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440화 (439/812)

121화 황제의 후계자

광무 11년 봄.

김옥균-태프트 밀약이 공개되지 않아 국민은 남만주가 대한제국의 세력권이 되었다는 걸 알지 못했지만, 마침 서양 열강들로부터 영사재판권을 회수하여 치외법권을 완전히 폐지하고, 최혜국 대우도 쌍무적 관계가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 두 번째였다. 이제 서양 열강도 대한제국이 ‘근대적 문명국가’라고 인정한 것이다.

불평등조약의 개정이라는 오랜 숙원이 이뤄지자 민심은 크게 기뻐했다.

"이제 대한국이 서양 열강과 대등한 국가라고 인정받게 된 게 아닌가!"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정부와 중추원에서도 조약 개정에 환호하며 황제께 존호(尊號)를 바치겠다고 했지만, 이선은 고사했다.

"중추원은 대황제 폐하께 존호를 가상(加上)할 것을 의결하였사옵니다."

"경들의 충정은 진정으로 고마운 일이나, 앞으로 존호는 사양하겠다고 이미 6년 전에 명한 바 있다."

이선은 체질적으로 과시와 허세를 싫어하고 실리를 선호했다. 존호는 군주의 개인적 권위를 빛내는 용도 외에는 없었다.

북벌 성공 후에 빗발치는 요청에 존호 8자를 받기는 했으나, 더 이상 받을 생각이 없었다.

"황제 폐하께서옵서는 세종대왕과 정조 선황제 이래 최고의 성군이시니, 후손이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마땅히 기려야 하옵니다."

"세종께서도 존호를 받지 않으셨으나, 후손이 그 업적을 모르는가? 번거롭게 하지 말라."

정통성이 약할수록 존호에 더 집착했으니, 광해군이 56자로 역대 최다의 존호를 받은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32자를 받은 태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정작 조선 최고의 명군인 세종은 생전이든 사후든 존호를 받은 적이 없었다.

존호 가상은 이선의 고사로 중단되었지만, 4월 11일 계천기원절을 기념하는 행사는 진행되었다.

환구단에서 하늘에 올리는 제례를 행하고, 근위사단의 열병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대한제국 건국과 황제 즉위 10주년을 맞이하여, 축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계천기원절 당일, 황성 주민들은 황제의 법궁(法宮)인 경복궁과 실질적으로 거주하는 경운궁 주위로 몰려들어 만세를 외치고 국가를 불렀다.

황제가 탄 어차(御車)가 대안문 밖으로 나오는 순간, 환호는 절정에 달했다.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 성수무강하사, 해옥주를 산같이 쌓으소서. 위권이 환영에 떨치사, 오! 천만세에 무궁케 하소서."

무개차(無蓋車)에 타고 있는 대원수 제복 차림의 이선이 손을 들어 답례하자, 일제히 만세가 쏟아졌다. 황제의 답례에 개중에는 눈물까지 흘리며 감격하는 이도 있었다.

이선도 사람이기에, 즉위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하늘을 찌르는 자신의 인기에 내심 기뻐했다.

그래도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점이 있었으니, 이선은 개인숭배라면 질색이었다. 점점 자신이 일본의 천황 신성화에 비견될 숭배를 받으니, 기쁘기는커녕 불편한 마음까지 들었다.

‘5백 년 동안 유교를 국시로 군주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학습시켜 왔고, 제국 선포 이후에도 정부가 황제 숭배를 교육시키고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인가.’

국민의 소박한 충성이야 기쁘게 받아들이겠지만, 관료들, 특히 군부의 과잉 충성은 역으로 불안감을 심어 주었다. 그러니 북진회와 같은 사적 단체까지 등장하는 것이었다.

전쟁 이후, 북진회는 적발되어 주도자들이 군사재판을 받았다.

"우리 대황제 폐하께옵선 북벌의 꿈을 이루신 위대한 군주이시오. 북진과 만주 고토 수복은 대한국민 전체의 염원이오. 지난 전쟁에서, 일본과 손을 잡고 러시아를 몰아내 만주를 수복해야 마땅했소. 우리는 황제 폐하의 신하이자 대원수의 군인으로서, 서양 열강의 눈치나 보는 유약한 정부를 대신해 황제 폐하와 대한국의 숙원을 이루고자 하였을 뿐이오. 이게 죄라면 달게 받겠소이다."

북진회 주도자, 7사단 참모 장호익 참령은 당당하기 짝이 없었다.

미국과 밀약을 맺고 남만주를 세력권으로 확보한 김옥균조차도, 군부 강경파에게는 ‘서양 열강의 눈치를 보는 유약한’ 정치가로 보였다.

정작 그 ‘유약한 외교 정책’은 이선이 주도한 것이지만, 군인들에게 황제는 신성한 무오류의 존재였고 정부가 문제였다.

국수주의자들은 연일 육군법원에 탄원을 보냈다. 심지어 군부 내에서 북진회를 동정하는 여론이 나오자, 이선이 직접 나서 선을 그었다.

"군주에 대한 충성을 빙자하여 군부 내 파벌을 조장한 걸 정당화하지 말라!"

북진회가 반역을 꾀한 건 아니었기에, 육군법원은 주모자인 장호익 참령에게 파벌 형성의 죄를 적용하여 징역 5년을 선고하고, 북진회에 가담한 장교들이 군복을 벗는 선에서 재판은 종결되었다.

"군인은 오직 국가에 충성할 따름이다. 군부 내에 사사로이 파벌을 조장하는 자,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황제이자 통수권을 지닌 대원수의 엄포에 장교들은 고개를 조아렸다.

‘이러다가 실제 역사의 일본 꼴 나는 거 아닌가? 진정한 국민국가라면 군주가 아닌 국가에 충성해야 하는데. 애초에 통치권과 통수권이 모두 황제에게 있는 구조가 문제인가…….’

이선은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없는 미래를 생각해 보았다. 헌법과 의회가 존재하는 입헌군주국이지만, 자신은 실질적으로 전제군주였다.

현재 대한제국이 모범으로 삼는 건 독일제국이었다. 헌법과 보통선거로 선출되는 의회가 존재하긴 하지만, 사실상 카이저가 전권을 행사했다. 사회민주당이 노동계급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원내 제1당의 자리에 올라도, ‘시끄러운 제1야당’ 이상으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총리와 각료들도 의회가 아니라 카이저가 지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의회가 견제 역할이라도 하는 독일과 달리, 정부 여당 일색인 한국 의회는 독재의 합법적인 도구였다.

민의원이 개원한 광무 4년 이후에는 내정의 상당 권한을 정부와 의회에 이양했지만, 군사와 외교는 황제가 독점했다. 김옥균이 미국과 맺은 밀약도 황제와 정부 핵심 인사 몇몇만 아는 정도였다.

이런 정치구조가 1907년 시점에서 이상할 건 하나도 없었고, 당연한 것이었다. 완전한 입헌군주국인 영국이 오히려 예외적이었다.

그럼에도 이선은 안주할 생각이 없었다. 10년 뒤면 당연해 보이는 구조가 사라질 터였다.

‘전제군주는 내가 마지막이어야 해. 내 후계부터는 국가의 상징인 입헌군주가 되어야 한다.’

이선은 마지막 전제군주가 될 생각이었다. 그 자신도 스스로 생각하는 ‘비상시국’이 끝나면, 전제군주의 자리에서 내려올 생각이었다.

그다음부터는, 보통선거권이라는 민의에 기초한 의회에서 선출되는 정부가 통치권을 행사해야 했다. 군주는 영국처럼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야 했다. 그게 바로 국가의 안정과 왕가의 영속성을 보장하는 길이었다.

‘입헌군주에 어울리는 후계자 교육을 미리 시켜 둬야지.’

장남 이진은 어느새 열한 살이 되어 있었다. 미래의 입헌군주에 어울리는 소양을 쌓기 위해, 이선은 장남의 교육에 신경을 썼다.

이진은 전통적인 유학뿐만 아니라 서구식 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근대 학문을 공부했다. 한문, 영어, 프랑스어를 두루 익혔다.

서구식 교육을 받은 첫 번째 왕족인 의친왕 이강과 영친왕 이영이 이진의 학습을 도왔다. 학문에 큰 관심이 없었던 이강과 달리, 그 자신이 호학(好學)인 이영은 영국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10살 어린 조카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자 했다.

조선은 관례적으로 11세 무렵에 세자를 책봉하는 관습이 있었다. 어차피 군주의 의지대로라 언제 책봉하든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슬슬 태자를 책봉할 때가 오고 있었다.

"폐하, 대한의 사직이 튼튼하려면 국본(國本)을 정하셔야 하옵니다. 제국의 격에 맞는 황태자를 책봉하소서."

황실의 원로, 황제의 백부인 이재면이 건저(建儲)의 총대를 멨다. 계천기원절 다음날, 이재면은 종친들을 거느리고 태자 책봉을 권했다.

"짐의 나이가 이제 마흔인데, 태자 책봉이 당장 급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국본을 정하는 일은 국가의 경사이자 관례이옵니다. 성상의 보령(寶齡)이 한창이시나, 마땅히 어진 이를 국본으로 세우시어 종묘사직을 억만년토록 보전하시옵소서."

이재면이 고개를 조아리며 거듭 권했다. 이선도 고개를 끄덕였다.

"백부님의 말씀은 옳습니다. 국본을 정하는 건 중요한 일이지요. 하오면 누구를 국본으로 삼는 게 좋겠습니까?"

"오, 오직 성상의 뜻에 달려 있는데 신이 어찌 감히 망령되게 대답하겠습니까?"

이재면이 난처해하며 말을 더듬었다. 종친들도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황실 원로라고 해서 후계를 함부로 언급할 수 없었다.

왕조 내내 세자 책봉은 가장 민감한 문제였다.

유교적 원리에 따르면 적장자 계승이 원칙이었다.

당장 태조부터 세자를 막내로 세웠다가 왕자의 난을 촉발시키지 않았던가?

그런데 태종도 적장자를 세자로 책봉했다가 그 자질에 실망하여 삼남을 세웠으니, 그가 바로 조선 최고의 명군 세종이었다.

"짐에게는 아우 셋이 있고, 아들도 셋이 있습니다. 마땅히 어진 이를 세우는 게 국가의 홍복이 아니겠습니까?"

태상황 이형은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 황제 이선. 40세. 황귀비 이씨 소생.

차남, 순친왕 이척. 34세. 폐비 민씨 소생.

삼남, 의친왕 이강. 31세. 귀인 장씨 소생.

사남, 영친왕 이영. 21세. 황태후 김씨 소생.

일녀, 정혜공주. 18세. 황태후 김씨 소생.

황제 이선은 광무 10년 현재 3남 2녀를 두었다.

장남, 황자 이진. 11세. 황후 김씨 소생.

차남, 황자 이안. 6세. 얀코프스카 소생.

삼남, 황자 이은. 2세. 황후 김씨 소생.

일녀, 황녀 이희. 9세. 황후 김씨 소생.

이녀, 황녀 이라. 3세. 얀코프스카 소생.

이진은 광무 원년에, 이안(얀)은 6년에, 이은은 작년 9월에 태어났다. 이희는 광무 3년에, 이라(이리나)는 재작년에 태어났다.

"덕량과 기량이 어떤가에 대해서는 반드시 성상께서 먼저 굽어살피고 계실 것이니, 어진 이를 선택하는 것은 오직 폐하의 간택에 달렸습니다."

이재면은 조심스러워하며 선택권을 황제에게 넘기긴 했지만, 결국 정해진 수순이었다.

황제의 아들이 존재하는 한, 아우들은 계승권 밖이었다.

그중에서도 적자는 이진과 이은이고, 이안은 혼혈에 서자이니 후계에서 자동 탈락이었다.

이선은 계승법과 황실의 제도를 담은 황실전범(皇室典範)을 계속 가다듬고 있었다.

"안 그래도 올해에는 황실전범을 제정하려고 했습니다."

"오오, 실로 만세에 무궁할 법도이옵니다. 하오시면……."

이선의 개인적인 신념이라면, 황실의 후계자는 꼭 적장자가 아니라 유능한 황족이 뒤를 이어야 했다. 그 기준에선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었다. 아들을 제치고 동생이어도 상관없었다.

‘지금까지만 놓고 보면, 군주로서의 자질은 영이 제일 낫다.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고, 선량하고. 소극적이고 지나치게 겸손한 게 단점이긴 하지만, 동양적 법도에선 크게 어긋나지 않지.’

이선은 19살 어린 막내아우의 재능에 감탄하길 여러 번이었다. 만약 자신에게 아들이 없다면 영친왕 이영을 후계로 고려했을 터였다.

하지만 아들이 존재하는데, 동생을 후계자로 내세울 순 없었다. 무엇보다 아직 어린 자식들이 앞으로 어떤 재능을 보일지 미지수였다.

여전히 유교적 관념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딸이나 혼혈 왕자는 군주로 상상도 못 할 터이니, 결국 답은 정해져 있었다.

"적장자 계승을 원칙으로 해야겠지요."

황제의 말에 이재면 이하 종친들이 크게 기뻐했다.

"황자 진은 타고 난 자질이 의젓하고, 효성과 우애가 일찍이 소문났으며, 나라 사람들이 모두 장성을 기대하고 있으니 태자로 책봉하심이 가합니다!"

"그러하옵니다. 폐하의 뜻이 정해졌으니 실로 종묘사직과 백성들의 복입니다!"

종친들은 혹여 이선이 황실전범을 내세워 조선 왕조의 원칙이었던 적장자 계승을 바꿀까 봐 걱정이던 참이었다.

막상 조선왕조 내내 적장자가 계승한 사례가 많지는 않아도, 원칙은 원칙이었다.

‘청나라처럼 황제가 후계자를 뜻대로 지명하는 제도가 낫지 않겠냐마는, 어차피 장차 입헌군주제가 될 거면 군주로서의 자질이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이선은 청나라처럼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을 고려했다.

결국 군주의 자질이 중요하기 때문에 태자밀건법과 같은 변형적인 계승법도 나온 것인데, 입헌군주제에선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군주가 얼마나 정부와 국민을 존중하냐가 더 중요했다.

그날 밤, 경운궁 석조전.

이선은 거듭된 의례와 정무로 피곤한 몸을 의자에 기댔다.

군주로서 필요한 의례는 최소화하고, 의례에 능숙한 순친왕 이척에게 위임하기도 했지만, 결국 군주로서 빠질 수 없는 의례가 자주 있었다.

정무도 여전히 쉼이 없었다. 예전처럼 만기친람은 아닐지라도, 이선은 수많은 사안을 직접 보고받고 처결했다.

매일매일 보고문은 올라오고, 꼼꼼히 살펴보고 비답(批答)하고, 대신들과 논의하고, 결정사항을 집행했다.

‘30대까지는 그럭저럭 몸이 버텨 줬는데, 확실히 나이 40이 되니까 예전만 못하구만.’

이선은 밤늦게까지 전깃불을 켜 놓고 일을 하는 게 비일비재했다. 전기가 도입된 덕에 낮과 밤이 따로 없었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눈을 혹사시킨 탓에, 이선은 결국 상시적으로 안경을 착용해야 했다.

하도 많은 보고서를 읽고 결제하니, 손과 어깨에도 무리가 왔다. 결국 웬만한 사안은 직접 쓰지 않고 비서에게 구술(口述)했다.

허리, 등, 목 등 사무직에게 오는 자잘한 고통들도 찾아왔다. 결국 정형외과도 주치의를 두어야 했다.

‘군주가 국가 제1의 노복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군.’

몸이 예전만 못하니 쉬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중요한 사안은 직접 다 관리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꾸준히 운동을 해서 관리한 덕인지 큰 병은 없었지만, 근래 두통이 계속 발생하는 게 걱정이었다.

‘설마 뇌종양은 아니겠지? 그러면 곤란한데. 만약 뇌종양이라면 현재 의학 수준으로는 치료 불가. 앞으로 최소 10년은 더 버텨줘야 해. 가능하면 20년은 더…….’

이선은 자신이 장수할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애초에 조선 군주 평균 수명이 46세였다. 그만큼 군주의 위치란 단명을 재촉하는 자리였다.

의학의 발달로 웬만한 병은 예방하긴 하겠지만, 70세 이상으로 오래 살 것 같진 않았다.

‘일 많이 하고, 음식 빠르게 먹고, 술 많이 마시고, 잠 적게 자고, 건강에 안 좋은 건 다 하는데.’

이선은 늘 심리적으로 시간에 쫓겼기 때문에, 잠도 적게 자고 음식도 빠르게 대충 먹기 일쑤였다.

그러면서 매일 밤에는 포트와인을 마셔야 잠에 들 수 있었다. 주정강화를 해서 한국에서도 좋은 맛으로 즐길 수 있는 포트와인은 그만큼 알코올 도수도 높았다. 이선이 매일 입에 달고 다니는 술이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과로예요. 제발 일과 술을 좀 줄이세요."

"그러고 싶은데, 그럴 수야 있나."

"술은 줄일 수 있잖아요?"

"그게 인생의 몇 안 되는 낙인걸. 노력해보리다."

마르가리타는 의사로서 이선이 큰 병이 없다고 판단했지만, 자잘하게 건강을 해치고 있는 것에 우려를 표했다. 이선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막상 실천으로 옮기진 않았다.

‘후계자를 세울 시기라……. 벌써 그럴 때가 되었나. 황태자라는 의무를 벌써부터 지우고 싶진 않았는데. 하긴, 언젠가 내가 죽은 후를 대비하긴 해야겠지……. 내가 없어도, 진이 잘 할 수 있을까?’

이선은 잠든 아들을 바라보며, 후계자 선택을 결심했다.

‘내 생전에 미리 다 준비를 해놓아서, 내 아들만큼은 전제군주로서의 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해야지.’

자신의 후계자에게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의무가 주어질 것이다.

- 122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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