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동양 협화(協和)
대청제국 붕괴 이후 주권과 영토를 규정한 남북화의 조약과 교서는 중국 이외 지역에도 통보되었다.
만주-내외몽골-신강-티베트-청해 등은 모두 대청 황제의 주권 영역으로 선포됐다.
"청조가 무너졌는데, 몽골이 왜 아직도 만주의 지배를 받아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독립국가 대몽골을 원한다!"
이미 독자적으로 ‘대몽골국’을 선언한 몽골인들은, 주권국가로서의 독립 불허에 분노했다.
대청 황제의 주권 하에 자치는 허용됐지만, 그들이 꿈꿨던 범몽골(외몽골·내몽골·서몽골) 통일도 허용되지 않고 분리되었다. 복드 칸이 이끄는 몽골 정부의 영역은 외몽골까지였다.
"러시아 정부는 대청국의 주권과 독립을 보장하기로 했소. 몽골에게는 실질적인 자치가 주어질 것이며, 러시아는 이를 후원하겠소."
몽골 독립의 후원자 노릇을 하던 러시아가 태도를 바꿔 청조의 주권과 영토를 지지했다.
"몽골과 티베트는 황교를 섬기는 불제자들이니, 단결하여 외부의 적에 맞서 원조를 제공하고, 자유로운 무역을 체결합시다."
달라이 라마의 ‘영적 고문’이자 러시아 국적의 불교 승려 아그반 도르지예프가 티베트-몽골-러시아-한국을 잇는 연결책 역할을 했다.
도르지예프는 티베트와 몽골의 단결을 촉구하고, 러시아와 한국에 열심히 로비를 했다.
"우리는 더 이상 만주인의 지배를 원치 않습니다. 부디 귀국에서는 독립을 승인해 주십시오."
지난 1년간 유라시아를 횡단해 신강 일대를 탐험하고,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를 만나고, 몽골에 도착한 러시아군 장성 만네르하임 소장은 신생 몽골군의 군사고문으로 추대됐다. 그는 실질적으로 러시아의 대리인 역할을 했다.
"현실적으로, 몽골에게는 자주독립을 지킬 수 있는 군사력이 없습니다. 북양군이나 만주군이 몽골 독립을 부정하고 쳐들어온다면 막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러시아가 있기에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만, 섣부른 독립은 많은 걸 잃을 수 있습니다. 자치를 받아들이십시오."
몽골 주재 한국 총영사 김규식도 설득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이웃나라에 맞서, 만주와 몽골, 티베트와 신강이 연합으로 단결하는 건, 생존을 위해 필요한 일입니다. 러시아와 한국이 자치를 보장합니다. 일단 대청 황제를 형식적인 주군으로 계속 모시고, 실질적인 자치를 누리십시오. 자치는 궁극적인 독립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미 러시아와 한국은 청국의 주권을 인정하고, 세력권 분할을 도모하는 상황이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이웃을 사이에 두고, 주변 소수민족들은 단결해야 한다.
러시아와 한국의 거듭된 권유에, 몽골은 일단 청조 하의 자치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궁극적인 독립에 대한 열망을 포기한 건 아니었다.
"대몽골국은 중국으로부터 영구히 분리되었으며, 자주국가임을 선언하노라."
"티베트국은 중국으로부터 영구히 분리되었으며, 자주국가임을 선언하노라."
몽골인의 수장 복드 칸과 티베트인의 수장 달라이 라마의 명의로, 몽장(蒙藏) 자주국가 선언이 나왔다.
열강의 요구를 받아들여 일단 대청국 산하의 자치권은 받아들였지만, 중화민국과는 영구히 분리되었음을 천명했다.
"이제 시작이다. 부처님의 가피(加被) 하에 우리 민족은 자주독립을 되찾았으며, 세계만방에 어깨를 나란히 하리라."
청군의 침입을 피해 영국령 인도로 망명을 해야 했던 달라이 라마 13세는, 티베트인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귀국하여 자주국가 선언을 했다. 1910년 이래 티베트에 주둔하며 내정간섭을 일삼던 주장대신과 신군도 남북화의에 따라 철수했다.
"중국 각 성의 인민이 군주제를 전복시켜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이들 한인은 이제 티베트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 반드시 티베트 지역에서 한인이 자취를 감추게 할 것이다."
영국령 인도에서 망명하는 동안, 달라이 라마는 세련된 근대적 통치술을 익혔다. 영국과 더 이상 적대하지 않고, 영국의 보호를 받으면서 중국으로부터의 독립과 근대화를 추구한다는 복안을 세웠다.
"암도는 물론이요, 중국에 편입된 고토도 언젠가 수복해야 한다."
청조는 일전에 티베트를 종속시켜 암도(Amdo, 청해) 지방을 분리하고, 캄(Kham) 지방을 사천에 편입시켰다.
남북화의 조약에 따라 청해는 청국의 영역으로 남았지만, 사천·운남·감숙의 티베트인 거주지역은 중화민국의 영역으로 남았다.
몽골이 내몽골과 서몽골까지 아우르는 대몽골의 재건을 꿈꾸는 것처럼, 티베트도 암도와 캄을 아우르는 대티베트의 복원을 꿈꿨다.
하지만 이들의 영토를 결정하는 건, 영국과 러시아라는 양대 열강이었다. 영국과 러시아는 티베트와 몽골을 각자 자신의 세력권으로 편입시켰고, 기준선을 넘지 않도록 조정했다. 한국이 그 사이에서 파이프라인 역할을 했다.
영국과 러시아의 중립지대로 설정된 신강에서는, 적화(迪化, 우르무치) 도대 겸 신군 도통 양증신(楊增新)이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했다.
운남 출신 양증신은 청조의 관료와 군대를 장악하고, 위구르 지도자들과 협상하여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노련한 정치력을 발휘해 큰 유혈사태 없이 신강을 안정시켰다.
"적화 도대 양증신을 신강 순무에 임명하노라."
"신 양증신은 대청 황제 폐하께 변치 않는 충성을 맹세합니다."
청조는 멀리 떨어진 신강까지 지배력을 행사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양증신을 신강 순무로 임명하여 사실상 통치권을 맡겼다. 영국과 러시아도 양증신의 권력을 인정함에 따라, 그는 방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신강의 지배자가 되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양국의 ‘보호’를 받는 처지였다.
"몽골인과 티베트인들의 독립과 영토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2차례의 유라시아 횡단 이후, 일약 러시아의 몽골-티베트 전문가로 떠오른 만네르하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러시아 군인 중 유일하게 달라이 라마를 2차례 알현했으며, 복드 칸의 군사고문으로 영입됐다.
핀란드 출신이지만 러시아에 충성하는 만네르하임은, 러시아가 칭기즈칸을 계승하여 유라시아 여러 민족들을 이끌 운명이 있다는 유라시아주의 이론에 점차 공감했다.
"물론 그들에게는 민족자결의 권리가 있습니다. 다만 평화와 안정을 해치면 곤란하겠지요. 우리가 함께 그들을 잘 지도해 주어야 합니다."
김규식은 1912년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로 떠오르고 있는 뉴저지 주지사 우드로 윌슨의 프린스턴 시절 제자였다. 김규식은 윌슨의 영향을 받아 민족자결주의에 공감했고, 신해혁명과 주변 민족들의 독립을 적극 지지했다. 그는 동아시아 여러 민족의 자결과 대한제국의 이익이 조화될 수 있는 방법을 골몰했다.
"우랄-알타이 계통의 민족 중 가장 서쪽에 있는 핀란드와, 가장 동쪽에 있는 한국은 러시아라는 유라시아 제국을 매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우랄-알타이 여러 민족이 바른길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20세기 초, 핀란드는 ‘우랄-알타이’ 이론을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우랄-알타이의 서쪽 끝에 핀란드와 헝가리가 있고, 동쪽 끝에는 한국과 일본이 있었다.
만네르하임 사절단의 일원인 핀란드 언어학자 람스테트(Gustaf John Ramstedt)는 우랄-알타이 이론을 연구하였고, 몽골의 독립을 지지했다. 그는 주 몽골 티베트 공사 역할을 하는 도르지예프, 김규식과 친분을 맺고 우랄-알타이 이론을 전파했다.
언어학자 람스테트와 언어적 재능이 뛰어난 김규식과 우랄-알타이 제어 공동연구에 들어갔고, 알타이 제어와 한국어의 비교연구를 했다.
이는 학문적 호기심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그런데 우랄-알타이 이론이 한국에 소개되면서, 북방의 정세변화에 맞물려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대한은 대고구려의 후예요, 북방 여러 민족의 형제다. 우랄-알타이 이론이 이를 증명한다!"
"대한과 일본, 만주, 몽골, 튀르크, 헝가리, 핀인은 모두 형제민족이다. 한민족은 이 거대한 형제민족의 일원으로서, 민족들의 우호와 친선을 도모할 필요가 있다."
"가자, 북방으로! 동양에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다!"
근래 투란주의가 소개되어 범민족주의에 이끌리고 있는 한국도, 우랄-알타이 이론을 흡수했다.
중국과 청조의 분리가 현실로 다가오자, 한국 민족주의자들은 그동안 ‘오랑캐’로 생각했던 만주-몽골-튀르크와 연합해야 한다는 북방진출론이 등장했고, 이를 정당화시켜 줄 수 있는 이론이 바로 때마침 소개된 우랄-알타이 동계(同系)설이었다.
그동안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던 핀란드와 한국의 범민족주의자들이, 러시아를 매개체로 삼아 유라시아에서 새로운 질서를 꿈꾸는 기이한 환경이 연출됐다.
* * *
북방으로 이전한 청국, 소위 ‘북청(北淸)’은 명목상 만주-몽골-신강-티베트를 모두 지배했다.
"대청국은 만주, 몽골, 회족, 서장, 한족 오족이 연합한 협화(協和)의 나라이다. 출신을 막론하고 모든 대청 국민은 동등한 권리를 지니며, 오족의 협화로 만대에 빛날 단단한 국가를 만들어 나가자."
성경 봉천부를 새로운 수도로 정한 북청은, 오족협화를 외치는 교서를 반포했다.
하지만 북청의 실질적인 통치영역은 만주 3성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만주에 협조적인 건 내몽골 정도였고, 이는 내몽골 차하르와 외몽골 할하의 오랜 역사적 갈등으로 인한 분리였다.
외몽골은 만주의 통치에 비협조적이었고, 지리적으로 고립된 티베트는 말할 것도 없었다. 몽골이나 티베트처럼 자치가 아닌 신강성도 사실상 반(半)독립 상태였다.
"대한 황제 폐하와 정부는, 대청국의 무궁한 발전과 번영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도움을 아끼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주청 한국 공사로 봉천으로 따라온 이완용이 한국의 지지와 지원을 약속했다.
대한제국은 중화민국을 승인하여 김가진을 초대 주중 한국 공사로 임명하여 남경으로 보냈다. 자연히 북경의 주청 공사관은 봉천으로 이전했다.
"귀국의 호의와 협력에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앞으로도 대청과 귀국 사이에 우호가 영원하길 바라오."
다시 총리대신으로 임명되어 만주 관리를 맡은 숙친왕 산기가 감사를 표했다. 황제와 청 황실은 당분간 자금성에 머무를 예정이었고, 심양고궁의 수리가 완료되면 이전할 예정이었다.
영토와 인구의 대부분을 상실하고 북방에 쪼그라든 현실을 살핀 숙친왕은 암담하기 짝이 없었으나, 청조가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해야 했다.
‘음흉한 조선 놈들. 입으로는 온갖 달콤한 소리를 하면서, 뒤로는 만주를 차지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겠지.’
숙친왕은 한국이 이중플레이를 해 왔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청조의 형제지국을 자처하면서, 뒤로는 분할을 획책하기 위해 영국 및 러시아와 음모를 꾸민 게 아닌지 의심했다. 혁명파와 손을 잡은 한국의 자칭 아시아주의자들도 한국 정부의 지시를 받은 게 틀림없었다.
‘조선과 아라사 놈들은 믿을 수 없지만, 현실적으로 의존할 수 있는 건 결국 저들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현실적으로 청조가 기댈 수 있는 나라는 한국과 러시아뿐이었다.
남북화의는 중화민국과 청국의 영토 불가침을 약조했지만,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시대가 아니던가?
옛 대청제국에서 인구의 9할 이상을 차지한 중화민국과 북청의 국력 차이는 앞으로 더욱 벌어질 터였다.
만주 3성, 내외몽골, 신강, 티베트, 청해를 합쳐 북청의 인구는 약 2,500만이었다. 그 중 7할이 만주에 거주했고, 만주의 대다수는 이주한 한족이었다. 봉금령 해제 이후, 특히 광서신정이 시작된 1900년대에 만주를 향해 한족이 다수 이주해 왔다.
중국 본토의 만주족들이 만주로 귀향을 개시했지만, 인구 비율을 뒤집을 순 없었다. 그렇다고 만주의 한족들을 모조리 추방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가뜩이나 넓은 땅에 비해 부족한 인구를 더 줄일 수는 없었다. 만주의 한족들은 대개 가난을 피해 이주해 온 빈농들이니만큼 귀향을 원치 않았고, 이들을 ‘만주국민’으로 개조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소수의 만주족이 계속 다수의 한족을 지배하고, 중화민족주의의 위협 속에서도 청조가 살아남으려면, 보호자를 자처하고 있는 러시아와 한국의 후원을 받아야 했다.
"이르다 뿐이겠습니까? 대청의 종묘사직이 만세에 이어지도록, 대한은 형제지국으로서 영원히 함께하겠습니다."
이완용은 속으로 냉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최상의 예우를 표하며 고개를 숙였다.
‘만주를 중국으로부터 분리하여, 대한의 완충국으로 삼으려는 성상의 계획이 마침내 현실로 이뤄진 게 아닌가? 그렇다면 임무를 완수한 나도 슬슬 귀국할 때가 된 것 같은데. 최소한 외무대신 직위는…….’
이완용은 자신이 임무를 완료했다고 생각하고, 본국으로의 영전을 꿈꿨다.
하지만 이선은 이완용을 계속 주청 공사로 놔둘 생각이었다. 아직 그에겐 임무가 남아 있었다.
"대한국 대황제 폐하의 성수(聖壽) 45세를 맞이하여, 성수무강을 기원하옵나이다!"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광무 16년 5월 31일, 황제의 탄일인 건원절을 맞이하여 대한제국에는 축제 분위기가 가득했다.
내외 귀빈이 황제를 알현하여 건원절을 경축했다. 대한제국의 우방인 러시아에서는 올해 특별히 키릴 대공을 특사로 파견해 축하했다.
"러시아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한국 황제 폐하의 탄일을 경하드리옵니다."
"고맙소. 귀국 황제 폐하께 짐의 감사를 전해 드리길 바랍니다."
영국 공주 빅토리아 멜리타와 결혼한 일로 황후 알렉산드라의 미움을 사 한동안 대공 지위도 박탈당했던 키릴이지만, 영러협상의 체결 이후 복권될 수 있었다. 오히려 영국 왕실을 처가로 둔 덕에 영국과 러시아를 잇는 파이프 역할을 할 수 있었고, 차르 니콜라이도 그에게 황실 외교의 책무를 맡겼다.
"대공께서 한국을 방문한 건 7년만이군요."
"예,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켜 기쁩니다."
이선은 최고위 귀빈인 키릴 대공과 별도의 회견을 했다.
7년 전, 러일전쟁 당시 태평양함대에서 복무하던 키릴은 이선의 중재 덕에 일본군 포로 신분을 면하고 러시아로 귀국할 수 있었다. 그 이후 이선과 키릴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래, 차르께서는 뭐라 하십니까?"
"폐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양국 정부가 추진하는 대로 별도의 조약을 맺자고 하셨습니다."
키릴이 방한한 건, 단순히 이선의 생일이나 축하해 주자고 온 게 아니었다. 신해혁명 이후 변화한 정세에 따라 이선과 니콜라이가 합의한 사항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러시아제국과 대한제국이 공동으로 청국을 보호한다. 외몽골과 동경 117도 이서의 내몽골, 북위 44도 이북의 북만주는 러시아의 세력권으로. 남만주와 내몽골 동부는 한국의 세력권으로 한다.」
"좋습니다. 정부 간에 구체적인 협의를 하고, 페테르부르크에서 비밀조약으로 체결하지요."
"예, 그리 보고하겠습니다."
이선은 지도의 선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동양의 신질서는 대한제국과 러시아의 협화, 이선과 차르의 협화로 의해 그려지고 있었다.
- 170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