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420화 (419/812)

101화 봉천 회전(奉天會戰)

광무 10년, 1906년 2월 7일. 김옥균-태프트 각서(Memorandum)가 교환되었다.

양국 정부의 공식적인 조약이나 협정이 아닌, 대한제국 총리 김옥균과 미합중국 전쟁장관 태프트 간의 ‘개인적인’ 각서였다. 형식상 국무장관도 아닌 전쟁장관 태프트에게 조약을 맺을 권한은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각국에서 핵심 위치에 놓인 정치가라는 점, 특히 국가원수의 오른팔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결코 개인적인 각서라고 할 수 없었다.

"예상대로라면 이제 두 차례의 결정적인 승부가 남아 있는데, 육군의 지상전과 함대의 해전입니다."

"미합중국은 어느 한쪽이 완승하는 걸 바라지 않지만, 특히 러시아의 승리는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만약 러시아가 다가오는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한국은 어찌하겠습니까?"

말인즉슨, 일본이 패배할 시 미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한국도 나서길 바란다는 의미였다.

"물론 대한제국은 동맹인 일본이 전투에서 승리하길 바랍니다. 그러나 만약 러시아가 승리하여 본격적으로 공세를 펼치게 된다면, 그로 인해 러시아군이 다시 대한의 영토를 침범하게 된다면……."

김옥균은 여기에 정치적 생명을 걸고 답했다.

"대한제국은 군사력을 총동원해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할 것입니다."

"아주 좋습니다. 외교와 군사, 어느 한쪽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귀국의 의지를 확인했습니다."

러시아가 확전에 나서지 않도록 중재하되, 만약 러시아가 중재를 무시하고 한국령 남만주를 침범한다면 군대를 총동원하여 막겠다는 의미였다. 태프트는 외교에만 의존하지 않겠다는 한국의 의지에 만족감을 표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미국도 도와주리라 믿습니다."

"물론입니다. 대통령께 보고 드리겠습니다."

「당신이 김 총리와 나눈 대화는, 모든 부분에 있어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요. 내가 직접 김옥균에게도 말할 수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한국인들은 대화가 참 잘 통하는 것 같소.」

태프트의 보고를 받은 대통령 루스벨트는 즉각 추인했다. 대통령과 장관을 넘어 두 사람은 개인적인 친구이기도 했고, 파나마 운하 문제와 필리핀 문제 등에서 태프트는 실질적인 대통령의 대리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김옥균-태프트 각서는 양국 정부의 비공식 협정이 되었다.

태프트로서는 아주 만족스러웠던 방한 일정을 마치고 필리핀으로 떠났다. 환대는 떠나는 순간까지 이어졌고, 태프트의 체구에 걸맞은 두툼한 비자금 봉투가 전해진 건 덤이었다.

"한국인의 노동력과 귀국의 기술로 개발된 운산 금광에서 얻은 이익금의 일부입니다. 한미 합작의 상징이지요. 이는 어디까지나 송별 선물에 불과하니 부담스럽게 여기지 마십시오."

"아하, 그래도 뭘 이런 걸 다……."

동양 최대의 생산량을 자랑하는 운산금광은 대한제국 황실이 최대주주인 대한광공업주식회사가 지분의 51%를 보유했고, 합작 자본으로 참여한 미국계 자본 동양광업주식회사도 49%의 지분을 갖고 있었다.

운산금광은 1905년 한 해의 생산량만 110만 달러에 달했다. 운산금광 개발을 주도한 사업가 헌트(L.S. Hunt)와 주한 공사 알렌 등 운산금광에 투자한 미국인들이 대박이 난 건 당연했다.

물론 최대 이윤은 소유주인 대한제국의 몫이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한국과 만주에서 귀국은 얼마든지 더 많은 이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도 같이 갑시다."

"폐하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어디까지나 황제 이선 개인의 ‘호의에 의한 송별 선물’이었지만, 적잖은 정치자금을 얻게 된 태프트가 만족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과연 알렌의 말처럼 ‘동양의 영걸이자 말이 잘 통하는 위인’이었다. 앞으로도 미국의 파트너가 될 자격이 충분했다.

"실로 총리의 공이 컸소. 이 각서는 앞으로 대한의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오."

"황공하옵니다, 폐하. 신은 황명을 받든 것뿐입니다."

이선의 치하에 김옥균이 고개를 숙였다.

"하온데 폐하. 남만주가 장차 한국의 종주권인 동시에 미국의 세력권이라는 말은, 주변국의 오해를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밀약이지. 공개하지 않기에 밀약 아니겠소?"

"물론 그러하옵니다만, 만주의 종주권은 청국에, 그 세력권은 러시아에 있지 않사옵니까. 대한이 종주권을 행사하려면……."

‘종주권(宗主權, suzerainty)’이란 의미는 근대적 만국공법의 관점에서 볼 때, 타국 영토에 지배권을 행사하지 않더라도 내정·외교상 특수한 권익을 갖는다는 걸 의미한다. 예컨대 1894년 이전까지 청나라는 조선에 대해 종주권을 주장했고, 1906년 현재도 몽골과 티베트 등에 종주권을 주장했다.

"물론 지금 당장 종주권을 행사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이 전쟁을 결산하는 강화조약이 체결되고, 머지않아 청국의 중국 지배가 붕괴하면……."

"폐하, 청국의 중국 지배가 붕괴한다니요?"

"짐의 생각에, 청국의 붕괴는 이 전쟁의 논리적 결과일 것이오. 러시아는 이미 혁명이 일어났고, 일본도 정치적 위기를 겪게 될 것이오. 그 여파가 청국에 미치지 않을 리가 없소. 짧으면 5년, 길면 10년 이내에 청조의 중국 지배권이 무너지리라 생각하오."

이선이 처음으로 드러내는 구상에 김옥균이 놀라움을 느꼈다.

의화단 전쟁 이후 청조의 중국 지배력이 크게 쇠퇴한 건 사실이지만, 광서신정을 내걸고 근대화 개혁에 나서고 있었다. 한국에 호의를 느끼는 광서제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중국에 침투하고 있는 게 아니었단 말인가?

"고균이 무슨 생각을 할지 짐작하오. 짐은 광서제 개인에게는 호감을 갖고 있지만, 청국 자체는 아니오. 이미 끝난 청국의 천명을 되살릴 방법은 없소. 짐은 장차 만주 황실을 보호하겠지만, 대한의 이익을 위해서요. 장차 우리는 남만주에 확고한 종주권을 행사해야 할 것이며, 이번 밀약은 열강의 추인을 받는 첫걸음이오."

이선은 신해혁명(1911)이 언제가 되었건, 청조를 타도할 중국의 혁명은 필연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청조의 멸망을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청조는 만주족의 고향으로, 옛 수도인 성경 봉천부로 되돌아와야 했다. 만주로 돌아온 청조, ‘만주국’을 ‘보호’할 나라는 물론 대한제국이었다.

이선에게 있어 김옥균-태프트 밀약은 다가올 미래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김옥균은 비로소 이선의 복안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과연……. 신은 폐하의 깊은 성심을 미쳐 다 헤아리지 못하였사옵니다."

"하하, 그래도 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고균뿐이지. 자, 그럼 봉천 전투를 지켜봅시다. 만주를 향한 러시아와 일본 양국의 열망이 어떻게 되는지."

러시아와 일본은 봉천 회전에 국운을 걸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봉천을 차지하진 못할 것이다.

* * *

일본은 봉천 회전에 국력을 총동원, 국운을 건 도박을 준비했다. 1군에서 4군까지 만주의 모든 야전군이 집결하고, 새로 편성한 5군까지 합류했다.

지금까지 ‘연전연승’했다고는 하나, 이미 사상자는 개전 당시 상비군 전체에 근접하는 18만에 달했다. 사상자는 신병과 후비군을 소집하여 채워 넣는 것으로 메꿨는데, 이제는 그조차도 한계에 달했다. 예비군 연한이 끝난 노병들조차 재소집되었고, 1907년도 징병인원까지 앞당겨서 징집했다.

광범위한 징병으로 일본군 총원은 65만에 달했지만, 이 중에서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전력은 봉천 전선에 배치된 25만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금과 물자의 부족은 더 심각했다. 전비는 20억 엔에 근접했고, 8년 치 예산에 달했다. 이미 1912년도까지의 예산을 앞당겨서 집행한 상황이었다. 그 대부분은 전쟁 공채와 차관이었다. 모두 갚아야 할 빚이었다.

지난 1년간 포탄과 탄환을 엄청나게 소모하는 바람에 일본의 생산력은 한계에 도달했고, 일본 본국에서는 냄비와 솥까지 공출하여 포탄과 탄환을 만드는 상황이었다.

만약 한국이 근거리에서 군수물자를 대 주지 않았더라면, 일본은 포탄과 탄환 부족으로 진작 휴전해야 할 상황이었다.

즉, 일본은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조속한 시일 내로 러시아 극동군을 섬멸하고 강화를 강요하지 않으면, 일본은 파산이었다.

"봉천 회전은 이 전쟁의 세키가하라 전투이자, 동양의 스당이다. 이 회전에서 승리한 쪽이 전후의 질서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일본 만주군 사령관 오야마 이와오 원수는, 봉천 회전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패권을 얻어 에도 막부를 개창하게 된 세키가하라 전투에 빗댔다.

실질적인 목표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스당 전투의 재현으로, 양익기동으로 러시아군을 포위섬멸한다는 계획이었다.

"제4군이 중앙을 맡고, 제2군과 제5군이 좌익과 우익의 공세를 돕는다. 제3군은 좌익에서 우회기동하여 철령 방향으로 진격해 러시아군의 후위를 끊고, 제1군은 우익에서 공세를 펼쳐 무순 방향으로 진격해 봉천으로 접근한다. 포위망이 완성되면, 삼면에서 총공세를 펼쳐 적을 기필코 섬멸한다."

일본군의 계획은 그동안의 전투에서 손실이 거의 없었던 4군과 예비대가 중앙에서 버티고 있는 사이, 3군과 2군이 좌익에서 우회하여 퇴로를 끊고, 1군과 5군이 우익에서 공세를 펼쳐, 최종적으로 러시아군의 양쪽 날개를 꺾어 버려 포위섬멸을 완성한다는 장대한 계획이었다.

이를 일본군은 상비군 13개 사단, 후비군 7개 사단 총 25만 명을 전선에 배치했다. 이는 사실상 일본 야전군의 전력이었다.

"비록 러시아군은 아군보다 숫자는 많으나, 지휘관은 극히 소극적이고 병사들의 사기는 떨어졌다. 아군이 필승의 각오로 공격한다면, 적은 반드시 무너질 것이다!"

"예!"

일본군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굉장한 낙관론에 근거해 전투를 준비했다. 이미 여순 공방전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은 3군에게 장거리 우회기동을 맡겨 적의 배후를 끊는다는 엄청난 임무를 부여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동서로 약 150km나 되는 전선에서, 2군과 3군이 공세를 맡을 봉천 서부는 평야라 그나마 기동이 용이했지만, 1군과 5군이 공세를 맡을 봉천 동부는 구릉지가 이어지는 산악지대라 공세가 극히 어려웠다. 첫 지상전 이래 거듭된 전투로 지친 1군과, 신병과 후비군으로만 구성된 5군에게도 무리한 임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공세일변도였다. 먼저 공세를 펼쳐서 적을 궤멸시키지 않으면 파산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에 맞서 봉천 전역에서 방어할 러시아군은 3개 야전군, 12개 군단, 24개 사단 총 36만 명이었다.

일본군에 비해 병력의 우위가 확연했고, 특히 기병 전력은 3배에 달했다.

다만 여순 함락과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는 게 문제였다.

9월의 사하 전투와 11월의 반격 공세도 실패로 끝났고, 추운 겨울에 만주에서 3개월이나 대치하면서 러시아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다.

여기에 아무리 소식을 통제해도 수도에서 벌어진 학살 소문이 들려오니, 러시아군 대다수는 왜 이런 머나먼 이국땅에서 싸워야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정치적 위기에 직면한 차르는 공세를 거듭 재촉했다. 승리만이 혁명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사령관 쿠로파트킨 대장은 차르의 채근에 못 이겨 공세를 준비했지만, 장교와 병사들의 낮은 사기를 우려했다.

"안드레이 알렉세예비치! 간만이외다."

"장군 각하! 만주에서 다시 뵙게 되는군요."

기병군단을 이끄는 브루실로프 장군과 제1군 참모 브론스키 대령은 반갑게 악수를 했다.

"만주 전선의 사기가 생각보다 더 나빠서 걱정이외다."

"후방에서 그런 소식이 들려오니……. 페테르부르크의 상황이 그렇게 안 좋습니까?"

"심각하오. 이 전투에서 반드시 이겨 불만을 일시적으로나마 잠재우는 수밖에."

브루실로프와 브론스키는 지휘부에서 드문 적극적인 공세파였다. 이들은 각자 확보한 정보를 통해 일본군의 실상이 생각보다 좋지 못함을 알고 있었다.

"대령, 어쩌면 대령의 따님이 이번 전투의 공로자가 될지도 모르겠소."

"아나스타샤가요? 그 무슨 말씀이신지?"

"따님이 소개해 준 한국 외교관이 있는데……."

브루실로프는 브론스키에게 이위종이 넘겨준 정보를 보여 주었다. 1905년 12월 시점에서 일본군 현황도였다. 일본군은 여순에서 생각보다 훨씬 큰 피해를 입었고, 요양-사하에 배치된 본대의 병력도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러시아군 지휘부는 일본군을 30만 이상이라고 오인하고 있었고, 일본군의 우익에는 한국군도 있다고 의심했다.

"정말 중요한 정보입니다만, 역정보는 아니겠지요?"

"오흐라나와 육군 정보국을 통해 확인했소. 그리고 만주 현지에도 아군의 협력자가 있소."

이위종이 말한 ‘현지 협력자’는, 바로 대한제국 관전무관 유동열 참령이었다.

대한제국은 공식적으로 중립국이니만큼, 영국·프랑스·독일·미국 등과 함께 러시아 측에도 관전무관을 파견했다. 한국 관전무관은 주러 공사관 무관을 지낸 유동열이었다.

이 중에서 영국과 한국 장교들은 러시아군에게 일본군 스파이가 아닌지 의심과 냉대를 받았다.

하지만 정작 유동열은 러시아의 승리를 위해 암약하고 있는 셈이었다.

"각하, 저는 러시아에서 기병학교를 다니며 전략을 습득했습니다. 제게 있어 러시아는, 기병이란 무엇인가를 알려 준 소중한 나라입니다. 러시아 기병의 용장이신 각하에게 도움이 되어 기쁩니다."

유동열은 자신이 습득한 최신 정보들을 브루실로프에게 넘겼다.

브루실로프는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전선을 시찰하고, 척후대의 정보를 통해 교차확인에 나섰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 두 한국인이 넘겨준 정보는 사실에 근접한다는 것이오. 전쟁대학의 수재였던 대령이 보기에는 어떻소?"

브루실로프의 설명을 가만히 듣고 있던 브론스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군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사실 저 역시 휘하의 고려인 장교를 한국으로 보내 정보를 확인하게 했습니다."

"오, 새로 확인된 정보가 있소?"

"한국군이 일본 측에 참전하지 않은 건 확실합니다. 소위 자치령 의용군 2만 명이 적전에 있습니다만, 전투 의지는 없습니다. 한국군은 변수에서 제외해도 충분합니다. 일본군의 전력도 장군이 확보한 정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브론스키가 보낸 고려인 장교, 빅토르 김 대위는 자치령과 한국을 암약하며 정보를 습득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 군사지원단장 이동휘 부령과도 접촉할 수 있었다. 빅토르 김이 주한 공사관에 근무할 당시 이동휘와 안면이 있었다.

"한국의 일본 지원은 동맹 조약에 따른 형식적인 겁니다. 일부 친일분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전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황제 폐하께서 전부 막으셨지요. 의용군도 자치령 영토를 회복하는 게 목표지, 진심으로 러시아와 싸울 생각은 없습니다."

빅토르 김은 한국이 러시아와 싸울 뜻이 없다는 확신을 받고 돌아와 상관에게 보고했다. 브론스키는 부하의 보고를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이제 확실하오. 아군의 병력 우세는 분명하고, 한국군의 참전이라는 변수도 없소. 이제 공세에 나서야 할 때요."

"하지만 사령부에서는 여전히 소극적입니다."

러시아군 지휘부는 여전히 공세에 소극적이었다. 브루실로프는 단호하게 말했다.

"사령부는 자꾸 보로디노 전투를 언급하는데, 아군에게 필요한 건 라이프치히요! 적의 중추를 무너트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내가 반드시 사령부를 설득해 공세를 성사시키겠소."

1813년, 나폴레옹의 유럽 지배를 끝장낸 라이프치히 전투.

이 전투에 참여한 프랑스군은 약 20만, 대불동맹군은 약 37만으로 역대 최대 병력을 동원한 전투였다.

1906년, 마침내 이 기록을 경신하는 대규모 회전이 준비되었다.

일본군 25만과 러시아군 36만이 격돌하는, 라이프치히 전투 이래의 최대 회전이었다.

2월 22일, 네 제국의 운명을 결정할 봉천 회전이 개시되었다.

- 102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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