전략 수정의 필요성을 느꼈다.

"전 전선에서 공세를 중단한다."

11월 2일, 결국 4차 공세도 무수한 사상자를 내고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일본군에게는 참으로 원망스럽게도, 여순 요새는 여전히 굳건했다.

"4차 공세도 실패했는데, 일본군이 새로운 공세를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정말 한도 끝도 없군요. 대체 지금까지 일본군 사상자가 얼마라던가요?"

"대외비인데, 6만에서 7만은 된다는군요. 전사자는 이미 1만 5천이고, 부상자도 5만 이상."

"질병으로 인한 후송병력도 생각해야지요. 각기병 환자가 2만에 육박합니다. 풍토병과 각종 질병으로 쓰러진 환자도 족히 1만은 될 겁니다."

대한제국 관전무관 육군 참령 이갑, 해군 정위 안중근, 군의 정위 김필순은 파악한 정보를 조합했다.

"아니, 각기병 환자가 2만이나 됩니까? 완편 1개 사단 병력이 통째로 각기병으로 쓰러졌다고요?"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밀려오는 부상자에 각기병 환자들까지, 군의대가 감당을 못합니다. 이미 각기병은 대한국군과 일본 해군은 해결했다고 누누이 말해도 육군은 대체 무슨 똥고집인지 모르겠어요."

"똥고집은 작전 지휘도 마찬가지죠. 해군에서 203고지 점령을 요구하니까 육군의 체면에 걸렸다고 거부했다던데. 추정대로라면 이미 10만의 병력을 상실했다는 건데, 도대체 병사의 목숨은 하루살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어째 1차 공세로부터 달라진 게 하나도 없군요. 아니, 더 나빠졌군."

이들은 일본군의 참사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4차 공세 실패까지 일본군의 사상자는 7만에 달했다. 질병, 특히 각기병으로 실려 나간 병사들까지 포함하여 10만의 병력을 상실했다.

연인원 20만의 병력이 여순에 투입됐는데, 그중 절반이 이미 전투불능 상태가 된 것이다.

일본군으로서는 뼈아픈 손실이었다. 그들은 미처 모르는 사실이지만, 실제 역사보다 개전이 1년이 늦어지면서 러시아군의 요새 방비는 훨씬 두터워지고, 지휘권도 요새 사령관으로 일원화되었다.

여순의 두터운 요새와 일본군 지휘부의 무능은 병사들의 희생을 무한정 늘리고 있었다.

"사상자 10만이면 국군 상비 병력과 비슷한 수준이군요. 개전 초기 일본군 상비 병력 20만의 절반이고. 여순에서만 10만을 잃었으니, 만주 전선까지 포함하면 최소 15만은 잃었을 터인데……. 일본군 동원 가능 병력이 최대 60만 정도라고 가정하면, 이미 4분의 1은 상실. 심각한 상황이군."

계산하던 이갑이 혀를 내두르자, 안중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일본이 대한에 계속 참전을 요청한다고 합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일본 보병들 대신에 총알받이 해 달라는 거 아니오?"

"예, 절대 안 되지요."

한국군이 투입되어 봐야 쓰임새는 뻔했다. 일본군의 출혈이 극심하니, 한국군도 같이 흘려 달라는 속셈이었다.

개전 초기만 해도 전쟁에 공감했던 이갑과 안중근은, 20세기 전쟁의 무서움과 일본군의 무능함에 학을 떼고 참전 반대론자로 돌변했다.

‘만약 국군이 러시아와 전쟁을 했더라면, 더 잘할 수 있었을까?’

이갑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한국군이 일본군보다 나을 것이란 보장이 없었다. 애초에 병력과 공업력도 열강에 비하면 부족하고, 한국군 장교들도 독립전쟁과 북벌전쟁에서 3류 군대인 청군을 상대로 승리를 경험한 게 전부였다. 새로운 전쟁의 양상에 무지한 건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만주 전선의 이야기를 들으면 열강이라는 러시아군의 무능도 일본군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왜 성상께서 그토록 전쟁을 회피하시려는지 알겠다. 준비되지 않은 무모한 전쟁은 미친 짓이다. 일본이 우리의 반면교사다.’

전쟁은 국운을 건 도박이었다. 지금의 일본처럼 모든 패를 건 도박이라면, 모두 따든가 잃든가 둘 중 하나였다.

그러니 일본은 10만이 희생했어도 공세를 중단할 수가 없었다. 설령 20만이 희생해도 마찬가지였다.

여순 최후의 공세가 준비되었다.

- 94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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