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457화 (456/812)

138화 만국평화회의

이선은 내심 냉소가 터졌다.

불과 7년 전, 의화단 전쟁 당시 ‘훈족의 공포를 보여 줘라! 중국인들이 독일인의 얼굴조차 감히 쳐다보지 못하게 하라’고 연설했던 그 카이저가, 뜬금없이 청국 주권의 보호자로 나서니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비외르쾨 밀약이 좌절되고 알헤시라스 회의에서 왕따 당하더니 좀 맛이 갔나?’

빌헬름의 막가파식 외교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그는 즉위 초부터 ‘외교 정책? 짐이 곧 외교 정책이다!’라고 외쳤다.

예를 들어 1906년 모로코 위기가 한창일 때, 이런 일이 있었다. 빌헬름이 주독 미국 대사관의 만찬에 참석했을 때 이런 말을 했다.

「독일의 인구는 4천만에서 6천만이 됐다. 인구 증가는 좋은 일이지만 식량이 문제다. 프랑스는 넓지만 인구가 부족하고 발전이 필요한 지역들이 있다. 프랑스가 국경을 서쪽으로 옮겨 그 자리에 독일인들을 보내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예방전쟁을 외치는 군부를 억제하고 있던 빌헬름의 딴에는 농담이었겠지만, 미국 외교관은 결코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독일의 프랑스 침략 야욕’에 대해 보고했고, 루스벨트는 독일에 전쟁 발발 시 프랑스를 지원하겠다고 경고했다.

이런 식의 즉흥적인 발화와 행동이 독일 외교에 끼치는 악영향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언제는 미국과 손을 잡고 일본을 공격할 궁리를 하더니, 갑자기 해군 참모본부에 미국 침공 계획 작전을 짜라고 요구하여 장교들을 아연하게 만들었다.

영국과 타협할 수 있다고 했다가, 러시아와 프랑스에 불가능한 반영 대륙 동맹을 제안했다.

이러니 고위 관료들이 카이저를 불신하는 것도 당연한 귀결이었다. 빌헬름의 큰 목소리와 달리 점차 핵심 정책에서 소외되었고, 그럴수록 그의 공상은 더욱 심해졌다.

카이저의 대청 정책도 즉흥성의 극치였다. 의화단 전쟁 때는 열강들에게 중국을 분할하자고 외치다가, 세력권 확대가 뜻대로 되지 않자 갑자기 청국 주권의 보호자로 돌변했다.

"폐하, 한국 역시 청국의 주권을 옹호합니다. 최근에 러시아와 맺은 협약에서도 이를 천명하지 않았습니까?"

"영국과 프랑스와 일본이 중국 남부를 분할하고, 러시아와 미국과 한국이 만주를 분할하고 있소. 그런데 어찌 주권을 존중한다고 하겠소?"

결국 독일을 제외한 열강 간에 청국 세력권 분할 합의의 기미가 보이자, 빌헬름은 일단 어깃장을 놓는 쪽을 택한 것이었다.

독일은 만성적인 재정 적자에 시달리는 청국에 차관을 제공하고, 군사고문단을 파견했다. 청 조정이 기쁘게 생각하는 건 당연했다.

청 조정은 비밀리에 독일과 동맹 가능성을 타진했다. 이홍장이 맺은 노청동맹이 사문화된 현재, 청국은 새로운 열강을 후견인으로 원했다.

"문호개방의 원칙을 확인하고 있지요. 산동 역시 독일의 세력권이 아니겠습니까?"

"독일은 청국의 군제개혁을 돕고 있소. 차관을 제공하고, 군사고문단을 파견했지. 하이에나처럼 뜯어먹으려는 영국이나 프랑스와는 다르오."

"한국도 청국 황제 폐하의 개혁을 지지합니다. 한국이 독일을 모델로 성장했듯이, 청국도 그리된다면 좋은 일이지요."

이선은 웃는 낯으로 계속 카이저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해 줬다. 하지만 카이저는 요지부동이었다.

"청국이 강성해지는 걸 영국이 러시아가 막으려고 하고 있지 않소? 영국은 티베트를, 러시아는 몽골을 빼앗으려고 하고 있지. 짐은 이런 상황을 용납하지 못하겠다 이거요!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와 함께 청국과 동맹을 맺어 주권과 영토를 보호할 생각이오."

빌헬름이 갑자기 청나라의 삼국동맹 가입 가능성을 언급하자, 이선도 더 이상 카이저의 허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자식, 안 되겠어.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이선은 포츠머스 조약 이후 동아시아의 신질서를 짜기 위해 노력했다. 일본을 복건으로 유도하고, 미국과 만주 분할의 밀약을 맺고, 러시아에도 남만주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이제 영국과 프랑스와도 승인을 받을 예정이었다.

영국-프랑스-러시아-한국-일본-미국의 세력권 분할 합의가 눈앞이었다. 그런데 독일이 어깃장을 놓겠다니 용인할 수 없었다.

"폐하께서 정녕 그러길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시면 될 일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짐에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선은 정곡을 찔렀다. 진정으로 청국을 삼국동맹으로 끌어들여 새로운 판을 짜고 싶다면, 한국 황제가 아니라 독일 외무부와 논의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당사자도 아닌 이선에게 이렇게 장광설을 늘어놓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뷜로와 외무부 고관들은 카이저의 대청 정책이 또 변덕에 의한 헛짓거리라고 생각하는 거지. 다 망해가는 청국을 동맹으로 끌어들여 어쩌겠다고?’

"귀국은 청국의 이웃나라요. 독일도 청국 문제에 있어 이해당사자란 말이오. 키아우초우(칭다오)는 한국에서 지척이 아니오? 그러니 우리 두 나라는 함께 청국 문제를 논의할 필요가 있소."

‘뭔 소리야, 대체. 이게 무슨 논리인 거야?’

이선은 빌헬름의 논리가 이해되지 않았다. 상대방이 이해를 하거나 말거나, 빌헬름의 말은 계속됐다.

"짐은 중국 시장을 독점하려는 영국에 맞서, 후발주자들이 연대할 필요가 있다고 보오. 영국은 마치 청국이 자기들 소유인 것처럼 굴고 있소. 영국과 한패가 된 프랑스나, 그 하수인인 일본과는 논의할 건 없겠지. 하지만 만주와 화북에 세력권을 둔 독일, 러시아, 미국, 한국은 함께 논의할 수 있소."

결국 카이저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였다. 동아시아에서 영국의 우월적인 위치에 맞서, 독일-러시아-미국-한국-청국이 손을 잡자는 말이었다.

한국은 작은 나라지만, 미국과 러시아를 잇는 연결고리 역할을 할 수 있는 나라였다.

"귀국 군대는 프로이센을 모델로 삼아 무장한 군대요. 청국의 북양군도 그렇지. 독일군과 북양군, 귀국 군대가 힘을 합치면, 동아시아에서 대적할 군대가 없을 것이오. 독일군은 산동에서, 귀국 군대는 남만주에 주둔하며 공동으로 청국을 보호합시다."

빌헬름은 군대의 연관성을 들어 설득했다. 그는 자신의 제안이 이선에게 솔깃하리라 기대했다. 남만주 세력권도 인정해 줄 터이니, 함께 청국을 ‘보호’하자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선으로서는 카이저가 외교적 파트너로서 신뢰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언제 어떻게 튈지 모르고, 독일 외무부와 협의나 했는지 의문이었다. 어쩌면 진지하게 고려한 게 아니라, 식사 중에 즉흥적으로 튀어나온 제안일지도 몰랐다.

"폐하의 제안은 굉장히 흥미롭습니다만, 매우 중대한 사안이라 짐이 혼자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귀국 후에 정부 및 의회와 협의해 보겠습니다."

"허어, 답답하구려! 우리는 모두 군주이거늘, 어찌 정부의 눈치를 보는 것이오? 우리가 책임져야 할 대상은 신과 국민이지 정부와 의회가 아니오! 폐하께서 마땅히 결단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까?"

독일은 체제상으로는 입헌군주정이지만, 카이저는 전제군주정을 지향했다.

프로이센식 외견적 입헌군주정을 택한 대한제국 황제에게, 외교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전권이 있었다. 실제로 러시아와는 그렇게 밀약을 맺었다.

"확답을 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만, 짐은 정부와 의회를 존중합니다. 기다려 주셨으면 합니다."

"안타깝구려. 짐은 폐하가 외교의 귀재라기에, 좋은 협의가 되리라 생각했소. 유감스러운 일이오."

빌헬름이 ‘정부 및 의회와 협의’하는 걸 싫어하는 걸 알기에, 거절 의사를 외교적으로 돌려서 표현한 것뿐이었다.

‘왜 독일이 외교적으로 고립됐는지 알겠다. 파트너로 전혀 신뢰가 안 가는 상대야. 아무래도 세계대전은 피할 수가 없겠어. 그렇다면 당연히 협상국의 편을 들어야지.’

어차피 독일과는 이해관계가 겹치는 바도 거의 없었다. 이선은 카이저와 협의를 하느니, 차라리 영러협상을 적극적으로 주선해 주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 * *

이선과 대한제국 사절단은 베를린을 떠나 네덜란드로 향했다.

독일에서 얻은 성과는 없었지만, 이선은 대신 확신을 얻었다. 독일의 고립은 기정사실이 될 것이다. 러시아와 미국은 물론이요, 영국과 프랑스와의 관계도 더욱 튼튼히 해야 했다.

1907년 9월 28일, 네덜란드 헤이그.

6월 15일에 개최된 만국평화회의는 어느덧 종장에 이르고 있었다.

이름 그대로 20세기 초의 ‘만국’이 참여한 회의였다. 1907년 당시, 전 세계에 주권국가는 약 50개국이었다. 이 중 45개국이 회의에 참석했으니, 만국이란 이름이 무색하지 않았다.

아시아에서는 페르시아, 시암, 청국, 일본, 대한제국이 참석했다. 제국주의 시대, 이들이 사실상 아시아 주권국가의 전부였다.

"황제 폐하 만세! 대한국 만세!"

이선이 암스테르담을 거쳐 헤이그에 도착하자, 대한제국 만국평화회의 대표단이 도열하여 환영했다.

수석대표 서광범, 차석 이상설, 대표단 법률고문 겸 주 네덜란드 공사 이준, 군사고문 이동휘, 공보담당 이위종 등이 차례대로 고개를 숙였다.

"석 달 넘게 경들의 노고가 많소. 대한이 국제회의에 참석하여 만국과 함께 평화의 기틀을 만들고 있으니, 참으로 감개무량한 일이오."

"황공하옵니다, 폐하!"

이선이 진정으로 감개무량했던 건, 회원국으로 명백히 초청을 받고도 열강의 외면으로 인해 회의장에 들어서지 못했던 실제 역사를 떠올려서였다.

냉혹한 제국주의 국가의 질서에 대한제국 외교관들은 좌절하고 말았다.

이준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분사(憤死)했고, 이상설은 일제가 조작한 궐석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귀국하지 못했다. 끝내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통렬하게 열강의 위선을 꼬집었던 이위종은 훗날 러시아 혁명에 가담하여 일제에 맞서 싸웠으나, 그 후의 행보는 잊혀져 최후를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랬던 이들이, 변화한 역사에서는 당당한 주권국가 외교단의 일원으로 만국평화회의를 함께 만들어나가고 있으니 감개무량할 따름이었다.

"네덜란드 여왕 폐하의 정부는 대한제국 황제 폐하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역시 비공식적 방문이었지만, 이선은 네덜란드 여왕 빌헬미나(Wilhelmina)의 초청을 받았다.

대한제국과 네덜란드는 실제 역사에서는 수교가 없었지만, 변화한 역사에서는 한국이 유럽에서 9번째로 수교한 국가였다.

현재 대한제국은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헝가리, 덴마크, 벨기에, 네덜란드, 스페인, 스위스, 스웨덴, 포르투갈, 그리스 등과 수교를 맺었다.

열강들과 달리 군소 유럽 국가들하고는 특별한 이슈가 없었으나, 우호적인 관계를 표명했다.

특히 네덜란드는 만국평화회의의 주최국이자, 네덜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를 지배하고 있어 한국도 기타 국가들보다는 깊은 관계를 맺었다. 헤이그에 전권공사가 파견되어 벨기에 공사를 겸했다.

네덜란드가 비록 이제는 3류 열강이라고는 하지만, ‘강소국(強小國)’을 지향하는 나라로서 배울 점이 있었다. 특히 열강 간의 외교적 균형을 맞추려는 자세는 높이 평가할 만했다.

"여왕 폐하의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비록 양국의 수교 역사는 짧지만, 그 관계는 250년에 달합니다. 사실 대한제국이 가장 먼저 관계를 맺게 된 서양 국가는 17세기의 네덜란드였습니다. 네덜란드인 벨테브레는 조선인 박연이 되어 군사발전에 기여했고, 서기관 하멜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최초로 세계에 알렸습니다. 이제 20세기가 되어, 대한제국은 더 이상 고요한 은자의 나라가 아닙니다. 서구 문물을 흡수하고 국가를 개혁하여, 당당히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세계 평화에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양국의 우호와 평화가 영원하길 바랍니다."

이선의 짧은 연설에 좌중의 박수가 쏟아졌다.

"얼마 전, 시암 국왕께서 네덜란드를 방문하셨습니다. 시암 국왕 폐하와 한국 황제 폐하는 전통을 탈피하고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나가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군주께서는 아시아의 미래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시암 국왕 라마 5세 쭐랄롱콘도 유럽을 순방 중이었고, 개명군주로서 유럽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선에 대한 환호도 그 못지않았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50대 중반의 중년인 라마 5세보다, 만으로는 39세라는 한창나이에, 20세기 초의 동양인으로서는 체격도 좋고 인물도 훤칠한 이선은 외관상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27세의 젊은 빌헬미나 여왕은 이선과 함께 헤이그 거리를 산책했다. 실크해트에 연미복 차림인 이선은 서양 예법에 따라 드레스 차림인 여왕과 팔짱을 끼고 산책했는데, 어색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두 군주를 본 네덜란드인들은 모두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했다. 자국 여왕에 대한 경의였지만, 먼 곳에서 온 동양 황제에 대한 경의이기도 했다.

「한국 황제는 매우 문명화되고 계몽된 아시아 군주다. 문명의 발전과 정치력에 있어서, 황제는 일본의 미카도(천황)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황제는 서양 문명의 진보를 조국에 이식했고, 조국의 운명을 바꿨다. 황제는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하여, 통역 없이 어디든 갈 수 있다. 게다가 그는 언제나 친절함과 정중한 예의를 갖춰서, 온 곳마다 자연스럽게 사랑과 존경을 느끼게 한다.」

네덜란드의 한 신문은 이선을 극찬했다.

이선은 이미 유창한 영어, 세련된 매너, 유쾌한 태도로 유명했다. 대청 황제나 일본 천황은 엄숙하고 고고한 구름 위의 존재였지만, 대한 황제는 스스럼없이 서양인들과 대화하고 악수했다. 동양의 전제군주라기보다는 서양의 입헌군주에 더 가깝게 느껴졌다.

‘이미지 메이킹은 중요하지. 군주의 이미지가 국가의 이미지로 직결되는 시대인데.’

1903년 에드워드 7세가 파리를 여행하며 친근한 태도로 프랑스인들과 어울린 것이, 이듬해 영불협상의 성공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처럼 이선도 일상의 영역에서도 외교를 수행하는 중이었다.

10월 1일, 이선은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했다. 정식 대표단은 아니지만, 귀빈 자격으로 초청을 받았다.

러시아 대표 프리드리히 마르텐스(Friedrich Martens), 프랑스 대표 레옹 부르주아, 영국 대표 어니스트 사토우 등은 모두 이선과 친분이 있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이선에게 연설을 요청했다.

"친애하는 만국의 대표단 여러분, 초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세계 평화라는 대의를 갖고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대한제국은 문명의 일원으로서 평화를 애호하며, 문호 개방과 만국의 동등한 기회를 위해 힘썼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은 엄청나게 빠른 변화를 체험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문명의 진보를 빠르게 흡수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받은 바를 돌려주어 문명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세계 평화와 인류의 단결이라는, 인류 보편의 위대한 가치를 위하여, 짐과 대한제국 국민은 힘쓸 것입니다. 만국의 동지들이여, 평화를 위해 함께 전진해 나아갑시다."

짝짝짝짝짝-!

45개국 대표단은 일제히 기립하여 박수를 쳤다.

지극히 원론적인 이야기였지만, 사실 이선은 ‘진보적인 동양’을 대표하여 서양을 향해 외친 셈이었다. 진보의 극한을 향해 달렸던 서양이, 발전한 기술의 결과물을 들고 끝내 세계대전이라는 참화 속에 빠져든다면, 동양이 그 빈자리를 채우리라고.

‘제3차 만국평화회의는 8년 후 1915년에 예정되어 있었지만, 과연 그때 개최될 수 있을까?’

평화를 부르짖었지만, 이선은 평화의 가능성을 믿지 않았다.

유럽을 방문한 후에 그는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다. 제국주의 열강의 충돌은 필연이었다. 세계대전은 피할 수 없을 터였다.

- 139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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