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489화 (488/812)

170화 희년(禧年)

광무 16년(1912).

이 해를 맞이하여 대한제국 정부는 일종의 ‘희년(禧年, jubilee)’을 선포한 상황이었다.

대한제국 선포 15주년 계천기원절(4월 11일), 황제 45세 건원절(5월 31일), 조선 개국을 기념하는 520주년 개국기원절(8월 14일), 태상황의 환갑을 기념하는 만수절(9월 8일)에 이르기까지 국경일이 잇달아 이어졌다.

이를 기념하는 각종 기념식과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육군 열병식, 해군 관함식, 제3회 내국박람회, 전국 야구·축구·육상 대회, 유물·미술품 전시회, 음악회, 연극, 활동사진(영화) 상영회 등 다양한 행사가 개최되었다.

정부와 황실 예산으로 수많은 구경거리와 즐길 거리를 제공하니, 국민 사이에서도 환호가 쏟아졌다.

"실로 태평성대가 아닌가!"

"중국의 혼란과 비교하니, 대한의 평화와 번영이 더욱 값지게 느껴지네."

"이게 다 황제 폐하의 은덕이자, 정부의 공로지!"

사람들은 평화와 번영을 만끽했다.

‘1912년은 실로 기쁜 해로다.’

이선에게는 그런 숫자상의 이유보다는, 동아시아에 신질서가 도래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대청제국이 붕괴하고, 그 빈자리에 중화민국이 들어섰다. 중화민국이란 그럴싸한 간판과 달리, 군벌연합체에 불과한 중국은 분열을 거듭할 것이다.

북방으로 이전한 북청은 중국 변경의 독립을 인정받았고, 특히 만주는 러시아와 한국의 세력권으로 나뉘어 중국과 한국 사이의 완충국이 되었다. 이선의 구상대로였다.

‘국외적으로는 변혁이, 국내적으로는 안정이.’

대한제국은 평화와 번영 속에서 한창 상승하는 중이었다.

1900년대에 본격화된 대한제국의 식산흥업과 경제발전은, 1910년대에 이르러 궤도에 올랐다.

러일전쟁 이전까지 한국과 만주의 시장을 지배하고자 했던 일본 상공업이, 전쟁 이후 대만과 중국 남부로 방향을 틀면서 대한제국은 기회를 얻었다.

토지개혁의 완수, 광업 개발과 생산량 증대, 토착자본과 금융의 확대, 교통의 비약적인 발전, 수입 대체를 위한 소비재 경공업의 확립, 광대한 만주 시장의 확보는 신생 대한제국의 산업을 도약시켰다.

1900년대 초만 해도 쌀, 금, 은, 구리, 석탄, 텅스텐 등 1차 산업을 수출하고 근대화에 필요한 공산품을 들여와 겨우 무역수지를 맞추는 상황이었다.

10년이 지난 현재는 방직, 섬유, 의류, 식음료, 목제품 등 소비재 경공업이 발전하였다. 국산 열풍이 불면서 기존까지 한국 시장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던 영국과 일본산의 점유율이 크게 떨어졌다. 수입대체라는 목표를 달성하고, 만주 시장에 수출하는 길까지 열렸다.

"국가 주도하에 자본을 투자하여 군수, 강철, 기계, 조선 등 중공업을 본격적으로 육성한다."

"폐하, 중공업은 워낙 많은 자본과 기술이 필요하온지라……."

"서양의 공업은 한참 앞서 있습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대한의 공업은 국제무대에서 상대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중공업 육성에 나선 일본조차도 서양에 비하면 낮은 품질로 인해 고전하고 있습니다."

광무 16년 5월, 이선은 본격적인 중공업 육성계획을 시사했다. 그러자 경제 관료들이 난색을 표했다.

러일전쟁으로 군수공업이 호황을 맞이하면서, 발전의 계기가 이루어졌다. 대한제국도 수입일변도였던 무기의 국산화를 추진하면서 군수공업을 육성했다. 부단한 노력의 결과, 1910년대가 되면 소총과 탄환은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중공업 발전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일본이 해군 일변도로 나가면서, 특히 군함 건조를 위한 기계와 조선업에 몰두했다. 마침내 일본은 자국산 전함을 건조하기에 이르렀으나, 서양 열강과 비교하면 뒤떨어진 상태였다.

하물며 일본보다도 근대화가 한 세대가 늦은 한국이, 아무리 근래 발전이 빨랐다고 해도 중공업에 도전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국 내전으로 한야평 제철소가 붕괴했소. 중국의 강철 생산량 9할이 사라져 버렸지. 강철은 산업의 쌀이나 다름없는데, 그 손실은 단기간에 메울 수가 없을 것이오. 대한은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 시장을 염두에 두어야 하오."

"그렇긴 하오나, 현재 중국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서양 열강, 특히 영국과 대적하려면……."

"국내시장의 수입 대체는 영국도 용인한 바이나, 중국 시장에 신참이 끼어드는 것을 용인할 리가 없습니다. 일본도 영국의 양해를 겨우 얻어 복건 시장에 진출한 상황입니다."

"지금 당장은 그렇겠지. 하지만 유럽에서 전쟁과 같은 비상사태가 발생한다면, 동양은 우선순위가 떨어질 수밖에 없소. 그때를 대비해야 하오."

보불전쟁 이후 40여 년간 평화로운 유럽에서, 전쟁, 그것도 파국적인 세계대전이 일어나리라 짐작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선은 확신했다. 세계대전이 발발하면, 유럽 열강은 전쟁에 집중하느라 동아시아까지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그 빈자리를 미국과 일본이 지배하다시피 했다. 일본은 유럽 열강이 철수한 중국 시장을 지배하고, 협상국에 군수품을 판매하면서 막대한 부를 쟁취했다. 세계대전 수혜로 일본은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변모했고, 메이지유신 이후 최대의 번영을 맞이했다.

변화한 역사에서도 일본은 적잖이 수혜를 누리겠지만, 한국이 과실의 상당 부분을 가져갈 터였다.

‘만주를 넘어 화북 시장의 지배력 확보,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한 대(對) 러시아 수출 확대.’

세계대전이 발발하면, 만주와 화북에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러시아와 독일이 모두 손을 떼야 하는 상황이 온다.

특히 중부열강에 의해 동부전선에 고립된 러시아는, 기존의 발트해-흑해 무역이 모두 막힘에 따라, 대외무역을 극동에 의존해야 했다.

러시아와 철도로 연결되어 있는 한국에는 절호의 기회였다. 서유럽과 비교하면 취약한 러시아 군수공업의 외주만 받아도 이문이 상당할 터였다.

지난 30년간의 근대화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체급 차이로 인해 여전히 농업이 지배적인 국가로 머물러있는 대한제국이지만, 국가의 체질을 전환할 절호의 기회가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광무 20년대는 공업이 대한을 먹여 살리게 될 것이오. 우리는 마땅히 미래를 대비해야 합니다."

"삼가 성상의 높은 뜻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이선은 1910년대 중반부터 이뤄질 ‘공업으로의 전환’을 예고했다. 원훈 김옥균과 총리 박영효 등 정부 지도부는 지지를 표명하고, 중공업 육성정책 계획에 돌입했다.

* * *

때를 맞춰, 1912년 6월부터 한로철도협정이 발효되었다. 1907년 이래, 서울발 대륙열차는 남만주철도로 접속하여 하얼빈까지 운행했다. 하얼빈에서 러시아 열차로 갈아타고 동청철도와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접속하는 방식이었다.

새로 한로철도협정이 발효되면서, 서울에서 모스크바까지 주 2회 급행열차가 편성되었다.

기존처럼 서울-하얼빈, 하얼빈-모스크바 두 구간으로 나눠서 구매하는 게 아니라 서울-모스크바 통합 승차권을 활용해 사실상 내국인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표준궤를 쓰는 한국과 달리 광궤를 쓰는 러시아 철도 사정으로 인해 여전히 하얼빈에서 갈아타야 했지만, 기존의 러시아 철도 운행시간에 맞춰 운행되던 환승시간도 최소화해 불편함이 없도록 하였다.

협정의 결과, 서울에서 모스크바까지 소요시간은 12일로 줄어들었다.

"황성발 모스크바 도착 대륙횡단 특급열차가 곧 출발합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승차권을 확인하시고……."

이선의 기억대로라면, 21세기에서도 불가능했던 일이 눈앞의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만주와 러시아를 잇는 북방 대륙경제권으로의 진출이다.’

청국의 붕괴, 중화민국의 영유권 포기, 일본의 북방 진출 좌절로 인해 대한제국은 북방으로 향하는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서전(스웨덴)으로 향하는 대한국 선수단은 승전보를 거두고 돌아오리라 다짐합니다!"

"대한의 건아여,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라!"

"와아아아아!"

대륙횡단열차의 첫 승객은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 출전하는 대한제국 선수단이었다.

1896년 제1회 아테네 올림픽을 시작으로, 4년 주기로 제5회 스톡홀름 올림픽까지 이어졌다.

이선이 아테네 올림픽에 참관한 이래, 한국에서도 올림픽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생겼다.

1900년대부터 한국에도 본격적인 ‘스포-오츠’의 바람이 불었다. 육체운동을 천시하던 고루한 사고방식이 점차 사라지고, 활동성을 중시하는 청년세대에 근대 스포츠가 전파되었다.

"대한의 건아라면 육체를 단련하자!"

"영국인의 실질강건, 프랑스인의 애국심, 독일인의 상무정신을 본받자! 이는 곧 육체의 단련으로부터 시작된다!"

‘실질강건’, ‘상무정신’, ‘애국심’은 근대국민국가의 표어였고, 대한제국도 마찬가지였다. 체육으로 단련된 ‘건강한 육체’와 ‘씩씩한 남성’은 ‘대한건아’의 직접적인 표상이 되었다.

학교를 중심으로 운동부와 운동회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서양인을 통해 전파된 야구와 축구 등 집단 스포츠는 각 학교와 지역을 빛낼 수 있는 장이 되었다. 자발적으로 야구부와 축구부가 조직되고, 지역대회를 거쳐 전국대회로까지 발전하였다.

광무 14년에는 대한전국야구대회가 개최되었고, 이듬해에는 대한전국축구대회가 개최되었다.

광무 16년에는 대한전국육상대회가 개최되고, 관료와 기업가, 체육인들을 중심으로 대한체육회가 창립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아시아에서 가장 빠르고 선도적인 위치였다.

"대한 건아여, 체력은 곧 국력이다!"

학교와 병영이 근대국민국가의 두 축이듯이, 체육의 확산도 학교와 병영을 통해 이루어졌다.

고위직도 예외가 없었다. 학무대신 이상설, 육군참장 노백린은 대한체육회의 상임이사를 맡을 정도로 생활체육 보급에 열성적이었다.

"대황제 폐하께옵서도 신민의 모범이 되고자, 몸소 체력을 단련하신다!"

이선은 젊은 시절부터 운동을 정기적으로 해 왔다. 딱히 국민의 모범이 되기 위함이 아니라, 본인의 체력 관리를 위해서였다.

이선도 나이를 먹으면서 격렬한 운동은 피했지만, 승마, 조깅, 정구(테니스), 골프 등을 꾸준히 즐겼다.

"황제 폐하 납시오!"

"와아아아아! 황제 폐하 만세!"

이선은 야구와 축구 대회가 활성화되면서 직접 참관하고, 시구와 시축을 맡기도 했다. 궁궐에 근엄하게 앉아 있는 조선의 전통적 군주상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행동이었지만, 특히 청년세대는 열광했다.

황제가 서양인이나 관료들과 격의 없이 운동을 즐기는 건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체면상 뛰는 것조차 마다하던 양반들도 황제를 모방하기 위해 팔을 걷고 운동을 했다.

여성이 몸을 움직이는 운동을 한다는 걸 수치스럽게 여기는 풍토도 자연스럽게 개선됨에 따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스포츠의 바람이 불었다.

제5회 스톡홀름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전 대륙에 걸쳐 선수단이 참여하길 바랐다. 올림픽은 유럽이 주도했고, 1908년 런던 올림픽이 되면 참여가 점차 확산되어 북미, 남미, 대양주(오스트랄라시아), 아프리카(남아프리카 연방)에서도 선수가 참여했다.

하지만 아시아는 아직까지 미답의 영역이었다. 조직위원회는 아시아 국가들의 참여를 바라며 한국, 일본, 중국, 시암, 페르시아 등에 초청장을 보냈다.

"세계선수권에 참여하는 건 아직 시기상조 아닐까요?"

"학무부에서는 1916년 베를린 올림픽 참여를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만……."

"초청을 사양할 필요는 없지. 이번 기회에 선수단을 파견하도록 합시다."

한국과 일본이 대회 참여를 수락함에 따라, 스톡홀름 올림픽은 최초로 5대륙이 모두 참여하는 올림픽이 되었다.

"선수단 규모는 어떻게 구성하지요?"

"세계적 수준에 맞는 선수가 있을 리가……."

"올림픽은 참여에 의의가 있다고 하지 않소."

"외교관도 아니고, 민간인 참여시 비용은 누가 부담해야 하나?"

"체류비는 개최국에서 보조해 주지 않나요?"

"일본에선 2명 파견한다는데, 우리도 첫 대회에서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럼 시일이 촉박하니 다음 대회부터 선발 규정을 정해 내보내도록 하고, 군인을 대표해서 1인, 민간인을 대표해서 1인을 선발합시다."

올림픽 참여에 호의적인 입장을 보인 이선과 달리, 정부 인사들은 굳이 왜 그런 데 돈을 써야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학무대신 이상설이 총대를 메고, 학무부 예산으로 참여를 결정했다. 본인이 직접 선수단장을 맡을 정도의 열성이었다.

"육·해군 통합 사격대회의 우승자는 안중근 부령입니다!"

"과연, 안 부령의 사격솜씨라면 세계에서도 부족함이 없을 터."

이 당시만 해도, 군인 신분으로 올림픽에 참여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특히 사격, 승마, 펜싱 등의 종목에서는 군인들이 대거 참여했다.

군인 대표로 시종무관 안중근이 선발되었다. 군부 내에서도 사격이라면 따라올 사람이 없다고 평가받는 안중근이었다.

"육상대회 우승자는 여운형 판임관입니다!"

27세의 여운형은 황성대학을 졸업하고, 문관시험에 합격한 엘리트였다. 하지만 대학 시절부터 그의 관심과 재능은 체육에 있었다. 당대인들과 비교하면 큰 키와 당당한 풍채를 지닌 여운형은 대학 야구부를 이끌었고, 육상과 체조 대회에도 참여했다.

본래 여운형은 학무부 판임관으로 육상 선발전 심판위원을 맡았는데, 즉석에서 참여 제안을 받았다.

"여 군이 운동 잘한다면서? 정부를 대표해서 참여해 보게."

"하긴, 저 모습들을 보니 호승심이 드는군요."

아직 전문적인 스포츠 선수들이 없던 시절이라, 다들 취미로 하던 사람들이었다. 여운형은 그들 사이에서 뜻밖에 두각을 드러내며 100m, 200m, 400m 경주에서 잇달아 1, 2위를 차지했다.

"잘 됐군! 무관이 대표로 나가는데, 문관도 대표가 있어야지!"

"그래도 소생이 세계적인 실력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아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의가 있네."

학무대신 이상설은 크게 기뻐하며 여운형을 대표선수로 추천했다.

이리하여 이상설을 단장으로, 안중근과 여운형을 선수로 하는 대한제국 선수단이 구성되었다. 현재 영국에 유학 중인 영친왕 이영도 올림픽 참관과 선수단 격려를 위해 스톡홀름 방문을 결정했다.

대한제국 선수단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러시아를 경유해 스웨덴으로 향했다.

안중근과 여운형은 일전에 김창수를 통해 안면이 있었다. 두 청년은 횡단열차를 타는 동안 의기투합하여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다.

"형님의 사격실력이라면 세계에서도 수위를 다툴 수 있을 겁니다."

"음, 좋은 결과를 낸다면 한국을 넘어 아시아인들에게도 희망찬 소식이 되겠지."

안중근의 호승심이 불이 댕겼다. 과연 사격솜씨라면 세계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리라는 자부심이 있었고, 콧대 높은 서양인들에게 대한제국과 동양인의 힘을 보여 주고 싶었다.

1912년 6월, 대한제국 최초의 올림픽 선수단이 개최국 스웨덴 스톡홀름에 입성했다.

- 171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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