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합종연횡
혁명적 위기에 빠진 러시아를 향해, 전 세계의 관심이 쏟아졌다.
국경을 접한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는 러시아 당국의 시위 진압을 비난하지 않았으나, 제1야당인 사회민주당(SPD)의 혁명 동조 시위가 발생했다.
유럽에 망명해 있는 러시아 혁명가들은 본국으로 귀국하려 들었고, 제2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은 러시아 당국을 격렬히 비난했다.
"러시아 당국의 야만적인 진압을 규탄한다!"
"차르 전제정은 타도되어야 한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러시아를 비난하는 걸 지켜보던 독일 정부와 군부는 내심 즐거워했다.
"러시아가 일본뿐만 아니라 혁명이라는 내부의 적과 싸우면 더 좋은 일이지."
"아니, 일본보다 오히려 혁명이 더 위협적이오. 러시아가 정신을 못 차린 틈을 타 프랑스와 일전을 벌이면……!"
러시아의 동맹국인 프랑스로서는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시민혁명의 종주국인 프랑스 공화국은 전제정의 학살을 비난하고, 시민의 편을 들어야 옳았다. 더욱이 현재 집권내각은 민주공화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존중하는 좌파 연립정부가 아닌가.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도대체 전쟁 중에 어떻게 이런 어리석은 짓을!"
"동맹국인 러시아를 비난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만약 독일이 작정하고 도발하면 어쩝니까?"
"이제 러시아는 동맹으로서 완전히 신뢰할 수 없소. 어떻게든 영국을 군사동맹으로 끌어들이는 수밖에."
1906년 1월, 때마침 영국 총선이 있었다.
자유당의 역사적인 대승이었다. 자유당은 전체 670석 중 400석의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보수당의 의석은 150석으로 줄어들었다. 심지어 총리인 밸푸어조차도 낙선했다.
나머지 의석도 자유당에게 우호적인 아일랜드 의회당과 노동당이었다. 노동당은 자유당과 협정을 맺어 보수당에 맞서 후보단일화로 선거를 치렀다.
그만큼 영국의 빈부격차와 불평등 문제가 심각하다는 의미였고, 자유당은 고전적 자유주의를 넘어 사회자유주의를 제시했다. 헨리 캠밸-베너먼(Henry Campbell-Bannerman) 내각의 재무장관 로이드조지가 주도하는 ‘자유 복지 개혁(Liberal welfare reforms)’에 착수했다.
대외적 환경은, 자유당은 집권하자마자 숙적 러시아의 혁명적 위기라는 상황에 직면해야 했다.
"대영제국 정부는 현재 러시아의 사태를 엄중히 지켜보고 있다. 러시아 당국의 무분별한 진압을 규탄하며, 평화적으로 사태 해결에 나설 것을 요청하는 바이다."
자유당 정부는 러시아 당국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보수당에 비해 러시아에 유화적인 자유당이지만, 시민 학살 사건을 눈감아 줄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자유당 지지층이 용납하지 않을 터였다.
영일동맹을 정권의 치적으로 여겨 일본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던 보수당과 달리, 자유당은 러일전쟁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적당한 시점에서 종전을 중재하려던 당초 계획과 달리, ‘폭군 러시아’에 맞서는 일본의 전쟁수행을 계속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러시아보다 중요한 건 독일이오. 프랑스와 굳건히 연대하여 독일의 도발을 저지해야 합니다. 극동 문제는 당분간 미국에 맡기도록 하지."
자유당 정부는 독일을 주적으로 여겼다. 동아시아 문제는 미국에 일정 부분 지분을 양보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유럽 문제에 집중해야 했다.
"미합중국 정부는 엄숙히 선언한다. 러시아 인민의 권리는 존중되어야 하며, 미국인은 언제나 자유를 향한 인민의 투쟁을 지지한다."
미국 정부 역시 러시아 비난 대열에 합류했다.
명분은 자유와 인권이었지만, 러일전쟁에 개입하려고 상황만 지켜보고 있던 미국으로선 때마침 적절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영국의 동의를 얻었으니, 이제 슬슬 나설 때가 됐군."
루스벨트 대통령은 만족감을 느꼈다. 영국 자유당 정부는 보수당과 달리 미국과의 공조를 강화하고, 동아시아 문제에 개입해도 좋다는 신호를 보냈다.
모든 정세가 미국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마침내 미국이 움직일 때가 왔다.
루스벨트는 시기를 가늠하며 필리핀에 머물고 있던 전쟁장관 태프트에게 즉각 일본과 한국으로 향하라고 명했다.
"하늘이 일본을 돕는구나! 러시아가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다니!"
"이로써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어."
러시아의 혁명적 위기를 가장 기뻐하는 나라는, 단연코 일본이었다.
여순 공방전에서 상상 이상의 피해를 입은 일본은, 끝없이 들어가는 전비와 늘어나는 인명 손실에 경악했다.
이미 국가 예산의 5년 치를 전비로 쏟아부었고, 이는 모두 빚이었다.
전투로 인한 사상자와 병상자들은 18만에 달했다. 개전 초기 상비군 전체에 육박했다.
"비록 희생이 많다 하나, 승전으로 갚을 수 있소!"
"이래서야 진짜 이길 수 있기는 한 거요?"
"황국이 패전할 리가 없지 않소! 반드시 이길 것이오!"
그럼에도 전쟁을 계속 강행하려는 군부와 달리 문민 관료들은 강화를 모색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은밀히 대미특사 가네코 겐타로에게 미국의 중재를 통한 강화 협상을 추진했다.
러시아도 여순 요새와 태평양 함대를 상실했고, 본국에서 혁명적 위기가 발생했으니 강화에 응하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미국을 통해 들은 러시아의 첫 반응은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만주 전선군과 제2태평양 함대가 존재하는 이상, 강화는 없다. 오직 러시아의 승리만이 강화의 조건이다.」
일본과 러시아의 관점 차가 커도 너무 컸다. 일본은 러시아의 전쟁 의지가 꺾였다고 생각했지만, 차르 정권의 완고함은 여전했다.
그럴 법도 한 것이, 유럽의 러시아군은 계속 만주로 수송되어 병력이 늘어나고 있었다. 제2태평양 함대로 개칭된 발트 함대도 대서양과 인도양을 넘어 동쪽으로 항진 중이었다.
비록 지금까지는 러시아가 계속 후퇴하고 있었지만, 앞으로 충분히 역전 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전제조건은 군의 사기가 계속 유지된다는 것이지만, 아무튼 차르 정권은 그러리라 믿었다.
"그럴 줄 알았소. 강화가 될 리가 있나. 러시아군 주력을 대파하기 전에는 강화란 불가능하오."
"앞으로 병력 격차가 더 심해질 터인데, 대체 어찌할 거요?"
"속전속결이지. 다음 봉천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섬멸하여 강화의 밑거름으로 삼겠소."
대본영을 이끄는 야마가타의 호언장담에 이토는 우려를 표명했다.
"그렇다면 최소한 한국은 끌어 들어야 하지 않겠소? 그래도 한국군 10만이 합류한다면 큰 도움이 될 터인데."
"비열한 조선놈들! 이놈들은 일본의 피와 돈으로 이익을 불릴 생각만 하지, 명색이 동맹이면서 구경만 하고 있다니!"
한국이 군수품 보급에서 인력 동원까지 꽤나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지만, 야마가타는 욕설을 퍼부었다.
"애초에 후작이 한국에 너무 유리한 조건으로 협약을 맺은 게 아니오? 지원만이 아니라 유사시 참전을 명문화했어야지!"
"애초에 외교적 협상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전쟁을 일으킨 건 군부가 아니오! 저쪽이 아쉬울 게 없는 상황에서 어찌 협상이 되겠소?"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야마가타에게 이토는 분개했다.
"이제 저쪽의 몸값은 더 올라갔지. 이 시점에서 참전을 요청하면 더 많은 대가를 내놓아야 할 터인데. 최소한 남만주 세력권은 한국에……."
"미쳤소? 지금껏 피는 우리가 다 흘렸는데, 구경만 하고 있던 한국에 남만주를 퍼 주다니? 자치령 이외에는 결코 넘겨줄 수 없소."
"그 조건으로 한국이 퍽이나 참전하겠소! 지금 중요한 건 일단 이기는 거 아니오?"
"한국 따위 없어도, 천황 폐하의 충용무쌍한 황군은 충분히 이길 수 있소! 러시아는 결국 반란으로 자멸하고 말 것이오. 후작은 지켜나 보시오."
야마가타의 정세인식에 이토는 어이가 없었다.
‘저러다 지면 대체 어쩌려고 저런단 말이냐?’
한국에 채무를 진 일본이 스스로 한국을 설득할 길은 점차 좁아졌고, 동맹인 영국조차 입으로만 지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믿을 건 미국뿐이었다.
‘미국 전쟁장관이 곧 동아를 방문한다고 하니, 차관을 추가로 더 얻어 내고. 미국에 요청해 한국의 참전을 종용해야겠다.’
이토는 태프트의 방일에 승부수를 걸어 볼 생각이었다.
* * *
러시아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이선은 어이가 없었다. 역사가 분명히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피의 일요일이 발생하고 말았단 말인가.
"이런 멍청한 놈! 어떻게 일을 이렇게까지 만들어! 내가 그렇게까지 알아듣게 조언을 했는데!"
이선은 니콜라이를 향해 분노를 퍼부었다.
이선이 오랫동안 니콜라이에게 여러 조언을 해 주었고, 근래 들어 자신을 멀리하는 것을 같아 키릴을 통해서도 전달했지만, 결국 아집만 부리다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이었다.
진작부터 니콜라이가 엄혹한 현실이 아니라 동화 속 세상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어떻게 전쟁 중에 국민에게 총질을 해 대지? 그 정도의 상황 판단력, 아니 최소한의 이해력도 없나? 결국 인간은 바뀌지 않는단 말인가? 제 스스로 무덤을 파고 마는군.’
이선은 진심으로 니콜라이가 실망스러웠다. 군주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이제 혁명은 피할 길이 없었다. 군대가 이반하지 않는 이상 당장 제정을 끌어내리진 못하겠지만, 최소한 일본과의 전쟁은 끝낼 수 있었다.
피의 일요일만 아니었더라면, 러일전쟁은 러시아가 지려야 질 수가 없는 전쟁이었다. 그런데 스스로 승리를 차 버리고 말다니.
‘두고두고 후환이 될 일본 육군의 척추를 분쇄할 절호의 기회인데! 이미 여순에서 충분히 손실을 봤어. 만주에서 러시아가 공세를 벌이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
이왕 일어난 전쟁, 이선은 이이제이와 양패구상을 원했다. 러시아의 만주 영향력이 소멸하고, 일본의 대륙 침략의 근원이 될 육군을 분쇄할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려면 러시아군과 일본군이 모두 손실이 늘어야 했다. 지금까지는 계획대로 되고 있었다.
결국 차질이 발생하고 말았으니, 대안을 고려해야 했다.
‘이대로 가다간 혁명적 위기가 러시아 전역을 뒤엎을 거고, 러시아는 여력이 있어도 전쟁을 포기하게 될 거다. 결국 일본이 강제로 기적적인 승리를 당하겠군. 그럼 실제 역사처럼 일본이 정신 못 차리는 건 매한가지 아닌가. 군부의 입김은 더욱 커질 테고. 이래서야 내 계산하고는 달라지는데.’
이선은 어찌해야 할지 고심했다. 일단 정보를 계속 확인하면서 익문사 요원들에게 지시를 이어 나갔다.
러시아가 스스로 승리를 걷어차려고 하고 있으니, 은밀히 정보라도 제공해 균형을 맞추려고 했다.
‘니콜라이는 틀렸어. 정보를 제공해 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고. 그나마 믿을 만한 이는 비테인가? 하지만 비테의 영향력도 전혀 없는 상황이니.’
때마침 이위종의 보고서에 브루실로프라는 이름이 나왔다. 브루실로프라면 이선도 아는 이름이었다.
‘장차 제정 러시아군을 대표하는 명장이 아닌가. 그 수많은 똥별 중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이선의 지시대로, 이위종은 얼마 전부터 익문사와 오흐라나의 이중간첩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본래는 오흐라나에 역정보를 제공하기 위함이었지만, 이제 진짜 도움이 될 정보를 공여했다.
이위종은 브루실로프에게 극비 정보를 전달했다. 이중간첩 신분으로서의 접선이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이선의 지시는 드러나지 않았다.
만에 하나 문제가 발생해도, 한국 정부 차원의 책임이 아니라 ‘러시아 여인과 사랑에 빠져 본분을 망각한’ 외교관의 일탈로 치부될 것이다.
‘그래도 이위종은 충성스러우니 무슨 일이 있어도 보호해야지. 하지만 만주에서 활동하는 북진회란 놈들은 내 신경을 꽤나 거슬리는군. 팽창주의를 내걸고 군대에 사조직을 결성해? 지금은 이용가치가 있으니 내버려 두지만, 전쟁 끝나면 어디 두고 보자.’
이미 육군 정보국의 감찰을 통해, 북방 사단 내의 북진회에 대하여 이선에게 보고가 들어간 상황이었다.
7사단장 권동진은 이선의 지시대로 움직였지만, 휘하 장교들은 사실상 북진회의 영향권에 있었다.
이선은 일단 북진회를 내버려 두었다. 정규군에 속하는 7사단이 일본군에게 협력하고 있다는 면피용으로 내세워, 참전 요구를 불식하기 위함이었다.
차후에 문제가 발생해도, 한국군의 책임이 아니라 ‘아시아주의와 팽창주의에 심취해 본분을 망각한’ 군인들의 집단 일탈로 치부될 것이다. 그 귀결은 군사재판이었다.
정보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들어왔다.
여순 함락 이후 일본은 거듭 참전을 요청하고 있었고, 영국과 미국은 러시아 규탄의 대열에 섰다.
‘영국 정부가 자유당으로 교체된 건 바람직한 일이야. 자유당은 보수당처럼 러시아 공포증에 시달리지 않을 터이니. 당장 독일 문제가 더 급하기도 하고. 결국 문제는 미국인가…….’
총리 김옥균과 개화당 내각은 참전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들은 더 이상 아시아주의를 내세우진 않았지만, 대한제국의 고토이자 사활인 만주로 진출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공통했다.
"폐하, 러시아가 어리석게도 스스로 자멸의 길을 걷고 있사옵니다. 더 늦기 전에 군대를 동원해 일본과 연합하여 러시아를 만주에서 몰아내고, 새로이 만주의 패권을 도모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글쎄. 참전이 적절한 해결책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군. 비록 일본이 우리의 동맹이긴 하지만, 러시아를 대신하여 만주에 거점을 딛고 나면 앞으로 어찌 나올지 모르겠소. 저들이 러시아보다 더 위험한 경쟁자가 될 수 있소."
이선의 부정적인 태도에 서광범과 김옥균이 일본의 참전 조건을 전달했다.
"폐하, 특파대사 금릉위(박영효)를 통해 들어온 이토 후작의 전언에 따르면……."
"한국이 참전할 시, 관동주를 제외한 남만주 전역의 세력권을 대한에 넘기겠다고 합니다."
관동주를 제외한 남만주 전역. 자치령을 넘어서 남만주 전역이었다.
꽤나 솔깃한 제안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그걸 믿지 못하겠다는 거요. 지금까지 일본이 흘린 피가 허다한데, 군부가 한국에 그렇게까지 양보하려고 들겠소? 최고 원로라는 이토 후작조차 군부를 통제하진 못하고 있소. 짐은 확신하지 못하는 일에 국운을 걸 생각이 없소."
이선은 일본을 신뢰하지 않았고, 여전히 참전에는 선을 그었다.
"곧 미국 대통령의 복심이자, 군사정책을 총괄하는 전쟁장관이 방한할 것이오. 그의 제안은 곧 미국의 미래구상일 터. 일단 들어 보고 판단합시다."
"삼가 명을 받드옵니다, 폐하."
이선은 태프트의 방한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미국이 제시하는 바를 들어야 했다.
개화당 내각도 이에 동의했다. 이제 미국이 영국을 대신해 동아시아의 새로운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는 점을, 국제정세에 밝은 이들은 모두 인식하고 있었다.
"총리."
"예, 폐하."
국무회의가 끝난 후, 이선은 총리 김옥균을 따로 불렀다.
"경에게 특별히 부탁하고 싶은 바가 있소."
"하명하시옵소서."
이선은 김옥균에게 은밀히 특명을 내렸다.
가만히 듣고 있던 김옥균의 표정이 차츰 변했다.
이선의 특명은, 향후 동아시아의 판도를 바꿀 새로운 합종연횡(合從連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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