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466화 (465/812)

147화 1910년

1910년, 광무 14년, 경술년 정월.

새로운 해가 밝았다. 특별할 게 없는 한 해의 시작이었지만, 이선은 새삼 특별한 기분이었다.

‘이 세계에 온 지 꼭 30년인가.’

21세기의 사학도 이선우의 기억을 갖고, 완화군 이선의 삶을 살게 된 것이 1880년 1월이었다.

이선은 아직도 가끔 자신이 기나긴 꿈을 꾸는 게 아닐지 의심할 때가 있었다.

물론 현실이었다. 어떠한 과학적 근거도 없었지만, 이선은 이 세계를 살고 있었다. 그는 종교를 믿지 않았지만, ‘신의 섭리’든 ‘역사의 우연’이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역사는 크게 바뀌었다.

‘1910년, 경술년이라.’

실제 역사에서는 절망의 해였다.

조선의 국권을 일제에 빼앗긴 해. 의병 전쟁마저 실패하고 수많은 조선인이 죽거나 기약 없는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그로부터 35년, 암흑의 시대가 조선과 동아시아에 드리웠다.

‘적어도 나의 역사에서는 그럴 일이 없다.’

이선은 자신이 암흑의 시대를 막았다는 것 자체로 일단 성공을 거뒀다고 여겼다. 35년간 기회 자체를 빼앗겼던, 한 세대의 가능성을 실험해 볼 수 있었다.

아직 갈 길은 한참 멀었다.

"폐하, 오늘 일정은 국무회의에 이어 원수부에서회의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음, 알겠소."

이선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상념에서 깼다. 시종무관장 민영환, 비서원경 이상설, 시종무관 안중근 부령이 시립(侍立)해 있었다.

"안 부령, 요새 공부는 잘되어 가나?"

"예, 폐하께서 명하신 바와 같이 비서원경께 사사(師事)하여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훌륭하군, 문무겸장이야."

이선은 웃으면서 안중근의 어깨를 툭 쳤다. 안중근이 황송한 듯 고개를 숙였다.

해군 장교 안중근을 시종무관으로 발탁한 건 이선이었다. 작년, 해군육전대 대대장으로 복무하던 안중근 참령을 부령으로 특진시키고 시종무관부의 배속 무관으로 임명했다.

1909년 10월 26일, 실제 역사에서라면 바로 이날에 있었던 하얼빈 의거를 떠올리고 즉흥적으로 내린 인사 조치였다.

‘이런 인사는 이번 한 번뿐이야.’

이선은 역사 속의 위인들과 접촉할 때, 일부러 선입견을 갖지 않고 대하려고 노력했다.

안중근이란 이름은 1900년 의화단 전쟁 당시 북경 공사관 방어전에서 알게 되었지만, 일부러 내색하지 않았다. 그가 역사 속에서 아는 안중근과 바뀐 역사의 안중근은 다른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반대에 있는 이완용도 마찬가지였다. 이선은 본능적으로 그 이름 석자에 혐오감을 느꼈지만, 바뀐 역사의 이완용은 유능하고 판단력 좋은 외무 관료였다. 그렇기에 외교관으로 중용하고 있었다. 인간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었다. 그 기대대로 이완용은 ‘대한제국주의자’가 되었다.

"안 부령이 학문에 관심이 많습니다. 무관이 아니었더라면 학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황공하옵니다. 비서원경께서 많은 가르침을 주셔서……."

"하하, 비서원경이야 워낙 훌륭한 학자니."

비서원경 이상설은 과거제를 폐지하고 대체된 고등문관시험 1회 수석 합격자이자, 어릴 적부터 신동으로 이름난 이답게 학자로서도 명망이 높았다.

이상설의 집은 수천 권의 장서로 유명했다. 전통적인 유학자 집안에서 자라 성리학을 익혔으나, 갑신경장 이후 변화한 바람을 타고 근대 학문을 빠르게 익혔다. 서양 법학·정치학·경제학은 물론이오, 사대부 출신으로는 드물게도 자연과학에도 관심을 보여 수학과 물리학 등에도 조예가 있었다.

독일 유학 후 성균관과 황성대학 교수에 재임하던 중, 이선이 학무협판으로 발탁했다.

학무대신과 만국평화회의 차석을 거친 후, 이선은 이상설을 궁내부 비서원경으로 임명했다. 비서원경은 차관급으로 품계상으로는 대신보다 낮아도, 황제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비서실장이라 실세라 할 수 있었다.

‘학자 출신이라 정치에 초연한 성향이 있지만, 능력이나 성품, 지향성 모두 훌륭해.’

1870년생인 이상설은 갑신경장 이후 근대화의 세례를 받은 첫 세대라 할 수 있었다. 이선이 장차 대업을 맡길 후속세대로 여기는 1870년대생 중에서도 이상설은 첫 번째 주자였다.

‘민영환은 출신의 한계 때문에 최고위직은 오르지 못하더라도, 계속 중책은 맡길 수 있겠지.’

민영환은 여흥 민문 중에서 최고위에 남은 유일한 이였다. 임오년에 역적으로 맞아 죽은 민겸호의 친아들이라 신정권에서 살아남기 어려운 처지였으나, 이선이 연좌제에 반대하여 미국 유학을 보냈다. 민영환은 조선의 충실한 신하로 남았고, 자신의 불리한 출신으로 인해 더욱 이선에게 충성했다. 개화당은 여전히 민영환을 탐탁지 않게 여겼으나, 이선은 그의 충성심을 의심치 않았다.

"조찬(朝餐)은 경들과 함께하고 싶군. 온 김에 같이합시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민영환, 이상설, 안중근은 일제히 황공해 했다. 황제와 식사를 함께한다는 건 가문의 영광이었다.

"안 부령, 그대는 의화단의 난과 러일전쟁을 직접 전선에서 지켜봤지. 그로 인해 동양 정세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들었네."

"황공하옵니다. 일개 군인으로서 짧은 생각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아니, 짐은 언제나 젊은 관료들의 생각도 들어 보고 싶네. 경은 장교로선 드물게 넓은 시야를 갖고 있어서, 짐이 시종무관으로 발탁하고 비서원경에게 사사하라 한 거야. 개의치 말고 이야기해 보게. 장차 그대가 생각하는 동양은 어찌 되겠나?"

시선이 안중근에게 집중되었다. 황제의 격려에 안중근은 특유의 대담함을 되찾고, 입을 열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감히 한 말씀 올리자면, 의화단의 난 이후 청국의 명운은 경각에 달려 있습니다. 천명은 이미 청조를 떠났으니, 머지않아 중국에 변혁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안중근은 자신이 가진 제한적인 정보만으로도, 중국의 변혁을 예상했다. 이선은 빙긋 웃었다.

"흥미로운 관점이군. 그럼 대한은 그 변혁에 어찌 대처해야 할까?"

"동양의 연대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합니다. 일본과의 동맹을 굳건히 하고, 서양 제국주의 열강이 중국을 분할하는 걸 막아야 합니다. 대한, 일본, 청국이 조약을 맺어 공동으로 군대를 운용함도 한 방법일 것입니다. 육군이 강한 대한, 해군이 강한 일본, 잠재력이 큰 청국이 함께 동양을 보호……."

"안 부령, 현실성 없는 소리 하지 말게.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민영환이 끼어들어 안중근을 면박 주자, 이선이 손을 내저었다.

"흥미로운 이야기네만, 안 부령은 아시아주의자인가보군."

"군인으로서 오직 국가에 충성할 뿐, 특별한 사상을 지향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북경 전투 이후 서양인들이 동양을 결코 동등한 대상으로 대우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안중근은 의화단전쟁과 러일전쟁을 겪으며 서양 열강에 대한 불신을 쌓았다. 실제 역사와 달리 일본의 침략을 겪지 않았으니, 일본을 적으로 여길 필요도 없었다.

일본의 힘이 한풀 꺾인 지금이야말로, 오히려 함께 손을 잡고 남과 북으로 중국의 변혁을 지도하여, ‘동양 평화’를 동양인의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품었다. 말하자면 한국형 아시아주의였다.

"대한은 영국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 및 러시아와 협상을 맺었는데?"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완전히 대등한 동맹은 아니라고 여깁니다.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장차 동양의 평화는 동양인의 손으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중근이 거듭 대담하게 말을 하니, 상관인 민영환이 입을 떡 벌리며 꾸짖으려고 했다. 그보다 앞서 이선이 먼저 말했다.

"안 부령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아네. 물론 완전히 대등한 동맹이 아니지. 하지만 어쩔 수 없네. 정치는 현실이야. 지금은 서양 열강에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하는 시대네. 그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으니까."

"황공하옵니다. 신의 어리석은 말로 성상의 어전을 어지럽혔으니, 죄를 청하옵니다."

"개의치 말고 말하라고 한 건 짐인데, 어찌 죄를 운운하나. 아무튼, 참고 기다리면 원하는 때가 올 것이네. 동양 평화를 동양인의 손으로 지킬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 그대들의 힘이 필요할 때가 올 거야."

이선은 중국 혁명과 세계대전 이후의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중국 혁명을 꿈꾸고 협력하는 이들은 대개 아시아주의자였다. 이선 자신은 아시아주의에 냉소했으나,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이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중화질서나 대동아공영권이 아닌, ‘완전히 대등한 주권국가들’의 아시아.

막 시작된 1910년대에 나타날 변혁의 세계였다.

‘이들도 역사의 변화를 함께하겠군.’

실제 역사에서라면, 이미 민영환은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자결했고, 이상설은 헤이그 특사로 궐석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러시아에 망명 중이었고,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사형수 신분으로 여순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들뿐만 아니라, 실제 역사에서는 자신의 능력을 채 꽃피워 보기도 전에 사라진 이들이, 바뀐 역사에서는 마음껏 능력을 발휘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선이 그리는 1910년대는 기회의 시대였다.

* * *

한창 솟아나는 젊음도 있다면, 스러져가는 늙음도 있었다.

조선 변혁의 계기가 된 임오군란 이후 어언 30여 년, 개화당 1세대들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할 시기가 왔다.

10년 전 홍영식이 가장 먼저 별세했으나, 이는 의화단의 난이라는 비극적인 상황에서 발생한 암살이었다.

하늘이 부여한 수명을 다해 쓰러지게 될 때였다.

먼저 별세한 건, 전 외무대신 서광범이었다.

작년 태프트 대통령의 취임 기념 특사로 도미했던 서광범은, 지병인 폐병이 악화되어 미국에서 입원했다.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1909년 8월 별세했다. 향년 51세, 만으로는 49세였다.

「내가 죽으면 이곳에 매장하지 말고, 대한에 묻어 달라. 번거롭게 방부 처리하여 실어 가지 말고, 화장하여 조국의 산야에 뿌려 달라.」

서광범의 유언대로, 동지이자 동문인 서재필이 장례 절차를 맡아 화장하여 유골을 들고 1910년 초 귀국했다.

개화당 동지들은 유골로 돌아온 서광범의 죽음을 슬퍼했다.

"젊은 위산(緯山, 서광범의 호)이 우리 중에 가장 먼저 떠날 줄이야!"

"병약한 몸으로 외교 일선을 돌아다니다 세상을 떠났네그려. 대한은 결코 그대의 충정을 잊지 못하리."

보빙사절단의 일원으로 조선인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한 서광범. 가장 먼저 양복을 입고 발레 감상을 즐길 정도로, 서구 문명에 대한 편견 없이 빠르게 적응한 사대부였다. 크게 눈에 띄는 역할은 하지 않았지만, 개화 관료로 중요한 직책들을 역임해왔다.

실제 역사에서는 1897년에 39세로 별세할 만큼 건강이 좋지 못했다. 이선이 병약한 그를 각별히 배려하였음에도 주어진 수명을 크게 늘리진 못했다. 작년 미국행을 맡긴 것도 신병 치료를 위해서였다. 끝내 미국에서도 서광범의 병은 치료하지 못했다.

대한제국 정부는 서광범에게 익헌(翼獻)이란 시호와 함께 금척대훈위수장을 추서했다.

나이 70을 바라보는 원훈들의 시대도 끝나 가고 있었다. 2대 총리 박정양은 오늘내일하고 있었고, 초대 총리 김홍집도 지병이 악화되어 쓰러졌다.

김홍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이선은 직접 병문안을 갔다. 김홍집은 제국의 원훈이었다.

"폐하께서 이 누추한 곳을 친림해 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경은 국가의 원훈인데 마땅히 와야지요. 아니, 누워 계시오."

김홍집이 억지로 일어서려고 하자, 이선이 말렸다. 김홍집은 사위 이시영의 부축을 받아 끝끝내 자리에 앉았다. 바싹 마른 몸에는 완연히 죽음의 그림자가 보였지만, 눈빛과 목소리만은 또렷했다.

"신하된 도리로 어찌 감히 성상 앞에서 누울 수가 있겠습니까?"

대개혁을 이끈 첫 수상이었지만, 김홍집은 본래 유학을 익힌 사대부였다.

"짐과 대신들, 국민은 모두 경이 어서 쾌차하기를 기원하고 있소."

"신의 나이 예순아홉, 과분할 만큼 오래 살았습니다. 이제 갈 때가 되었지요."

김홍집은 죽음에 해탈한 듯이 말했다. 평균수명이 낮은 20세기 초에 69세라면 장수한 노인이었다.

"어찌 그런 말을 하시오? 아직 경의 지혜가 이 나라에 필요하오."

"황공하오나, 아닐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현명한 군주이시며, 대신들은 유능합니다. 의회를 통해 민의도 반영되고 있지요. 이 늙은 신하가 필요한 시대는 지났습니다. 신은 이제 없어도 됩니다."

총리 퇴임 후에도 계속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일본의 ‘원로’들이었다. 이토는 나이 70에도 변화한 역사로 인해 죽지 않고, 여전히 일본 정치의 막후에서 활동했다. 그와 달리 대한제국의 원훈 김홍집은 물러설 때를 알았다.

"경이 기반을 만들어 준 덕이오. 경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대한도 없었을 것이니."

김홍집은 ‘비 오는 날의 나막신’이라는 세평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복잡한 행정을 처리함에 있어 그만한 관료가 없었다. 갑신경장 이후 방대한 근대화 작업에서 김홍집은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런 점에서 그 어떤 개화당 지도자도 김홍집에게 필적할 수 없었다. 예컨대 김옥균은 이데올로그이긴 해도 실무 관료는 아니었다.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려면 보좌할 악장(콘서트마스터)이 필요했는데, 이선에게 있어서는 그가 바로 김홍집이었다.

"아닙니다. 폐하께서 이 나라를 이끌어 주신 덕이지요. 신은 그저 부속품에 불과했습니다. 현명하고 밝은 주군을 만나 국가를 재조(再造)하였으니, 나라의 녹을 먹는 사대부로서 이보다 더 영광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이선과 김홍집 사이에는, 이선과 김옥균과 같은 동지적 유대감은 없었으나, 서로를 신뢰하는 군신의 표본과도 같았다.

"대한의 국위가 상승일로이니, 신은 더 이상 여한이 없습니다. 다만 마지막으로 아뢰고자 한다면……."

"무엇이든 말해 보시오."

"이미 대한은 지난 30년간 나라를 근본적으로 재조하였습니다. 그 변화의 신속함에, 늙은 신하는 지난날을 기억하기도 어렵습니다. 지금까지는 자주독립을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으나, 앞으로는 조화가 이뤄지길 바랍니다. 후속세대가 조선의 전통을 기억할 수 있도록……."

마지막 영의정이자 첫 총리로서 근대화를 이끌며 유림으로부터는 온갖 비난을 받았지만, 그 자신은 스스로를 전통을 계승한 사대부라고 생각했다. 국가의 녹을 먹는 사대부로서 변화의 흐름을 받아들여, 시대에 필요한 개혁의 선봉에 섰을 뿐이었다.

이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의 충언을 마음 깊이 기억하겠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노신은 결코 크나큰 성은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김홍집은 마지막 남은 사대부의 거인이었다. 그의 죽음은, 그 자체로 한 시대의 끝이었다.

광무 14년 2월, 전 총리대신 김홍집은 별세했다. 향년 69세.

대한제국 정부는 그에게 충헌(忠獻)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미 최고 훈장인 금척대훈위수장은 생전에 받았기에, 이 이상의 훈장은 추서할 수도 없었다.

"아! 고 충헌공의 충정을 어찌 잊겠는가? 삼일간 애도의 기간을 선포하고, 장례는 국장의 예로 대우하도록 하라."

김홍집의 장례는, 대한제국 황족을 제외하고는 최초로 국장으로 엄숙히 거행되었다.

실제 역사에서, 김홍집은 갑오개혁을 주도했다가, ‘왜대신’으로 찍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을미사변은 그의 책임이 아니었지만, 총리로서 비난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아관파천 이후, 김홍집은 탈출과 망명의 기회가 있었다. 일본 공사관으로 호위하겠다는 제안에도 불구하고, 김홍집은 단호히 거절하고 죽음을 택했다.

「나는 조선의 총리대신이다. 다른 나라 군대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부지하느니, 차라리 조선 백성의 손에 죽는 것이 천명이다.」

광화문 거리에서 백성들에게 몰매를 맞아 죽고 시체가 찢길 정도로 비참한 최후였지만, 장렬하고 숙연한 죽음이었다. 이런 이를 어찌 친일파라고 할 수 있겠는가?

김홍집은 어려운 시대에 자신의 책무를 다하고자 했던 조선의 충신이었을 뿐이었다.

변화한 역사에서, 김홍집의 죽음은 황제와 국민의 애도를 받았다. 장례는 대한제국 국장으로 이뤄졌다. 그의 역사적 역할에 보다 더 어울리는 장례였다.

그와 동시에, 한 시대가 저물고 있었다.

- 148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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