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혁명 전야
「대러시아의 차르, 초원의 지배자이신 하얀 칸이시여! 우리 몽골인들은 폐하께 생존과 독립을 호소합니다.
……몽골은 지난 200년간 만주와 운명을 함께해 왔으나, 지금은 아닙니다. 근래 한족들은 청 조정을 장악하고, 유목민을 존중하던 청조의 성격을 변질시켰습니다. 그 결과 충성과 보호라는 몽골과 만주의 쌍무적 관계는 유명무실해져, 독립을 추구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청조의 정책 변화는 몽골인들에게 배신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초원의 유목민들을 고통에 빠트렸습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몽골 왕공들의 친서는 만주족의 청나라와 함께해 왔던 지난 역사를 반추하고, 현재 북경의 정책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광서신정으로 근대화 정책이 추진되면서, 청조는 내몽골 일대에서 대대적인 광산 개발에 나섰다.
광산 개발은 한족의 이주를 불러일으켰고, 한족의 이주는 목초지 개간으로 이어졌고, 목초지 개간은 유목의 기반을 무너트렸다.
내몽골의 점진적인 중국화는 왕공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내몽골 각지에서 반청·반한(反漢) 투쟁으로 이어졌다. 외몽골 왕공들에게는 다음은 자신들의 차례라는 공포를 불러일으켰고, 청조와의 화해는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우리 왕공들이 예전부터 폐하께 거듭 호소해 온 바와 같이, 우리는 러시아를 믿고 따르며, 서로 돕기를 원합니다. 청조로부터의 독립과, 만리장성 이북의 옛 몽골 영토를 통합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신다면…….」
왕공들의 친서를 받은 니콜라이 2세는 굉장한 흥미를 느꼈다.
‘1911년, 과연 이선이 예고한 대로 유라시아 천명의 변화가 온 것인가!’
니콜라이는 즉시 이선의 자문을 구하기 위해 전문을 보냈다.
차르와 외무부에 친서를 전달한 몽골 대표단은 황실 주치의 바드마예프와 접촉했다. 부랴트 출신 러시아 관료로 진작부터 몽골 독립을 획책하고 있던 바드마예프는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각하께서는 부디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나 역시 몽골인의 일원이자 러시아의 충복으로서, 어찌 공들의 호소를 저버리겠습니까?"
바드마예프는 이선이 파견한 대한제국 태의와 손을 잡아 알렉세이 황태자의 치료에 효과를 보여, 차르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근본적인 치료는 되지 않아도 태의와 바드마예프의 처방은 알렉세이의 증상 완화에 도움을 주고 있었다.
바드마예프 주위에는 일명 ‘녹색용’이라는 유라시아주의 파벌이 득세했고, ‘하얀 칸’이 유라시아를 지배하리라는 주장을 설파해 왔다.
"몽골제국의 정당한 계승자인 대러시아의 하얀 칸은 유라시아를 지배할 운명이다! 칭기즈칸의 후예인 몽골 왕공들이 자발적으로 천명을 마치려고 하는데, 러시아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바드마예프는 추종자들을 격동시키고, 지원군을 끌어들이고자 했다.
"부디 한국에서도 몽골의 독립을 도와주십시오. 한국은 몽골의 형제민족 아닙니까?"
"알겠습니다. 본국에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주러 한국 참서관이자 제국익문사 러시아과장 이위종은 최근 러시아뿐만 아니라 ‘유라시아’로 정보 업무를 확대했다. 이위종은 몽골 독립에 관한 정보를 수집해서 한국에 보고했다.
1911년 8월 15일(율리우스력 2일), 니콜라이 2세의 주재로 극동문제 특별회의가 개최되었다.
국무회의 의장(총리) 스톨리핀은 러시아가 몽골 문제에 개입하는 데에 회의적이었다. 그에게 시급한 사안은 농업개혁의 완성이었고, 유라시아 제국 운운은 불필요한 모험이나 다름없었다.
"몽골 독립 승인과 지원은 북경 정부를 극단적으로 자극하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이미 영국과의 합의로 몽골은 러시아의 세력권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구태여 더 나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표트르 아르카디예비치(스톨리핀), 청국의 신정은 몽골에서 러시아의 이익을 침해하고 있지 않소? 티베트에서 그랬던 것처럼, 청군이 몽골로 진주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소?"
"물론 그런 일은 막아야 할 것입니다. 러시아는 거중 조정자로서 청국의 압박으로부터 몽골을 보호하고, 북경과 우르가를 중재하는 게 좋겠습니다. 신정이 몽골로 확대되는 걸 중단하라고 권고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스톨리핀의 조심스러운 전략에 차르는 불만을 느꼈다.
꼭 이선의 조언 때문이 아니더라도, 자발적으로 러시아의 지원을 원한다고 요청하는 몽골인들을 버리고 망해 가는 청국 따위와 타협할 필요를 못 느꼈다.
10년 전 만주를 점령한 것처럼, 동양을 향한 차르의 야망과 모험심이 다시 불타오르고 있었다.
「짐의 친애하는 형제이신 황제 폐하!
마침내 유라시아의 천명이 움직이는 순간이 왔습니다.
하지만 수백 년에 한 번 있을 대변혁이니만큼, 성급하게 움직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몽골 독립을 지지하고 지원을 암시하시되, 공개적으로 나서서는 안 됩니다.
머지않아 중국 본토에서 중대한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청조의 붕괴가 목전에 다가왔습니다. 그리되면 만주, 몽골, 티베트, 신강의 분리는 기정사실입니다.
러시아를 위한 변혁의 시기가 도래할 것입니다. 그때를 기다리셔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니콜라이의 자문에 이선은 즉각 답변을 보냈다. 이선의 조언을 받아들인 니콜라이는 방침을 결정했다.
"좋소. 일단 표트르 아르카디예비치의 진언대로, 몽골이 완전한 독립은 승인하지 않겠소. 대신 청국에 몽골의 자치권을 존중하고, 신정을 중단하라고 거중 조정을 제안하겠소."
"황공하옵니다, 폐하!"
니콜라이는 일단 스톨리핀의 진언을 받아들였다. 차르가 자신의 뜻을 받아들이자, 스톨리핀은 만족감을 느끼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에 대한 대가도 받아 내야겠지. 재무대신은 극동으로 향하여 만주를 방문하고, 몽골 종단철도의 필요성과 경제성에 대해 검토해 보시오."
"예, 폐하."
니콜라이는 내각의 2인자인 재무대신 블라디미르 코콥초프(Vladimir Kokovtsov)에게 만주로 향할 것을 명했다.
명목상의 이유는 이르쿠츠크-우르가-북경을 잇는 몽골 종단철도 검토지만, 진짜 이유는 이선이 암시한 ‘유라시아 천명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함이었다.
코콥초프는 하얼빈에서 한국 정부 대표자와 회담을 예정했다.
"몽골인들의 눈물 어린 호소에도, 결국 러시아가 몽골을 저버린단 말입니까?"
러시아 정부의 결정에 몽골 대표단은 실망을 느꼈다. 겨우 거중 조정이나 받아 내려고 이 먼 길을 온 게 아니었다.
그러자 바드마예프가 그들을 달랬다.
"이는 명목상의 선택일 뿐입니다. 폐하의 본의는 다릅니다. 폐하께서는……."
바드마예프가 차르의 ‘본의’를 전달하자, 몽골 대표단은 만족감을 표명했다.
"과연! 그렇다면 우리는 차르와 러시아를 믿고 몽골로 돌아가겠습니다."
"차르의 현명하신 판단에 경의를 표합니다."
"하얀 칸을 믿으십시오. 그분께서는 초원의 새로운 보호자가 되실 겁니다."
바드마예프는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러시아가 유라시아의 지배자가 되는 날이 눈앞으로 다가온 듯했다.
"에밀 구스타프 만네르하임 남작. 경은 묵던 전투의 공훈을 세운 장교이자, 짐의 명을 받아 아시아 탐험에 나섰지."
"예, 폐하."
니콜라이는 은밀히 만네르하임 소장을 겨울궁전으로 불러들였다.
만네르하임은 1906년 러일전쟁 만주전선에서 공을 세운 후, 러시아 군내에서 아시아 전문가로 활동했다. 러시아의 아시아 전문가들은 ‘우랄-알타이’ 이론에 경도된 핀란드인들이 많았고, 핀란드 출신 만네르하임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1907년, 차르의 명을 받은 만네르하임은 핀란드 언어학자로 위장하여 페테르부르크를 출발, 1909년까지 2년에 걸쳐 유라시아를 횡단하며 정보를 수집했다.
"경이 쓴 보고서는 잘 읽었네. 몽골 왕공들,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하고도 안면이 있지."
투르키스탄-신강-몽골-북경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여정 동안, 만네르하임은 젬툰담바 후툭투와 몽골 왕공들을 만나고, 망명해있던 달라이 라마 13세를 알현했다. 달라이 라마는 러시아와 차르에게 상당한 호감을 표명했고, 만네르하임은 달라이 라마에게 러시아 근위기병대의 제복과 권총을 선물했다.
"현재 극동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네. 경은 짐이 인정하는 아시아 전문가이니, 다시 극동으로 파견할까 하네. 경은 짐의 대리인으로, 극동에서 활동하도록."
"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만네르하임은 차르를 향해 거수경례했다. 다시 아시아로 향하는 건 험난한 길이었지만, 군인은 명을 따를 뿐이었다.
"장군, 우르가에 도착하시면 우리 정보원들이 장군을 도울 겁니다. 이곳에 가십시오."
이위종은 만네르하임과 협력했다. 이 무렵 차르의 정보요원과 제국익문사는 협력관계였다.
"고맙군요. 엘리자베타 발레리아노브나(이위종의 부인)께 안부 전해 주십시오."
"하하, 감사합니다."
만네르하임도 이위종, 아니 이선의 ‘협력’덕에 봉천 회전에서 승리할 기회를 얻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기꺼이 한국의 도움을 받았다.
러시아와 한국은 그레이트 게임의 협력자였다. 러시아와 영국의 그레이트 게임은 종료되었지만, 유라시아의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 * *
청국, 상해 공공조계(上海公共租界)의 모처. 청국 영토이나 그 행정권이 미치지 못하는 열강의 조계지 모처에서, 변장한 이들이 모여 은밀한 논의를 했다. 양복을 입고 단발을 한 이들은 겉보기에 조계의 일본인이나 한국인 같았다.
"혁명에 가담하는 신군 장교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습니다."
"좋소. 보안을 철저히 하시오."
"일제 봉기의 순간이 오면, 광동에 이어 호북-호남의 신군 봉기로 장강 유역과 주요 도시들을 장악하고, 북경으로 진격한다."
중국동맹회의 실무를 맡고 있는 송교인과 황흥은, 강남의 신군 봉기가 도미노처럼 각 성의 봉기로 이어지길 기대했다.
중국 전역에 뻗어 있는 동맹회 조직은 느슨하기 짝이 없었지만, 이를 감시해야 할 청조의 방첩망은 더 느슨했다.
"좋습니다. 무기와 자금은 필요한 만큼 지원해 드리지요.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송 동지."
"고맙습니다, 신 동지. 신 동지는 실로 중국의 벗입니다."
선글라스를 쓰고 양복을 입은 채 유창한 중국어를 구사하는 ‘신 동지’는, 겉으로 봐선 ‘개화된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별말씀을요. 미야자키 선생 말처럼, 중국 혁명은 아시아 변혁의 첫걸음입니다."
그는 바로 대한제국군 예비역 참령 신규식(申圭植)이었다. 신규식은 송교인과 ‘밀약’을 맺은 김옥균의 대리인으로, 음지에서 동맹회를 돕고 있었다.
즉, 신규식은 중국 혁명을 배후에서 돕고 있는 제국익문사 요원이었다. 물론 공식적인 신분은 어디까지나 퇴역 군인이자 상인으로서 민간인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청조가 매년 한국에 지급하는 의화단전쟁 배상금의 일부는 중국동맹회의 혁명자금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중국인의 혈세로 중국 혁명을 돕는다.’는 이유였다.
"우리의 후원자이신 고균 김옥균 선생이 입버릇처럼 한 말이 있지요. 일본은 동양의 영국이 되려 하니, 조선은 동양의 프랑스가 되어야 한다. 조선의 힘이 강해진 후, 청국 및 일본과 함께 손을 잡고 서양에 맞서 삼화(三和)를 달성해야 한다."
"오, 그렇지요. 소생도 일본에 있을 때 선생에게서 익히 들었습니다. 만날 때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자연히 외우게 되더군요, 하하하."
동맹회의 일본인 간부 미야자키 도라조가 껄껄 웃었다. 일본의 아시아주의자들은 중국 혁명을 지지했고, 특히 미야자키는 진심으로 중국 혁명이 아시아의 변혁으로 가는 길이라고 믿었다.
"소생은 고균 선생의 삼화주의에 진정으로 공감하는 바입니다. 프랑스가 혁명정신을 유럽에 전파하려고 한 것처럼, 한국도 동양 혁명의 벗이 되고자 합니다."
"참으로 훌륭한 말씀입니다."
송교인은 거듭 찬사를 보냈지만, 그 말을 전부 믿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한국군 장교였던 이가 중국 혁명의 대의를 얼마나 믿겠는가?
과거에는 혁명가였을지 모르나, 지금은 노회한 제국주의 정치가인 김옥균이 부르짖는 삼화주의도 완전히 신용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맹회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현재로선 은밀한 형태로나마 혁명을 후원하는 나라는 한국뿐이었다.
그 대가로 혁명 성공 후에 만주와 몽골, 티베트와 신강의 독립을 승인하기로 했지만, 한족 중심의 국민국가 건설을 지향하는 중화민족주의자인 동맹회로서는 받아들일 수 있는 선택지였다.
"손일선 동지는 광동 기의를 시작으로 북벌을 계획했지만, 지도부의 만류로 중단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광서제 사후, 손문은 즉각적인 봉기를 일으키지 못해 안달이었다.
본래 4월에 광동 광주(광저우)에서 봉기가 계획되었으나, 홍콩에서 은밀히 혁명을 지원하고 있는 제국익문사 아주국장 이회영이 거듭 만류했다. 광주 봉기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던 송교인과 황흥이 결국 손문을 주저앉혔다.
지방에서 거듭 봉기를 일으켰다가 실패로 끝난 손문의 모험적인 전략과 달리, 신군 내에서 동조자를 확대해나가는 송교인과 황흥의 전략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민심은 천심이니, 만청을 향한 민중의 분노가 폭발할 때 봉기를 일으킵시다."
"내각의 만주인 요직 독점과 만한동수 의회설립안에 분노한 사람들이 많지만, 민심을 움직이는 데 부족한 감이 있습니다."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청조는 분명히 더한 무리수를 저지르고 말 겁니다. 국가를 개혁해야겠다고 마음은 조급하지만,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큰 법이지요."
신규식은 이회영으로부터 전달받은 황제의 비밀전문을 떠올렸다.
「민중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전까지는 섣불리 봉기를 도모하지 말라.」
중국에서 과연 전국적 민중운동이 일어날까? 물론 태평천국과 의화단과 같은 사례도 있으니, 얼마든지 일어날 수는 있었다.
그런데 조급해하는 동맹회의 혁명파들을 만족시킬 만한 민중운동이, 당장 일어날지는 의문이었다.
그 의문은 머지않아 풀렸다.
시초는 이번에도 청조의 조칙에서 비롯되었다.
「철도는 곧 국력이다. 이에 월한선과 천한선을 국유화하니…….」
1911년 7월, 몽골 왕공들이 은밀히 독립을 결의하던 바로 그 무렵, 조정에서는 우전부(교통통신부)의 주청을 받아들여 철도국유화 조칙이 반포되었다.
광동 광주(광저우)-호북 한구(한커우)를 잇는 월한선(粤漢線)과 사천 성도(청두)-한구를 잇는 천한선이 그 대상이었다.
특정 지역의 민영화된 철도를 다시 국영화한다.
이 사소해 보이는 칙령이, 나비효과가 되어 중국 전역을 뒤엎는 거대한 폭풍으로 발전하리라고는, 그 어느 당국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혁명을 열망하던 세력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혁명이 목전에 다가와 있었다.
혁명 전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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