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김옥균-태프트 밀약
"황제 폐하 알현은 모레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장관을 확실히 모시겠습니다."
"총리께서는 국정으로 바쁘지 않으십니까?"
"대국의 대인을 모시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요. 장관께서는 풍채부터가 실로 대인이십니다, 하하."
"제가 좀 크긴 하지요, 하하하."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태프트의 체구는 거대했다. 182cm의 거구에 120kg라는 비대한 체형인 태프트는, 작고 마른 체구인 김옥균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황제를 알현할 때까지 이틀간, 정치적 문제에 대한 언급 없이 환대가 계속 이어졌다.
황성의 명소, 한미관계와 관련된 장소들을 방문하고 환담을 나누었다. 시내 곳곳에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엇갈려서 걸리고, 동원된 한국인들이 태프트가 방문하는 곳마다 환영의 만세를 외쳤다.
주한 미국 공사 알렌도 태프트에게 황제 이선에 대해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 황제는 동양 최고의 영걸입니다. 이 나라와 처음 수교했을 때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본국에서 관심이 없었을 만도 하지요. 하지만 겨우 20여 년 사이에 이렇게 변했습니다. 황제의 지도력 덕이지요."
"뭐, 그렇긴 하지만 일본도 한세대 만에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수 있는 강국을 만들었지."
"비록 현재의 한국이 일본보다 약할지는 몰라도, 잠재력은 더 많습니다. 그리고 누가 더 미국에 우호적이냐가 중요하지요. 황제는 영어도 유창하고, 미국에 대한 이해도 엄청나게 높습니다. 아시아 어디에도 이렇게 미국에 우호적인 지도자는 없을 겁니다."
이선에게 매수된 알렌은 찬사를 거듭했다. 주일 미국공사 그리스컴(Lloyd C. Griscom)이 일본의 야망에 우려를 표한 것과 대조적인 태도였다.
태프트는 자연히 이선에 대한 기대를 갖고 회견에 응하게 되었다.
2월 4일, 경운궁 정관헌.
대한제국 황제 이선과 미합중국 전쟁장관 태프트의 회견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장관. 미국의 특사를 이렇게 만나게 되어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황제 폐하를 알현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선은 흔쾌히 태프트와 악수하고 직접 자리를 안내했다. 비대한 태프트를 위해 일부러 넓고 편안한 의자를 준비했다. 사소한 배려 하나하나에 만족감을 느꼈다.
"오늘은 입춘, 봄이 오는 날이라고 합니다. 긴 겨울이 끝나고, 따뜻한 봄이 오고 있습니다. 먼 나라에서 귀한 손님이 오시니 더욱 특별한 날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선은 입춘에 대한 설명으로 회견을 시작했다. 이어서 의례적인 찬사가 이어졌다.
"대한제국과 미합중국이 수교한 지 어언 25년, 사반세기가 지났습니다. 지난 사반세기는 양국 간의 우호와 특별한 관계가 싹트는 시기였습니다. 향후 25년은 더욱 커다란 진전이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100년이 지나도, 대한과 미국은 형제의 국가로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폐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미국과 한국 두 나라의 우호친선이 영원하길 바랍니다."
"대한제국은 모든 외국과 호의적인 관계를 맺길 바랍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수교한 서양국가인 미국에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습니다. 짐의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미국이 대형처럼 느껴진달까요. 장관의 듬직한 풍모를 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하하."
이선은 일부러 ‘빅 브라더(Big Brother)’란 표현을 썼다. 이선만 아는 중의적인 표현이었지만, 문자 그대로 해석한 태프트로서는 유쾌하게 받아들였다.
"미국이 크고, 저도 좀 크지요. 하하하."
"한국에서는 장관과 같은 풍채를 덕 있는 대인의 풍모로 여깁니다. 총리가 그렇게 말하지 않던가요?"
"들었습니다. 참 좋은 문화더군요."
"장차 가장 큰 사람, 대통령까지 오르실 거라고 확신합니다."
역사를 아는 이선은 확신을 담아 말했다.
"아니, 제가 그럴 능력이나 되겠습니까."
"확신합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위대한 시대를 계승하실 분은 오직 장관뿐이라고. 두 분은 워싱턴과 링컨 이래 가장 큰 업적을 세우실 겁니다."
이선은 루스벨트와 태프트를 한껏 치켜세워 주었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장차 루스벨트와 태프트의 분열로 끝날 걸 뻔히 알면서도.
"과찬이십니다. 폐하야말로 동양의 나폴레옹이자 표트르 대제이지 않으시겠습니까?"
"이야말로 과찬이군요. 어찌 그런 위인들과 비교하겠습니까? 짐은 아직 그리 내세울 만한 업적이 없습니다."
"동양 최고의 영걸께서 참으로 겸손하십니다."
제3자가 보면 헛웃음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두 사람은 서로를 치켜세워 주고 찬사를 보냈다.
이는 바로 루스벨트가 한 명언 - ‘말은 부드럽게 하되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다녀라. 실패하지 않으리라.’에 부합하는 말들이었다.
실컷 부드러운 말을 했으니, 이번에는 커다란 몽둥이를 보여 줄 차례였다.
"미 육군과 국방정책을 책임지는 장관께 근위사단의 열병식을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준비가 되어 있으니 가시지요."
원수부 앞 연병장에서 근위사단의 즉석 열병식이 개최되었다.
원수부 검사국 총장 이학균 부장과 근위사단장 박승환 참장이 직접 열병식을 지휘했다.
"이학균 장군은 미국 유학파로, 건군 초기에 미국 군사고문단의 보좌관 역할을 맡기도 했었지요."
"오, 그렇습니까."
현재의 한국군은 프로이센의 색채가 짙었지만, 이선은 의도적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내세웠다.
과연 대한제국 최고의 정예부대답게, 근위사단 보병·기병·포병·공병대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보무당당하게 행진을 했다.
대원수 제복 차림의 이선도 선 채로 거수경례를 하며 근위사단의 열병을 받았다.
"이런 군대라면 일본군, 아니 서양 열강의 군대 못지않아 보입니다."
"과찬이십니다. 아직 부족함이 많지요."
"지금 당장 전쟁을 하기에도 부족함이 없지 않겠습니까?"
태프트의 말은 은근히 참전을 암시했다.
"대한의 국토를 방위할 준비는 언제든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주변국과 달리 침략전쟁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대한은 오직 조국의 안보를 지킵니다. 이른바 한국식 먼로주의랄까요."
이선은 먼로주의(Monroe Doctrine)에 빗대 단호한 태도로 답했다. 사실 이중적인 표현이었다. 먼저 공격은 하지 않겠지만, 아메리카 전체를 세력권으로 여기는 미국식 먼로주의처럼 한반도뿐만 아니라 세력권으로 간주하는 남만주 일대의 주권 침해는 용인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저녁에는 석조전에서 만찬이 있었다.
중요한 외빈을 대접할 때는 조선의 전통을 깨고, 이선은 황후를 대동하고 만찬을 했다. 서양의 관례를 따른 것이었다.
다만 근래는 황후가 셋째를 잉태하여 외부인과의 접촉을 피하고 있었으므로, 이선은 단독으로 태프트와 만찬을 했다.
"황후께서 장관을 뵙지 못해 안타깝다는 말을 전해 달라 하였습니다."
"크나큰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황후께 존경의 인사를 전해 주십시오."
태프트는 한국 황실의 개방적인 태도에 놀랐다. 청국 황실은 말할 것도 없고, 개화되었다는 일본 황실도 보수적이었다.
천황을 알현할 때도, 메이지는 엄숙한 태도로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이선은 유창한 영어와 세련된 서양식 매너로 응대했고, 그 아우인 이영도 마찬가지였다.
만찬에는 조선 전통의 궁중 정찬이 준비되었다. 황제인 이선조차 특별한 행사가 없고서는 먹지 않는 음식들이었다.
"식사는 마음에 드십니까, 장관?"
"최고입니다. 아주 만족스러운 식사였습니다. 저는 동양의 음식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만, 이렇게 훌륭한지 미처 몰랐습니다."
‘그야 미국인 입맛에 맞는 음식들만 골랐으니까.’ 비대한 체구답게, 태프트는 과연 먹는 걸 사랑하는 미식가였다. 최고의 궁중 숙수들이 서양인 입맛에 맞게 궁중 정찬을 조리했다. 이선은 미식가를 위해 ‘미식 외교’를 선보이는 중이었다. 나폴레옹 시대 프랑스 외무장관 탈레랑의 전문이었다고 하는 미식외교였다.
"서양식 궁전과 동양식 의례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대한제국은 동서양의 조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는 국가의 정책이기도 합니다. 짐은 동양과 서양이 서로를 배제하지 않고, 이해할 수 있을 때 진정으로 우의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이 궁전과 음식들에 담긴 건, 조화를 상징합니다. 국가 간의 관계도 조화로워야 합니다. 짐은 한국, 일본, 청국, 러시아, 영국, 미국이 모두 조화롭게 동아시아에서 세력균형을 이루길 바랍니다. 특히 앞으로는 태평양의 시대가 오리라 확신하기에, 한미일 관계가 중요할 것입니다. 짐은 한미일 삼국이 동양 문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길 바랍니다."
태프트는 이선에게 매우 좋은 인상을 받았다. 어떻게든 한국을 깎아내리고 배제하려는 일본과 달리, 한국은 일본을 포함한 세력균형을 추구했다.
국력 차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미국 주도의 질서를 구축하려면 한국의 태도가 더 바람직하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짐은 미국의 자본과 기술력이 세계를 선도하리라 확신합니다. 앞으로도 대한제국과 만주에 많은 미국인 자본가와 기술자들이 기회를 얻길 희망합니다. 전후의 동아시아는 기회의 장이 열릴 것이며, 만주는 미국의 뉴 프런티어가 될 겁니다. 짐은 아메리칸 드림, 프런티어 정신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참으로 기대가 됩니다."
"20세기는 전제의 시대가 끝나고, 자유의 시대가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미국이 세계의 자유를 선도하는 한, 한국은 미국과 함께하겠습니다."
"예, 폐하. 대통령께 폐하의 진정 어린 말씀을 꼭 전해 드리겠습니다."
이선은 태프트와 정중하게 악수를 나누고 회견을 마쳤다.
직접적인 정세 이야기는 없었지만, 간접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 회견이었다.
이제 구체적인 회담은 총리 김옥균과 태프트 사이에서 이뤄졌다.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회담이 시작되었다. 통역 한 사람만 배석한, 김옥균과 태프트의 단독회담이었다.
"현재 전황을 보건대, 일본이 우세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다만 러시아의 저력은 충분합니다. 만주군과 발트 함대가 있는 이상, 러시아는 결코 강화에 응하지 않을 겁니다."
"일본은 격파할 수 있다고 확신하더군요."
"물론 한국은 동맹국 일본이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일본이 지나치게 크게 이기는 것도 문제입니다. 일본이 완승한다면, 일본은 러시아를 대신해 만주를 독점하려고 할 겁니다. 최소한 남만주는 독점지배하려고 들 겁니다."
김옥균의 지적에 태프트도 공감했다.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 일본 여론의 지나치게 공격적인 태도에 우려하는 주일 미국공사의 의견을 들었다. 실제로 가쓰라가 내민 강화조약 조건은 가혹하기 짝이 없었으며, 일본의 의도에 의구심이 들었다. 그나마 이토는 합리적인 제안을 들고 왔지만, 원로가 군부를 통제하고 있는지도 의심이었다.
"반대로 러시아가 공세를 펼쳐 일본을 완파하는 것도 문제지요. 다시 만주를 독점하려 들 거니까."
"물론 그런 일도 피해야 합니다. 최소한 한미 양국은 만주의 독점을 막기 위해, 어느 한쪽이 지나치게 승리하는 상황은 피해야 한다는 공통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합니다만."
"동의합니다."
"육지와 해상에서 한 차례 더 큰 싸움이 벌어질 건 분명합니다. 일본 육군과 러시아 육군의 봉천 전투, 그리고 일본 연합 함대와 러시아 발트 함대의 해전이 되겠지요. 이 이후에는 양국 모두 한계가 오리라 생각합니다. 그때 미국이 적극적인 중재에 나서 주십시오."
김옥균은 지도를 가리키며 향후 전개를 예측했다.
"일본은 미국이 설득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강화 중재를 부탁하고 있으니. 하지만 러시아가 응하겠습니까?"
"러시아의 혁명적 위기가 심화되면 강화를 배제할 가능성은 적어 보입니다만, 한국이 러시아가 강화에 응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예전만 못합니다만, 우리 황제 폐하와 러시아 차르께서는 오랜 벗입니다. 국내가 위기에 빠질수록 벗의 조언을 귀담아들으시겠지요."
"흠, 그렇게 해 주실 수 있으시다면야……."
태프트는 문득 가쓰라의 말이 떠올랐다. ‘한국은 여전히 러시아와 내통하고 있다’라는.
"혹여 오해가 없으셨으면 한데, 군주 간의 관계는 국가 간의 관계와 다릅니다. 우리 황제 폐하께서 러시아 차르와 친밀하다는 이유로, 일각에서 근거 없는 비방이 심합니다. 대한제국은 동맹국 일본의 전쟁승리를 위해 협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예전부터 ‘한국 황제는 러시아 스파이’라는 음해를 멈추지 않고 있지요."
김옥균은 마치 태프트의 속내를 들여다본 것처럼 선제적으로 치고 나왔다.
"결코 아닙니다. 장관께서도 직접 보지 않으셨습니까? 황제 폐하께서는 러시아어는 못 하지만 영어는 유창하시고, 형제분들을 모두 미국과 영국으로 유학 보내십니다. 동맹도 영국과 맺었으며, 자본과 기술은 미국을 최고로 선호하지요. 러시아 차르와의 관계는 개인적인 관계일 뿐입니다."
"아, 물론입니다. 황제 폐하와 한국 정부의 외교 정책은 신중하고 현명합니다. 미국이 오해할 리가 없지요."
태프트는 흔쾌히 오해를 불식시켰다. 김옥균은 바로 한발 더 나갔다.
"한국은 미국을 최고의 파트너로 여깁니다. 미국에 수억 달러의 차관을 빌리고도, 전후 만주 이익을 독점하려는 일본과 다릅니다. 본인이 제안 드리고 싶은 바는, 전후의 새로운 질서입니다. 앞으로는 미국이 동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주리라 기대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입니까?"
"일단 문제가 되는 만주에서, 러시아는 철수해야 합니다. 러시아 영토가 접한 북만주는 우월권을 인정하더라도, 봉천성과 길림성이 속한 남만주는 안 됩니다. 대략 북위 44도, 장춘-길림 북쪽의 선에서 세력을 나누어야 합니다."
김옥균은 만주 지도의 북위 44도선에 줄을 그었다. 태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러시아가 조차한 관동주는?"
"당연히 관동주에서 철수하고 청국에 환부해야지요. 뿐만 아니라, 하얼빈 이남의 남만주 지선도 포기해야 합니다."
여기까지는 일본의 구상과 거의 비슷했다.
"남만주 지선의 운영권은 국제 신디케이트, 특히 미국 자본에 의해 운영되길 희망합니다. 한국, 미국, 영국, 일본 4개국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미국으로선 가쓰라의 제안보다 이쪽이 더 흥미로웠다. 일본의 강화조약 안은 일본이 운영권 일체를 획득하고, 미국의 투자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흘린 피가 있어서 쉽게 포기하지 않겠지만, 영국은 배제하는 게 좋겠습니다. 러시아가 원치 않을 터이니."
영국은 따돌리고 싶은 게 미국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김옥균은 바로 받아들였다.
"일리 있는 말씀이십니다. 그럼 한미일 3국이 공동 운영하는 방안을 생각해 보시지요."
"좋습니다."
김옥균과 태프트는 펜을 들고 계속 줄을 그었다.
"북위 44도 이남의 남만주는, 대한제국에 있어서는 조상의 고토이자 국가의 사활이 걸린 핵심 이익선입니다. 결코 주변국, 특히 러시아와 일본에 넘겨줄 수는 없습니다. 이는 평화를 해치는 행위입니다."
"으음."
"다만 미국이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남만주를 한국의 권역으로 인정해 준다면, 미국 자본에는 가장 우선적인 기회가 주어질 겁니다. 만주 시장을 개방하고, 지하자원을 미국 자본에 의해 개발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겠습니다."
이미 평안도와 한국령 요동도 일대에서 미국 자본이 들어와 한미합작회사 형태로 철도를 부설하고, 광산을 개발하여 상당한 이익을 누리고 있었다. 이를 남만주 전역으로 확대하자는 의미였다.
미국으로서는 굉장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북위 44도 이남의 남만주를 대한제국의 세력권으로 인정한다. 대신 미국 자본에는 우선권이 주어진다. 이렇게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남만주는 한국이 종주권(suzerainty)을 갖지만, 미국의 세력권(sphere)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세력권(sphere)’이란 단어는 미국 입장에서 훨씬 만족스러웠다. 태프트는 자신의 펜을 들어 이미 김옥균이 그은 북위 44도선에 줄을 이어서 그었다.
"동의합니다. 다만 이는 협정(agreement)이 아니라, 각서(memorandum)형식으로 해야 합니다."
정식 협정은 미국 상원의 비준을 받아야 했다. 이는 어디까지나 밀약, 양국 행정부의 각서로 간주되어야 했다.
"물론입니다. 한미 각서, 아니 김옥균-태프트 각서라고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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