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동양의 신질서
청제국의 수도, 북경의 하늘에도 중화민국의 철혈십팔성기가 휘날렸다.
다만 자금성의 내성(內城)은 예외였다.
청 조정과 중화민국 정부의 협의에 따라, 자금성은 건청문 광장을 경계로 하여 나뉘었다.
외조(外朝)의 삼대전과 문화전, 무영전 등의 전각은 중화민국 정부의 소유가 되었고, 내정(內廷)의 후삼궁과 동쪽과 서쪽에 있는 육궁 등은 청 황실이 소유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성경으로 떠날 준비를 합시다."
"어휴, 여길 어떻게 두고 떠나누."
"남았다가 한족들에게 칼 맞느니 차라리 떠나는 게 낫소."
내성의 소유권은 청 황실에 남지만, 황실과 조정은 만주로 떠나야 했다.
덕종 광서제의 능묘를 완성하고, 태조 누르하치와 태종 홍타이지 시절의 수도인 성경 봉천부의 고궁을 수리할 때까지, 황제와 황족들은 일시적으로 자금성에 체류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최대 1914년 말까지 더 체류할 수 있었다.
북경에서 태어나 살아온 왕공들에게 말이 만주가 고향이지, 조상의 고향일 뿐이었다. 만주는 미지의 벽지(僻地)나 다름없었다.
모든 것이 있는 북경을 두고 떠나려니 발이 떨어지지 않아 잔류를 희망하는 만주 왕공들도 있었지만, 민국 정부의 찬밥을 먹는 것보다야 그들의 영토로 인정받은 만주로 가는 게 나을 터였다.
남북화의는 만몽회장(滿蒙回藏) 독립을 보장했다. 이들은 대청 황제의 주권하에 일종의 동군연합을 구성할 예정이었다.
"만주 침략자를 몰아내자!"
"만주 놈들은 중국에서 꺼져라!"
신해혁명과 각성 독립 이후, 혼란을 틈타 중국 전역에 반(反) 만주의 광풍이 불었다.
"양주십일, 가정삼도를 잊지 말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양주십일(揚州十日)’과 ‘가정삼도(嘉定三屠)’는 명청 교체기에 청군이 저지른 대학살을 의미한다. 1645년 남명을 공격하던 청군은 양주와 가정에서 ‘시체로 우물이 메워질’ 정도로 끔찍한 대학살을 저질렀고, 이는 한족들에게 수백 년이 지나도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
강남 지역의 한족들이 특히 반청 감정이 더 강한 이유는, 명청 교체기부터 시작하여 태평천국에 이르기까지 화북보다 훨씬 많은 박해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만주인들은 한족이 다수인 도시에 살더라도, 엄격한 만한 분리 정책으로 인해 ‘주방팔기(駐防八旗)’라고 불리는 별도의 구역에 살았고, 이들이 손쉬운 분노의 대상이 되었다.
"죽어라! 침략자 만주 팔기 놈!"
"나, 나도 여기서 태어난 중국인이오!"
"닥쳐라, 더러운 만주 놈아! 양주십일의 복수다!"
한족 강경파들은 그동안 누적되어 왔던 분노를 주방팔기들에게 풀었다. 도처에서 사적인 보복과 학살이 뒤따랐다.
이는 남북화의를 위반한 일이었고, 사적 보복과 학살은 ‘근대적 민주공화국’을 지향하는 중화민국 정부 입장에서도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남경에서는 만주족에 대한 보복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각지에 발령했다.
하지만 남경 정부의 힘은 미약하기 짝이 없었고, 지방에서는 통제되지 않는 학살이 이뤄졌다.
각지의 군벌들도 치안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수준이 아니면 눈감아 주는 수준이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나리! 남북화의에서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 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만주족은 만주로 꺼져야지, 왜 중국에서 살려고 하나? 이게 다 중국인의 재산을 빼앗아 누려온 것이렷다?"
주방팔기의 호소에 군벌들은 군대를 동원해 일단 팔기구역을 보호해 주긴 했지만, 가산을 모두 빼앗아 버렸다.
생명 이외에는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린 만주족들은, 자신이 원래 살았던 고향을 떠나 조상의 고향인 만주로 귀향하길 희망했다.
"조약에서 보장해 준 대로 만주로 보내 주시오!"
"만주로 돌아간다면 민국 정부는 당신들의 신변을 보장해 주겠소."
한족 국민국가를 원하는 중화민국은 만주족의 귀향에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중화민국 군대의 보호를 받아 가며, 각지의 만주족들은 항구와 철도역에 집결했다.
이들에게는 정처 없는 귀향, 사실상의 추방이 기다리고 있었다. 추방 과정에서 취약한 위생으로 인해 전염병이 돌아 쓰러지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래도 목숨만 건질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만주로 떠나는 만주족의 수는 물경 100만에 이르렀다.
한족 입장에서 보면 역사의 업보를 갚는 것이요, 만주족 입장에서 보면 조상의 죄를 후손에게 푸는 억울한 박해였다. 신해혁명의 씁쓸한 뒷면이 아닐 수가 없었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 나는 대청에 충성을 맹세한 이상 그 신하로서 살 것이요, 죽어서도 대청의 귀신이 되리라."
한족 문무신료들 대부분은 중화민국에 충성을 맹세하는 길을 택했지만, 일부는 끝까지 청 황실을 따르는 길을 택했다.
문관으로는 대표적으로 입헌파의 거두 강유위가 있었고, 무관으로는 북양군 사령관 장훈이 있었다.
조약에 따라 북양군은 중화민국에 속했고, 장교의 절대다수는 중화민국을 택했지만, 장훈과 일부 장교들은 북양군의 특권을 포기하고 청조를 택했다.
"신하된 도리로 어찌 황은을 저버리랴? 우리는 끝까지 대청과 황제 폐하를 따른다!"
만주행을 택한 장훈과 장병들은 혁명의 상징인 단발을 거부하고, 끝까지 변발을 고수했다. 그래서 이들은 이른바 ‘변자군’으로 통했다.
"우리는 중국의 정통 정부인 중화민국을 따른다!"
왕당파였던 풍국장과 직례파 북양군 장교들의 대다수는 변발을 자르고 중화민국에 충성을 맹세했다.
단기서나 안휘파 입장에선 풍국장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지만, 북양군의 양대 파벌인 직례파를 무시할 수 없었다.
풍국장은 북양군의 지휘권을 인정받는 조건으로 중화민국에 충성을 맹세했다. 이는 원세개가 사주한 바였다.
"단기서의 위상이 너무나 커졌소. 이대로 북양군 전체를 단기서가 차지한다면, 안휘파 세상이 되고 말 거요. 풍국장으로 하여금 견제하게 해야 합니다."
"부총통의 말씀이 옳소."
단기서는 반정을 단행, 청조를 압박해 남북화의를 성사시킨 장본인으로 ‘공화국의 영웅’으로 떠받들어졌다.
중화민국 정부는 단기서를 육군총장 겸 하북 도독으로 임명하여, 하북으로 개명된 직례 일대의 통치권을 일시적으로 위임했다.
단기서가 북방의 최강자로 등장하자, 원세개가 이를 견제하려 들었다. 남경 수복과 민국 건국의 공을 세운 원세개도, 북경 수복과 청조 붕괴를 성사시킨 단기서에 비할 수 없었다.
원세개는 재빠르게 풍국장과 손을 잡았고, 직례-남양 두 파벌이 안휘파를 견제하는 형태가 되었다.
바로 이들, 북양군에서 갈라져 나온 안휘파와 직례파, 남부의 남양파와 호광파 네 파벌이 신생 중화민국의 4대 군사집단이었다.
4대 파벌 중에서 그나마 공화국에 진심으로 충성하는 집단은 호광파뿐이었으나, 그들조차도 각성자치를 지지하여 제 영역을 벗어나지 않으려 했으니, 남경 정부는 유사시 정부를 보호할 능력조차 없었다.
중화민국이 기대는 건 열강의 승인과 지지였다. 선통제의 교서 발표 이후, 영국을 시작으로 중화민국에 대한 승인이 이어졌다.
"대영제국 정부는 중화민국을 중국의 합법적인 정부로 승인합니다. 기존에 청조에 제공하기로 한 차관은 정부 수립을 기념하여 중화민국에 제공하도록 하겠습니다."
"귀국의 호의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영국에 이어 미국, 프랑스, 한국, 일본,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스페인 등이 신속히 중화민국을 승인했다.
이들보다는 시간이 걸렸지만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도 결국 중화민국을 승인했다.
"다행히도 공화국 정부는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군."
"우리 이권을 보장해 준다면야, 청조가 망하든 말든 상관없지."
"공화국의 기반이 취약하니, 오히려 더욱 외국에게 기대지 않겠소?"
"앞으로도 중국은 우리의 시장이자 공급처로 남아야지. 하하하!"
각국의 빠른 승인은, 중화민국이 청조가 기존에 맺은 조약과 채무를 승계하기로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혁명가들의 기대와 달리, 중국의 분할과 반(半)식민지화는 혁명 이후에도 다를 바가 없었다.
"중화민국의 수도는 남경이다. 경사는 북경으로, 직례는 하북으로 개명한다."
중화민국의 수도가 남경으로 결정됨에 따라, 정부 기관이 일제히 남경으로 이전할 준비를 했다.
비록 수도의 지위를 상실한다 할지라도, 6백 년 황도였던 북경은 여전히 중국에서 으뜸가는 위상을 가진 도시였으므로, 행정부의 분국(分局)이 설치되었다.
각국 공사관도 북경에서 남경으로 이전할 준비를 했다. 북경 공사관 구역은 총영사관으로 변경되었다.
"청조를 중국에서 몰아내고 중화민국을 건국했으나, 이제 시작에 불과하오. 민국 정부가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지역은 하나도 없지 않소?"
남경정부 입장에서도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정부는 중국 전역에서 신군의 충성맹세를 받아 냈지만, 이는 각 지역에서 군벌화된 신군이 주인을 청조에서 민국으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았다.
중화민국은 명목상 미국식 연방제를 지향했지만, 실질적으로는 각성 연합체에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우리는 오직 국민을 힘으로 삼아야 하오. 임시 약법을 반포하고, 국민투표로 정부를 선출해 기반을 다져야 합니다."
혁명파에게 실질적인 무력은 없었지만, 이들에게는 혁명의 주역이라는 상징성이 있었다. 상징성을 권력으로 전환하려면, 힘이 필요했다. 주권재민의 공화국에서 힘이란 곧 국민이었다.
임시대총통과 임시참의원을 대신하여, 내년에 전국적 선거가 진행되어 상하 양원과 정식 대총통이 선출될 예정이었다.
「제1조. 중화민국은 중화인민이 이를 조직한다.
제2조. 중화민국의 주권은 국민 전체에 속한다. ……」
5월, 임시참의원은 임시헌법에 해당되는 중화민국 임시약법을 공표했다.
동아시아 최초의 민주공화국답게, 손문의 삼민주의 사상에 의거하여 주권재민과 민주정부를 표방했다. 정치 체제는 미국식 연방제와 프랑스식 이원정부제의 혼용이었다.
소학교 교육을 마친 21세 이상의 남성에게 투표권이 부여되었고, 그 대상은 무려 4천만 명이나 되었다.
당시로는 미국에 버금가는 최대 규모의 투표권 부여였고, 실로 장대한 이상의 실험장이었다.
"중화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으며, 정부는 국민에 의해 구성됩니다!"
"수천 년 황제 전제의 시대가 끝나고, 주권재민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혁명을 지지하는 이들은 임시약법 초안을 곳곳에 붙이고, 사람들에게 선전했다.
그런데 반응은 대개 밋밋하기 짝이 없었다.
"대총통 손문! 근데 손문이 누구야?"
"청나라가 망하고, 중국의 새 지도자라고 하지 않나."
"그럼 이 손문이란 사람이 새 황제가 된 건가?"
"그래? 이제 손씨 왕조의 시대인가?"
"손씨 왕조라고? 명나라 주씨도 아니고, 손씨가 무슨 황제를 해?"
"손씨라고 황제 못할 건 뭔가? 삼국지에 나오는 오나라 손권도 손씨 아닌가! 수도가 남경인 걸 보니 오나라와 관계가 있겠군!"
"오나라가 대체 언제 일이여. 그럼 정통왕조인 한나라의 유씨를 따라야지, 왜 손가 따위가 황제야?"
"암! 정통은 한나라지!"
중국인 대다수는 역대 왕조들과 중화민국의 차이를, 황제와 대총통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다.
"이 어리석은 사람들아, 황제가 아니라 대총통이라고! 국민이 의원을 선출하고, 의원이 대총통을 선출하니까, 결국 국민이 대총통을 선출하는 것이네!"
"뭐? 백성이 나라님을 직접 뽑는다고? 완전 미친 세상이로군."
"그럼 저 손문이란 사람도 백성이 뽑은 건가?"
"그건 아니지만, 각성 대표부가 선출했네."
"그럼 성이 최고인 건가? 전국시대처럼 제후들이 천자를 옹위하는 건가?"
"그게 아니라, 미국식 연방제란 말이네!"
"미국? 미국이 뭔데? 먹는 거냐?"
중국인의 절대다수는, 자신이 사는 지역을 벗어나서 살지 않으며, 교육 수준도 형편없었다. 배웠다는 이들도 유교적 전통교육이 전부였다.
소학교 교육을 마쳤다는 4천만 명도, 광서신정 이전의 세대에는 유교 경전인 소학(小學) 이수자를 기준으로 삼았으니, 근대적 제도에 대한 이해가 있을 리가 없었다.
"언제나 조정은 멀고, 힘은 가까운 법. 황제가 대총통으로 바뀌었다고 해도 달라진 건 없으니까,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
여전히 중국을 지배하는 건 향촌 신사 계층이었다. 이들이 각 성의 자의국을 지배했고, 자의국은 신군 도통과 결탁했다. 신사 계층의 지지를 얻는 각 성의 군부 실력자들은 점차 군벌화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중국을 통치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중국에 필요한 건 힘, 오직 강력한 힘과 질서이야!"
군벌의 수령들은 자신만이 중국을 통치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들에게 있어 손문과 혁명파는 이상을 좇느라 현실을 도외시하는 백면서생의 무리에 지나지 않았다.
"누가 권력을 잡던 간에 배부르게만 해 준다면 상관없어."
"암, 먹고 살게만 해 준다면야. 전란이라면 지긋지긋해."
난립하는 군벌들과 야심가들, 도탄에 빠진 민생.
짧지만 파멸적이었던 전국적 봉기와 내전은 가뜩이나 암담한 중국의 경제를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고, 특히 중국 철강 생산의 90%를 책임지던 한야평 제철소의 파괴는 공업의 붕괴를 의미했다.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한단 말인가?’
손문과 중화민국 지도부는 혁명의 승리에 도취되어 있지 않았다. 승리는 짧았고, 위기는 도처에 깔려 있었다.
동아시아 최초의 민주공화국, 신생 중화민국의 미래는 결코 밝지 않았다.
* * *
신해혁명과 대청제국의 붕괴.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배후에서 끈을 움직여가며 은밀히 조종하던 한 사내가 바다 건너에서 전해 오는 소식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자, 이제 동양의 신질서의 시작이다.’
이선이 구상하던 동양의 신질서가, 신해혁명과 대청제국의 붕괴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만주와 몽골, 티베트와 투르키스탄은 중국에서 분리된다. 하지만 이들이 각자도생하기에는 그 힘이 너무나 미약하기 때문에, 대청국의 틀 안에서 동군연합(同君聯合) 형태로 묶어 둔다.
대청 황제는 여전히 만주의 한이자 몽골의 칸, 티베트의 전륜성왕이자 투르키스탄 무슬림의 보호자였다.
그리고 이들은 러시아와 대한제국의 공동 보호를 받을 터였다.
중국 18성은 중화민국이라는 하나의 틀로 묶이기는 했으나, 사실상 전국시대나 후한(後漢)말기의 재현이었다. 명목상 미국식 연방제, 실질적으로는 난립하는 군웅할거의 시대였다.
‘열강이 버티고 있으니 당장 나설 수는 없겠으나,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폭풍이 밀려오는 순간, 동양의 신질서는 대한이 새로이 이끌게 된다.’
동양의 제국을 무너트린 신해혁명, 서양의 제국들을 무너트릴 세계대전.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대한제국이 동양의 새로운 조정자로 부상할 시기가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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