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새로운 국민
밀약을 맺은 며칠 뒤, 김옥균의 보고를 받은 이선은 만족감을 표명했다.
"언제나 경의 노고가 많군. 수고했소."
"황공하옵니다."
김옥균은 고개를 조아렸지만, 여전히 중국에서 혁명이 일어날지 여부에 대해 확신이 없었다.
"하온데 폐하, 소위 중국동맹회와 이러한 밀약을 맺으라 명하심은, 청국에서 러시아와 같은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고 여기시는지요?"
"경이 태프트 장관과 맺은 밀약과는 성격이 다르지만, 청국의 변화에 대비해 보험을 들었다고 생각합시다."
"유럽과 달리 청국에서는 공화혁명이 가능하겠습니까? 수천 년 전제의 나라인데……. 일개 망명객의 무리에 불과한 저들이 정녕 혁명을 성사시킬 수 있다고 보시는지요? 청조의 300년 지배가 그리 쉽게 무너질지……."
"흠, 고균과 개화당도 25년 전에는 일개 비밀결사에 불과했었지. 하지만 지금은 어떻소? 망상으로 보였던 꿈이 현실로 이뤄졌지."
"개화당에는 폐하라는 위대한 지도자가 계셨지요. 일개 망명객에 지나지 않는 손문 따위가 어찌 감히 비견되겠습니까?"
25년 전인 1882년, 이선이 귀국하고 개화당의 지도자가 되면서 조선의 역사는 근본적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개화당의 꿈은 상상 이상으로 이루어졌다.
"아니, 짐은 그저 역사의 진보라는 흐름 위에 올라탔을 뿐. 혁명은 손문이나 동맹회가 일으키는 게 아니오. 그들은 역사의 진보라는 흐름을 따를 뿐이지. 전통적인 표현으로 천명을 따랐다고 해도 좋소. 전통적인 군주제는 천명을 잃었고, 새로운 천명은 국민에 있소."
이선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전제군주제, 특히 청나라나 오스만과 같은 전통적인 다민족제국의 전제군주제는 20세기에 몰락이 필연이었다. 제국을 대신하여 국민국가가 승리할 것이다.
"빠르면 5년 이내에는 동양의 대변혁이 있으리라 확신하오. 10년 이내에 세계적인 대변혁이 일어날 수도 있지. 그러니 대비는 마련해 둬야지."
1907년 시점에서, 세계대전과 제국들의 몰락을 예측한다면 정신 나간 예언자 취급당할 것이다.
역사에는 우연의 영역이 있고, 필연의 영역이 있다. 팽창이 한계에 도달한 제국주의 열강들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필연의 운명이었다.
"폐하의 성지(聖旨)는 신이 감히 가늠하기가 어려운 일이니, 마땅히 따를 뿐이옵니다."
지난 25년 동안 이선은 언제나 옳았음을, 최측근에 있는 김옥균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김옥균의 스승 대치 유홍기가 죽기 전에 예견했던 것처럼, 이선은 ‘다른 세상에서 왔기에 미래를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30대의 패기 넘치는 혁명가에서 어느덧 원로 정치인이 된 김옥균은, 2인자라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자신이 초라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국제 외교가 되었건 국내 정치가 되었건, 실무를 맡아 서명하는 건 김옥균 자신이지만, 결국 모든 건 이선이 그린 큰 그림대로 움직일 따름이었다.
성공한다면 황제의 성지요, 실패한다면 책임은 자신의 몫이었다. 물론 김옥균은 이선이 끝내 성공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설령 실패한다한들 책임을 질 용의는 충분히 있었지만, 늘 황제의 고굉(股肱)일 뿐 그 이상이 될 수 없었다.
상념에 잠겨 있던 김옥균은 주군의 물음에 현실로 돌아왔다.
"고균. 갑신경장 이래 20년 넘도록, 개화당이 집권당이 되어 국가를 이끈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시오?"
"폐하께옵서 개화당의 지도자가 되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황제가 된 후에는 당적을 떠났지만, 이선은 오랫동안 개화당의 지도자였다. 이선 자신도 개화당에 ‘오당(吾黨, 우리 당)’이란 표현을 거리낌 없이 썼다.
"아니지.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소. 역사의 진보라는 흐름 위에 올라탔다고. 짐뿐만 아니라 개화당 전체가 함께 올라탔지. 개화당이 조선의 개혁과 진보를 이끌었기에, 20년 넘게 집권당의 위치를 유지하고 있는 거요."
"아, 실로 그렇사옵니다."
"지난 20년간 개화당은 국가의 핵심이었소. 그런데 작금의 개화당이 대한의 진보를 이끌고 있는지 의문이 드는군."
이선의 어조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함의는 날카로웠다.
"어인 하교이신지……."
"작년까지는 전쟁 중이었으니까, 개혁 정책의 유보가 있어도 이해하오. 하지만 전쟁이 끝났으면 바뀌어야지."
작년, 광무 10년의 제2회 총선거는 입헌개화당의 압승으로 끝이 났다. 자유주의 성향의 독립당은 다시 입헌개화당과 통합하여 연합정권을 세웠고, 우익 팽창주의 제국당은 관제야당이나 다름없었다. 소수의 무소속 의원을 제외하면 사실상 민의원이 개화당에 독점된 상황이었다.
개화당은 전시라는 특수상황을 내세워, 모든 개혁 정책을 유보했다. 2회 총선거를 앞두고 논의되었던 선거권 확대도 중단된 채 1회와 같은 유권자들이 투표에 나섰고, 그 결과가 개화당의 압승이었다.
순차적으로 진행되던 농지개혁과 노동 관련 입법들도 러일전쟁을 핑계로 중단되었다.
"개화당은 러시아와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보고 느낀 바가 없소? 선제적인 개혁만이 국가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음을, 실제적인 사례를 보고도 이해가 되지 않소?"
애초에 개화당은 개혁적 관료와 도시 유산계급의 자유주의 정당이었고, 문명개화에 비판적이던 농촌의 지주들도 장기집권의 떡고물을 얻고자 합류했다.
관료-지주-자본가를 대표하는 개화당은 그 이해관계를 충실히 대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광무 5년의 북부 농지개혁에 이어, 8년에는 중부 지방에서도 농지개혁이 이뤄졌다. 그 과정에서 개화당의 소극적인 저항이 이어졌다. 이해관계가 확연히 떨어지는 북부와 달리, 중부에는 개화당을 지지하는 명문가와 관계있는 토지가 많았다.
민의원은 물론이고 더 보수적인 중추원에서 어떻게든 농지개혁의 대상을 최소화하려다가, 이른바 ‘광무 8년 대역 음모사건’이 발생한 후, 황제의 비상대권으로 입법시켰다.
러일전쟁 종전 후 남부 지방을 대상으로 농지개혁이 계속 추진되자, 다시 잡음이 터져 나왔다.
남부, 특히 전라도 일대에는 개항 이후 상업적 농업으로 이익을 얻는 지주들이 많았고, 대지주 계급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농지개혁을 아예 막을 수는 없겠지만, 어떻게든 지연시키고 최소화하하기 위해 정부와 의회에 로비를 계속했다.
"구당(유길준)을 총리로 임명한 이유는, 구당이 개화당 내에서도 특히 사회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하기 때문이었소. 그런데 막상 권력을 잡으니 어쩔 수 없나 보군."
유길준은 최초의 미국 유학파이자 학무대신으로 국민교육을 입안한 장본인이자, 근대국민국가에 필요한 사회개혁을 지지했다.
하지만 김홍집처럼 오랜 실무관료로서의 장악력이나, 김옥균처럼 당 지도자로서의 카리스마를 갖지 못한 유길준은 막상 총리가 되자 개화당 주류에게 주도권을 내주고 끌려다니고 있었다.
"황공하옵니다. 성상의 우려를 총리에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이런 이야기는 짐이 직접 총리에게 전해야 맞소. 그런데 왜 경에게 말하겠소?"
이선은 정계에서 실질적인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는 김옥균과 박영효에게 경고를 보내는 것이었다.
20년 전에는, 김옥균이 조선에서 가장 급진적인 정치가였다. 구체제를 무너트리고 자주적인 근대국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실천으로 옮겼다.
그랬던 김옥균도, 막상 목표를 초과달성하게 되자 국내 개혁보다 해외 패권을 더 중시하는 제국주의 정치가가 되었다.
제국주의적 패권 추구는 이선도 다를 바 없었으나, 국내 개혁이 쌍두마차처럼 함께 달려 나가야 했다.
"절대 다수의 국민에게 평화와 안정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영토 확장이 무슨 의미가 있겠소? 짐은 입헌정치와 정당을 존중하기에 가급적 개입하고 싶지 않소이다만, 의회와 정당이 정부의 발목을 잡으면 곤란하지. 그렇지 않소?"
이선은 개혁 입법이 지지부진할 때마다 민의원과 중추원을 해산시켜 버리고 싶다는 욕망이 계속 들었다. 하지만 그 자신이 스스로 입헌체제를 출범시켰고, 황제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의회를 해산시켜 버린다는 나쁜 선례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 송구하옵니다. 시정하도록 하겠습니다."
황제의 경고에 김옥균이 고개를 숙였다. 이선은 다시 부드러운 어조로 격려했다.
"고맙소. 짐은 고균을 믿소. 우린 무려 25년 동안 같은 길을 걸은 동지였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기를 바라오."
"황공하옵니다. 신은 언제나 성총을 보좌하길 바랄 뿐입니다."
김옥균이 물러난 후, 이선은 새삼 민의원과 중추원의 명단을 살펴보았다. 개화당 일색이었다.
‘지금까지는 일당 독재가 위로부터의 개혁에 도움이 됐던 건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20년이 지나니까 서서히 고인물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군.’
이선 스스로도 솔직히 인정했다. 헌법과 의회가 존재했지만, 대한제국은 실질적으로 황제 전제(專制), 개화당 일당 독재였다.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위해 신속한 의사 처리 시스템이 필요했고, 지금까지는 매우 유효했다.
그러나 광무 10년을 기점으로 자주독립은 완성되었다. 가장 위협적인 일본의 위협이 사라졌고, 러시아의 힘도 빠졌다. 청나라는 죽을 날을 기다리는 불치병 환자였다.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은 대한제국을 동아시아 문제의 파트너로 여길 수 있는 지역강국으로 인정했고, 동맹과 밀약을 잇달아 체결했다.
수호통상조약 체결 이래 오랜 숙원이었던 불평등조약의 개정, 영사재판권도 열강으로부터 되찾는 데 성공했다. 아직 관세자주권만큼은 열강이 돌려주지 않으려 했지만, 세계대전이 일어나면 충분히 되찾을 수 있다.
위로부터의 근대화, 외형적 근대화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온 상황이었다. 아래로부터의 근대화, 내면적 근대화도 촉진시켜 진정한 근대국민국가를 완성해야 했다.
‘결론은 선거법을 개정해서 더 민의에 가까운 의회를 만들어야 하고, 개화당에 대적할 만한 제대로 된 야당이 등장해야 해. 향후 10년은 개화당의 능력에 필적할 세력이 없겠지만, 후속 세대가 빨리 성장해야 한다.’
시대의 흐름을 올라탔다가 내려오고 있는 개화당의 후속 세대가 등장해야 했다.
아마도 10년 후에 닥칠 세계적인 혁명의 바람에 대비할 수 있도록, 그때까지 새로운 정치 세력이 육성되길 바랐다.
* * *
2회 총선거 결과와 4차 개화당 내각의 성립, 유길준 내각의 행보에 실망하는 건 단연 개혁적 자유주의자들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이 잠시 기대를 걸었던 독립당도 다시 개화당의 일부가 되었고, 개화당 일색인 의회는 새로운 정치개혁과 사회개혁에 소극적이었다.
개화당의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그들 대부분이 명문 벌열(閥閱) 출신의 경화사족(京華士族)이었다. 자주독립과 위로부터의 근대화에는 열성을 올렸지만, 투표권 확대와 사회개혁에는 소극적이었다. 이들이 원하는 건 결국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일종의 과두체제였다.
"쳇, 개화당이나 독립당이나 어쩔 수 없군."
"하나같이 뿌리가 명문가 도련님들이니 어쩔 수가 있나."
"하긴. 김홍집은 경주 김씨, 김옥균은 안동 김씨, 박정양과 박영효는 반남 박씨, 서광범과 서재필은 대구 서씨, 유길준은 기계 유씨, 기타 등등……. 대부분 노론 명문가 출신이지."
"어제의 혁명가가 오늘의 독재자. 일본의 삿쵸 번벌 독재나, 대한의 경화사족 독재나 비슷하지 뭐."
"세상이 바뀌었는데, 언제까지 기호(畿湖) 놈들만 권력을 독점할 생각인지?
서울과 경화사족에 오래된 반발을 느끼고 있는 서북 지방, 평양이 재야 세력의 거점이 되었다.
전통적인 양반 관료나 지주가 적은 대신, 상업이 발달한 많은 평양은 새로운 시대에 빠르게 적응했다. 상공업의 빠른 발전으로, 평양은 상공인이 여론을 주도했다.
특히 러일전쟁으로 평양 일대의 군수공업이 크게 성장하면서, 평양은 전쟁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빠르게 군수공업으로 전환한 이승훈처럼 돈벼락을 맞아 대자본가로 성장한 케이스가 적잖았다.
평양은 서울에 대하여 찬탄과 열등감이 교차했다. 잘 교육받은 평양의 지식인과 상공인들은 서울 사람들처럼 중절모를 쓰고 양복을 입고, ‘촌스러운 사투리’를 대신해 ‘세련된 서울말’을 썼지만, 콤플렉스가 사라지지 않았다.
조선 건국 이래 500년째 권력을 얻지 못한 채 주변부를 맴돌고 있는 서북인들의 콤플렉스는 부를 얻게 되자 정치적 욕망으로 확대됐다.
"모두 러시아와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태를 보았지? 더 이상 귀족 정치, 파벌 정치는 안 돼. 민의를 대표하는 군민공치가 답이야. 평민들이 나서야 해."
서북은 러일전쟁의 소문을 가장 신속히 접하는 곳이기도 했고, 1906년 러시아 혁명의 소식도 빠르게 퍼져 나갔다.
한국의 자유주의자들도 1906년 혁명에 열광했다. 유럽 최후의 전제제국이었던 러시아조차도 ‘군민공치(君民共治)’의 입헌정치라는 대세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던 것이다.
"개화당은 모든 신민을 사랑하시는 성상의 지극한 뜻을 받들지 못하고 있다."
"국민이 단결하여 개화당에 포위되어 있는 황제 폐하를 구출하자!"
서북, 특히 평양은 황제 이선을 열렬히 지지했다. 이선은 왕족의 신분으로 독립전쟁의 분수령이 된 평양성 전투를 진두지휘한 영웅이자, 고려조 이래 500여 년 만에 평양을 서경으로 승격시키고 제2의 수도로 육성하고 있는 군주였다. 서북 사람 모두에게 빛나는 영웅 군주였다.
서북은 지금까지 ‘이선의’ 개화당을 열렬히 지지했지만, 황제와 개화당이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면서, 이제는 개화당이 일군만민의 진정한 국민국가를 방해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오직 존귀하신 대황제 폐하 한 분 외에는, 모든 대한국민은 평등을 향유해야 합니다. 자유와 평등, 군민공치는 세계의 대세입니다."
전국을 순회하며 협동조합과 국민계몽을 설파하고, 강연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30세의 청년 안창호가 ‘신민(新民)’ 운동의 중심에 섰다.
"국민국가에서, 신하-백성, 신민(臣民)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국민, 신민(新民)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새로운 국민이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나가야 합니다!"
안창호로 대표되는 청년 자유주의자, 양기탁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주의 언론인, 이승훈을 중심으로 하는 진보적 상공인이 연합하여 신민회(新民會)를 결성했다. 지도부 면면은 대부분 서북 출신이고, 아직 정당으로는 발전하지 않았지만, 새로운 재야세력의 출현이었다.
"유림이라고 언제나 시대에서 뒤쳐질 수는 없다. 위로는 성상의 성지를 받들고, 아래로는 국민의 여망을 모을 수 있는 새로운 정당을 건설하자!
박은식, 신채호 등 개신(改新) 유림은 ‘대동회(大同會)’라는 개혁적 유림단체를 결성했다. 대동회는 상투를 깎고 신학문을 익히는 근대적 유림을 대표했다.
가장 보수적인 유림이 전통을 고수하려던 영남 남인들의 고장, 경상도조차도 개신 유림을 지지했다. 작은 포구에 불과했던 부산의 놀라운 변화를 직접 눈으로 보고, 무엇보다도 북벌의 성공은 보수적인 유림조차 개신으로 돌아서게 했다.
개화당 독주를 저지해야한다는 데 신민회와 대동회가 일치하면서, 연합하여 전국 정당으로 발전할 기미를 보였다.
"그 어떤 정파도 진정으로 농민을 대변하지 못한다. 농지개혁이 완수되면, 농림대신직을 내려놓고 농민들을 대표할 단체를 만들 생각이오."
가장 진통이 많은 남부의 농지개혁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전봉준은, 대지주의 적이자 자영농의 벗이라는 정치적 위치를 확실히 했다. 그는 삼남 지방의 소농을 중심으로 하는 농민정당을 구상했다. 북유럽과 동유럽의 농민당들처럼, 인구의 절대다수가 농민인 국가에서 농본사회적 이상을 구현하는 게 목표였다.
광무 11년, 대한제국 건국 10주년.
새로운 국민, 새로운 자유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 121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