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혁명의 시작
수도 한복판, 황제가 거처하는 궁전 앞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학살 사건. 피해자들은 평화적인 시위대였으며, 온순하게 청원을 하려던 사람들이었다.
크리스마스 학살, 혹은 피의 일요일이라고 불리게 될 충격적인 사건의 여파는 러시아 전역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희생자들을 살려 내라!"
"학살자를 처단하라!"
"동포여, 피의 일요일을 잊지 말라!"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순식간에 혁명의 중심지가 되었다.
급진파의 요람인 대학은 공공연히 정치적 소요의 중심지가 되었다. 대학생들은 동맹 휴학을 선언하고, 공공연히 정치적 구호를 외쳤다.
"학우들이여, 동맹 휴학에 나서자!"
"전제정권 타도하자!"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차르는 물러가라! 공화국 만세!"
러시아 역사상 최초로, 공화국을 외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1825년 12월 데카브리스트의 봉기 이후 꼭 80년 만에, 러시아는 혁명적 위기에 접어들었다.
급진적인 개혁을 꿈꾼 데카브리스트는 소수의 장교와 지식인들에 불과하였으나, 80년 뒤에는 다수 대중의 지지를 얻고 있다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동지들이여, 총파업에 돌입하자!"
"사회민주주의 만세! 혁명 만세!"
노동자들은 계엄령에 아랑곳하지 않고 총파업을 선언했고, 1월 이내로 50만의 러시아 노동자들이 파업에 동참했다.
노동조합이 러시아 전역에서 형성되고, 변호사·의사 등의 전문직 조합들조차 연대의 의미로 노동조합에 합류했다.
"시민들이여, 세금 납부를 거부하라!"
"총체적인 시민불복종에 나서자!"
중도 자유주의자들조차 정부에 완전히 등을 돌렸다. 자유주의자들은 ‘해방 동맹’을 결성하고 시민적 자유를 외쳤다.
부르주아지, 인텔리겐치아, 프롤레타리아트가 한마음으로 연대하는 드문 일이 벌어졌다.
"토지를 농민에게!"
"지주들은 꺼져라!"
소요사태는 점차 도시에서 농촌으로 전이되었다. 농민들은 지대(地代) 거부 운동을 벌이고, 옛 영주인 부재지주의 토지를 점거하기 시작했다.
농촌의 민심 이반은 도시 못지않게 위태로웠다. 러시아 제1의 산업은 여전히 농업이었다. 러시아 인구의 85%가 농민이요, 전선에 나가는 병사들 역시 대부분 농민 출신이었다. 혁명의 위기가 병사들에게 전염되는 것만큼 두려운 게 없었다.
"러시아의 지배를 끝장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독립 만세! 러시아를 타도하라!"
이미 1905년 초부터 소요사태에 접어들었다가, 군대의 진압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폴란드, 핀란드, 발트 연안, 카프카스 지역에서는 저항이 더욱 거세게 불타올랐다.
시위와 파업을 넘어 독립운동 조직의 무장봉기까지 발생했다. 특히 소수민족 출신 군인들은 빠르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상황은 하루가 다르게 심각하게 돌아갔다.
온 나라가 혼돈에 빠져 있는 동안, 오직 한 사람. 이 모든 상황의 가장 큰 책임자이자, 가장 큰 위기의식을 느껴야 할 전제군주 - 차르 니콜라이 2세만이 천하태평이었다.
"짐은 노동자들이 불순한 해외의 반역자들, 외국 첩자들에게 조종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개탄스럽다. 하지만 반역자는 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신민은 신과 황제에게 충성스러우리라 확신한다. 짐은 신민들의 충성과 헌신을 믿기에, 그들이 잠시 잘못된 길에 접어들었다 할지라도, 그들의 죄를 기꺼이 용서하겠다."
차르의 초기 대응은 놀라울 정도로 기만적이었다.
정부가 국민에게 용서를 구하는 게 아니라, 국민이 정부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위는 평화집회가 아니라 폭동으로 규정되었고, 학살 피해자는 반역자와 외국 첩자들에게 조종된 폭도들이었다.
"겨울궁전 총격사건은 수도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군대의 정당한 진압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시위를 주도한 자들은 외국인 첩자들, 외국에 망명한 혁명가들의 조종을 받는 자들로 밝혀졌습니다."
"소요의 배후에는 사회주의자들, 테러리스트들, 유대인, 프리메이슨이 있습니다. 모두 신성한 러시아를 파괴하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단호히 대응해야 합니다."
차르는 정확한 조언은 무시하고, 왜곡된 보고만을 진실로 받아들였다.
궁전 밖의 세상을 전혀 알지 못하고, 아니 알려고 하지조차도 않는 니콜라이로서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니콜라이는 20세기에 살지만, 정신세계는 그가 이상으로 꼽았던 ‘표트르 대제 이전의 러시아’, 즉 17세기에 살고 있었다.
17세기의 전제군주가 20세기의 국가를 다스리려하고 있었다. 무려 3세기의 시대착오였다.
"감옥을 짓자고 했는데, 결국 현실이 됐군. 이제 더 많은 감옥이 세워지든가, 붕괴든가 둘 중 하나겠지."
피의 일요일 사건에 책임을 지고, 내무대신 미르스키 공이 사임했다.
미르스키의 개혁안을 진작 받아들였더라면 사태가 이렇게까지 오지도 않았을 터지만, 차르는 오히려 그가 무르게 나오는 바람에 소요가 발생했다고 생각해 기꺼이 사표를 수리했다.
후임 내무대신으로 임명된 알렉산드르 불리긴(Alexander Bulygin)은 개혁의 필요성에 절감했다. 그는 헌법 제정과 의회 개설로 위기를 돌파하고자 했다.
"폐하, 현재 위기가 온 나라를 뒤엎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국민에게 정치적 양보를 승인하지 않으시면, 파국이 임박할 것입니다. 부디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파국을 운운하는 내무대신의 말에 차르는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했다.
"허어, 어찌하여 그리 겁을 내는 거요? 행정의 책임자인 경이 겁을 집어먹고 있다고 신민들이 생각한다면, 정부가 얕보이고 말 거요. 장차 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르지."
내무대신은 차르의 정세인식에 아연한 표정으로 답했다.
"폐하, 모르셨습니까? 이미 혁명은 시작되었습니다."
* * *
"아니, 이게 대체 무슨 난리란 말인가. 어찌 상소를 올리는 백성들에게 총격을……."
주러 한국 공사 이범진은 거듭 한탄했다. 근대적 정치사상에 대한 이해가 거의 부족한 이범진이었지만, 유학을 익힌 그로서는 군주가 공손히 청원하는 백성을 학살한다는 걸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부친의 한탄을 들으며 이위종은 제국익문사에 보고할 사항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익문사가 그에게 내린 지시를 실행으로 옮길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익문사 독리 김학우, 엄밀히 말하면 황제 이선으로부터 페테르부르크를 향해 세세한 지시사항이 내려오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정치적 위기가 발생하리라고는 나도 예측했지만, 이렇게 치명적인 사태까지 벌어질 줄이야. 설마 성상께서는 이조차도 예상하고 계셨던 건가?’
러시아의 혁명 가능성은 익문사가 가장 주목하고 있는 사항이었다. 전쟁 초만 해도 설마 그럴까 싶겠냐마는, 불길한 예측은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무슈 리, 정말로 폭풍이 목전에 다가오고 있는데 우리는 모르고 있었던 걸까요?"
"글쎄요. 앞날을 어찌 알겠습니까마는, 이리될 줄은 몰랐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위종은 아나스타샤 브론스카야를 다시 만났다.
그녀는 백부 브론스키 장군이 피의 일요일 사건의 책임자가 되는 바람에 크게 상심한 터였다. 엄밀히 말하면 그가 부재중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학살을 자행한 부대의 지휘관으로서 책임이 없다 할 수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도시로 나가는 것조차 두려워 저택 안에 머물렀다. 장교들, 특히 피의 일요일과 관련된 장교들의 가족들조차 비난의 눈초리를 받았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이세요? 설마 저를 위로해 주려고 일부러 오시진 않았을 거고."
"지난번에 아가씨가 소개해 주셨던 브루실로프 장군을 찾아뵐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초면에 불쑥 찾아갈 사이는 아니다 보니. 괜찮으시면 브론스키 가문의 소개장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알렉세이 알렉세예비치를? 공무와 관련된 일이라면, 소개장 없이 외교관 자격으로도 충분할 텐데요."
외교관이 공적인 사유로 찾아간다면, 문전박대를 하진 않을 터였다.
"개인적인 일입니다. 부탁드립니다."
"그럼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당장 말씀드릴 수는 없고, 일이 끝나면 알려 드리지요."
아나스타샤는 의아했지만, 이위종의 표정이 절박했기에 더 묻지 않고 브론스키 가문의 직인이 찍힌 소개장을 써 주었다.
"감사합니다, 아나스타샤 안드레예브나. 이 은혜는 반드시 갚죠."
"내 친구, 엘리자베타의 연인을 위해서 쓴 거예요. 그러니 그녀에게 감사하세요. 도시에 다시 평화가 오면, 엘리자베타랑 같이 오페라 보러 가요."
"하하, 물론이죠. 제가 최고로 모시겠습니다. 어서 그런 시기가 오면 좋겠군요."
이위종은 아나스타샤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장군은 만주로 향하는 특급열차의 1등석에 앉아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브루실로프는 부하를 불렀다. 그가 만주에서 지휘할 부대의 장교였다.
"부르셨습니까, 각하?"
"어서 오게, 만네르하임 중령."
큰 키에 균형 잡힌 체격, 검은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38세의 카를 만네르하임(Carl Gustaf Emil Mannerheim) 남작은 스웨덴계 핀란드인으로, 촉망받는 기병 장교였다.
"중령은 제2근위기병연대에서부터 함께했지. 이번에 만주 전선에도 함께 복무하게 됐군."
"예, 장군을 다시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참 어려운 시기에 전선으로 가게 됐어."
"군인으로서 사양할 일은 아닙니다. 대반격의 일원이 될 거니까요. 다만 포트 아르투르(여순) 함락으로 전선의 사기가 걱정입니다."
비록 일본군의 희생이 훨씬 더 컸다고 할지라도, 여순 함락과 태평양 함대의 소멸은 러시아에 충격을 주었다.
"음. 페테르부르크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만주 전선은 오죽하겠나. 이제 공세 말고는 답이 없어. 계속 소극적인 전략으로만 나갔다간 사기가 더욱 꺾이고 말 테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만주보다 페테르부르크가 더 걱정입니다. 전선으로 떠나기 전에 헬싱포르스(헬싱키)에 들렸는데, 거의 무정부 상태더군요. 그런데 페테르부르크조차 그 지경이 되다니! 이대로 가다간 머지않아 혼란이 극동 전선에까지 도달할 겁니다. 정부의 조치가 있어야 합니다."
만네르하임처럼 러시아를 위해 일하는 소수민족도 적지 않았지만, 제국 전역에서 러시아에 대한 소수민족의 반감은 엄청났다.
피의 일요일 이후에는 심지어 러시아인의 충성심도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중령, 우린 군인으로서 정치에 개입할 입장은 아닐세. 정부를 믿고, 우리 할 일을 하자고."
"실례했습니다, 각하."
말은 그렇게 해도, 브루실로프도 걱정이 태산이었다.
아직 전선의 사기가 떨어졌다는 소식은 없었지만, 피의 일요일 사건의 여파가 군대에까지 퍼져 나갈 것이다. 소요가 더 심각해지기 전에 일본과 결판을 내야 했다.
"중령, 이건 내가 확보한 정보인데. 읽어 보게."
브루실로프는 만네르하임에게 서류 가방을 건넸다. 문서를 읽어 보던 만네르하임의 표정에 놀라움이 어렸다.
"각하, 이건……."
"그래. 1905년 12월 시점에서 일본군의 배치도, 사상자 현황일세. 일본군의 병력손실이 우리 생각보다 크더군."
"엄청난 정보군요. 대체 어떻게 이런 정보를 얻으셨습니까? 육군 정보국입니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아니야. 중령, 아나톨리 브론스키 장군 알지?"
"예, 근위기병사단장이신. 이번 사태로 난처하시겠군요."
"그 조카딸에게 소개받은 한국 외교관이 있는데. 그 청년이 넘겨준 거야."
브루실로프는 만주로 떠나기 전, 이위종의 방문을 받았다. 브론스키 가문의 소개장을 들고 왔기에 집사도 흔쾌히 문을 열어 주었다.
인사만 한 사이라 뜬금없는 방문이었으나, 이위종은 뜻밖의 전달을 했다.
이위종이 넘겨준 서류는, 기밀 직인이 찍혀 있는 최신 군사정보였다. 브루실로프는 깜짝 놀랐다.
"이게 대체 뭐요?"
"보시다시피, 일본군 최신 정보입니다."
"대체 이걸 왜 내게 주는 거요?"
브루실로프는 본능적으로 역정보(逆情報)가 아닌지 의심했다.
"장군께서 만주로 향하신다고 하니, 제가 이걸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건 납득이 되지 않소! 이건 기밀문서인데, 당신네 나라 입장에선 반역이 아니오!"
이위종이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저는 분명 한국인이고, 대한제국을 위해 일합니다만, 제가 사랑하는 여인은 러시아 사람입니다. 체류한 시간은 짧아도, 제게 있어 러시아는 제2의 조국이나 다름없습니다."
"허어."
"이대로 가다간 러시아가 패전하여 혁명이라도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러시아가 만주에서 승리한다면, 상황이 바뀔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제 조국 대한제국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러시아가 일본을 이겨야 합니다. 만주 전선에도 저와 뜻을 같이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 친구가 장군을 도울 겁니다."
이위종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해 보였다. 브루실로프는 일단 청년의 설명을 받아들였다.
"흠……. 그럼 동료란 이는 어떻게 접촉하면 되겠소?"
"제가 연통을 넣어 두겠습니다. 장군이 도착하는 대로 접촉을 취할 겁니다."
"알겠소. 오늘 일은 철저하게 비밀이어야 하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장군께서도 보안을 지켜 주십시오. 알려지는 순간 저는 끝장입니다."
"물론이오."
브루실로프는 이위종을 내보내고, 문서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고자 했다.
"각하, 그럼 이게 역정보가 아니란 말입니까?"
"오흐라나(내무부 공안질서수호국)와 육군 정보국에 문의를 해 봤네. 그런데 놀랍게도 오흐라나에서 이미 그자를 포섭한 바가 있더군."
"그럼 그 외교관이 오흐라나의 요원이란 말입니까?"
"적어도 오흐라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네. 그 청년은 한국 황제의 대리인인 전권공사의 아들이자, 활동범위를 보건대 평범한 외교관이 아닌 정보원으로 추정되네. 그런데 러시아 여인과 사랑에 빠진 거지. 그로 인해 보수적인 부친과 갈등을 빚게 됐다는군. 오흐라나에서는 포섭할 가치가 있다고 봤네."
과연 설명은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졌다.
"한국은 중립국이지만 일본과 동맹 관계니, 분명히 쓸 만한 정보가 있을 거라고 본 거지. 실제로도 그렇고."
"그런데 왜 하필 장군일까요? 오흐라나 요원이라면, 그쪽에 넘기면 간단한 일을."
"사안이 급박하여, 만주 전선으로 가는 장군에게 직접 넘겨주고 싶었다는군. 장군 중에서 안면이 있어 접촉할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나. 거 참, 소개장을 써 준 아나스타샤에게 고마워해야 할지……."
브루실로프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정보가 정녕 사실이라면, 수세만 지킬 이유가 없습니다. 공세에 나서야 합니다."
"만주에 도착하면, 먼저 전선 상황을 살펴봐야지. 역정보가 아닌지 최종 확인하고, 모든 게 사실로 판명이 되면 공세를 건의해야겠네. 그러니 귀관도 나를 도와주게."
"물론입니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해 봐야지요."
"그래. 군인으로서 위기에 빠진 러시아를 구할 길은, 다가오는 일전에서 대승을 거두는 것이네."
두 장교는 승리를 다짐했다. 군인으로서도, 러시아인으로서도, 반드시 만주 전선에서 승리해야 했다.
승리로, 시작된 혁명을 다시 잠재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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