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민족 해방
1911년, 선통(宣統) 원년.
새 황제의 연호가 시작되는 첫해였다.
이제 나이 여섯 살이 된 어린 황제에게 주어진 환경은 가혹했다.
천하를 제패하여 동양 최강으로 군림하던 대청제국의 위상은 산산조각 난 지 오래였다. 1860년 영불연합군의 북경 함락과 1900년 9국 연합군의 북경 함락은, 사실상 왕조의 종말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역대 중국 왕조 중에 외세 침략자에 의해 수도가 두 번이나 함락되고도 살아남은 왕조는 없었다.
격세지감이었다. 한때 만주족의 정복은 얼마나 거대했던가? 만주와 중국을 넘어 몽골과 티베트, 신강에 이르기까지 대청의 깃발이 휘날렸다.
청조는 살아남기 위해 최후의 몸부림을 쳤다. 지난 10년간의 광서신정은 나름의 성과도 있었고, 청조의 미래가 반드시 멸망으로 가는 길은 아니었다.
"열성조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사직, 형님으로부터 부탁받은 천하를 반드시 지켜 내리라."
"신이 충심으로 보좌하겠습니다."
아들이자 어린 황제를 대리하는 감국섭정왕 재풍과, 초대 내각총리대신 숙친왕 산기는 의지를 확고히 다졌다.
자신의 대(代)에서 청조가 무너지는 걸 가만히 지켜만 볼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청조의 명운을 지켜 내야 했다.
"일본과 조선처럼 변혁을 이뤄 내려면, 군사와 정치의 개혁이 완료되어야 한다. 신건육군이 완성되고 헌정을 실시한다면, 문과 무에서 힘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섭정왕의 가장 큰 과제는, 결국 청조를 향한 신민의 충성심을 어떻게 지켜 낼 수 있냐는 것이었다.
채찍과 당근이 모두 갖춰져야 했다. 청조를 지킬 수 있는 강력한 군대와, 신민의 동의를 얻기 위한 헌법과 의회.
광서신정의 주된 업적은 신건육군, 즉 군의 근대화였다. 북양군을 중심으로 착착 근대화가 이루어졌다. 지방의 신군도 그럭저럭 근대적 군대의 꼴을 갖춰 나가고 있었다.
흠정헌법대강은 3년 전에 발표되었고, 헌법에 기초하여 2년 뒤에 선거가 실시되어 의회가 구성될 예정이었다.
선통 원년 5월, 의회 설립에 대한 칙령이 공표되었다.
"선통 3년에 전국적인 선거를 실시, 의회를 개설한다……."
섭정왕과 숙친왕 내각은 의회 설립을 예정하는 칙령이 혁명파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입헌파들의 지지를 얻어 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이 조칙이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도대체 이게 뭐야? 이 발표대로라면 투표권자는 극소수밖에 안 되잖아?"
"의회를 만한동수로 한다니, 이건 또 뭔 소리야? 이게 무슨 대표성이 있단 말이냐?"
의회설립안에 따르면, 의회는 상원격인 추밀원과 하원격인 자정원으로 구성된다. 추밀원은 각 성의 지방의회인 자의국에서 추천한 인사 절반, 황제가 임명한 인사 절반으로 구성된다. 지방의 한족 향신이 절반, 황제가 임명한 만주·몽골·장족(티베트)·회족(무슬림)이 절반이 될 예정이었다.
추천·임명제인 상원은 그렇다 쳐도, 직접선거로 선출될 하원도 인구비례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
투표권은 세금 납부를 기준으로 만 25세 남성으로 한정되어, 인구의 약 1%인 400만여 명으로 예정했다. 그런데 만주족 대표와 한족 대표는 별도의 선거구로 선출되고, 그 수는 각각 400명씩 동수였다. 이른바 만한동수의 원칙이었다.
약 4억의 한족이 약 400만의 만주족보다 인구가 약 100배 많은 걸 감안하면, 일방적으로 만주족에게 유리한 구조였다. 만주족은 1만 명당 1인을 대표한다면, 한족은 1백만 명당 1인을 대표했다.
"일본도 처음 선거를 실시할 때는 인구의 1퍼센트 정도였고, 한국도 3퍼센트 정도였다. 첫 선거이니 이런저런 시행착오가 많을 터, 제한적인 투표권을 실시하는 건 당연하다. 동양에서 400만이나 투표권을 가진 사례는 없다."
"인구비례를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한인 99인에 만주인 1인이어야 정당한 구성이라는 건가? 그렇다면 진정한 협화라 할 수 있겠는가? 만한동수의 원칙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이는 단순히 의회 설립의 문제가 아니라, 청조가 가진 근본적인 딜레마였다.
광서제는 청조가 살아남기 위하여, 장차 만주족의 특권을 저버리고 ‘중화제국’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생각했다. 그는 이를 위해서 변발 단발과 양복 착용, 천도까지 생각했다. 다만 무술변법의 급진적 개혁으로 인해 반동을 불러일으킨 만큼, 순차적으로 진행을 계획하던 중 서거했다.
하지만 만주 황족과 기인들에게 이는 자신들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상실하는 길이었다. 지금도 만주족 다수는 만주어도 잊어버리고 사실상 한화(漢化)되어 가고 있는데, 근대화랍시고 전통을 모조리 부정해 버린다면 소멸의 길로 접어든다고 우려했다.
그렇다고 해서 인구의 절대다수인 한족들을 계속 무시할 수는 없으니, 들고나온 게 ‘협화(協和)’와 ‘만한동수’였다. 만주족과 한족이 완전히 대등한 입장에서, 영국 연합왕국이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처럼 공동통치를 구상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독일인들과 헝가리인들은 인구라도 비슷하지! 중국하고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말이 좋아 대등한 통치지, 만주인들이 요직을 독점한 내각처럼 만주 우위의 지배를 계속하겠다는 거 아닌가?"
입헌파들은 만주 황실을 존중했고, 특히 그 수장인 강유위는 ‘보황(保皇)’을 자처할 만큼 광서제의 충신이었다.
궁극적으로 아이신기오로(애신각라) 황실을 정점으로 한 중화제국으로 전환해야겠으나, 당장 만주족들에게 모든 특권을 내려놓으라고 할 수는 없었다. 점진적으로 융화를 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중국에는 반드시 황제가 필요하다. 중국인에게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는 아직 이르다. 중국인의 민도가 그만큼 뒤따른다고 생각하는가? 어림도 없다. 결국 힘을 가진 자가 새로운 황제가 되겠다고 설칠 것이다. 그 결과는 끊임없는 분열과 내란이다."
강유위는 중국에서 민주주의와 공화국의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고, 특히 중국인의 민도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더욱이 혁명은 필연적으로 변강의 독립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 이는 중화의 붕괴를 의미한다. 작금의 중국과 변강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정통성 있는 황제는, 오직 대청 황실뿐이다. 대청 황실을 중심으로, 중국에 진정한 입헌군주제를 실시하자."
강유위는 이른바 ‘혁명과분(瓜分)’을 들고 나왔다. 한족 중심의 혁명이 주변부 민족들의 독립을 도미노처럼 불러일으킬 것이고, 열강이 주도하는 분할이 현실이 되리라 우려했다.
"최근에 선거를 치른 한국하고 너무 비교되는군. 한국에선 의회제와 정당정치가 안착했던데."
"어쩌다가 옛 번국인 조선에도 이렇게 부끄러운 처지가 되었단 말인가?"
입헌파들은 거듭 실망을 토해 냈다. 최근 3회 민의원 총선거로 다양한 정당구도가 확립된 한국과 너무나 비교되는 상황이었다.
"입헌을 주도하고 있는 게 사법대신 강유위 아닌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무술변법의 주도자가 어쩌다 이렇게 보수화됐나?"
"권력의 중추에 들어갔으니, 만청의 똘마니가 된 거지. 결국 강유위도 이홍장과 장지동 같은 양무파 대신들과 다를 바가 없어."
"동지들! 대체 중국에 만주 황실과 만한동수가 왜 필요합니까? 우리는 한족의 국민국가를 원합니다!"
"옳소! 청조를 타도하는 길밖에 없다!"
"멸만흥한! 회복중화! 삼민주의! 공화국 만세!"
입헌파들은 실망한 정도라면, 혁명파들은 거친 비난을 쏟아 냈다.
여론이 예상 밖으로 비난으로 들끓자 조정도 당황했다.
"의회설립안은 어디까지나 가안(假案)이다. 앞으로 수정이 가능하니, 자의국을 통해서 전국의 의견을 수렴하겠다."
조정은 일단 한발 물러섰으나, 만한동수의 원칙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었다.
한족 엘리트들은 청조와 만주 황실의 지배로는 입헌군주제와 근대국민국가로의 순조로운 이행이 불가능하리라고 체념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혁명파가 바라던 바였다.
"동지들, 낡아 빠진 청조와 이민족 만주족들은 결코 중국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소. 신군이 중심이 되어 혁명의 중추가 되어야 하오."
청조의 기대와 달리, 신군은 반란의 요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특히 남쪽으로 갈수록 더욱 그랬다.
북경과 직례를 지키는 북양군은 청조에 충성스러웠으나, 강남의 신군은 혁명파들이 잠식해 갔다.
신식 교육을 받은 장교들은 이대로 가다간 중국이 열강에 의해 분할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고, 혁명과 같은 급진적 수단에 호소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조하는 자가 갈수록 늘어났다.
반청 혁명을 부르짖는 중국동맹회에 포섭된 장교들의 수가 갈수록 늘어났고, 장교들도 휘하의 부하들을 포섭했다.
예전부터 반청 세력의 요람이었던 광동과 호남의 신군들이 대거 혁명파에 포섭됐고, 호북성의 신군도 2만 중에서 3분의 1 정도가 혁명파의 영향력에 있을 정도였다.
"저 토이기(오스만) 군사혁명을 보시오. 지방에서 일어난 군사혁명으로 전제정을 타도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소."
1908년의 ‘청년튀르크당 혁명’은 신식 군대의 힘으로 전제정권을 타도한 모델이 되었다.
살로니카의 3군이 봉기를 일으킨 후에 콘스탄티노플로 진격, 군대에서 잇달아 봉기가 이어져 파디샤 전제정권을 무너트린 청년튀르크당 혁명은 중국동맹회에 영감을 주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후대의 격언을, 중국동맹회는 몸소 실천으로 옮길 생각이었다.
이들에게 있어 청조와 만주 황실은 중국의 합법적인 지배자가 아니라, 이민족 압제자에 불과했다.
군사 봉기는 곧 ‘민족 해방’으로의 길이었다.
* * *
대청제국으로부터의 민족 해방을 꿈꾸는 건 한족 혁명가들만이 아니었다.
‘중화의 천자, 만주의 가한, 몽골의 칸, 티베트의 전륜성왕, 무슬림의 보호자’인 대청제국의 매력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특히 역사적 독립성과 종교적 지도자라는 강력한 구심점이 있는 티베트와 몽골은 청조의 속박에서 벗어난 독립국을 꿈꿨다.
1908년, 영국-러시아 협상이 체결되었다. 영국의 침공 이후 몽골과 북경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달라이 라마 13세가 마침내 티베트로 귀국했다. 그는 일단 티베트에 대한 청조의 명목상 종주권과 영국의 세력권을 받아들였다.
티베트로 돌아온 달라이 라마는 중단되었던 근대화를 추진했다. 광서제와 달라이 라마 모두 낙후한 국가를 근대적으로 개혁하겠다는 목표는 같았으나, 중대한 차이점이 있었다.
"우리가 충성을 맹세했던 건 대청 황실이지, 중국이 아니다!"
광서신정 이후, 지금까지 변강의 간접지배에 만족했던 청조는 중앙집권화를 시도했다. 신강처럼 성이 만들어지진 않았지만, 몽골과 티베트에 한족 관료가 파견되어 행정개편과 근대화에 나섰다.
이는 고도의 자율성을 유지하고 있던 티베트의 지도자에게 불쾌감을 불러일으켰다. 달라이 라마가 청조의 지배에 저항하자, 1910년 초 청조는 사천의 신군을 티베트로 파견했다.
근대적인 군대를 갖고 있지 못한 달라이 라마는 후견국인 영국에 지원을 호소했다. 하지만 영민한 광서제는 이미 영국에게 티베트의 이권을 계속 보장해 주는 조건으로 종주권 재확립에 나섰고, 이를 받아들인 영국은 형식적인 항의에 그치고 말았다.
결국 신군이 라사를 점령하자, 달라이 라마는 영국령 인도로 두 번째 망명을 떠나야 했다.
"국외로 도주한 달라이 라마 13세를 폐위하고, 새로운 달라이 라마를 선출한다."
점령군은 판첸 라마에게 달라이 라마 13세의 폐위와 새로운 달라이 라마의 선출, 즉 ‘환생’을 강요했다. 이는 달라이 라마에게 광적인 충성심을 갖고 있는 티베트인들에게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판첸 라마는 협조를 거부했고, 티베트 불교 승려들은 백성들에게 청조에 대한 저항을 설파했다.
청조는 티베트를 군사적으로 일시 지배했지만, 정신까지 굴복시킬 수는 없었다.
"중국 놈들, 감히 달라이 라마께 저런 모욕을 주다니!"
"티베트 다음은 몽골이겠지. 칭기즈칸의 후예인 대몽골은 절대로 굴복하면 안 된다!"
티베트와 종교를 공유하고 있는 몽골에도 달라이 라마의 폐위 선언은 폭거나 다름없었다.
만주족의 지배를 일찌감치 받아들이고 비교적 순조롭게 통치 체제에 편입되었던 차하르 몽골(내몽골)과 달리, 할하 몽골(외몽골)은 저항 의식이 강했다.
강희제의 몽골 정벌 이래, 청조는 외몽골은 ‘맹(盟, 아이막)’의 지배자인 왕공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했지만, 광서신정은 외몽골도 중앙집권의 대상으로 여겼다.
20세기에 이르러 초원에도 근대적 민족주의가 전파되면서, ‘칭기즈칸의 후예’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몽골 왕공들은 만주족의 지배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최후의 구심점이었던 광서제가 붕어하자, 몽골인들은 더 이상 만주인을 몽골의 대칸으로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 대몽골의 후예들은, 만주와 중국의 지배를 거부하고, 완전한 독립을 결의하는 바이다."
"할하뿐만 아니라, 차하르의 모든 아이막도 대몽골의 일원이 될 것이다."
1911년 7월, 4아이막을 대표하는 80명의 왕공들은 비밀리에 우르가(울란바토르)의 교외에 있는 복드 산에 모여 독립과 몽골 통일을 결의했다.
몽골의 달라이 라마라고 할 수 있는 최고 종교지도자 젬툰담바 후툭투(Jebtsundamba Khutuktu)를 모든 몽골인의 칸으로 하는, 대몽골국 구상이 확립되었다.
몽골은 대청제국을 구성하는 민족 중 최초로 독립을 결의하였으나, 이들은 아직 현실적으로 청국에 맞설 능력이 없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몽골의 인구는 적었고, 군대는 더욱 적었다.
"청조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려면, 일단 강한 이웃들에게 도움을 호소하는 길밖에 없소."
"러시아는 몽골 독립에 우호적이니 그들에게 지원을 호소합시다."
"그렇소. 러시아를 시작으로, 아시아의 형제민족인 한국과 일본까지 지원을 얻어 냅시다."
"다른 나라는 몰라도, 청조의 번국이었던 한국이라면 우리의 처지를 이해하겠지."
독립 결의는 일단 비밀에 부쳐졌고, 그동안 독립을 계속 호소해 왔던 러시아에 특사를 파견하여 몽골 독립이라는 대의를 알리고 지원을 얻어 내기로 했다.
한국과 일본도 협력 대상으로 여겼는데, 이는 투란주의나 범몽골주의 관점에서 한국과 일본이 ‘형제민족’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현실적인 힘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청조의 제후국이었다가 힘을 키워 자주독립을 쟁취한 ‘솔롱고스(한국)’는, 개혁적인 몽골 엘리트의 모범이 되었다.
외몽골을 대표하는 왕공 한드도르지와 종교지도자 체렌지메드, 내몽골을 대표하는 왕공 카이산은 비밀리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해 ‘하얀 칸(차르)’에게 독립을 호소했다.
특히 러시아 체류 경험이 있는 카이산은 유창한 러시아어를 구사했고, 러시아를 끌어들여 중국의 지배를 막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1911년, 거대한 영토를 지배해 온 대청제국이 붕괴하고, 민족해방과 자주독립이라는 새로운 유라시아의 천명이 격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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