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481화 (480/812)

162화 남북전쟁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각하! 역사가 각하의 반정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장개석과 신규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원세개에게 경의를 표했다. 원세개도 일어나 화답했다.

"오랫동안 길러 왔는데 자르자니 아쉽지만, 일단 이 변발부터 자르고 양복으로 갈아입어야겠군."

변발 호복이 청조의 상징이라면, 단발 양복은 혁명파의 상징이었다. 이제 원세개는 외견상 완전히 변신을 다짐했다.

"단, 먼저 송교인과 황흥의 확답이 와야 할 거요. 손문 선생의 보증이 있으면 금상첨화고."

역시나 원세개는 확증이 있기 전에는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혁명이 성공하면 국가원수에 추대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손문의 보증을 받고 싶어 했다.

"손문 선생은 해외에서 귀국 중이고, 황흥 동지는 무한삼진에서 혁명군을 지휘하고 있기에 빠른 확답은 어렵습니다. 송교인 동지가 상해에 있으니 빠른 답변이 가능할 겁니다."

"좋소. 그럼 송 선생의 답을 기다리지. 그동안 여러분은 내 빈객으로서 관저에서 편안히 머물러 주길 바라오."

원세개의 지시에 남양군 병사들이 장개석과 신규식을 데리고 나왔다. 말이 좋아 빈객이지, 사실상 인질이었다.

그래도 밀사들은 태연했다. 송교인과 원세개가 곧 타협을 맺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원세개는 이익에 보장되는 이상, 혁명에 충성할 거요."

"문제는 혁명의 대의와 원세개의 이익이 얼마나 조율이 될 수 있느냐겠지요."

나이 서른에 불과하지만, 혁명파의 ‘삼두’인 송교인은 원세개와 신속히 타협에 도달했다.

「양강총독 겸 남양통상대신 원세개가 반정하는 대신, 정부 수립 이전까지 양강 3성의 통치권과 남양군의 군권을 보장한다. 남양군은 청조의 침공으로부터 남경을 방위할 혁명의 간성이 된다. 새로이 수립될 민국 정부의 최고위직과 군권을 원 공에게 약속하는 바이다.

각성도독부대표연합을 대리하여, 송교인.」

새 정부에서 최고위직과 군권을 보장받은 원세개는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하하, 역시 송 선생은 통이 크시군. 좋소, 혁명을 위해 기꺼이 간성이 되어 드리지."

원세개는 송교인의 답을 기다리는 사이에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영사를 만나 ‘혁명 합류’를 통보했다. 유혈사태 없이 남경과 장강 하류의 경제 중심지들의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를 이끌어 낸 원세개에게 각국 대표는 찬사를 보냈다.

"양강총독부와 남양군은 혁명의 대열에 합류한다! 청조를 타도하자! 혁명 만세! 민국 만세!"

원세개의 ‘귀순’으로, 남경과 남양군은 혁명파로 넘어갔다. 남경의 반정으로 강남 해방은 절정에 올랐다. 이로써 강남의 모든 성은 혁명의 대열에 합류했다.

하지만 이러한 인위적인 이합집산으로 이뤄진 ‘해방’이, 신생 중화민국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미지수였다.

"원세개의 결단 덕에 남경은 피 흘리지 않고 해방되었구려."

"지금은 분명 원세개의 덕을 보고 있지만, 만약 혁명을 배신하려 한다면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

젊은 장개석은 원세개의 변신과 타협을 탐탁지 않아 하는 표정이었다.

어쩌면 그는 이런 격언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한 번 배신한 자는 두 번 배신하는 법이다.’

남경에 청조의 황룡기 대신 혁명군의 철혈십팔성기(鐵血十八省旗)가 휘날렸다. 철혈십팔성기는 중화 18성을 상징하는 깃발이었다.

남양군 2진도 혁명군의 일원이 되었다.

북양군 진격으로 기울어졌던 저울의 추가 다시 균형을 이루기 시작했다.

* * *

「미국과 법국의 공화혁명이 성공하였듯이, 중국의 공화혁명이 승리하리라는 건 필연이다. 이민족 청조의 천명은 이미 끝났으며, 중화의 광복과 공화의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강남 ‘해방’의 소식이 중국 전역, 아니 세계만방에 신속히 전해졌다.

"원세개, 이 개자식! 결국 대청을 배신하고 말았구나! 애초에 이런 승냥이 같은 놈에게 군권을 주면 안 되는 거였는데……. 대체 뭘 믿고 원세개에게 남양군을 맡긴 건가!"

원세개의 변절 소식을 전해 들은 청조는 격노했다. 남경 함락과 남양군의 변절은 청조에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 망탁조의(莽卓操懿) 같은 놈!"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놈!"

원세개를 유교적 관점에서 최악의 찬탈자들로 규정된 왕망·동탁·조조·사마의에 빗대는 비난이 쏟아졌다.

누구보다 허탈함과 배신감을 느꼈지만, 입씨름을 해 봐야 아무 의미 없다는 걸 깨달은 섭정왕 재풍은 북양군에 명령을 내렸다.

"당장 남경으로 진격하여 역적 원세개와 그 일당들의 목을 베어라!"

원세개에게 뒤통수를 맞고 격분하기는, 북양군 총사령관 장훈도 마찬가지였다. 협공을 준비했는데 오히려 토벌해야 할 적만 늘어난 셈이었다.

당장이라도 남경으로 달려가 베어 버리고 싶은 건 장훈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유능한 군인답게 곧 냉정을 되찾았다.

"원세개가 변절하는 바람에 양강 강방함대도 적에게 넘어갔는데, 무슨 수로 도하를 해서 남경으로 진격하겠는가! 지금은 전력을 분산시켜 낭비하느니, 무한에 병력을 집결시켜 적의 예봉을 꺾는 게 낫다."

장훈은 봉기가 처음으로 일어난 혁명파의 성지이자, 장강 중류의 요충지인 무한삼진을 먼저 떨어트려야 한다고 판단했다. 무한삼진을 획득하면 장강과 철도를 따라 호남·강서·광동·사천을 모두 압박할 수 있었다.

"북양군이여! 속히 무한삼진을 함락시켜라!"

장훈의 독촉을 받은 북양 1군 사령관 단기서와 2군 사령관 풍국장은 총공세에 나섰다.

1월 17일 이후 무한삼진의 강북 한구와 한양을 놓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특히 한구 전선은 주인이 수차례 바뀔 정도로 격전이었다.

"물러서지 마라! 혁명의 성지인 무한삼진을 반드시 사수해야 한다!"

"무한삼진이 무너지면 혁명이 위태롭다!"

혁명군 사령관 황흥과 호북 도독 여원홍은 장강 북쪽에 배수진을 쳤다. 군을 독려하며 필사적으로 방어했지만, 혁명군은 정예 북양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혁명군은 호북 신군과 의용군으로 구성되었고, 신군도 북양군에 대적되지 않는 판에 의용군이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의기는 가상했지만 훈련, 무기, 조직력 모두가 부족했다.

"한구 탈환에 성공했습니다!"

"한양을 수복했습니다!"

1월 27일, 북양군은 한구와 한양을 점령했다. 혁명군은 패퇴하여 장강 너머 무창으로 퇴각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승리자 북양군 지휘관들의 의견이 갈렸다.

"기세를 몰아 장강을 건너 무창의 적까지 궤멸해야 하네!"

"장강 도하에는 막대한 희생을 감내해야 할 것이네. 일단 한구와 한양 탈환을 보고하고 명령을 기다리세."

풍국장과 단기서의 의견이 확연히 갈렸다.

강경한 왕당파인 풍국장은 신속히 무창까지 진격하여 혁명파의 소굴을 때려잡자는 생각이었다.

보다 현실주의자인 단기서는 생각이 달랐다.

‘북양군이 반란군을 상대로 압승한다 한들, 승자는 없다. 패자는 오직 중국이다. 태평천국과 의화단의 참상을 보고도 어찌 내전을 또 벌이려 한단 말인가? 한 번 위용을 보여주었으니,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프로이센 전쟁대학 유학파로 군국주의와 권위주의의 강력한 영향을 받은 단기서였지만, 현실주의자인 그는 상황을 대국적으로 보았다.

북경이 함락된 의화단전쟁의 악몽이 생생히 떠올랐다. 내전이 길어질수록 열강이 개입할 여지가 많아지고, 중국인의 희생은 더욱 커질 터였다.

북경 조정과 북양군 총사령 장훈은 역도들을 박살 내겠다는 기세로 명령을 내렸다. 신속한 승리가 가능하다면 상관없지만, 이미 강남의 모든 성이 반란에 동조한 상황이었다. 진압하려면 한참 시간이 필요했다.

마침 한구를 점령한 1월 27일에 사천으로 파병된 청조의 신군이 궤멸당하고, 사천성도 완전히 혁명파에게 넘어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남북 모두 상대를 압도할 수 없다는 걸 증명했으니, 외교적 타협으로 결말을 내야 했다.

"단 장군의 현명한 판단에 감사드립니다."

"정직한 중재를 부탁드립니다. 무창의 반군은 사면을 조건으로 정중히 항복을 권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저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실시하는 조건으로 타협할 수 없는지 논의해 주십시오."

한구 주재 영국 영사가 중재자로 나섰다.

영국은 여전히 청조를 지지하기는 했으나, 영국의 세력권인 장강 유역에서 전투가 지속되는 건 극구 피하고 싶었다. 특히 장훈과 풍국장처럼 인정사정 보지 않고 ‘반란 소굴’을 박살 내려는 자들보다야, 말이 통하는 단기서를 환영했다.

"단기서, 이놈 봐라. 제멋대로 역도들과 협상을 해?"

풍국장은 단기서의 협상 시도에 분노했다. 교활한 풍국장은 곧 분노를 가라앉히고,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단기서와 풍국장, 그리고 왕사진(王士珍)은 이른바 ‘북양삼걸’로 불리는 북양군의 삼두였다. 다만 단기서가 ‘북양의 용’, 왕사진이 ‘북양의 호랑이’라고 불리는 것과 달리, 유능하지만 탐욕스러운 풍국장은 ‘북양의 개’라고 불렸다.

단기서는 독일 유학파에, 청군에서는 드물게도 청렴하고 검소한 장군이었고, 그만큼 인망이 더욱 높았다. 그러니 풍국장은 고깝게 여기고 있었다.

‘단기서를 제치고 내가 북양군의 수장으로 올라갈 절호의 기회다.’

풍국장은 단기서가 반란군과 모종의 협상을 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단기서가 여전히 청조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참소(讒訴)나 다름없었다.

"단기서가 대청을 배신했단 말인가?"

"단 도통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이유야 어쨌건 영국 영사와 접촉하여 반군과 협상한 건 사실이라 하지 않소? 만약 단기서가 원세개처럼 신군을 이끌고 배신하면 뒷일은 어쩔 것이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원세개의 배신이 불과 얼마 전 일이라 북경 조정은 화들짝 놀랐다.

직속상관인 장훈의 변호에도, 북경 조정은 단기서의 북경 소환을 명령했다.

그러나 여전히 북양군에서 단기서가 차지하는 위상이 높기 때문에, 청조도 감히 처벌할 생각은 하지 못하고 참모총판(참모차장) 겸 포병사령의 지위를 내려 북경으로 소환했다. 형식상으로는 영전이나 실질적으로는 지휘권 박탈이었다.

"허, 전시에 후방에서 행정이나 하라고? 평생 대청을 위해 복무한 나를 배신자로 의심한단 말인가? 군인으로서 명령이니 따르기야 하겠다마는, 이래서야 누가 조정에 충성하겠는가?"

"이래서야 차라리 원세개처럼 반정하느니만 못합니다!"

"도통께서 원세개만 못할 게 무엇입니까? 반정하신다면 따르겠습니다!"

단기서를 따르는 북양군 장교들이 불만을 토해 냈지만, 단기서는 고개를 저었다.

"말을 삼가게! 어찌 무관의 몸이 되어 지위를 탐내 국가를 배반하겠는가? 중국이 국난의 위기에 처해 있다. 오직 대의를 위해서만 판단하고 싸우도록!"

단기서는 소환을 받아들이고 북경으로 떠났다.

단, ‘청조’가 아니라 ‘중국’을 강조했고, ‘대의를 위해서’ 다른 선택도 할 수 있다는 암시와 함께였다.

"호광총독 겸 흠차전권대신 장훈은 속히 무한의 역적들을 토벌하도록 하라!"

단기서 대신 충성심을 확고히 믿을 수 있는 장훈에게 직접 무한으로 가서 반군을 토벌하라는 칙령이 내려졌다.

"그나마 대화가 통하는 단기서가 물러나고, 저 무지막지한 장훈과 풍국장이 지휘하게 됐으니……."

무창에 모인 혁명 지도부는, 단기서의 영국식 입헌군주제 타협안은 거부했지만, 만약 그가 반정한다면 원세개에 버금가는 지위를 주리라고 합의했다.

일단 양측은 일시적 휴전은 합의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휴전이 발효되기도 전에 단기서가 소환된 것이었다.

"이제 타협은 없소! 차라리 적이 방심하고 있을 때 선공을 가합시다!"

"좋소! 내가 직접 선봉에 서겠소!"

2월 1일 새벽, 황흥은 특공대를 이끌고 장강을 건너 한구를 기습했다.

"혁명 만세!"

"민국 만세!"

"적의 기습이다!"

"퇴각, 퇴각하라!"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한 혁명군이 오히려 역습을 가하자, 단기서의 해임으로 사기가 떨어진 북양군은 패퇴했다. 풍국장은 다시 한구와 한양을 내줘야 했다.

"도대체 이 무슨 추태인가!"

"면목 없습니다, 장군."

"벌해 주십시오!"

급하게 무한삼진으로 달려온 장훈은 격노했다. 풍국장과 북양군 장교단은 고개를 숙이며 죄를 청했다.

"됐다! 죄는 공으로 씻는다. 역도들에게 북양군의 힘을 보여 주자!"

장훈은 그동안 미국 남북전쟁의 전훈을 살피고 있었다.

그는 현재 청조가 북군, 혁명군이 남군이라고 생각했다. 정부가 북쪽에 있고, 남부 성들이 분리를 외치니 과연 50년 전과 상황이 비슷하다고 볼 수 있었다.

중대한 차이점은, 남북전쟁은 북부가 압도적으로 경제력이 강했지만 중국은 남부의 경제가 더 부유하다는 점이었다.

장훈은 남부의 요충지를 신속하게 탈환하고, 경제적 우위를 압살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역도의 소굴인 무한삼진을 시작으로, 장강 하류를 향해 진격한다. 바다로의 행진이다."

남부의 전시경제를 파괴하기 위한 셔먼의 진격, 즉 ‘바다로의 행진(Sherman's March to the Sea)’을 모범으로 삼아, 장훈은 중국판 바다로의 행진을 계획했다.

이런 가혹하기 짝이 없는 작전을 입안한 장훈 본인도 강남인 강서 출신이었다.

다만 그는 다른 강남인들과 큰 차이가 있었다. 1854년에 태어날 무렵 태평천국 반란군에 의해 할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어릴 적에 유리걸식하며 힘겹게 살아야 했다.

그 원한이 맺힌 장훈은 ‘남부의 반란’이라면 치가 떨렸고, 청조에 대한 광적인 충성까지 더해지자 거칠 것이 없었다.

"돌격! 역적들을 결코 용납하지 마라!"

"공격! 공격하라!"

2월 4일, 북양군의 총공세가 재개되었다. 이번에는 장훈이 끌고 온 대규모 포병이 가차 없이 포를 쏟아 내며 한구와 한양 시가지를 타격했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한구-한양 전선은 빠르게 붕괴했다. 혁명군은 또다시 한구-한양을 버리고 장강을 넘어 무창으로 퇴각했다.

"반란의 소굴에 본보기를 보여 주어라!"

장훈의 명령에, 북양군의 포신은 인정사정없이 한구-한양을 타격했다.

이 과정에서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발생했다.

한양 제철소, 즉 한야평(漢冶萍) 석탄제철공사.

1894년 호광총독 장지동에 명령으로 건설된 한야평 제철소는 중국 최초의 현대적 제철소였다.

비록 청조의 방만한 운영으로, 운영권이 사실상 외국 자본에 종속된 상황이었지만, 연간 7만 톤의 철강과 50만 톤의 철사를 생산하여 청국 철강 생산의 90%를 차지했다. 단일 제철소로는 청국을 넘어 동양 최대의 규모였다.

청조와 혁명파는 물론이요, 한야평 제철소에 자본을 대고 있는 영국과 일본까지 모두 제철소의 운명에 관심을 기울였다.

"각하, 큰일입니다! 한야평 제철소에 포격이 집중되어 시설이 대부분 파괴되었습니다!"

"이런 멍청한 놈들! 대체 왜 제철소를 파괴해!"

"반란군이 제철소에 주둔하고 있어서……."

"그걸 말이라고 해, 이 미친놈들아! 병사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제철소는 피해 없이 탈환했어야지!"

북양군의 포격은 한야평 제철소를 대파했다.

장훈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남부 반란군의 경제를 고사하겠다는 중국판 셔먼 작전을 세웠지만, 남부를 넘어 청국 전역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상황이었다.

삽시간에 청국은 철강 생산의 90%를 날려 버렸다. 그 손실은 이루 말할 것이 없었다. 시설을 복구하는 데는 막대한 자본과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그때까지 중국의 중공업은 사실상 개점휴업이었다.

중국판 남북전쟁은 과연 장훈의 계획대로 경제적 총력전의 양상을 보였다.

문제는, 단기적으로 전시경제를 피해 입히는 수준을 넘어, 장기적으로 중국의 공업 생산력에도 치명적인 악영향이 되었다.

- 163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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