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479화 (478/812)

160화 북양군

혁명 초기, 북경의 청조는 무창 함락 소식을 듣고 경악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반란이 확산되기 전에 당장 진압해야 합니다!"

조정은 무창을 버리고 도망친 호광총독 서징과 민심의 분노대상인 우전대신 성선회를 즉각 파면하고, 육군대신 음창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급히 호북으로 보냈다.

"역적들을 신속히 토벌하라!"

청조는 이 시점까지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했다.

1911년 당시 청국 전역에는, 14진(鎭, 사단) 18개 혼성협 약 30만의 신군이 있었다.

청국 최강의 부대인 북양군은 완전 편제된 6진으로 충실한 훈련과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그에 비해 지방의 신군은 각 성의 재정으로 운용을 하니 장비와 질이 모두 열악했다.

조정은 반란군이 오합지졸이라 판단했고, 섭정왕 재풍은 만주족인 육군대신 음창(荫昌)과 아우인 군왕 재도에게 북양군 지휘권을 맡겼다.

북경의 1진, 천진의 4진, 제남의 5진 등 3개 사단과 2개 혼성여단 5만 명의 신군이 경한선 철도를 타고 한구로 진격했다.

"반군 따위 단숨에 진압해 주마."

북양군 자체는 호북군보다 전력이 압도적으로 강했지만, 문제는 지휘관의 무능이었다.

만주 귀족 음창이나 황족 재도 모두 전형적인 팔기(八旗) 자제였고, 서구식 군사교육을 잠시 받았다지만 팔기 특유의 시대착오적인 무능함을 드러냈다.

"동지들! 중국 전역에서 공화혁명에 동조하고 있다. 무한삼진이야말로 혁명의 보루다. 우리는 반드시 무한삼진을 사수해 혁명을 수호한다!"

호북군 도독 여원홍은 유능한 지휘관이었고, 무창 봉기를 지원하기 위해 온 동맹회 군사지도자 황흥도 혁명가의 카리스마를 보이며 지휘했다.

그렇다고 해도 호북군 2만여 명은 급조된 오합지졸이었으므로, 북양군을 제대로 지휘하기만 해도 승리는 따놓은 당상이었다.

그런데 전선에서 한참 떨어진 하남의 열차에서 지휘하던 음창은, 하남 신군 52표가 혁명군에 포섭되어 투항하자 지레 놀라 퇴각 명령을 내렸다.

혁명군에게 승리를 갖다 바친 셈이었고, 끝없이 하락하던 청조의 위신은 더욱 추락했다.

북경 조정은 혼란 상태였다.

지방 곳곳에서 신군의 반란이 이어지고, 독립이 도미노처럼 확산되자 청조는 이제 발등에 떨어진 불을 처리하느라 급급했다.

"이미 강남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심지어 화북까지 확대되고 있소."

"조기에 진압하지 못하면 장발적(태평천국)의 난이 재현됩니다!"

"먼저 민심을 다독이고, 진압군을 재편성하소서!"

"으으음……."

섭정왕 재풍은 실수를 인정했다. 철도 국유화를 하려다 화근을 불러일으켰고, 만주족에게 군권을 맡기는 데 집착하다가 더 큰 반란을 불러일으킨 꼴이었다.

「철도 국유화 조치를 취소한다! 민란의 책임자 성선회는 영구히 재등용하지 않겠다. 내각은 책임을 지고 총사직한다. 다시는 황족들을 내각에 기용하지 않겠다. 헌법을 새로이 제정하여 황제의 대권을 대폭 삭감하고, 내각과 의회를 존중한다…….」

1912년 1월 1일, 신해년 음력 11월 13일, 청조는 숙친왕 내각을 총사퇴시키고 ≪헌법신조≫를 발표해 민심을 달래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그 정도 조치로 달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다.

1912년이 되자, 지방의 이탈은 오히려 더 심화되었다. 혁명의 불길은 장강 중류에서 하류로 번졌고, 심지어 황하 이북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청조 타도! 멸만흥한! 삼민주의!

"독립 만세! 민국 만세!"

절강·강소·복건·안휘·사천·귀주에서도 잇달아 군정부 선포와 독립선언이 이어졌고, 화북의 섬서·산서·산동까지 독립이 확산되었다.

독립을 선언한 성들은 각성도독부대표연합회(各省都督府代表聯合會)를 결성해 느슨하게 연합했다.

"장군께서 도독을 맡아 주십시오."

"장병들이 원한다면, 부족하나마 본관이 맡도록 하겠소."

호북의 선례를 따라, 신군이 봉기를 일으키면 그 다음에 지역 상인들이 지지를 보내고 자의국 신사들이 혁명을 추인하는 형태가 반복됐다.

처음부터 혁명파이거나, 당초 혁명파의 일원은 아니지만 지역에서 명망 있는 지휘관이 도독으로 추대되었다.

대표적으로 광동의 혁명가 호한민(胡漢民, 후한민), 광서제독 육영정(陸榮廷, 루룽팅), 산서 신군 협통(여단장) 염석산(閻錫山, 옌시산), 운남 신군 협통 채악(蔡鍔, 차이어) 등이 추대된 도독이었다.

일단 청조와 구체제에 반대하기만 하면, 입헌파든 혁명파든 가리지 않고 도독부에 기용됐기 때문에, 봉기가 성공해도 실제 지배권은 입헌파나 보수파가 장악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들을 추동하는 이념은 공화주의보다 지역주의였다.

도독으로 추대된 이들은 대부분 그 지역 출신이었고, 새로 수립될 민국 정부에 복속되기보다는 지역의 자치에 더 관심이 많았다.

즉, 청조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이들이 군벌로 전환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의미였다.

1912년 1월, 무창 봉기로부터 불과 한 달여 만에, 중국 본토 18성 중 14성이 혁명과 독립의 대열에 합류했다.

연결이 느슨한 연합 상태였지만, 사실상 중국 전역에 청나라에 맞서는 공화혁명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경희를 신임 총리대신으로 임명하고, 내각 구성을 맡긴다."

이홍장의 조카인 이경희(李經羲, 리징시)가 2대 총리로 임명되었다. 애당초 이홍장이 지목한 후계자는 이경희였으나, 광서제가 북양군의 군벌화를 경계하여 그동안 외직을 떠돌았다.

섭정왕은 뒤늦게나마 양무운동의 상징이자 회군-북양군의 설립자인 이홍장의 조카를 총리로 임명해 양무파-입헌파의 지지를 지키고자 했다.

"인창과 재도를 경질하고, 장훈을 호광총독 겸 흠차전권대신으로 임명하여 반란군 진압의 전권을 부여한다."

"신 장훈, 삼가 황명을 받들어 역적을 반드시 토벌하겠나이다!"

유능한 지휘관이자, 청조에 강한 충성심을 지니고 있는 북양군 사령관 장훈(張勳, 장쉰)이 진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른바 ‘북양 삼걸’로 불리는 단기서(段祺瑞, 돤치루이)와 풍국장(馮國璋, 펑궈장)이 1·2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한구의 전선으로 파견되었다.

천진무비학당을 거쳐 프로이센 육군대학에서 유학한 ‘북양의 용’ 단기서는 현재 북양군, 아니 청군 전체를 통틀어 가장 유능한 지휘관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풍국장은 능력과 인망이 단기서만 못했지만, 역시 천진무비학당 출신으로 북양군의 유능한 사령관으로 인정받았다.

"우리가 지휘를 맡게 된 이상 역적들은 항복하든가, 죽든가 둘 중 하나다!"

장훈은 혁명을 강경히 진압할 것을 천명했다. 그는 북경 주재 외국 공사들 앞에서 선언했다.

"소위 독립을 선언한 성들은, 비유하자면 50년 전 미합중국으로부터 분리를 선언한 남부연합과 비슷하오. 저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하오. 북군이 단호하게 남부의 반란을 제압한 것처럼, 본관은 중국 남부의 반란을 뿌리 뽑을 것이외다!"

독립을 선언한 각성도독부대표연합회를 미국의 남부연합에 빗댄 장훈은, 미국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승리하였듯이 청군이 승리할 거라고 자신했다.

장훈은 얼마든지 중국의 셔먼(William Tecumseh Sherman) 장군이 될 생각이 있었다. 셔먼이 남부를 박살 내 전쟁의지를 꺾어 버린 것처럼, 장훈도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서라면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싸울 기세였다.

"북경 방위는 금위군 2개협에만 맡기고 북양군을 총출동시킨다. 동삼성(만주) 방위를 맡고 있는 병력은 유사시를 대비해 대기하라."

"먼저 직례에 인접한 산동은 확실히 제압해야 한다."

1912년 1월 초순, 재정비를 마친 북양군 3군 6진이 남부를 향해 본격적으로 출진했다. 먼저 직례의 지척에 있는 산동에 대한 압박이 시작됐다.

도독으로 추대되었던 산동순무 손보기(孫寶琦)는, 북양군의 진격에 놀라 독립을 포기하고 다시 청조에 충성을 맹세했다. 도독의 배신에 산동의 혁명파들은 체포되거나 도망쳤다.

‘독립’이란 게 이렇게 허술하기 짝이 없었고, 얼마든지 뒤엎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1군과 2군은 무한삼진으로, 3군은 강소를 향해 진격한다!"

산동을 제압한 북양군의 주력은 풍국장과 단기서의 지휘 하에 혁명의 중추인 무한삼진으로 진격하고, 장훈은 서주(쉬저우)에 주둔하며 강소-안휘를 압박했다. 경제 중심지인 장강 하류 성들의 이탈을 막기 위함이었다.

청국 최강 부대, 북양군의 거침없는 진격에 대륙이 격동했다.

혁명은 내전으로 치닫고 있었다.

* * *

한편, 상해에서도 독자적인 군정부가 수립되었다.

1월 3일, 상해 경찰 간부 진기미(陳其美, 천치메이)가 봉기를 주도하여 상해 도대를 제압했다. 경찰은 위장신분이었고, 그는 사실 동맹회 지도부였다.

조계지를 지배하는 열강들은 중립을 선언했고, 혁명파도 열강의 지지를 얻기 위해 조계는 건드리지 않았다.

상해 군정부 도독으로 추대된 진기미는 혁명을 즉시 강소와 절강으로 확대했다.

"축하드립니다, 도독 각하! 소생은 각하께서 해내시리라고 믿었습니다."

"아, 신 동지. 각하는 무슨, 예전처럼 동지라고 부르십시오. 일을 성사시키는 데 신 동지의 도움도 컸지요."

도독부를 방문한 신규식과 진기미가 반갑게 악수를 했다. 동맹회에서 첩보를 담당하는 진기미는 신규식이 사실 한국의 정보 요원이라는 걸 눈치챘지만, 외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으므로 협력에 거리낌이 없었다.

"동지의 연기력이 정말 탁월합니다. 도대는 동지가 동맹회에 추대되어 배신했다고 생각하더군요."

"뭐, 그들이 사람 보는 눈이 없었던 게지요."

상해 봉기가 손쉽게 성공할 수 있었던 건, 경찰 간부로 위장하고 있던 진기미가 무기 반입과 조직 확대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신규식과 제국익문사의 은밀한 협조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상해 봉기 다음날 항주 봉기도 성공해 절강이 독립을 선언했고, 강소와 안휘에서도 잇달아 독립을 선포했지요. 이로써 강남은 모두 확보했습니다. 다만 문제는……."

진기미는 지도에서 남경을 가리켰다.

"남경의 양강총독부가 건재하고 있는 상황이라, 실질적으로 독립이 확보된 건 아닙니다. 남경을 함락시켜야 혁명이 성공합니다."

양강총독부가 관할하는 강소·안휘·강서가 모두 독립을 선언하긴 했지만, 핵심지역에는 여전히 총독부가 건재했다.

남경의 상징성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옛 육조고도이자, 명나라의 첫 수도이며, 강남의 중심지였다.

태평천국도 남경을 수도로 삼았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남경은 북경과 대비되는 남부의 수도였다. 혁명파 역시 공화국의 수도로 남경을 염두에 두었다.

"도독 각하,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오, 왔나! 소개하지. 국제우인 신규식 동지일세."

신군 군복 차림의 청년이 거수경례를 했다.

"혁명군 2진 5단을 지휘하는 장지청입니다."

"아아, 이야기 들었습니다. 항주를 단 하루만에 함락시킨 공훈자라고."

장지청(蔣志淸)은 절강 태생으로, 25세의 청년 장교였다.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하던 중 동맹회에 포섭되었다. 육사를 졸업하고 일본군 견습장교로 복무하던 중 혁명 소식을 듣고 즉시 군복을 벗고 상해로 귀국했다.

장지청의 아명은 서원(瑞元), 족보명은 주태(周泰), 자는 개석(介石), 가명은 중정(中正)이다.

"그렇습니다. 장 단장이 결사대를 이끌고 항주 해방으로 가는 길을 열었지요."

"과찬이십니다, 각하! 소관은 그저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장개석은 역시 절강 출신인 진기미에게 발탁되어 그의 심복이 되었다. 진기미의 신임을 받는 장개석은 항주 봉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다.

"남경으로 가는 길을 열고 싶은데, 가급적 무혈로 해 보고 싶군요."

"방법이 있겠습니까?"

"양강총독을 포섭해 봐야지요."

"원세개, 그 자가 과연……."

위안스카이(원세개)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신규식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원세개는 능력은 있지만 기회주의자니까, 혁명이 유리하다고 판단되면 얼마든지 편을 바꿀 수 있는 자입니다. 양강총독의 지휘 하에 남양군이 있는데, 북경의 종용에도 진압을 서두르지 않는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해 볼 만한 도박이지요."

"좋습니다. 그럼 포섭 공작이 진행되고 있습니까?"

"이미 진행 중입니다. 신 동지도 남경으로 가서 거들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원세개는 조선과 특별한 인연이 있지요."

"흠, 별로 좋은 인연은 아닐 터인데요."

원세개는 이홍장의 대리인으로 조선에 왔다가 이선으로 인해 실각했다. 문책을 받고 백의종군하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절치부심하며 재기한 원세개는 이홍장에 버금가는 양무파 장지동의 눈에 들어 다시 권력의 중추에 가까워지긴 했지만, 이홍장의 버림을 받은 이상 북양군하고는 관계가 없었다.

바뀐 역사에서 원세개의 기반은 오히려 혁명이 불고 있는 강남에 있었다.

장지동의 추천으로 호광총독과 양광총독을 역임했지만, 1909년 후원자인 장지동이 죽자 실각하여 좌천되었다.

원세개가 신군 창설과 운용에 재능이 있었던 덕에, 결국 양강총독 겸 남양대신으로 재기용되어 남양군을 맡았다.

"원세개는 강자에게 약하지요. 열강이 혁명을 돕는다고 판단하면 바로 편을 바꾸려 들 겁니다. 한국과 러시아가 배후에서 혁명을 돕고 있고, 뒤이어 그 동맹인 프랑스와 영국도 돌아선다면……."

진기미는 밀약에 대해서는 미처 몰랐지만, 한국뿐만 아니라 러시아가 혁명을 은밀히 배후에서 돕고 있는 이유를 알았다. 자국의 이익이 된다면, 서구 열강들도 얼마든지 청조를 저버릴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소생이 남경으로 가서 원세개를 설득해 보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위험할지도 모르니, 장 단장이 동지를 호위하도록 하겠습니다."

진기미는 심복 장개석을 신규식의 호위로 붙여 주었다.

"개석, 언제나 신규식과 함께 움직이게. 만약 신규식과 원세개가 별도로 협상하는 게 있다면, 반드시 파악해야 하네."

"알겠습니다."

명목은 신규식의 호위였지만, 신규식이 원세개와 별도로 밀약을 맺는 걸 감시할 목적도 있었다.

신규식과 장개석은 즉각 상해에서 남경으로 떠났다.

각자 속에 품고 있는 게 뭐든 간에, 신규식과 장개석은 중국 혁명이라는 목표를 갖고 함께 싸우고 있는 동지였다.

신규식도 군인 출신이었으므로, 강력한 국가를 열망하는 청년 장개석의 마음을 이해했다. 두 사람은 금세 의기투합했다.

"혁명이 성공하면, 장 동지는 뭘 하고 싶소?"

"혁명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일본과 한국처럼 산업화를 진행하고, 강력한 군대를 건설하여 열강의 침략을 막아야지요. 우리에게도 북양군 같은 군대가 있었더라면 혁명을 빠르게 성사시킬 수 있었을 겁니다. 군인으로서 군사력 강화에 일익을 맡고 싶습니다."

일본 유학파인 장개석은 일본과 한국의 근대화를 부러워하고 있는 한편, 언젠가 뛰어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신규식은 불현 듯이 일개 혁명군 장교에 불과한 장개석이 언젠가 중국에 있어 결정적인 인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민반응인가? 아니, 그래도 황제 폐하께 보고해야겠군. 언제나 만나는 사람이 있으면 놓치지 말라 하셨으니.’

황제는 놀라울 정도로 중국 혁명파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익문사가 그토록 정보력이 뛰어난 건지, 정말 소문대로 황제가 ‘천리안’을 갖고 있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신규식은 원세개와 회동을 마치면, 보고하는 김에 장개석에 대해서도 언급해야겠다고 판단했다.

- 161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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