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남만주철도주식회사
광무 11년(1907) 6월 12일.
남만주철도 주식회사(南滿洲鐵道株式會社, The South Manchuria Railway Company), 약칭 만철(滿鐵, MRC)이 공식 출범했다.
"남만주철도 주식회사 출범을 선언합니다!"
포츠머스 조약에 따라 러시아가 보유한 동청철도 남만주 지선, 즉 여순-하얼빈 구간이 국제 신디케이트에 매각됨에 따라 만철의 성립이 준비되었다.
만철은 주식회사의 형식으로 주를 모집했고, 사전 합의에 따르면 유니온 퍼시픽 철도 회장 해리먼이 이끄는 국제 신디케이트가 지분의 34%, 한국 정부가 33%, 일본 정부가 33%를 확보할 계획이었다.
여순-대련-요양-봉천-장춘-하얼빈을 잇는 만철은 약 1,000KM로, 만주의 남북을 종단했다.
먼저 러시아가 부설한 광궤에서 표준궤로 개궤(改軌)하는 작업이 시작됐다. 만철은 경의선과도 연결되어, 한반도와 만주를 이을 계획이었다.
앞선 6월 10일, 안봉선(安奉線)이 공식 개통되었다. 압록강 이북의 안서(단둥)에서 봉천(심양)을 잇는 안봉선은, 한반도와 만주를 잇는 중요한 노선이었다.
이제 부산에서 출발한 열차가 황성과 평양을 지나, 의주에서 압록강철교를 건너 안봉선을 이용해 봉천까지 연결될 수 있었다.
950KM의 부산-의주 한반도 종단철도, 280KM의 안봉선, 도합 1,230KM를 환승할 필요 없이 직통으로 잇는 특급열차 ‘광무호(光武號)’가 운행을 개시했다.
"특급열차 광무호를 이용해 주시는 승객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광무호는 부산에서 출발하여, 대구, 천안, 황성, 개성, 평양, 의주, 봉황성에만 정차하고 봉천까지 직행합니다. 부산에서 의주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23시간 30분, 압록강을 넘어 봉천까지는 7시간 30분으로 31시간이면 남쪽 끝 부산에서 만주의 중심부인 성경 봉천부에 도달합니다."
광무호는 시속 40KM로, 기존 경부·경의선 열차보다 2배가 빨랐다. 20세기 초의 증기기관차로는 최고 수준의 속도였다.
부산에서 서울까지는 약 11시간, 서울에서 평양까지는 약 6시간 30분, 평양에서 의주까지는 약 6시간으로, 부산에서 의주까지 한반도를 종단하는 데 24시간 이내로 가능했다.
머나먼 남의 땅으로 여겨졌던 만주도, 봉천의 한-청 국경 입국심사시간을 포함해 평양에서 14시간이면 도달이 가능하니 반나절이면 충분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의 끝에서 끝이었던 부산에서 의주까지가 한나절이면 이동 가능하게 된 것이다.
"기차 들어온다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
궤적을 내뿜으며 무정차로 빠르게 지나가는 광무호를 기다리던 군중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철도만큼 근대화의 획기적인 변화를 감지하게 하는 건 없었다.
기관차 전면에 태극기와 이화문을 엇갈리게 매달고 달리는 광무호는 그 자체로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상징했다.
"부산에서 의주까지 하루면 충분하다고?"
"조상님들이 보시면 기절할 일이구만. 옛날에는 부산에서 한양까지 가려면 보름은 걸렸는데. 의주까지 가려면 한 달은 걸렸겠지?"
"청나라 심양까지도 한 번에 연결된다니."
"심양뿐인가? 만주를 넘어 더 멀리 아라사와 구라파까지도 연결될 수 있다네."
"정말 놀라운 시대야."
사람들은 감탄했다. 오랫동안 한반도라는 영역에만 안주해 있던 이들로선, 만주와 그 너머 시베리아와 유럽까지 철도로 연결된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움을 느꼈다.
대한제국은 만주를 향해 질주하는 광무호처럼, 대륙을 향해 비상하는 국가였다.
첫 시행 운전 중인 광무호는 부산에서 서울까지 무정차로 내달렸다.
6월 9일 자정에 출발한 광무호는 오전 11시에 황성역(남대문역)에 도착했다. 이선과 정부 각료들은 첫 시승을 위해 역에서 대기했다.
마침내 광무호가 플랫폼에 도달하자, 일제히 박수와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광무호 만세! 만철 만세!"
이선은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광무호의 귀빈석에 탑승했다. 황실과 정부 인사들을 위해 특별히 제공되는 귀빈석은 움직이는 호텔과 다름없었다.
6월 10일 자정, 광무호는 압록강을 넘어 안서역에 도착했다.
이선과 각료들은 안서의 신축 호텔에서 1박을 한 뒤, 10일 정오에 안봉선 개통을 선언했다.
"안서-봉천선 개통을 공식 선언합니다!"
"이제 대한국과 대청국, 한반도와 만주를 잇는 철도가 완성되었습니다. 양국을 잇는 철도가 영원한 우호친선과 평화에 기여하길 위하여! 더 나아가 유럽과 아시아가 평화와 번영으로 이어지길 위하여!"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한만(韓滿) 우호 만세!"
이선의 개통 축하 연설에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제 대한제국과 만주, 러시아, 유럽이 철도로 연결되는 순간이 이뤄졌다.
"광무호와 만철은 대한국의 새로운 대륙 정책을 상징하게 될 것이외다."
공식행사가 끝난 뒤, 이선은 각료들 앞에서 새로운 대륙 정책의 포부를 알렸다.
안봉선은 봉천에서 남만주철도 본선과 접속한다. 만철 본선을 통해 하얼빈까지 연결되고, 하얼빈에서 러시아가 운행하는 동청철도(만주 횡단철도)로 갈아타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연결된다. 이를 통해 유럽까지 연결될 수 있었다.
"만철은 단순한 철도회사가 아니오. 남만주를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만주의 동인도회사가 되겠지. 대한은 만철을 통해 만주로 나아갈 것이오."
만철은 철도 운행만 담당하는 게 아니라, 운송 사업, 항만 운영, 제철 산업, 석탄 산업, 철로 주변의 조차지(철도 부속지) 행정, 호텔 운영, 이주민 모집 등 다양한 사업에 뛰어들 계획이었다.
일개 회사를 뛰어넘은 제국주의 시대의 다국적 식민 기관, 20세기의 동인도회사였다.
* * *
만철은 1907년 6월 창립 선언까지 순조롭게 진행된 게 아니었다.
만철의 운영 주체는 사전 합의에 따르면 국제 신디케이트, 한국 정부, 일본 정부였다.
1907년도 환율은 1파운드 = 5달러 = 10원 = 10엔 = 10루블이었다. 각국은 고정환율을 택하고 있어서 화폐 가치의 변동에도 환율은 그대로 유지됐다.
만철의 1차 자본금은 1억 5천만 달러, 즉 3억 원이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도 1억 원을 마련해야 했다.
아무리 러일전쟁의 특수를 받았다지만, 정부의 2년 치 예산을 모두 철도에 투자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한제국은 국립 안산 제철소와 자치령 무순·본계 탄광의 현물출자로 5천만 원을 확보하고, 나머지 5천만 원은 주식 모집과 국채 발행으로 확보했다.
한국인들의 철도 열기는 대단했으니, 민간 몫으로 배정된 주식 1천만 원이 엄청난 경쟁이 몰렸다.
"만주붐은 온다……. 만주로 가자!"
"미래를 대비해 단 한 주라도 사야 해!"
"다른 데 투자한 돈 다 빼서라도 만철 주식을 사라고!"
자산가들 사이에서 만철 주식 열풍이 불었다. 장차 막대한 이익을 내리라는 기대에, 빚을 내 가면서까지 주식 확보에 나섰다.
정부의 기대 이상으로 1천만 원이 조기 확보되자, 민간 대상 주식 발행을 늘려 2천만 원까지 확대됐다.
나머지 3천만 원은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여 부담했다. 도합 8천만 원을 투자한 대한제국 정부는 만철의 주요 대주주였다.
문제는 미국과 일본의 지분싸움이었다.
‘철도왕’ 해리먼이 주도한 국제 신디케이트는, 당초 예상을 깨고 자본 모집이 신통치 않았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지진의 여파로 유니온 퍼시픽 회사의 주가가 폭락하고, 해리먼의 신용이 떨어지면서 자본 모집에 차질을 빚었다.
"유니온 퍼시픽도 폭락했는데, 뭘 믿고 저 머나먼 만주철도에 투자하나?"
"철도로 아메리카, 아시아, 유럽을 잇는다고? 허무맹랑한 소리!"
샌프란시스코 지진이 촉발한 미국 자본시장의 위기는 1907년까지 지속됐다.
당대의 사람들은 아직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후대에 ‘1907년 공황(Panic of 1907)’으로 명명할 미국의 자본 위기가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국제 신디케이트는 순수한 민간 자본의 연합으로 구성할 계획이었으나, 자본 조달이 난항을 빚어 위기에 봉착했다. 만주 이권에 관심이 많은 루스벨트 행정부가 구원투수로 나섰다.
"이대로 가다간 영국이나 프랑스 자본이 국제 신디케이트를 지배한다고 나설 터인데, 그럴 수야 있나. 어디까지나 미국 자본이 신디케이트를 지배해야 한다."
해리먼을 대신해서 루스벨트의 측근이자 차기 국무장관 후보로 여겨지는 녹스 상원의원이 국제 신디케이트를 주도하게 되었다. 백악관의 확실한 보증을 받게 되자, 미국 자본가들은 만철에 자본 투자에 나섰다. 신디케이트 참여를 원하는 영국과 프랑스 자본가들은 대부분 배제되었다.
이선은 자본 모집 상황에 놀랐다.
지분 34%로 대주주 역할을 할 국제 신디케이트는 각국 정부와 무관한 다국적 자본이 되어야 했다. 한국 정부 33%, 일본에서 채무 변제를 대신해 33%를 확보할 미국 정부 사이에서 국제 신디케이트가 캐스팅 보트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정부의 정책 논리가 지배하는 정부 자본과 달리, 다국적 민간 자본은 철저하게 자본 논리로 접근할 터였다. 미국 자본이 주도하더라도, 반(反)독점법으로 미국 대자본과 마찰을 빚는 루스벨트 행정부의 뜻대로 자본가들이 움직이진 않으리라는 계산이 있었다.
그런데 이리되면 사실상 미합중국 연방정부가 국제 신디케이트를 지배하게 될 터였다.
‘미국 정부가 일본 지분까지 확보하면 67%의 권한을 행사하게 되네. 이렇게 되면 사실상 미국 정부가 만철을 지배하게 되는 거잖아?’
아무리 미국과 우호적 관계를 맺었다지만, 미국에 만주 이권을 전부 바칠 생각은 없었다. 미국 자본이 대거 한국에 출자되었다고 해도, 러시아를 대신해 미국에 만주를 바치려고 밀약을 맺은 게 아니었다 본래 한국이 청나라에서 따낸 안봉선 부설권과 운영권은, 만철과는 별개였다. 하지만 만철 본선과 안봉선이 따로 놀게 되면 경쟁자가 될 터이니, 한국은 안봉선도 만철의 관할로 들어가는 데 합의했다. 애초에 안봉선 부설에도 미국 자본이 적잖이 들어간 터였기에, 한국은 양보했다.
한국은 만철에 안산 제철소와 본계·무순 탄광의 이권도 일정 부분 공유했다. 자본금의 33%를 속히 확보할 목적도 있었지만, 대한제국을 대신해 만주 이권을 세련되게 잠식하고 장악할 만철에게 만주인들의 분노를 돌릴 목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한국이 만철의 지배적 위치에 있어야만 의미가 있었다. 루스벨트의 구상대로라면 미국이 만철의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었다.
‘역시 교활한 제국주의자 시어도어 루스벨트…….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나? 순박한 니콜라이하고는 차원이 다르구만.’
이선은 숙련된 제국주의자인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솜씨에 감탄했다. 시야가 좁고 고집이 세서 답답하긴 해도, 자기 마음에 들면 아낌없이 내주는 차르하고는 달랐다.
루스벨트는 막대한 대일 차관으로 일본을 경제적으로 종속시킨 뒤에, 한국과 만주까지 달러 경제권으로 종속시키려는 거대한 복안을 갖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이른바 ‘대백색함대(Great White Fleet)’를 구성해 단숨에 세계 3위의 해군력을 확보했고, 대서양은 유럽에 맡기더라도 태평양은 미국이 독점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이른바 아시아-태평양 패권 구상이었다. 고립주의가 대세를 차지하고 있는 20세기 초의 미국에서, 오직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이었다.
‘실제 역사에선 일본의 똥배짱으로 무산되었던 계획을 실천으로 옮기려 하는군. 그래도 미국 대통령은 황제와 달리 임기라는 게 있지. 루스벨트 임기가 1년 반 남았나? 밀약 당사자인 태프트라면 루스벨트하곤 좀 다르겠지. 민주당으로 정권이 넘어가면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동안 일본 지분이 미국에 못 넘어가도록 해야겠다.’
이대로 가다간 루스벨트의 뜻대로 돌아갈 상황이었다. 이선은 일본을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일본도 모처럼 한국과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남만주철도 참여는 일본의 위신과 관계된 일이었다. 아무리 사이온지 내각이 해군과 손을 잡고 북수남진, 해주육종을 내세웠다지만 만주에서 12만이나 되는 일본 청년이 죽었다는 걸 무시할 수 없었다.
조슈-육군의 망상이 무너졌다고는 해도, ‘12만 젊은이의 피 값’에 집착하는 여론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었다.
"우린 어떻게든 자본 확보를 성사시킬 겁니다. 차관도 만기 때까지 다 갚을 겁니다. 그러니 결코 지분을 차관 변제용으로 내놓지 않겠소이다!"
5천만 달러, 1억 엔에 해당되는 차관을 변제하는 대신, 남만주철도의 지분을 넘기라는 주일미국공사의 요구에 사이온지 내각은 단호히 거부했다.
아무리 돈이 없어서 허덕이고 있다곤 하지만, 전쟁으로 얻은 유일한 만주 이권인 남만주철도 지분 33%를 미국에 그냥 넘길 순 없었다. 이건 여론도 용납하지 않을 터였다.
"주식 모집! 채권 발행! 남만주철도 주식회사에 함께합시다!"
더 이상 돈 나올 구석이 없는 일본 정부로선, 민간 자본과 외국 자본에 기댔다.
재벌은 물론이요, 국민에게까지 손을 벌려 십시일반으로 모아 겨우 2천만 엔을 확보했지만, 남은 8천만 엔이 문제였다.
"이대로 일본을 미국에 넘겨줄 수 없고, 미국이 만주 이권을 독점하게 내버려 둘 수도 없소."
국제 신디케이트에서 배제된 영국이 동맹국 일본의 구원투수로 등장했다.
영국은 미국 자본이 일본과 만주까지 지배하려 드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3차례의 외채 모집 끝에, 영국은 600만 파운드(약 6천만 엔)를 일본에 빌려주었다.
"역시 믿을 수 있는 나라는 동맹국 이기리스(영국)뿐이다!"
일본은 영국의 ‘은혜’에 감격했다. 영국을 향한 일본의 의존도는 더욱 높아졌다.
꾸역꾸역 8천만 엔까지 도달했지만, 일본은 자본 확보 만기일인 1907년 4월까지 나머지 2천만 엔을 확보하지 못했다.
예전의 일본이라면 1천만 달러(2천만 엔) 정도는 추가로 쉽게 빌렸겠지만, 러일전쟁의 여파로 신용도가 바닥을 기는 일본으로선 더 이상 돈 나올 구석이 없었다. 이미 3번이나 외채 모집에 응한 영국도 추가 제공은 어렵다는 태도를 보였다.
일본은 애가 탔다. 만기일까지 자본금을 확보하지 못했다간 지분이 날아갈 위기였다.
이때 한국이 나섰다.
1907년 4월, 사이온지는 극비리에 한국의 초청을 받아 황성을 방문했다.
만주를 경제적으로 지배할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지분싸움은, 창립 이전부터 물밑에서 치열하게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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