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포츠머스 조약
"요동반도를 환부하는 조건으로 청국이 아모이와 복주를 내놓겠습니까?"
"최선을 다해서 중재해 보겠습니다. 만주 황실은 복건보다 요동을 훨씬 중시하는 만큼, 이는 흔쾌히 허락할 겁니다. 만주 환부로 동양 평화와 삼국 연대가 유지되고, 일본은 복건으로 가는 길이 열리고.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결말이 아닙니까?"
이선은 전후 일본의 정치적 역학구도를 예견하고 대안을 제시했다.
해전의 압승으로 주가가 오른 해군은, 요동반도보다 복건을 세력권으로 얻길 원했다.
"아모이와 복주를 얻는 조건으로 관동주를 청국에 환부한다. 전쟁명분도 살리고, 실리도 얻고. 괜찮은 것 같군요."
진작부터 북수남진을 외쳤던 사쓰마와 해군에게, 대만에서 인접한 아모이와 복주는 탐나는 항구였다. 의화단 전쟁 당시 아모이를 점령했다가, 영국의 훼방으로 결국 다시 토해 내야 했다. 하지만 이제 영국도 동맹의 일원인 이상,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오? 요동반도 할양을 포기한다니! 여순과 만주 벌판에서 죽어 간 우리 군인들의 피는 뭐가 되는 거요!"
"지키기도 어려운 요동보다는, 대만에 인접한 복건이 훨씬 낫지 않습니까? 해군 없이 육군이 단독으로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해군이 아니었다면, 러시아를 강화 회담으로 끌어낼 수 있었겠습니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해군의 발언권은, 봉천에서 패배한 육군과 비할 데 없이 강했다. 결국 육군은 침묵해야 했다.
대한제국과 일본 해군의 이해관계는 조정이 가능했다. 이선의 유도대로, 일본은 만주 대신에 복건을 택했다.
"러시아와 일본 양군은 만주에서 철군하고, 관동주는 청국에 환부한다. 양국 모두 동의했습니다. 하르빈 이남의 동청철도 남만주 지선은……."
"러시아가 비용을 들어 부설한 철도를 그냥 넘길 수는 없습니다."
애초에 동청철도 부설을 통한 ‘평화적인 만주 침투’를 고안했던 이가 비테였던 만큼, 이에 대한 애착도 컸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동청철도는 1904년까지 이득보다 손실이 훨씬 컸다. 관세와 운임 등 사업수익은 운영비용의 10%에 지나지 않았다.
기대했던 물류도 해상이 압도적으로 철도보다 많았다. 예컨대 독일 브레멘에서 대련까지 철도 수송운임이 1톤당 220마르크인데, 해운은 23마르크로 시간상의 손실을 극복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치타-하얼빈-우수리스크를 횡단하는, 러시아 극동 영토를 이어 주는 동청철도 본선은 정치적 필요성에라도 고수해야 했지만, 남만주 지선은 반드시 지켜야 할 이유는 없었다.
바로 이점을 한국과 미국이 파고들었다.
"남만주 철도를 일본이 아니라, 중립화하여 국제 신디케이트가 인수하는 겁니다. 운영도 국제 주식회사 형태로. 이보다 만주의 기회평등과 문호개방에 어울리는 조건이 없지요."
남만주철도 경영의 구상에는 전쟁장관 태프트와 유니언 퍼시픽 철도(Union Pacific Railroad)의 사장, 일명 ‘철도왕’ 에드워드 해리먼(Edward H. Harriman)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회사를 아시아까지 넓히길 원하는 해리먼은, 이미 태프트 및 김옥균과 남만주철도 주식회사 설립에 대해 논의했다.
"그럼 인수 비용은 어떻게 됩니까?"
"인수 비용으로 신디케이트가 5천만 달러를 지불. 미국 정부 보증 차관 1억 달러도 제공하지요."
루블로 환산하면 인수 비용 1억 루블, 차관 2억 루블이었다. 들어간 비용에 비하면 턱없이 적었지만, 악성채무 상태인 현재 상황을 생각하면 손절(損切)을 각오해야 했다.
"지난 7년간 러시아가 동청철도에 투입한 돈이 12억 루블(6억 달러)입니다. 남만주 지선의 가치도 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인수 비용으로 1억 달러를 내놓는다면, 매각에 동의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인수 1억 달러, 차관 1억 달러로 남만주철도 운영권과 이에 따른 재산을 양여하는 계약을 맺죠."
하얼빈-여순 구간 남만주 철도는 미국 자본을 중심으로 한 국제 신디케이트에 매각을 결정했다.
밀약에 따라 당연히 한국은 운영에 참여하기로 했고, 33%의 비용과 지분을 갖기로 합의했다. 미국 정부가 33%, 해리먼이 구성할 국제 신디케이트가 34%를 소유할 계획이었다.
물론 일본도 여기에 동참하고자 했다. 남만주에서 죽어 간 일본인의 피만큼, 일본이 지분을 갖는 건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일본이 피를 흘려 쟁취한 결과이니만큼, 당연히 남만주철도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아, 물론입니다. 만주의 문호는 열려 있습니다. 지분의 34%는 국제 신디케이트, 33%는 한국, 33%는 일본의 몫이 어떻겠습니까? 자금만 충분히 준비해 주십시오."
고무라는 일본에 33%의 몫이 있다는 해리먼의 설명에 만족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일본이 비용을 지불한다면 한 자리를 내주겠지만, 파산 위기의 일본은 비용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더욱이 일본은 미국에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차관의 일부 변제를 조건으로 일본 몫의 지분을 인수할 계획이었다.
사실상 미국의 외교적 농락이었다.
이제 모든 합의는 이루어졌다.
마지막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청나라 북경으로 잠시 무대가 옮겨졌다.
분명히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전쟁이지만, 전장이 된 무대는 청나라 만주였다. 전후에 전리품처럼 나눠질 것도 결국 청나라였다.
주청 일본공사 우치다 고사이(内田康哉)는 광서제에게 알현을 청했다.
"폐하, 미국에서 온 희소식을 전해 드리게 되어 외신도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러시아가 만주를 대청국에 환부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관동주, 즉 요동반도의 조차지도 포함됩니다."
"오! 이렇게 고마울 데가. 과연 일본국은 대청국의 우방이자, 동양의 형제요!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광서제는 크게 기뻐하며 일본에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그 기쁨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일본 공사는 말을 이었다.
"일본은 동양 평화와 청국의 영토 보전, 만주 수복을 위해 싸웠습니다. 수십만의 일본 청년이 만주에서 피를 흘렸습니다."
"짐이 어찌 이를 잊겠소? 동양 평화와 삼국 연대를 위한 귀국의 노고와 희생은, 결코 대청 조야가 잊지 않을 것이오!"
"일본은 아무 조건 없이 만주를 귀국에 돌려드리게 되었습니다만, 그래서는 국내 여론이 결코 용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수십만의 희생을 치른 만큼, 일본 국민은 이에 상응하는 대안을 원합니다."
갑자기 공사의 태도가 바뀌었다. 일본은 결코 ‘동양 평화’와 ‘만주 수복’을 위해 싸운 게 아니었다.
"대안이라 한다면?"
"대청국에서 북경에 인접한 여순과 대련을 대신해, 대만에 인접한 아모이와 복주를 일본에 조차해 주신다면, 일본은 복건의 발전을 위해 힘쓰겠습니다. 만주를 러시아로부터 되찾기 위해 죽어 간 십만 일본인의 혼도 편안히 잠들 수 있을 것입니다."
순간 광서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동양 평화를 운운하면서 만주 환부를 달성했다더니, 그에 대한 답례랍시고 복건의 항구를 내놓으라니.
"공사는 기다려 주시오. 대신들과 논의할 시간이 필요하오."
"물론 기다리겠사옵니다. 하지만 열강들은 만주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이 문제가 조속히 해결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영국과 미국, 러시아와 한국도 동의했다는 점을 감안해 주시옵소서."
말투는 정중해도, 노골적인 협박이었다.
광서제는 대신들을 소집해 숙의했으나, 열강들이 동의했다면 손 쓸 방도가 거의 없었다. 대신들도 만주 환부를 조건으로 아모이와 복주를 조차해 주자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대청 황실의 본원인 만주의 중요성이, 어찌 복건의 두 항구와 비견되겠습니까?"
"일본이 만주 수복을 위해 많은 피를 흘린 건 사실입니다. 적당한 대가를 내놓지 아니한다면, 일본은 차후에 더한 요구를 할지도 모릅니다."
아모이와 복주는 1842년 남경 조약으로 개항한 최초의 개항장에 속했다. 특히 복주는 남양 함대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이니만큼 쉽게 내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도 대신들, 특히 만주족 대신들은 일본에 아모이와 복주를 조차해 주라고 권했다. 이들에게는 요동반도가 저 남쪽의 항구들보다, 만주가 복건보다 더 중요했다.
광서제는 주청 한국 공사 이완용을 자금성으로 불러들였다.
"공사, 정녕 귀국도 일본의 복건 두 항구 조차에 동의했단 말이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그러하옵니다. 열강이 모두 동의한 일이니……."
애초에 이런 중재안을 내놓은 게 한국이었지만, 이완용은 어쩔 수 없다는 태도로 말했다.
"허어, 짐은 귀국을 정녕 믿었거늘!"
"폐하, 지금 일본의 기세를 누르기가 쉽지 않사옵니다. 일본은 만주에서 수십만 병사를 잃은 만큼, 반드시 전쟁의 대가를 얻길 원합니다. 이들은 끝내 요동반도를 얻기를 희망했기에, 어쩔 수 없이 대안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북경과 성경(봉천)에서 지척인 관동주의 일본 할양은 한청 양국이 모두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그건 그렇소."
"하오니 대안으로 저 남쪽의 항구라도 조차하고자 하려는 것입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이완용의 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광서제에게도 요동반도와 복건의 두 항구 중에 선택하라면 당연히 요동이었다.
"일본은 서양으로부터 바르지 못한 행적만 본받았으니, 실로 왕화(王化)의 덕을 모르옵니다. 황상께옵서 저 열도의 외이(外夷)에게 중화의 성덕을 베푸시어, 항구 두 개를 빌려주시옵소서. 그 대신, 한국 황제 폐하께옵서는 만주가 대청에 확고히 환부되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외신도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이완용은 유학자 출신답게, 그럴싸한 궤변으로 광서제의 마음을 다독였다.
그래도 광서제는 아쉬운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일본이 주장했던 ‘동양 평화’와 ‘삼국 연대’가 얼마나 허구였는지를, 새삼 깨달았던 것이다.
‘역시 유구(류큐) 합병 이래, 일본은 믿을 수가 없다. 유구와 대만 다음은 복건인가. 내버려 두면 그다음은 절강과 강소겠지. 반드시 힘을 키워 오만한 섬나라 오랑캐에게 이 치욕을 갚으리라.’
메이지 일본을 개혁의 모델로 생각했던 광서제는, 이제 일본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일본은 결국 서양 열강과 다름없는 침략자였다.
만주로 슬금슬금 끼어드는 한국도 내심 경계했지만, 이선 덕에 서태후를 몰아내고 정계로 복귀할 수 있었던 광서제는 한국을 적대할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광서신정 이래 청나라의 가상적국은 만주를 점령한 러시아였지만, 이제 경계의 화살은 일본을 향해서 날아갔다.
* * *
1906년 8월 10일.
25일간 15차례의 밀고 당기는 회담이 지속된 끝에, 마침내 러시아와 일본은 전쟁 종료를 합의하는 조약에 서명했다.
1. 이제부터 러시아 황제 폐하와 일본 천황 폐하의 국가 간에는 평화와 우호가 존중될 것이다.
2. 러시아제국 정부와 일본제국 정부는 대청국과 대한제국의 주권과 영토의 불가침성을 존중한다. 앞으로 갈등의 원인을 피하기 위해, 양국은 러시아-만주-한국 국경에서 국가의 안보를 위협할 수 있는 군사력의 사용을 배제한다.
3. 일본은 러시아가 북위 44도 이북의 만주에 대하여 정치적·군사적·경제적으로 특수한 우월권을 가짐을 인정한다.
4. 러시아는 북위 44도 이남의 만주를 중립화하는 데 동의하며, 요동반도 관동주 조차지와 그에 따른 모든 특권을 12개월 이내로 청국에 반환한다.
5. 러시아군과 일본군은 현재 주둔 중인 만주 지역에서 18개월 이내로 완전히 철수한다.
6. 러시아와 일본은 만주에서 열강의 문호 개방과 기회균등 원칙을 준수한다.
7. 러시아는 동청철도 본선, 북만주 노선을 독점적으로 개발하고 소유할 권리가 있다.
동청철도 남만주 노선, 하르빈-포트 아서(여순) 구간과 그 지선의 특권과 재산 일체는 중립적인 국제 신디케이트에 매각한다.
8. 만주철도는 군사적 목적이 아닌 상업 및 산업 목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관련 국가와 기관들은 별도의 철도 협약을 체결한다.
9. 러시아 제국 정부는 사할린 전도(全島)와 그 부속도서, 그에 따른 모든 공공 재산과 권리를 일본 제국 정부에 영원히 양여한다.
단, 일본은 러시아에 라페루즈(소야)해협과 타타르(마미야)해협의 자유항행을 보장한다. 이를 보장하기 위해 사할린의 군사요새화는 용인하지 않는다.
10. 일본에 양도된 지역의 주민들은 부동산을 매각하고 자국으로 이주하지만, 양도된 영토에 머물기를 원한다면 현지법으로 보호를 받는다.
11. 러시아는 일본해(동해), 오호츠크해, 베링해의 러시아령 연안의 어업권을 일본인에게 허용한다.
12. 각국 간에 전쟁으로 인해 무효화된 기존의 조약들은 새로운 조약으로 대체한다.
13. 현행 조약이 효력을 발생한 후, 가능한 빠른 시일 내로 모든 전쟁 포로가 본국으로 복귀해야 한다.
14. 이 조약은 러시아 황제 폐하와 일본 천황 폐하의 비준을 받아야 한다. 조약 서명일로부터 60일 이내에 비준되어 각국 정부가 발표하게 되면 완전한 효력을 지닌다. 비준의 공식 교환은 워싱턴 D.C에서 행한다.
15. 미합중국 정부와 대한제국 정부는 중립국으로서 본 조약의 성실한 이행을 지지하고 보장한다.
서력 1906년, 메이지 39년 8월 10일.
니콜라이 2세 재위 13년 7월 28일(율리우스력).
미합중국 포츠머스에서 양국 전권위원이 강화 조약을 체결하고 서명하였다.
러시아제국 수석전권위원 세르게이 비테.
일본제국 수석전권위원 고무라 주타로.
1905년 2월에 시작된, 18개월간의 전쟁이 마침내 끝났다.
일본은 최대 65만 병력을 동원해, 약 12만에 달하는 병사들이 전사하거나 질병으로 사망했다. 부상과 질병으로 인해 손상을 입은 병사들도 약 18만에 달했다. 러시아군에 잡힌 포로는 약 2만이었다.
전쟁으로 인한 손실은 30만을 넘겼으며, 이들 대부분은 일본 육군의 근간을 이루던 장교와 병사들이었다. 이제 일본에 남은 병사들은 노병과 신병뿐이었다.
사실상 일본 육군은 만주에서 붕괴했다. 이제 대륙으로 나아가 ‘진취’하자는 야욕은 강제로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재정적 피해도 전비가 20억 엔에 육박하여, 무려 1912년도 예산까지 7년 치를 미리 끌어 써야 했다. 대부분은 빚이었고, 외채였다. 기대했던 배상금도 받지 못하게 된 일본은 당장 재정적 위기에 봉착했다.
러시아는 최대 70만 병력을 동원해, 약 8만에 달하는 병사들이 전사하거나 질병으로 사망했다. 부상과 질병으로 인해 손상을 입은 병사들도 약 15만에 달했다. 일본군에 잡힌 포로는 약 5만이었다.
육군의 손실은 일본보다 확연히 적었으나, 문제는 해군이 궤멸당했다는 점이었다. 태평양 함대와 발트 함대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사실상 러시아 해군은 붕괴했다. 이제 만주와 태평양으로 나아가겠다는 정책은 수정되어야 했다.
인적, 재정적 손실보다 더 심각한 건 제국 위신의 타격이었다. 세계 최대의 제국인 러시아가 후발 아시아 국가 일본과 비등하게 싸웠다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운 일인 데다, 발트 함대의 전멸은 굴욕과도 같은 결과였다.
무엇보다 피의 일요일과 같은 실책으로 국내에 혁명적 위기가 발생했으니, 자업자득이었다.
도대체 18개월간 무엇을 위해 그토록 피를 흘렸는지, 러시아인들과 일본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참아 왔던 국민적 분노가 지배계급을 향해 쏟아지게 될 터였다.
이제 결산을 치를 때가 왔다. 전쟁의 후폭풍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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