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제국의 욕망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과 혁명의 혼란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동안, 대한제국은 놀라울 정도의 정치적 안정성을 구가했다.
비록 대한제국령 요동과 남만주 자치령 일부가 전장이 되었다지만, 인명손실은 거의 없었다. 자치령 의용군으로 전환한 7사단이 약간의 피해를 입었을 뿐이었다.
러시아군과 일본군이 점령했다가 철수한 요동 안산, 본계, 무순 등지에서 재산상의 손실은 입었지만 금방 복구할 수 있었다.
오히려 한국은 전쟁특수를 맞아 경제적 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한국에 막대한 군수품을 발주하던 일본은 결국 재정 위기로 전쟁 공채로 대체해야 했고, 채권자에서 채무자의 처지로 전락했다.
강화도 조약 이래 30년 동안 지속되었던 한일 간의 경제적 불균형은 처음으로 한국에 유리하게 조정되었다. 이제 한국은 일본에 경제적 종속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결국 러일전쟁의 최대 수혜자는 한국이었다.
미국과 손을 잡고 남만주에 세력권을 확보하게 되었고, 만주를 놓고 대립하던 러시아와 일본이라는 두 강력한 경쟁자가 모두 힘이 빠졌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일본 육군, 조슈벌이 이렇게 무너질 줄이야. 참 기묘하고도 상쾌한 기분이군."
일본의 소식을 보고받은 이선은, 예상을 뛰어넘는 전개에 놀랐다.
익문사 일본 조직은 은밀히 아시아주의자들과 접촉해 자금을 지원하며 혼란을 부추기고 있었다.
일본의 아시아주의자들은 ‘한국인 동지’가 진심으로 ‘유신혁명’에 동조하는 거라 믿고 있었다. 기타 데루지로가 책을 출간하여 단기간에 지식사회에 퍼트릴 수 있었던 것도 익문사의 자금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선은 배후 공작을 통해 장기적으로 일본의 혼란을 가속화시키려 했으나, 단기간에 쿠데타 모의와 자체적 진압까지 이뤄진 것이다.
조슈벌이 쿠데타를 모의하리라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였지만, 전쟁에서 살아남은 젊은 장교 하나가 일도양단으로 무너트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조슈벌이 무너지고, 합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사이온지와 하라가 정국을 안정시킨 것에 만족해야겠군. 육군이 몰락하고 해군이 득세했으니 대한과 이해관계가 충돌할 가능성도 적을 거고. 사이온지도 이제 도련님 근성은 벗어났으니 마냥 군부에 휘둘리지 않을 터. 의회제도가 확립되면 군부가 폭주할 가능성도 줄어들겠지. 잘 됐군."
현 상황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대한제국으로서는 대륙 진출을 부르짖는 일본 육군과 조슈벌이 껄끄러운 존재였다.
실제 역사에서는 더욱 그랬다. 이번에 제거당한 가쓰라 다로는 한일병탄을 강요한 총리고,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초대 조선총독으로 조선을 가혹하게 무단통치한 자였으며,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2대 조선총독으로 3.1운동을 무력으로 짓밟은 자였다.
이런 악당들이 다름 아닌 일본 군인의 칼로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으니, 그 역설성에 기묘하고도 상쾌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의 혁명적 위기도 종료. 끝이 씁쓸하긴 했지만, 입헌군주국으로 가는 길이 열렸지. 앞으로 니콜라이가 정신을 차려야 할 터인데."
최종적으로 1906년 혁명은 유혈진압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제정 러시아는 10월 선언과 신임 총리 비테의 수완으로 혁명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3월에 국가두마가 소집되고, 4월에 새 헌법이 반포될 예정이었다. 이제 러시아는 입헌군주국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차르가 프로이센식 외견적 입헌군주정이라도 받아들이고, 유능한 개혁가들에게 정치를 맡겨 위로부터의 개혁에 나선다면 제정의 수명을 늘릴 가능성도 있었다.
"이제 러시아와 일본은 신경을 덜 써도 되겠고, 청나라에 집중할 때가 왔나."
이선의 시야는 지도에 걸려 있는 만주와 중국으로 향했다.
역사대로라면, 신해혁명까지는 4년 남았다. 물론 이미 역사가 바뀌었기에 반드시 그해에 혁명이 일어나리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이선은 대청의 천명이 한계에 도달했음을 인지했다.
광무 11년(1907) 2월 13일.
정미년 원단(설날)을 맞이하여 이선은 종묘에 제례를 올리고, 창덕궁의 태상황을 배알했다.
올해로 대한제국 선포와 즉위 10주년, 어느새 마흔이 된 이선의 기분은 새삼 싱숭생숭했다.
21세기에 40세는 한창 청년이나 다름없지만, 이 시대만 해도 완연히 중늙은이의 대열에 섰음을 의미했다.
"어느새 불혹(不惑)의 나이가 되었군. 공자님 말씀에,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는 나이라지. 그런데 짐은 세상일에 너무 관심이 많으니, 원."
"하오나 폐하께옵서 판단을 흐리는 일은 없지 않으십니까? 언제나 현명한 판단만을 내리시오니."
이선의 자조적인 농담에 곁에 있던 의친왕 이강이 웃으면서 답했다.
"아우야, 너도 이립(而立)이니, ‘마음이 확고하게 도덕 위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 나이’ 아니냐. 과연 그러한가?"
이강도 어느새 나이가 31세였다. 이선의 기대대로 진보적인 사고를 가진 황족으로 성장, 황실 외교관이자 이선의 대리인 역할도 곧잘 수행했다.
그런데 이강은 여전히 탕아 기질을 버리지 않았다. 태상황과 황태후의 압박에도 이강은 나이 30을 넘기고도 결혼을 하지 않았고, 이 나라 저 나라에서 만난 애인을 갈아 치우기 여러 번이었다.
"송구하옵니다. 신은 아무래도 공자님 말씀과는 거리가 있사온지라."
"그래. 네가 네 의무를 수행하는 이상, 사생활이 어떤지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다만 태상황과 황태후께서 걱정하실 일은 없도록 해라."
사생활이 깨끗하다 못해 무색무취의 삶을 살고 있는 순친왕 이척이나, 학문에 매진하며 유학을 준비 중인 영친왕 이영은 구설수에 오를 일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척의 경우에는 첫 결혼과 재혼에도 불구하고 자식이 없어서 ‘남성으로서의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무엄한 소문이 있었지만, 이강은 그 반대로 여색을 너무 밝힌다는 소문이 돌았다.
"짐도 스물아홉까지 결혼 안 하고 버티느라 힘들었지만, 너는 벌써 서른이 넘지 않았느냐. 황실의 시각에서 보기에 괴이쩍은 일이긴 하지. 사생활은 자유다만 구설수에 안 오르게 해라."
"황공하옵니다. 결코 황실에 누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강은 11년 전 일을 떠올리며 씩 웃었다.
이선이 그 나이가 되도록 결혼을 안 하고 버틴 건, ‘파란양’ 마르가리타를 염두에 둔 게 아닌가 싶었다. 결국 파란양은 황제의 애인이 되었으니, 소원성취였다.
늘 욕망을 절제하고 국무에 매진하는 이선이 유일하게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진 케이스였기에, 이강은 흥미롭게 생각했다.
‘형님은 왜 저렇게 피곤하게 사시는지 몰라. 만인지상의 권력을 갖고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계시는데, 마음껏 즐기며 산다고 누가 뭐라 할 건가?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데, 그 정도는 당연한 권리 아닌가?’
이강은 이선의 담백한 사생활이 오히려 의문이었다. 유교적 군주 혹은 근대적 군주로서의 모범이 문제가 아니라, 그냥 이선 자신의 욕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미 확고한 권력을 확립했고, 대한제국의 국위는 자주독립을 넘어 지역강국의 반열에 들어서고 있었지만, 이선은 늘 어딘가 쫓기는 사람 같았다.
‘향후 10년 이내로 중국 문제를 해결해야……. 열강의 힘이 빠질 세계대전이 일어나야 중국 문제를 해결할 적기겠지.’
이선은 대형 지도를 바라보며 미래를 구상했다.
사람의 욕망이란 건, 끝이 없는 법이었다.
처음 이선의 목표는 조선이란 나라가 제국주의 시대에 살아남아,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완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지역강국의 반열에 들어서자, 동아시아를 근본적으로 재편성하고 싶다는 욕망이 들었다.
이강은 이선을 오해하고 있었다. 이선은 언제나 욕망이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개인적인 욕망이 아닌 국가적인 욕망이라는 점이었다.
재위 10년, 나이 40에 접어들면서 이선의 욕망은 좀 더 정치적인 무언가로 변화하고 있었다.
자주독립, 산업혁명, 사회발전, 입헌체제, 민족자결, 국민주권, 역사의 진보…….
이와 같은 욕망은 예전부터 있었다지만, 혁명과 전쟁의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이선의 욕망도 구체화되었다.
‘최소한 만주와 몽골, 가능하면 신강과 티베트도 민족자결을 내세워 중국 본토에서 분리되어야 해. 그러려면 역시 만주 황실과 달라이 라마를 활용해야겠지. 만주 황실은 물론이요, 달라이 라마와는 계속 연락을 하고 지내야겠어. 장차 만주는 확고히 대한의 세력권이 되어야 한다.’
이선은 이제 완연히 제국주의자였다. ‘이익선과 주권선’을 부르짖던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큰 틀에서 차이가 없었다. 다만 ‘국민주권과 민족자결’이라는 세련된 형태로, 중국의 분리를 이끌어 낸다는 차이가 있었다.
그러려면 중국 혁명은 필수였다. 청조의 천명이 끝난 후에, 질서의 재편성이 가능할 터이다.
이선은 미국에서 귀국한 김옥균을 황궁으로 불러들였다.
* * *
"어서 오십시오, 선생. 한국은 처음이십니까?"
"예, 처음입니다. 자유가 살아 숨 쉬는 나라에 온다는 건 언제나 반가운 일입니다만."
26세의 청년 혁명가 송교인(宋敎仁, 쑹자오런)은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호남성 출신으로 일본으로 유학해 신학문을 익힌 송교인은 귀국 후 반청 운동을 벌였다. 1904년 호남성 장사에서 황흥(黃興)과 함께 ‘화흥회(華興會)’를 조직해 청조 타도를 부르짖으며 봉기를 계획했다가 실패했고, 다시 일본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송교인은 흥중회(興中會)를 이끄는 손문과 결합해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를 결성, 본격적인 혁명운동에 돌입했다.
이 무렵 중국동맹회가 부르짖는 혁명은 멸만흥한, 즉 만주를 멸망시켜 한족의 나라를 회복한다는 단계였다.
만주와 몽골은 결코 ‘중화민족’이 아니라, 한족의 중국을 억압하는 이민족 압제자였다. 중국동맹회에 가담한 ‘중국 대표’도 중국 본토 18성으로 제한되었고, 감숙성을 제외한 17성 대표가 선출되었다.
중국동맹회는 멸만흥한에 공화혁명의 이념을 내세웠고, 사회혁명의 필요성을 더했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을 지켜본 중국동맹회는 ‘토지국유’와 ‘평균지권’을 내세워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고 정치·경제적 평등을 확립해야 한다고 외쳤다.
"중국 혁명의 사상가인 송 선생을 모실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과찬이십니다. 저야 손일선(손문) 선생의 휘하일 뿐이지요."
말은 겸손하게 해도, 송교인은 내심 손문을 ‘말만 대포처럼 쏘아 대는 허풍선이 손대포’라고 여겼다.
송교인은 소수 음모가의 봉기에 집착하는 손문과 달리, 장강 중하류의 도시를 중심으로 대중 운동과 결합해서 청조를 타도하겠다는 구상을 했다.
물론 이들은 청조 타도와 중국 혁명이라는 목표는 같았다.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외세와도 손을 잡을 준비도 되어 있었다. 이들의 논리에서는 만주족의 지배가 곧 외세 강점이었기에, 외세를 타도하기 위해 외세와 손을 잡는 데 거리낄 이유가 없었다.
"미야자키 선생은 간만에 뵙습니다. 근래 일본의 정세는 어떻습니까?"
"번벌이 타도된 건 바람직하지만, 당분간 일본에서는 혁명의 가능성은 희박해 보입니다. 중국 혁명으로부터 새로운 바람이 불게 될 겁니다."
송교인과 동행한 37세의 미야자키 도라조(宮崎寅藏)는 일본의 대표적인 아시아주의자였다.
"서양의 침략을 받고 있는 아시아를 구제하기 위해선, 동양 문명의 중심인 중국의 혁명과 민중의 자유가 선결되어야 하며, 그 이후에 비로소 진정한 아시아 해방의 길이 열리게 될 겁니다."
일본의 아시아주의자들은 대개 대륙낭인들과 관계가 있는 국수주의자였지만, 미야자키는 진심으로 ‘아시아 해방’의 가치를 믿었다.
1898년 필리핀 독립전쟁에 동참하고, 1900년 손문의 삼주전 봉기에도 가담하고, 1906년 중국 망명객들이 일본에서 중국동맹회를 결성할 때도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에 대해서도 상당히 우호적이라서, 김옥균이 주일 공사로 재임하던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다.
"미야자키 선생은 진정 이상가이십니다."
"그러니 이 선생과 우리가 함께 손을 잡은 게 아니겠습니까? 하하!"
송교인과 미야자키를 한국으로 초대한 건, 다름 아닌 이회영이었다.
이회영은 1898년 필리핀 독립전쟁에 특파원으로 종군했을 때 미야자키를 알게 되었고, 그를 통해 일본의 아시아주의자 및 중국 혁명가들과도 친분을 얻게 되었다.
물론 이회영이 제국익문사 동아(東亞)국장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그의 표면적인 신분은 어디까지나 기자, 출판인, 사상가였다.
이회영이 1904년 야마가타 테러를 배후에서 은밀히 조종했다는 사실, 영국인 베델과 손을 잡고 호헌운동을 지원했다는 사실 등은 드러나지 않았다.
최근에도 기타 데루지로의 출판과 망명을 도운 바가 있었는데, 일본 아시아주의자들은 한국 아시아주의자 이회영의 순수한 호의라고 여기고 있었다.
"내가 두 분을 한국으로 초청한 건, 중국 혁명에 동조하는 한국 아시아주의자들에게 소개하려는 목적도 있습니다만. 한 고위직께서 두 분을 만나고 싶어 하셔서, 대리인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위직이라 하시면……?"
"보안은 반드시 지켜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전 총리대신, 고균 김옥균 대감입니다."
송교인과 미야자키의 표정에서 놀라움이 서렸다.
"김옥균 공께서 우리를 만나보고 싶으시다고요?"
"김옥균 공과는 주일 공사 시절부터 친분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는데……."
"저야 대리인 역할을 맡게 된 거니, 자세한 건 직접 뵙고 이야기 나누셔야겠습니다만."
"하지만 대한제국의 공식적인 입장은 청조와 우호관계 아니었습니까? 저는 청조 입장에서는 역적입니다만."
송교인은 대한제국에서 2인자인 김옥균이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게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송교인은 공식적으로 국사범, 망명객이었다. 청조가 한국에 체포와 송환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청조의 요구를 일본은 묵살하고 있지만, 청조와 친밀한 한국이라면 따를 수도 있는 게 아닌가?
"그러니 비공식적으로 만나고 싶다는 것이겠지요. 제가 알기로 고균께서는 아시아주의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한국, 중국, 일본이 화합해야 한다는 삼화주의(三和主義)를 제창하기도 하셨고."
"그랬지요. 그래서 저도 김옥균 공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은 바 있습니다."
미야자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송교인은 아직 의문이 남아 있었지만, 주저하지 않았다.
"옛말에, 불입호혈부득호자(不入虎穴不得虎子,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선 호랑이 새끼를 못 잡는다)고 했지요. 청조란 호랑이를 잡으려면 무엇이든 못하겠습니까?"
"하하, 역시 송 선생은 젊은 만큼 패기가 넘치는군요. 그럼 곧 자리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송교인은 어쩌면 기회다 싶었다. 청년 시절의 손문도 위험을 감수하고 이홍장을 찾아 혁명의 동조자가 되라 설득한 적이 있지 않았는가? 손문은 최근에도 일본 전 총리대신 오쿠마 시게노부를 만나 지원을 호소했었다.
만약 한국의 실력자인 김옥균을 혁명의 동조자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불입호혈부득호자, 모험을 해야 큰일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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