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477화 (476/812)

158화 무창 봉기

개혁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국가의 근대화라는 막중한 개혁이라면 더욱 많은 돈이 필요하다.

북경과 지방의 갈등은 만주족-한족의 문제도 있지만, 바로 이 재정 문제도 걸려 있었다.

태평천국전쟁 이후 조정의 지방 통제력은 갈수록 떨어졌고, 의화단전쟁은 정점을 찍었다. 지방의 성에서는 북경으로 올라가야 할 세금을 상당수 은닉하고 독자적으로 재정을 집행했다.

의화단전쟁으로 막대한 배상금을 물게 된 청 조정은, 재정이 파탄 난 상황이었다. 배상금과 광서신정의 근대화에 필요한 재정확보를 위해 각 성에 ‘기부금’을 할당해 걷기 시작했다.

행정 근대화에 나선 조정은 세금의 상당수가 새어 나가고 있다는 걸 파악했고, 중앙집권을 부활시키려고 하는 조정과 지방분권을 확대하려는 성들 간의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각 성에서는 투명한 재정을 실시하고, 매년 책정하는 예산을 북경으로 보내야 한다!"

북경에서 남쪽으로 갈수록 조세저항이 커져 갔다. 근대화의 피해자인 빈농 계층은 말할 것도 없고, 주된 수혜자인 신사-상공인 계층에서도 불만이 터져 나왔다.

전통적인 유교적 교육을 받았지만 근대화의 필요성을 깨닫고 적응하는 ‘신식 신사’와, 자본주의적 발전에 올라타서 수혜를 누리고 있는 ‘신상’ 계층이 지방 여론을 주도했다.

1908년의 지방의회(자의국) 선거는 엄격한 제약으로 인해 투표권자가 0.5%에 불과했지만, 중국 최초의 선거로서 의미가 있었다. 각 성의 자의국은 바로 이들 신엘리트 계층이 완전히 장악했다.

특히 만주족에 대한 반감과 분리주의 성향이 강한 광동, 호남, 사천 일대에서는 조정의 재정 중앙집권화 시도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도대체 조정에서 우리한테 해 준 게 뭐가 있다고 막대한 세금을 걷어 간단 말인가?"

지방의 반감에도 불구하고, 광서신정 10년 동안 중앙의 재정은 두 배로 성장했다. 근대화의 성과에 자신감을 얻게 된 청 조정은 민간에 잡다하게 불하된 각종 근대적 산업을 국유화하기 시작했다. 그 대상은 광산, 철강, 해운, 그리고 철도였다.

"철도는 국력. 일본과 한국처럼 전역에 철도를 부설하면, 근대화와 중앙집권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광서신정은 중국 전역에 철도를 부설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청국의 재정은 미약했고, 영토는 너무나도 넓었다.

중국을 남북으로 종단하겠다는 야심 찬 첫 계획, 경한선(북경-한구)이 1905년에 완공되었다. 하지만 남쪽을 잇는 월한선은 광주에서 출발해 광동성도 못 벗어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조정은 일단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간 자본을 적극 활용하여 철로의 민영화에 나섰다.

이에 호북·호남·광동의 신사와 상공인들이 적극 호응했고, 철도 건설이라는 대의 앞에 주민들까지 성금을 모아 부설에 나섰다.

전통적인 향신, 신흥 부르주아뿐만 아니라 가난한 백성들의 성금까지 모인 ‘민족 자본’이었다.

그런데 신임 우정부대신 성선회(盛宣懐)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양무운동의 실무자였던 성선회는 현실성과 합리성을 중시했다.

"대체 이런 잡다한 방식으로 어느 세월에 철도를 완성한단 말인가? 철도 부설에는 대량의 자본이 필요한 만큼, 국영화를 해야 한다."

민족 자본의 철도 부설은 의기는 가상했지만, 기술과 재정 모두 부족했다.

성선회는 영국·프랑스·독일에 차관을 빌려 신속한 철도 부설에 나섰다. 민간에 불하한 부설은 다시 회수해야 했다. 부설이 지지부진한 월한선과 천한선이 국유화 대상이 됐고, 조정은 성선회의 상주를 받아들였다.

국유화 조치에 월한선과 천한선에 투자한 광동·호남·호북·사천의 투자자들은 경악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철도 국유화 조치라니!"

"그, 그럼 투자한 사람들은 어떻게 보상해 준다던가?"

조정의 발표는 투자자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투자액은 공채로 전환되는데, 무이자로 완공 후 10년에 걸쳐 분할 상환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조정의 은화 과다 주조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발생, 매년 물가가 폭등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무이자로 완공 후 장기간에 걸쳐 분할 상환한다는 건, 투자금이 사실상 휴짓조각이나 다름없는 공채로 대체된다는 의미였다.

"조정 놈들이 미쳤나? 국가가 백성을 상대로 사기를 치고 있는 거냐?"

"우리가 그렇게 우습게 보여?"

중국 역사를 통틀어, ‘상인’이 ‘관’을 상대로 목소리를 낸 경우는 드물었다. 관에서 하라면 하는 게 상인의 운명이었고, 권력자가 유산계급의 재산을 갈취하는 건 비일비재했다.

조정에서는 그런 안이한 관점에서 바라봤을지 몰라도, 근대화의 수혜를 경험한 신흥 부르주아지가 순순히 당할 생각이 없었다.

"철도 부설 차관 담보로 서양에 우리 지역의 염세(鹽稅)와 금광, 탄광까지 내걸었다는군!"

"이런 매판 반역자를 보았나!"

서양에서는 차관에 대한 담보를 요구했고, 광동·호남·호북·사천 지역의 각종 이권이 담보로 걸렸다. 이는 민족주의적 감정에 더욱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철도 국영화 취소하라!"

"조정은 지방에 대한 부당한 조치를 중단하라!"

7월 14일, 호남 장사(창사)를 시작으로 철도국유화 반대운동, 즉 보로운동(保路運動)이 시작되었다.

이미 공사가 상당 부분 진행된 천한선은 월한선보다 투자자가 더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그렇기에 사천에서는 반발이 더욱 거셌다.

"매판 반역자 성선회를 죽여라!"

"만청을 타도하자!"

손실을 본 투자자들뿐만 아니라, 학생들과 일반 백성들까지 시위대열에 합류했다. 동맹 휴학과 파업, 심지어 납세 거부까지 시작되었다.

마치 1906년 러시아 혁명과 유사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북방 오랑캐에 의해 잠식된 강북과 달리, 중화문명을 보존해 온 강남이야말로 정통 중화!"

"사천은 대한(大漢)의 후예이다. 촉한 소열제(유비)와 무후(제갈량)께서 사천을 기반으로 한의 부흥을 위해 진력했듯이, 우리 사천이 멸만흥한을 위해 앞장서야 한다!"

경제적 거부는 이념적 거부로 뒷받침되었다. 예로부터 광동과 호남은 멸만흥한 운동의 거점이었고, 중화 민족주의의 본산이었다.

‘월(粤, 광동)’, ‘초(楚, 호북-호남)’, ‘촉(蜀, 사천)’이라는 별도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이 지역들에서 청조에 대한 반대와 분리주의가 폭발했다.

이른바 ‘성(省) 민족주의’라고 부를 만한 분리주의의 태동이었다.

"만청 타도!"

"혁명 만세!"

"만청의 압제를 받느니 차라리 독립하자!"

보로운동은 정치적 반대와 봉기로 확산되었다.

가을이 되자 사천의 폭동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고, 사천 전역에 계엄령이 발동되었다. 신군이 사천에 투입되고, 저항자들도 무기를 들고 맞섰다.

중국 남부에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 * *

중국 남부에 시위가 격화되고 있는 1911년 10월 초순.

러시아의 조차지인 북만주 하얼빈에서, 대한제국 전 총리대신 김옥균은 러시아제국 재무대신 코콥초프와 회견했다.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각하."

"반갑습니다, 각하."

김옥균과 코콥초프가 만난 표면상의 이유는 남만주철도와 동청철도의 사업 연결 논의, 몽골 횡단철도 부설의 가능성 타진이었다.

"고균, 청국의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소. 우리가 예견했던 중국 혁명, 동양 질서의 재편성이 올해 이뤄질 것 같소. 이럴 때일수록 열강과 확실하게 협의를 해야 하오. 이미 러시아 황제 폐하께 귀띔을 해 놓았으니, 만주를 방문할 황제의 대리인과 북방 문제에 대해 합의했으면 하오. 그 이후에는 영국, 프랑스, 일본과도 논의합시다."

"삼가 황명을 받들겠나이다."

이선의 명을 받은 김옥균이 고개를 숙였다. 어느덧 나이 환갑이지만, 여전히 그는 ‘혁명’이란 단어를 들으면 가슴이 뛰었다.

언제나 주군의 말은 옳았다. 마침내 그들이 꿈꾸는 동양 질서의 재편성이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한국과 러시아 양국은 중국의 체제 변화에 대하여 공동으로 신속하게 대응해야 합니다."

"그런데 중국 남부의 봉기가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날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1906년에 러시아 전역이 시끄러웠지만 결국 무탈하게 넘어갔지요."

코콥초프가 중국 혁명 가능성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제정 러시아의 고위관료들은 ‘혁명’이란 단어에 경기를 일으키는 성향이 있었다.

"이번 사태는 태평천국이나 의화단과 다릅니다. 지난 50년 동안 중국의 지방분권적 경향은 갈수록 심화됐고, 만주족과 한족, 북경과 지방의 대립이 결정적으로 악화됐습니다. 한 지방에서 봉기가 일어나면,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릴 겁니다."

김옥균은 중국판 ‘도미노 이론’을 설명했다.

보수적인 재정 관료인 코콥초프는 총리 스톨리핀처럼 러시아의 확장 정책에 부정적이었으나, 아시아를 향한 차르의 열망을 무시할 수 없었다.

차르의 면전에서도 거침없이 비판을 하는 스톨리핀과 달리, 코콥초프는 차르의 순종적인 충신을 자처했다. 그렇다면 ‘천명’을 따라야 했다.

"러시아는 유사시 만주와 몽골, 투르키스탄(신강)과 티베트를 중국에서부터 분리해야 한다는 데 동의합니다."

"몽골은 러시아의 독점적인 영향권에 들어갈 것이고, 만주와 내몽골은 러시아와 한국이 공동으로 보호하도록 하지요."

러시아는 국경을 접한 몽골, 신강, 북만주의 독점적인 영향권을 원했다. 한국은 남만주와 그에 인접한 내몽골 동부를 영향권으로 원했다.

양측은 지도를 보며 모종의 합의를 했다.

만주는 북위 44도, 내몽골은 동경 117도에 줄을 그어 양국이 원하는 세력권의 대략적인 기준이 됐다. 중국에서 체제 변동이 발생하면, 양국 정부가 세력권 분할을 구체적으로 합의하기로 결정했다.

"러시아는 몽골의 분리 독립을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왕공들에게 지원 의사를 밝혔습니다."

"한국은 중국 남부의 혁명 운동을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모종의 작업이 진행 중이지요. 그래서 말인데, 귀국에서 도와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중국 남부의 러시아 조계, 특히 한커우는……."

김옥균은 러시아의 협조를 요청했다. 코콥초프는 김옥균의 설명을 들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건 외무부에서 결정할 일이니, 본국에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꼭 필요한 일이니만큼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황제 폐하께서 관심이 많은 일이니 흔쾌히 승인하실 겁니다."

김옥균과 코콥초프는 다시금 지도를 들여다본 후 술잔을 들었다.

"아시아의 변혁을 위하여!"

"러시아와 한국의 우호와 미래를 위하여!"

건배사를 마친 김옥균은 보드카를 원샷으로 들이켰다. 타는 듯한 느낌이 목구멍을 감돌았다.

타는 목마름으로, 자주독립과 혁명을 부르짖던 옛일이 추억처럼 떠올랐다.

‘이제 조선을 넘어 중국과 아시아도 변혁하게 될 것이다.’

* * *

1911년 12월, 호북성 무창(武昌, 우창).

중국동맹회의 하부조직인 호북 공진회(共進會)와 문학사(文學社)는 봉기 준비에 한창이었다.

송교인은 동지를 보내 중국동맹회 중부총회를 무창에 건립했다. 동맹회, 공진회, 문학사는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통합지휘부를 선출했다.

문학사 지도자 장익무(蔣翊武)가 사령관으로, 공진회 지도자 손무(孫武)가 참모장으로 선출되어 봉기를 계획했다.

실제 역사대로라면 이미 1911년 10월 10일에 봉기가 발생해야 했지만, 역사의 사소한 변화로 봉기도 늦춰졌다.

동맹회가 계획한 일제봉기의 날은 1912년 음력 정월 초하루(양력 2월 18일)였다.

그런데 사태의 전개는 다시 봉기를 앞당기기 시작했다.

동맹회 중부총회는 총지도부의 만류를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봉기를 계획했다. 각 성의 느슨한 연합체인 동맹회는 총지도부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호북 신군의 상당수가 사천으로 이동하여 무창의 방비가 소홀해졌습니다. 지금이 절호의 기회입니다."

"상해로 사람을 보내 송교인, 황흥 동지를 무창으로 초빙합시다."

11월, 사천의 봉기는 더욱 심각해졌다. ‘사천 보로 동지군’에는 사천 신군까지 가담해 사천의 성도(省都)인 성도(成都)를 점령하는 데 이르렀고, 사태 악화에 놀란 청조는 호북의 신군을 사천으로 보내 진압군에 합류시켰다.

호북성 혁명파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무창에 잔류한 신군 1만 5천여 명 중 대략 1/3에 해당되는 5천여 명이 혁명파의 영향력 하에 들어온 상황이었다. 이들이 기습적으로 봉기한다면 무창을 점령할 가능성이 보였다.

호북성 무창과 장강 대안(對岸)의 한구, 한양을 묶어 ‘무한 삼진’이라 불렀다.

무창은 호북의 성도이자 장강 중류의 산업과 교통의 요충지였고, 무한 삼진을 장악하면 중국의 동서남부 교통로를 통제할 수 있었다.

"12월 22일, 동지를 기하여 봉기합시다."

동지(冬至)는 전통적인 명절로 휴일이었다. 폭죽을 좋아하는 중국인들은 동지에 맘껏 터뜨렸다. 즉, 폭탄이 터져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는 환경이었다.

동맹회 중부총회는 겉으로는 폭죽 성능을 실험하는 척하며, 폭탄제조에 나섰다.

한구의 러시아 조계지가 그들의 거점이었다.

12월 11일, 한구.

퍼엉! 퍼어어엉!

"이, 이게 무슨 소리야?"

"엄청난 게 터진 거 같은데……."

동맹회는 폭탄 실험 중 실수로 화약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주변을 깜짝 놀라게 할 폭음이었다.

"이런, 죄송합니다. 동지에 쓸 폭죽 실험하던 게 터져서……."

"수상한 놈들이군. 수색해!"

동맹회는 급하게 잔해를 치우고 해명했지만, 폭발 소리를 듣고 달려온 러시아 조계지 경찰은 의심하고 거처를 수색했다.

동맹회가 제조한 폭탄, 깃발, 선언문, 조직도 등이 조계지 경찰에게 적발당했다. 혁명파 입장에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저들은 비밀 반란조직이 틀림없습니다. 청국 당국에 넘겨야 하지 않을까요?"

"그만두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하지만 호북성 당국에서는 반란 조직 검거에 협조를 희망하는 공문을……."

"외무부에서 청국 내부 문제에 개입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왔어! 본국 정부 훈령과 청국 협조 요청 중에 어디가 더 중요한가?

"무, 물론 본국의 훈령입니다!"

조계지 경찰은 영사관의 압력에 수사를 중단하고, 체포된 자들을 조속히 방면했다.

청조 입장에서는 호북성 동맹회 조직을 일망타진하고, 봉기를 막을 수 있는 기회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놓치고 있었다.

"폭탄이 폭발하고 한구의 동지들이 체포됐다고?"

"이거 심각하군. 이러다간 조직 전체가 탄로 날 수가 있소."

"그렇다면 끝장이지!"

그런데 장강 건너편의 무창에서는 한구의 동맹회원들이 체포됐다는 소식까지만 전해졌다. 이들은 러시아 조계 당국이 혁명파를 봐주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

조직 전체가 탄로 나고 봉기 계획 자체가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무창의 지도부는 결단을 내렸다.

"어차피 검거되어 죽으나, 봉기를 일으키다 죽으나 마찬가지다! 오늘밤 12시를 기해 일제 봉기를 발령한다!"

"동지들, 기의(起義)하자!"

"혁명 만세!"

1911년 12월 12일 12시, 봉기의 첫 신호탄이 쏘아 올렸다.

무창 봉기의 시작, 신해혁명의 서곡이었다.

- 159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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