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반전(反轉)
한국에서는 동해 해전, 일본에서는 일본해 해전, 국제적으로는 쓰시마 해전으로 불리게 될 해전의 결과는 일방적이었다.
"지휘권을 네보가토프 제독에게 이양한다. 전함, 더 이상 교전에 응하지 말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퇴각하라."
러시아 전함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전투 초반, 일본 함대의 화망(火網)에 전함들이 걸려들면서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다. 기함 알렉산드르 3세도 격침당하면서, 부상을 입은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지휘권을 제3함대 사령관 네보가토프(Nikolai Nebogatov) 제독에게 이양했다.
임페라토르(황제) 알렉산드르 3세, 크냐지(공작) 수보로프, 보로디노, 오슬랴바, 나바린, 시소이 벨리키, 아드미랄(제독) 우사코프 등은 격침당하거나 피해를 감당하지 못해 자침했다. 중과부적으로 백기를 들고 투항한 군함도 부지기수였다.
"전원, 미카사에서 침착하게 퇴함하라. 함과 함께 최후를 맞이할 필요는 없다. 전투는 계속된다."
이에 비하면 일본은 기함인 미카사만 상실했을 뿐이었다. 발트 함대는 최후의 발악으로 기함에 포격을 집중시켰고, 대파당한 미카사는 항행 능력을 상실했다. 도고 제독과 연합 함대 사령부는 기함을 신형 전함 가토리로 옮겨 전투를 계속 지휘했다.
전투는 이튿날인 29일까지 이어져 계속됐다.
가까스로 화망에서 벗어난 군함도 추격해 온 일본 함대를 따돌리지 못했다. 기동력이 빠른 순양함과 구축함, 어뢰정이 끊임없이 발트 함대를 괴롭혔다.
네보가토프의 제3함대는 울릉도 해역까지는 퇴각하는 데 성공했지만 결국 그곳에서 포위되어 항복해야 했다.
최종적으로 러시아는 전함 8척과 해방 전함 3척을 모두 잃었다. 지휘관인 로제스트벤스키 제독도 포로로 잡혔고, 분함대 사령관들도 백기를 들어야 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건, 빠른 기동력을 갖고 있는 순양전대뿐이었다.
"해협을 돌파하여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이대로 적에게 침몰당할 수도 없다."
순양전대 사령관 엔크비스트(Oskar Enqvist) 제독은 고심 끝에 결단을 내렸다.
"무장해제를 각오하더라도 중립국 항구로 퇴각한다."
순양전대는 방향을 반전(反轉)하여 남서쪽으로 향했다. 가장 가까운 중립항은 대한제국 남단, 제주도에 있었다.
"한국은 일본에 협력 중이지 않습니까? 이대로 투항하면 함대를 압류당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어디로 가나? 남은 선택지는 청국 상해 아니면 필리핀 마닐라야. 상해는 영국의 입김이 세고, 미국도 일본 편인 건 매한가지. 최대한 빨리 가까운 중립항으로 가는 게 낫네. 애초에 한국 해군이 보유한 순양함은 본래 러시아 해군의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와 드미트리 돈스코이 아닌가? 그렇게 우리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이제 와서 신의를 저버리진 않겠지."
순양함대는 일본의 추격을 따돌리고 가까스로 제주항에 입항했다. 최종적으로 살아남아 입항에 성공한 건 방호순양함 아우로라, 올레그, 이즘루트, 젬추크 4척이었다.
"귀국에게 우리 함대의 운명을 맡기니, 관대한 처분을 바랍니다."
제주도에 외국 군함이 다수 정박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제주목사와 제주진위대장은 러시아 순양함대의 입항을 받아들이고, 상부의 훈령을 받아 무장해제에 나섰다. 군함과 수병의 안전은 중립국인 대한제국에서 보호하기로 결정했다.
* * *
"발트 함대가 전멸이라고……?"
극동에서 전해진 급보에 페테르부르크 궁정의 공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럴 리가 있나! 제대로 된 정보인가?"
"보고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전함 11척은 모조리 격침되거나 항복했고, 오직 순양함과 구축함의 일부만 살아남아 퇴각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무사히 도착하여 입항한 건 순양함 1척과 구축함 2척뿐입니다. 순양함 4척이 한국 제주항에 입항하여 억류됐고, 구축함 1척과 어뢰정 2척이 상하이에 입항하여 억류됐습니다."
"그렇다면 사실상 전멸이 아닌가! 적의 피해는 얼마나 되나? 적도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겠지?"
"적 기함 미카사가 침몰……."
"그래, 그리고?"
차르와 대신들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쳐다보았으나, 해군 참모총장 아벨란 제독은 기대를 깨고 말았다.
"그게 다입니다. 일본 측 피해는 전함 1척이 전부입니다. 아, 어뢰정 몇 척도 격침됐다고 합니다."
완패, 그것도 일방적인 완패였다. 러시아 해군 역사상 이렇게 치명적이고 굴욕적인 참패는 처음이었다. 아니, 먼저 근대화에 도달한 서양의 해군이 동양의 해군에게 이 정도로 참패를 당한 일 자체가 처음이었다.
"발트 함대가 소멸된 이상 더 이상 극동에서 전쟁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조속히 강화해야 합니다!"
"그 무슨 소리요? 만주의 전투에서는 우리가 승리했소! 적을 바다로 몰아내기 일보 직전이란 말이오! 일본은 더 버틸 수 없으니, 최종 승리는 우리의 몫이오!"
"함대가 소멸하고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했는데 어떻게 최종 승리가 가능합니까? 당장 신민들이 파업하겠다고 들고 일어나는 마당에!"
"그러니까 승리로 잠재울 수밖에 없지요!"
대신들의 갑론을박을 보면서, 허울뿐인 국무회의 의장직을 맡고 있는 비테는 한숨을 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더 늦기 전에 강화에 나서야 했다.
"이제 후폭풍이 엄청나겠군. 봉천에서 이긴 게 아무런 의미가 없게 돼 버렸어. 당장 소식이 나오면 국민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조속한 강화 말고는 답이 없다."
후폭풍은 바로 눈앞으로 다가왔다.
발트 함대 전멸의 소식이 전해진 날은 4월 18일(그레고리력 5월 1일)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노동절이었다. 노동절을 맞이하여 주요 도시에서는 총파업이 계획되어 있었다.
"호외요, 호외! 발트 함대 전멸!"
"러시아 역사상 유례없는 최악의 패배!"
피의 일요일 이후 들끓던 민심에, 발트 함대 전멸 소식은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극동의 전쟁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전멸로 증명하다!
"이 정권의 무능함이라면 지긋지긋하다! 어서 전쟁을 끝내라!"
"차르는 물러나라!"
"차르의 지배를 끝장내자!"
반정부 여론과 반전(反戰) 여론이 합쳐지면서, 5월 총파업은 예상보다 훨씬 거세게 일어났다.
발트 함대의 전멸은 러시아 제국의 위신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냈다.
사실상 무정부 상태였던 폴란드에서는 1863년에 비견될만한 노동자들의 봉기가 일어났다. 바르샤바와 우치에서는 노동자 군대가 주둔군과 충돌하여 도시에서 몰아내는 일까지 벌어졌다. 일부 폴란드 출신 병사들은 봉기군에 가담하기도 했다. 폴란드 전역에 계엄령이 내려지고, 계획대로라면 만주로 향해야 할 병력이 폴란드에 투입되었다.
양대 수도인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는 물론이요, 흑해 최대 항구인 오데사와 발트해의 리가는 총파업으로 도시 기능이 마비상태에 접어들었다. 흑해와 발트해 무역으로 주된 국부(國富)를 창출하는 러시아로서는 치명적인 상황이었다. 철도노조도 파업에 동참하여, 진압군이 될 군대의 수송을 저지했다.
도시에서의 반란은 점차 농촌으로 확대되었고, 오랫동안 억눌려 왔던 농민들도 낫과 쇠스랑을 들고 귀족들의 영지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혁명적 위기는 목전에 도달하고 있었다.
여전히 승리의 가능성을 믿고, 강화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던 차르 정권에 치명적인 사태가 발생했다.
전쟁 이후 병사 단위의 반란은 종종 있었지만, 일회성적인 반발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와는 차원이 다른 반란이 발생했다.
바로 유일하게 남은 함대, 오데사에 주둔하고 있던 흑해 함대의 반란이었다.
5월 14일(그레고리력 27일)은 차르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기념일이었다. 니콜라이 2세는 1896년 5월 14일에 대관식을 했으니, 1906년은 마침 10주년이 되는 해였다.
전쟁과 혁명 중의 흉흉한 분위기이기는 하나, 정부와 군대에서는 이날을 기념했다. 발트 함대 전멸 소식이 들려온 후, 극도의 경계상태였던 흑해 함대에도 이날만큼은 외출과 특별 금일봉이 주어질 예정이었다. 수병들은 오랜만의 외출과 선물을 기대했다.
"아, 금일 외출은 도시 내의 혼란으로 인해 취소되었다.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신 선물 역시 철도 파업으로 인해 도착하지 않았다. 각 군함의 장병들은 군함에 남아 임무를 계속 수행하라."
그런데 바로 당일에 외출이 취소되었다. 이유인즉슨 오데사의 총파업에 수병들이 휘말리길 원치 않아서였다.
그런데 정작 장교들은 하선하여, 주지사 관저로 향했다. 황제의 대관식 10주년을 기념하는 관료와 귀족들의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병사들은 격분했다.
"이런 미친놈들이 장난하나? 수병들 휴가는 도시 내의 혼란으로 취소되었다면서, 장교 놈들은 이 시국에 무도회나 하고 있어?"
"차르가 준다는 선물이 도착하지 않았다고? 그럴 리가 있나. 이미 다 그놈들이 횡령해서겠지!"
러시아 해군에서, 장교와 수병의 갈등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육군도 만만치 않았지만, 군함 안에서 생활해야 하는 해군의 갈등이 더 강했다.
해군 장교들은 특히 대부분 귀족 출신이었고, 병사들은 대부분 농민 출신이었다. 장교들은 수병을 전우가 아닌 자신들의 하인처럼 대했다. 군기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체벌과 폭력이 일상화되었다.
장교들은 총파업 이래 과열되는 오데사의 좌익적 분위기에 병사들이 물들기 원치 않아서 외출을 취소시켰지만, 오히려 이게 도화선에 불을 붙인 꼴이 되었다.
"태평양 함대와 발트 함대가 전멸당했어. 이제 남은 건 흑해 함대뿐이지. 저들은 제국의 위신을 위해 우리도 얼마든지 전멸시킬 준비가 되어 있을걸."
애초에 보스포루스 해협을 군함이 통과할 수 없는 조항으로 인해 흑해 함대는 투입될 수도 없었지만, 흑해 함대에는 자신들도 출동하여 전멸될지 모른다는 공포도 있었다.
전쟁에 끌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장교와 군대에 누적된 증오, 피의 일요일 이후 차르에 대한 실망감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더 이상 못 참겠다, 개새끼들! 언제까지 이렇게 당하고만 있어야 하나?"
"이미 폴란드 주둔군에서는 반란이 일어나서 시민들과 합류했다는군. 우리라고 못 할 이유가 없지 않나?"
"군함을 점거해서 오데사 시민들과 합류하는 거야. 흑해 함대에서 혁명이 시작되는 걸세!"
함대 내에 존재했던 사회민주노동당 비밀조직이 수병들을 선동했다. 고참 수병들 중에는 사회주의 지지자들이 있었고, 심지어 평민 출신 하급 장교들 사이에도 사회민주노농당 비밀당원이 있었다.
"혁명이다! 차르, 정부, 군대, 장교를 타도하라!"
"혁명 만세!"
5월 15일(28일), 흑해 함대에서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다. 전날 밤 무도회에 참석하여 진탕 마시고 돌아온 장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야 말았다.
일부 장교들이 총을 쏘며 저항에 나섰지만, 수병들에 의해 사살되고 군함의 통제권이 넘어갔다.
유독 장교와 수병들 간에 사이가 나빴던 전함 포템킨(Potemkin)에서 제일 먼저 반란이 일어났다. 함장과 부함장은 사살되어 바다에 던져졌고, 장교들은 모조리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일부 장교들은 혁명 지지자임을 밝히고 살아남아 붉은 완장을 찼다.
이어서 전함 게오르기 파베다노세츠(Georgii Pobedonosets)에서도 반란에 동조했다.
전함 포템킨과 게오르기에는 오데사 항에 입항하여 파업 시민들에게 동조한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를 상징하듯, 전함에는 러시아 해군기를 대신해 붉은 깃발이 휘날렸다.
"전함에서 반란이라고?"
반란 소식을 들은 흑해 함대 사령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남은 전함 4척을 동원해 진압을 시도했으나, 여전히 정부에 충성하는 전함들조차 옛 동료에 대한 진압에 나서지는 않았다.
"즉각 진압한다! 저항하는 놈들은 모두 사살해도 좋다!"
대신 육군이 나서 진압에 나섰다. 반란군 전함 2척은 육상과 해상에서 오데사 항에 고립된 채 포위됐다. 반란 전함은 지상을 향해 함포를 쏘며 저항했지만, 함포 사격은 서투르기 짝이 없었다.
결국 포템킨과 게오르기는 항구를 탈출, 인접국인 루마니아로 향했다. 이 과정에서도 흑해 함대는 진압을 거부하여 유유히 도주할 수 있을 정도였다.
끝내 그들이 기대했던 혁명의 도화선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육군의 강력한 진압으로 혁명에 동조하는 시민 수천 명만 사살되었다.
그럼에도, 흑해 함대의 반란이 체제에게 준 충격은 굉장했다.
"군대, 그것도 전함에서 반란이라니. 어떻게 이런 일이!"
"아직 육군은 정부에 충성합니다만, 언제 반란의 기운이 닿을지 모릅니다. 즉각 강화에 나서야 합니다."
"이제는 일본이 아니라 혁명이라는 이름의 괴물과 싸워야 할 때입니다."
러시아는 마침내 50만 대군을 만주에 집결하는 데 성공하여 대반격의 준비를 마쳤지만, 만주의 일본군이 아니라 국내의 혁명 세력과 싸워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만주의 지상군이 존재하는 한 강화는 절대 없다는 태도를 보이던 차르도, 6월 6일 마침내 굴복했다.
"미국이 강화를 중재하고 있으니, 응하도록 하라. 한국에도 중재를 요청하는 전문을 보내도록."
현재 강화를 적극적으로 중재하는 나라는 프랑스와 미국, 한국이었다.
프랑스는 러시아의 동맹이라 일본이 응하지 않을 터였고, 미국은 러시아가 보기에 지나치게 친일적으로 여겨졌고, 한국도 일본의 동맹이기는 하나 러시아의 ‘은혜’를 입었으니 미국보다는 더 친러적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미 이선이 수차례 전문을 보내 ‘러시아에 도움이 될 정직한 중재자’가 되리라고 다짐한 터였다.
「짐의 좋은 형제이신 황제 폐하! 봉천 회전의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짐은 러시아가 끝내 이기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영국과 일본이 숱하게 참전을 요구했음에도, 러시아에 대한 중립을 지켜왔던 것입니다.
…… 다만 러시아 국내의 정치적 상황과, 해군의 장거리 원행으로 인해 앞으로의 상황이 우려가 됩니다. 일본의 국력은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가장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를 맺기 좋을 때입니다.
한국은 러시아를 위해, 정직한 중재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전쟁이 아닌 외교로 성과를 얻으셔야 합니다. 외교적 성과를 토대로 국내 정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폐하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폐하의 좋은 형제, 이선」
봉천 회전 직후, 이선은 니콜라이에게 승리를 축하하는 전문을 보냈다.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믿었던 니콜라이는 코웃음을 치며 무시했지만, 결국 이선의 말이 맞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발트 함대가 궤멸당하기 전, 만주에서 승리한 직후에 강화협상에 나설 걸. 그럼 지금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가 가능했을 터인데. 이제는 흑해 함대까지 반란이라, 러시아가 혁명 때문에 전쟁에서 발을 뺀다는 걸 세계에 인정한 셈이 됐으니…….’ 더욱이 순양함 4척이 한국에 억류되고 있는 이상, 이들의 무사귀환을 위해서라도 한국의 협력은 필요했다. 저 순양함 4척은 이제 발트 함대의 전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니콜라이는 마침내 현실을 인정하고, 한국에 중재를 요청하는 극비 전문을 보냈다.
러시아 국내의 반전(反戰)이 낳은 반전(反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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